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좁고 비싼 서울에서 복닥거리며 버티느니 근교의 괜찮은 땅을 구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시겠다는 것이 우리 부모님의 오랜 꿈이셨다. 마침 건축 쪽에 종사하시는 아버님이신지라 벌써 십여년전부터 어떤 집을 어떻게 지을지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고치기를 여러번, 그러다가 올해 4월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전원주택을 짓는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제부터 올릴 사진들은 드문드문 내가 가서 찍은 사진들과 아버지가 현장을 관리하며 찍으신 사진들이 뒤섞일 예정이며, 가능한 집이 세워지는 시간순으로 실시간에 가깝게 업데이트하려 한다. 관련한 문의나 궁금한 점들이 있다면 비밀댓글로 남겨주시길.

 

 

15. 1층바닥 기준레벨 설정 및 외벽거푸집 설치, 외부 쌍줄비계 설치

 

2015년 4월 30일, photo by father

 

 

탄탄하게 쌓은 지대 위에 1층 바닥면을 확정하는 작업중인 거 같다. 바닥면의 기준이 어디인지, 그리고 다시 1층

 

외벽을 어떻게 쌓으면 될지 거푸집도 세팅하는 중.

 

 

 

 

안동의 어느 전시관에서 만난 이 때깔나는 옷들은 사람의 상상력을 마구마구 자극했다.

비에 젖거나 물이 묻으면 흐물흐물 녹아내리거나 힘없이 벗겨지지 않을까. 때가 묻으면

지우개로 그저 쓱쓱 지워버리면 되는 걸까. 여차하면 한 귀퉁이 찢어내어 수첩으로도

쓸 수 있는 걸까. 저 옷은 급하면 그냥 아무데나 잡고 쫙 찢어내리면 되는 걸까, 따위 온갖

흥미진진하고 살짝 야시시한 그림을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만드는 옷들의 재료는, 바로 종이다.


'종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아무리 찾아도 그런 의미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종이라고 하면

으레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좀더 머리를 굴리면 뭔가를 포장하고 덮는 정도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할 뿐인 거다. 찾다 찾다가, 무려 '식품과학기술대사전'에까지 가서 찾아본 종이의

만드는 법, 분류, 용례 등은 이런 거다.


식물섬유나 그 밖의 섬유로 제조한 펄프를 얽히게 하여 엷게 교착시켜 말려서 시트 상으로 만든 것. 광의로는 합성고분자물질로 제조한 합성지도 포함된다. 종이는 한지, 양지, 판지, 합성지로 나누어지나 용도에 따라서 인쇄용지, 필기용지, 도화용지, 지도용지, 여과지, 감광지 등 또는 백판지, 골판지원지 등으로도 분류한다. 종이의 제조원리로는 플라스틱이라든가 인청동의 망 위에 펄프를 부유시킨 물을 흘려, 수분을 제거하고 건조시켜 만들어진다.

약 3000~4000년 전, 이집트에서 파피루스(papyrus)의 육질부를 종횡으로 펴놓고, 압착하여 건조시켜 필기용으로 사용했던 것에서 유래하여 paper(영), papier(독일), papel(프랑스)의 어원이 되었다. 현재의 종이는 서력 105년 중국에서 채윤이 삼 또는 동백의 나무껍질을 원료로 발에 올려 종이로 한 것이 기원으로 되어 있다. 종이가 대량으로 쓰이게 된 것은 목재로부터 펄프가 만들어지고 원망, 장망 등 기계적으로 연속생산이 가능하여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지만 그전까지는 귀중품이었다.

종이에 의해서 인류는 과거의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종이의 소비량은 문화의 척도가 되고 있다. 컴퓨터시대가 되어 종이의 소비량이 감소할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실제로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용도별로는 중량비로 약 4할이 포장에 사용되고 있어 종이는 포장의 중요한 소재이다.

* 출전 : 식품과학기술대사전 한국식품과학회 저, 2008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뭔가를 접고 오려 만들거나, 단단하게 말려서 바람을 일으키거나, 혹은

벽에 바르거나 바람을 막는데 쓰는 건, 그 위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함께 오래전부터

활용되어 온 종이의 쓰임 중 하나인 거다. 그런데 옷이라니. 종이로 옷을 만든다는 건 어릴 적

여자애들과 같이 못 이기는 척 인형 옷입히기 놀이를 할 때 빼고는 생각도 안 해본 일이다.

