영화, 참 쉽게 만들었구나 싶은 게 첫 소감.


요새 3D가 트렌드라니까 한번 오토바이 경주씬이나 괴물이 육박하는, 쪼끔 맛보여줄만한 장면 좀 넣어주고,

여름 휴가 혹은 방학을 맞이한 관객들 많을 테니 일단 안전하게 '액션 블록버스터' 간판 내걸어주고,

한국에서 좀체 안 된다던 SF 크리쳐 영화장르를 '괴물'이 깼으니 비슷한 수준에서 괴물 하나 빚어내고,

그리고 빵빵한 투자사와 배급사 확보해서 온동네 영화관 다 확보해냈으니 훨씬 유리한 출발선에 선 데다가,

마지막으로 개봉 일자나 개봉 과정에서의 막판 작업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노이즈마케팅까지.

아, 게다가 뻔뻔스럽게도 마지막에 슬쩍 우겨넣은 뜬금없는 7광구에 대한 '민족주의 마케팅'..역겹더라.


뭐 다 좋다. 이야기의 개연성이고 흡인력있는 전개고 나발이고 간에, 아마도 이 영화가 따르고 싶었던 듯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간지나는 껍데기만 따르고 싶었다 치더라도, 재미는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봉준호의 '괴물' 때보다 발전한 CG기술이라도 현란하게 과시하던가, 뭐라도 스케일크게

뻥뻥 터뜨리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지원이 인상쓰고 뛰어다니는 것 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렸을 적 봤던

'에일리언1'의 시고니 위버가 보여줬던 연기나 그 영화 자체의 아우라와는 전혀 비교조차 불가한 수준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 영화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실수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괘씸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어 굳이 영화평을 적는 것. 비슷하게 생긴 괴물딱지가 나오는 것 빼고는

봉준호의 '괴물'이 도달했던 해석의 다양성이나 세상에 대한 은유 같은 깊이보다는 그저 이런 괴물 한번

만들어내서 뛰어다니게 할 수 있어, 를 과시하는데 그치는 '디워', 혹은 '용가리' 쪽에 가까운 얼개와 스토리다.

애초 그런 수준의 영화라고 딱 깨고 이야기를 했으면 괘씸하지나 않지, 무섭지도 긴장감 돋지도 독특하지도

않은 괴물이 뛰어다니는 걸 보며 뭔가 크게 낚였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나마 3D로 보지 않은 게 다행.


이런 영화, '피할 수 없는 놈과의 사투'가 시작된 게 아니니까 엔간하면 피해가는 게 좋겠다.






저질 포스터가 망쳐버린 영화의 컨셉과 이미지.

영화 포스터를 다운받으러 네이*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랬다. 영화 평이 왜 이렇게 안 좋지?

내레이터가 쓰레기네, 좋은 영화를 이렇게 망쳐놨네, 하는 이야기들과 함께 왠지 내가 본 

영화와는 굉장히 달라 보이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던 거다.


세상에서 가장 큰 아쿠아리움이라고? 아빠가 딸애에게 재미있게 바다이야기를 해주는 식의

내레이션이라고? 정보석이나 '빵꾸똥꾸'양에게 사심은 없지만, 대체 이 영화를 수입해서 국내에

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싶다. 이건 아동용 교육영화도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말랑한 오락영화도 아니고, 단순히 해양의 신기한 볼거리들 보여주려는 괴수대백과사전같은

관상용 영화도 아닌 거다. 내 생각이 그렇단 얘기다.

'바다가 뭔가요'란 질문에서 비롯한 영화

아마도 외국에서 쓰였던 영화 포스터는 디비디 케이스의 이 그림이 쓰였던 듯 하다. 서로 판이한

영화 포스터의 이미지와 분위기만큼이나 원래 의도나 메시지는 한국에선 꽤나 뒤틀린 거 아닐까.

