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월요일 오후, 코엑스 3층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진격, 조그마한 초대장

하나를 들고 차려입은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 전우회 따위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들까지

숨넘어갈 만큼 잰 걸음으로 3층 행사장을 찾았다.

얼마나 바글댔냐 하면, 코엑스 1층부터 3층까지 전관에 그들의 숨가쁜 뜀박질 소리가 메아리쳤고, 그뒤를 따라

질서유지를 위해, 그리고 연사로 초청된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의 안전을 위해 의경들이 떼를 지어 몰려갔었다.

정신사나운 호루라기 소리와 구둣발 소리, 그리고 쉼없이 3층 행사장이 어디냐고, 어디에 가면 라면냄비를

받을 수 있냐고.


심지어 그들은 일층 행사장에서 커피브레이크를 가지며 마주보고 담소를 나누던 외빈들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며 "이건 뭐야~"할 정도로 용감무쌍했다. 이럴 수가. 이토록 비문명적인 인간들이라니.

그나저나, 엥? 라면냄비?? 오후3시인가 시작된다던 행사에 수천명의 사람이 몰렸다더니. 무슨 행사인가 싶어서

시간날 때 올라가 봤댔다. 민주평화통일? 진보쪽 단체인 거 같으면서도 묘하게 보수색채가 진한 듯 보이는

이름이 슬쩍 호기심을 간질였다. 근데 평화통일 어쩌구 행사에 왠 라면냄비 Seeker들인가 말이다.

안내데스크 뒤쪽 가득히 쌓인 라면냄비를 둘러싸고 옥신각신 실랑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전쟁터 한가운데서

부상병이 물한모금을 청하는 심정으로 주위 '어르신'들께 물었다. 이건 대체 뭡니까. 라면냄비는 어떻게 하면

받는 겁니까. 사정인즉슨 이랬다. '북괴를 몰아내는 통일꾼'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는 '통일무지개회원카드'를

작성해서 회원신청을 하고 나면 입장이 가능하고, 입장이 가능한 사람에게만 무려, '라면냄비'씩이나 제공이

된다는 거다. 다소 소략하게 말하자면, 회원가입신청과 라면냄비의 물물교환이다.

그래서 신청서를 내고 라면냄비를 받는 창구는 이토록 혼잡스러운 거다. 초대권을 흔들며 왜 더 안 주냐고

항의하는 어르신, 양손에 라면냄비가 담긴 종이백을 네다섯개씩 주렁주렁 꿰고 가는 어르신.

한쪽에는 알맹이가 쏙 빠진 채 껍데기만 남은 종이백이 수북하다. 파란색이다.

"핵무기 개발로 세계와 대결하면서 고립을 자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2,400만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에 신음하는

참담한 현실", "초당적이고 범국민적인 국민통합을 이루어 정부의 대북정책에 호응하는 지지층을 넓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식의 관계 고위인사들 인사말을 보아도 알 수 있듯, 파란색이다.

이런 어이없는 대북관, 게다가 황장엽의 어이없는 통일관. 몇년전 황장엽이 주최하는 소규모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한때 주체철학의 창시자였던 그는, 그의 '인간중심철학'이 김일성에 의해 일인독재를 정당화하는

'주체사상'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한땅에서의 지분을 받았지만 남겨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인간적으로 동정을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북한에 대한 매파적이고

극렬한-결과적으로 한국 보수반동과 통하는-목소리를 더하는 것은 할 짓이 아니다. 그러면서 북한에 머리위에

있는 한국은 한국만의 '한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느니 어떻다느니, 정부의 동원능력을 확대하고 시민적

공간과 가치를 훼손하는, 그런 어이없는 민주주의론까지 운위하고 있는 건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게다가 이런 자리를 위해 화환을 보내고, 사람들을 동원하고, '라면냄비' 몇천개를 사라고 돈을 내어주는

사람들은 더더욱 어이가 없다. 회원이 되면 낭독하게 될 '선서문'에 보면 적나라한 그들의 의지가 담겨있다.

"남남갈등을 해소하고 정부의 대북정책 공감대 확산을 위해 적극 노력한다."