그런데 그저 슬쩍 걸쳐놓기만 하는, 전혀 실제로 입을 엄두도 낼 수 없는 그 2차원의 옷이

실제 사람이 입고 생활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채 이 곳에 전시되어 있던 거다. 마치 아바타를

필두로 한 3D영화가 전혀 새로운 충격과 감각을 일깨우듯, 3차원으로 구현된 옷들이 눈앞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사실은 생각을 조금만 뒤집으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왜 하필 수의를 앞에 두고 그렇게

납득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옷이나 포장지나, 뭔가를 싼다는 것에선 같은 거다.

물론 수의와 달리 실생활에서 입을 수 있으려면 그 종이의 견고함이나 내구성, 부드러움

정도가 굉장히 특출해야 하겠지만.

여기가 바로 그런 한지를 만드는 곳이다. 이미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가 다녀간 안동 하회마을 옆의 안동한지공장이다. 얼마전 있었던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이 곳의 한지가 또다시 국제적으로 알려질 기회를 얻었는데 15개 회의장 전체의 실내공간을

장식할 도배지로 활용되었다는 것. 전국 최고의 품질임을 거푸 인증받은 셈이다.

이 곳에서는 단순히 한지를 전통적인 제조법에 따라 생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만들어진 한지를

전시하고 제작과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체험관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지를 원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들도 전시하고 있었고, 명함통이나 필통 같은 것들을 직접 한지로 만드는

체험 역시 해 볼 수 있었다. 단순히 만들어진 종이를 파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을 직접 경험해보고

앞으로도 한지를 볼 때마다 스스로의 이야깃거리와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랄까.

닥나무가 시래기와 함께 시름시름 마르고 있던 컴컴한 창고. 얼핏 보아서는 무슨 뱀가죽을

벗겨놓은 듯 길고 가늘고, 그렇지만 질겨보이는 것이 잔뜩이다.

가까이서 보면 겉껍데기는 칙칙하지만 속은 제법 하얀 빛깔을 숨기고 있는 게, 어찌어찌 살살

잘만 다뤄주면 하얗다 못해 뽀얀 빛깔을 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실제로 한지를 제조하는 건

이 녀석들을 사정없이 삶고 헹구고 햇볕 아래 표백하는 과정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한지만들기1. 커다랗고 네모난 솥에서 삶아지고 있는 닥나무 껍데기들, 슬쩍 만져보니

제법 낭창하게 많이 부드러워졌다. 물기도 흠뻑 머금은 데다가 불에 삶아진 덕분인 듯 했다.

한지만들기2. 창고에서 봤던 녀석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새하얀 빛깔로 변신한 닥나무 껍데기,

아주머니 둘이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무더기무더기 끄집어 내어 열심히 뭔가를 골라내고

있었다. 껍질 속에 혹여 섞여 들어간 티를 골라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한지만들기3. 잡티가 없이 깔끔하게 골라진 닥나무 껍질을 분쇄기에 들어가 잘게 짓이겨진다.

그때 아무 염료 없이 그대로 짓이기면 하얀 한지를 만들 원료가 되는 거고, 뭔가 빨갛거나

파랗거나 노란 염료를 첨가하면 그 색깔을 띈 한지가 만들어지는 거라 한다.

한지만들기4. 여기가 아마 제일 기술도 필요하고 힘도 필요한 작업이지 싶었다.

생각보다 훨씬 작고 열악한 공장에서 내리쬐는 형광등은 왜 그다지도 밝은지, 판을

휘젓는 아저씨의 팔뚝에 솟아오른 굵고 야성적인 힘줄과 핏줄들을 그대로 비췄다.


한지만들기5. 잘게 짓이겨진 닥나무 섬유들이 둥둥 떠다니는 물 속에 저 커다란 판을 넣고

좌우로 세번, 위아래로 세번, 그렇게 십여번 가까이 힘차게 흔들어주면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없던 판 안에 하얀 종이가 생겨나는 거다. 섬유들이 물풀처럼 흔들리며 좌우로 정렬하는

모습이 머릿속엔 생생하게 그려졌지만, 아저씨들의 두꺼운 팔목이 움직이는 아랫쪽을 아무리

눈 크게 뜨고 지켜보아도 한지가 생겨나는 과정은 좀체 신기롭기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지를 판에서 떼어내어 아랫쪽에 차곡차곡 쌓아올리곤, 다시 닥나무

섬유들이 흐늘거리는 물 속으로 판을 집어넣었다. 다시금 시작되는 좌우로 세번, 위아래로

세번의 십단콤보. 둘이 나란히 서서 하는 작업이니 아무래도 조금 덜 심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두분이서 슬쩍 장단을 맞춰가며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 분이 조금 앞선다

싶으면 다른 분이 금세 따라잡기도 하고.