(사람의 시각에서) 귀엽고 독특한 '눈길을 끄는' 동물들이 우르르 배치된 한국 포스터와는 달리,

오리지널 포스터는 바다가 보인다. 영화 제목은 '오션스', 바다다. 영화는 '바다가 뭔가요'라는

아이의 질문에서 시작했다. 그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100분동안 바다 곳곳의 생명체들을 보여주는

이 영화, 그렇게 만만한 영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맞다. 굉장한 볼거리들이 우르르 나온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눈을 못 뗄만큼 굉장한

이미지들이 쉼없이 이어진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기기묘묘한 생명체들이 나왔고, 고래나 상어같은

거대한 생명체의 몸에 그어져있는 주름이나 툭툭 불거진 혹들도 완전 생생하게 보았으니 굉장히

신기했다. 화면 한장면한장면 눈을 뗄 수 없도록 순식간에 그들은 먹이를 삼켰고 사랑을 했으며

우아한 곡선을 그으며 몸을 뒤틀고 유영했다. 마치 '괴수대백과 사전'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스펙타클의 측면에서 가히 '해양 블록버스터'라 부를 만큼 압도적이기도 했었다.


어항은 바다가 아니다, 생명은 눈요깃거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건 단순히 물고기들이 가득 담긴 커다란 어항 이야기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어항과는

철학이 다른 영화다. 그들이 등장할 때 학명이니 뭐니 이름이 등장하던가. 인간이 제멋대로 분류하고

붙여놓은 이름 따위, 혹은 그들의 생태나 특징에 대한 박물학적이고 과시적인 지식의 편린 따위, 영화는

전혀 관심갖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보기 편하게 잘 꾸며진 공간에서 원래 삶의 신비나

생명력같은 것들이 거세된 것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저 그것들이 원래 살고 있는 방식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에게 보여지기 위해 정리되고 가다듬어진 모습이 아니라,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잡고

살아가는 생명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며 결국 바다가 뭔지 그 질문에 집중하고 싶은 거다.


그들은 인간들의 편의나 필요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다. 단순하고 당연하지만 너무도 쉽게 잊고 마는

사실이다. 때로는 경이롭고 섬뜩하기까지 한 바다 생명들은 인간의 눈으로 재단되지 않은 스스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수만년에 걸쳐 진화를 하고, 먹이 사슬에 따라 포식하고 포식당하며, 제각기의 목소리로

울부짖고, 그렇게 아침해가 뜨고 저녁해가 진다. 그들의 생생한 피부 질감과 지느러미나 촉수가

움직이는 방식, 그런 디테일을 망연히 보다보면 '생명의 귀중함'이란 말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그림이나

조악한 모형으로 익숙하던 고래들의 모습이 실제 날것의 그들 모습과는 또 얼마나 다르던지.


달달하고 말랑한 대신, 불편하고 딱딱하게 읽어야 할 영화

영화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사고가 개입되는 걸 느끼기도 했다. 문득문득 쟤들의 저런 삶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어지는 거다. 그 의미란 것 자체가 지극히 인간적인 거겠지만, 그저 눈뜨면 먹이를 찾아

움직이고 때가 되면 교미를 하고. 운좋으면 살아남고 운없으면 먹이가 되는 세상이란 게 너무 잔혹해

보였다. 그렇지만 인간의 세상과 인간이 사는 방식과 계속해서 비교하게 되면서 '인간우월'의 감정은

혼란에 빠지기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 녀석이 먹이로 바쳐져 포식자의 배가 부르면 아무리 먹잇감이

눈앞에 있어도 평화로운 정경, 자족할 줄 아는 그 자연스러움이란 건 인간에겐 참 쉽지 않은 경지다.


결국 그런 인간의 마음이 빚어내는 결과는 바다에서도 참담하다. 상어를 잡아서는 지느러미만 베어내고

다시 바다로 던지는 무표정한 어부들, 바다에 방치된 그물에 휘감긴 채 죽어가는 바다 생명들, 하늘에서

바다 수면 아래로 쏘아내려지던 바닷새들처럼 돌고래와 고래를 향해 쏘아지던 작살들, 그리고 곳곳에서

망가지는 자연 환경들. 앞서 잔뜩 놀래켰던 경이로운 바다와 바다 생명체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바다란 뭘까. 단순히 인간을 위한 거대한 어항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이로운 공간이라 감탄만 하는 것도 아닌 거 같다.


바다 생명들에게 바다란 뭘까

그래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 시야가 넓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여태까지 어쩌면 '바다란 뭘까요'

그 질문 앞에는 '우리(인간)에게'라는 말이 숨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꼬마도 암묵적으로

그렇게 물었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바다는 뭘까요"라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오션스'란 영화를 보고 나서는 질문을 좀더 명확하게, 그리고 바르게 고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인간과 바다 생명들에게, 바다는 뭘까요."