솔직히 이런 양반도 마찬가지다. 나름 인지도가 있는 김병찬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있다. 뭐, "대통령과의

대화"에 나가서 대통령 팬이니 어쩌니, 내복이 어쩌구 저쩌구 박자맞춰주는 탤런트니 아나운서들도 있으니

이런 조그마한 데서 마이크 잡는게 뭐가 어떠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사실 나는 애 많이 낳자거나 다시 한번

같이 뛰자거나 허리띠 졸라매자는 공익광고에 목소리 빌려주는 사람들도 일말의 가책은 있지않을까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런 관제 행사가 먹히는 상황이 많은 걸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관에서 얼굴마담 내세워 사람들

동원하고 여론몰이하려 들고, 그래도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그게 별 거 아닌 쭉정이 단체에의

가입신청서를 써주는 조그마한 수고가 되었건, 별 거 아닌 '라면냄비' 따위 일용품이 되었건, 한 사람의 그런

호응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런 조그마한 호응이 모여 지금같이 괴물같은 시대를 만들어낸 거 아닌가. 그래놓고

뒤로 돌아 정부 욕하고, (돈/지식) 가진자 욕하고 그래봐야 자기 얼굴에 침뱉기다.


하나더, 굳이 말하자면 '어르신' 문제다. 우리 사회에 대체 존경, 최소한 존중받을 만큼의 어르신이란 얼마나

될까. 그들은 식민시대라는 시대적 굴레에 대한 일정한 책임,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에 대한 일정한 책임, 이후

미쳐돌아가던 반공이데올로기와 발전이데올로기의 총화라고 해도 심한 건 아니지 싶은데, 그런 부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겸손한 '어르신'은 찾기가 힘들다. 생물학적으로 나이만 먹었을 뿐.

얼마전 '친일인명사전'에 맞서 '친북인명사전'을 발간했다는 어떤 뉴라이트계열 단체의 기자회견장에서

"왜 김대중, 노무현이 포함되지 않냐"라면서 니놈들도 빨갱이다, 라고 하며 급기야 서로 빨갱이 삿대질을 하던

사람들, 오바마 방한때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던 사람들, 어르신들이다. 이미 사고방식이 굳을대로

굳어버려 더이상 개전의 여지조차 없는, 그래서 약간 관조적이랄까, 역사적이랄까 그런 먼 시각에서 보자면

사라지는 것 밖에 답이 없는 존재들 아닐까 싶다. 반면교사로서 훌륭한 귀감이기도 하지만.




기자가 뭘까라는, 오늘 시작된 인턴 수업 매 시간마다 내게 불편하게 내질러졌던 질문. 사실 그다지 진지하게

뭘까~하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어서, 일단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관망세를 취하다. 진리를 구성하고,

사회적 책임이 막중하고, 머 그런 것들이 짚어졌다. 김학준 사장은 조선 시대의 사관과 언관에 비유를 하기도,

혹은 군사독재 시절 정의의 횃불로 비유를 하기도 하며, 권력에 대해 결연하게 맞장뜰 수 있는 자세를 강조했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분명히 기자는 어떤 축복을 받은 직업이긴 할게다. 자신의 호기심을 도발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쾌감. 무엇 하나 전문지식을 쌓지는 않더라도, 그만큼 자유롭게 알고 싶은 것들을 공부해가며 자신의

발로 눈으로 직접 알고 싶은 사실을 캐낸다는 것. 그저 쏟아지다시피 제공되는 정보에 만족하는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른 입장일 거다.



하지만, 지금이 유교적 기치가 공고했던 조선 시대나, 악과 정의의 구분이 선명했던 군사독재 시대와 같을까.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보되고 나선, 오히려 제멋대로 호명되는 '민주주의'의 허울. 역설적인 이념 과잉의 시대에서
 
'민주주의'라는 둔탁하고 애매한 수사로는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는다. 확고한 지반은 이미 무너졌다.

도끼를 짊어지고 왕에게 상소를 하던 심정으로 오늘날 언론의 사명을 운위한다는 것은, 내게 다시 황장엽씨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이 중심되는 세상을 구축하기 위한 그의 철학-함이 결국 기대고마는 '민주주의', 그것은

그러나 '미치광이'가 지배하는 북한을 의식해야 하는 한국에서는 의사 민주주의, 곧 반공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채

제기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삶을 온통 묻어버린 그러한 사고방식은 자기가 옳다는, 옳을 수밖에 없다는

경직성으로 귀결된다. 맞장뜨자라는 도전적 사고. all or nothing의 극단성.

정치 권력에 대한, 시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대립각.



오늘날 기자에게 필요한 건, 진부하지만 똘레랑스 같은 거 아닐까. 물론 자신의 정견이나 의견이 없을 수야

없지만, 그조차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의 한부분을 구성하는 톱니같은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 구성되는 진실에

수만가지 버전이 있을 수 있고, 압축성이 생명이라는 짧막한 기사글에 담기는 진실이란 허약하기 짝이 없다는

자기 반성..주제 파악. 좀더 경험해보면, 어떻게 생각에 살이 붙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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