그렇게 쌓여만 가는 한지는 아직 너무 축축하다. 축축하고 미끌거리고, 해서 좀처럼

손으로 잡아올릴 수가 없었다. 귀퉁이에 슬쩍 손가락을 댄다는 게 무슨 지문을 남기듯

깊은 흔적을 남겨버려서 시껍하곤 도망나와버렸다. 아직 종이라기보다는 뭔가..묵이나

전병같은, 먹을거리에 가까워보이는 네모판.

한지만들기6. 어느 정도 물을 빠지도록 방치했던 그 하얗고 네모진 묵덩어리에서는 이제

한장씩 '종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떨어져 나올만큼 형체가 잡혔다. 따뜻하다기보다는 뜨거운

철판 위에 한장씩 솜씨좋게 잡아당겨 붓질 한 방에 찰싹 붙여놓는 아주머니의 손놀림은

거의 춤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마른 종이는 이제 한장씩 다시 포개져선 밖으로.

한지 만들기 체험관에서는 '좌우 세번, 위아래 세번'의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손가락만 슬쩍 빠뜨려도 온통 닥나무 섬유들이 휘감기는 물 속에서 조그마한 판을 움직여

종이를 만들고, 수건 위에 올려 물을 뺀 후에 뜨거운 철판 위에서 바싹 말리는 과정. 그렇게

내가 만든 종이 양쪽 귀퉁이에는 서로 마주보도록 도장을 두 방 찍어줬다.


내가 만든 한지를 조심스레 접어서는 어디에 쓸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옆 방으로 옮겼더니

온통 화려하고 아름다운 종이들이다. 닥나무 섬유질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한 결하며, 정말

곱게 나염된 그 빛깔하며, 저런 종이는 포장지로 쓰거나 아님 아까 봤던 한지 옷의 허리띠로

써도 딱 좋을 거 같다.


무려 천 년 이상 보존된다는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 한지는 '조선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특징과 개성이 묻어 있다고 한다. 종이 한 장이라도 직접 만들어보고 나니

그 과정에서 천년을 버틴 사람들의 지혜와 미감의 한켠이나마 엿본 듯 했다. 아무래도 앞으론

한옥집이나 한지로 된 포장지만 보아도, 아니 한지 비스무레한 아름다운 종이 한 장만 보아도

마음이 설렐 듯 하다.





얼마전 GS 중역들과 함께 했던 회식에서 전무 하나가 내게 마치 인사면접보듯 질문했다, 술이 불콰히 취해서

이런저런 얘기중에. 윤선생은, 자네는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건 날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자기소개서, 에세이, 커버레터를 쓸 때 잠시 손을 멈추게

되는 지점. 어쩔까 하다가, 늘상 몇마디 공격을 허용하고 마는 대답을 그대로 읊었다.

무엇이 되겠다는 완결된 꿈은 없습니다, 다만 하루하루 의미를 찾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원점에서 항상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변덕스럽진 않습니다.



만약 레쥬메를 들고 하는 Q&A였다면, 아마도 나는 이런 식으로 좀더 읊조렸어야 했을 거다. 이력을 얼핏 보면 좀

미친년 널뛰듯 한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 밑에는 일관된 열정이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제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 책임감이라 쓴 에세이 역시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함이였구요. 운운.



정형화된 남성성은 목표지향적인 반면, 여성성은 과정지향적이라 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무언가를 갖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갖고 그 무엇을 향해 치닫는 '남성적' 성품이란 게...상당히 희박하다. 똑같이 '성취'라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예컨대 이번학기 학점과 같이, 그건 분명 목표학점을 찍어놓고 달린 결과라기보다는 리포트, 중간,