이스탄불 성 소피아 성당 옆으로 조금 걸으면 나타나는 지하저수조, 비잔틴시대에 지어졌다는 이 지하

구조물은 당대의 수도 시설이었다고 한다. 천오백년전의 구조물이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실제로 볼 만한 건 지하저수조를 떠받친 빼곡한 기둥들 중 주춧돌을 메두사

형상의 조각상 머리로 받쳐놓은 몇 개의 기둥들.

조명이 기둥마다 비치고는 있지만 대부분은 까만 먹장 아래에 숨어있는 지하 저수조,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동굴 안에서처럼 웅얼웅얼 번진다. 물방울이 더러 심하게 떨어지는 곳에서는 아예

우산을 쓰고 가는 앞사람의 어깨가 이미 젖어있었다. 예레비탄 사라이, 터키어로 물에 잠긴 궁전이란

뜻이라더니 정말. 물 속을 걷는 기분이다.

일명 '눈물의 기둥'. 다른 기둥들이 아무런 장식없이 그저 까끌까끌한 표면을 가진 것과는 달리

이 기둥은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유난히도 물이 많이 흘러내리는 기둥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건지도 모르겠고, 저 문양 자체도 왠지 굵고 끈적한 눈물을 흘리는 눈알처럼 생기기도 했고.

이렇게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물들이 정화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걸 알고 일부러 기둥을

매끈하게 다듬지 않은 것이라고 하던데, 이 '눈물의 기둥'은 워낙 물이 많이 흘러내려서인지 아님

처음부터 그렇게 다듬은 건지 굉장히 매끈하고 미끈미끈하다.

메두사의 머리 부분이 거꾸로 물구나무선채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사람들도 몰려있고, 동전들도

몰려있던 곳.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더이상 그리스로마 신화의 인물들과 괴수들이 진지하게 믿어지지

않던 시기였다는 걸 반증하는 것 같다. 봐라, 메두사 머리와 옛 신전의 조각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않느냐. 봐라, 그 때 진지하게 메두사를 무서워하던 건 신화와

실제를 구분 못하는 무지몽매함 때문이었을 뿐이란 말이다. 아마 그런 걸 웅변하고 싶던 거 아닐까.

그런 점에서는 메두사 머리를 백팔십도 거꾸로 돌리나 구십도만 틀어버리거나 거기서 거기다.

굉장히 부리부리하고 선명한 눈초리에, 온통 크고 두툼한 코와 입술, 머리의 컬까지 메두사는

비록 고개가 꺽였을지언정 여전히 풍기는 압박이 범상치 않다. 비록 비잔틴인들이 신화세계를

무시하고 청산한다는 의미로 신전을 부수고 메두사의 머리를 이렇게 다뤘지만, 의연하려는

겉표정과는 달리 은근히 속으로 쫄지 않았을까. 마치 오늘날 성황당이니 부적이니 따위에

코웃음치면서도 속으로는 괜히 거시기하듯이.

이 곳에 저장된 물이 깨끗해서 마실 수 있는 정도인지 아닌지를 바로 알아보기 위해 비잔틴인들은

이렇게 물고기를 길렀다고 한다. 지금도 저 아래에 온통 꼬물대는 물고기들은, 어쩌면 그때부터

천오백년동안 이곳에서 자라온 물고기 일족의 후예 아닐까. 천오백년이면, 저 물고기들이 환경에

적응을 거듭하여 결국에 눈이 퇴화하기에 짧은 시간이었을까.

지상으로 다시 올라왔다. '메두사'란 이름의 까페가 바로 옆에 있었다. 이전 시대에 무서웠던 걸

괜시리 툭툭 치면서 자신의 당당함이나 용감함을 과시하는 건 비잔틴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다.

메두사가 날뛰던 시절의 공포가 거의 완전히 무독해진 채 지하궁전보다도 훨씬 아래에 파묻힌

오늘날에는, 아마도 과학 이전의 비합리적 믿음이나 광신도적 신앙,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나

마음가짐, 체벌도 교육의 일종이라 여기는 마음가짐 따위를 지하궁전에 처박은 채 의연한 척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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