기말..하나하나 찍어나가면서 얻어진 결과였다. 사람들간의 관계 역시 그렇다. 對이성 관계에 있어서도, 애초부터
 
뭔가 이뤄보겠단 심잡고 만난다기보다는..그냥 만나는 게 좋고 보는 게 좋고 그러다 보면 뭔가 되든 안되든, 그런

것 같다. 그냥 '지금의' 것이 좋은 건데, 그 '지금의 것'으로부터 어떤 정향을 추출해내는 사람에겐 오해를

부르기도 하고. (어쩌면 이 모든 건 사람을 겁내고 감정을 두려워하는 내 핑계일지 모른다)



과정 자체를 즐긴다는 말은, 그래서 사회적 통념상 '불건전'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슬며시 빠져나갈

구멍을 항상 보고 있겠다는 말을 뒤집은 것인지도 모른단 얘기다. 원하는 목표 대신 목표를 향하는 길 자체를

즐기겠단 말, 어디로 어떻게 꺽이고 변화/변전/변질/변색/혹은 퇴색(?)되더라도, 사후적인 한마디,

이를 앙다물고/기꺼운 표정으로/썩소를 지으며/비극을 연기하듯, '재밌었어.' 혹은 '그걸로 충분해.'



내가 정말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운전대를 잡고 '지금 현재'만 주시하는 고속주행에선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밟혀도 차가 휘청하듯이, 조그마한 일 하나에 마음 전체가 왈칵 쏟아지기도 한다. 애초

별것아닌, 아주아주 사소한 일 하나라 할지라도, 그건 몇달몇년 간의 내 의지를 순식간에 뒤엎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 그 바램, 의지란 것 자체가 뭐 그리 대단한 이유나 설득력이 있었겠냐만, 관성에 기대어 응고되어

가던 그 마음이란 게, 한순간에 휘발되어 버린다. 고시를 그렇게 그만 둘 수 있었던 것도, 사람과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정리하는 것도, 돌아서면 무지 차가울 것 같다는 누군가의 사려깊은 통찰도, 결국은 같은 궤적에 있는 것

같다. 현재를 탐닉하는 마음, 그리고 한순간의 (언제고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연적일) 엇나감, 그리고는

망설임 없는 돌아섬. 그 돌아섬에는, 이러한 사건,일상,이벤트를 통해 무언가를 '얻었다'는 자기만족 내지

자기위안과 자족감이 가득한 데다가, 애초 무언가를 끝까지 추구하지 못하는 주의력 결핍장애나 집중력핍진증의

징후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애초 전형적인 여성상에 비추어진 '과정지향적'이란 단어 자체에 마초적이고 악의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진 않은가 의심할 판이다. 아님, 초점을 보다 좁혀서, 나 자신의 성품이란 게 단지 '다소 여성적'이란

식으로 넘어갈 게 아닌 무언가 문/제/가/있/다/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을 끝까지 추구해서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쇼부'를 보고야 말겠다는 우악스러움(혹은 집요함/보다 중립적으론 굳건함)이 결핍되어

있다. 그리고 여태까진, 어렴풋이 느껴졌던 그러한 빈궁함의 이유를 '목표'가 없다는 데서 찾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일본 애니에서 느껴지는 그 상실의 미학. 이쁜 비극. 그런 결말. 마지막을 얼마나 농도짙은 애수, 혹은

싱실감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듯이, 거침없이 '추락하는' 캐릭터들. 애초 목표를 향해

쏘아진 살이 아니었다는 듯이. 얼마나 이쁜 궤적을 그리며 하루하루 추락했는지가 문제였다는 듯이.



과정이 중요하다고,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그 과정이 충실하고 이뿌다면 된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그건 언제고 나타나는 돌부리가 버거워지는 순간 널부러지며, '에라 모르겠다

여태 즐거웠으니/행복했으니 됐다'라는 식의 방탕스러움 그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이고, 그런 식으로 해석할 여지 역시 충분히 예측가능한 거였다. 그치만 역시나, 발딛어

직접 감촉하기 전까지는 모든 땅이 미지의 섬이었던 게다.



목표를 놓쳐선 안 되는 거 아닐까. 책임감이란 거, 그런 게 아닐까.

그렇게 합리적이지도, 납득할 만하지도 않지만.



아, 그 전무가 내게 치고 들어온 공격은 그런 거였다. 와이프, 혹은 여자친구가 그런 모습에 실망하지 않겠나.

내 대답. 그런 나를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런 관계가 불가능하겠죠. 잘한 대답인진 모르겠지만,

전무는 그저 내 어깨를 몇차례 두들겨 주고는 술한잔 말아주더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