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김진숙과 김세균 / 한정숙
정년을 1년 앞둔 김세균 교수가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김진숙씨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한겨레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정년을 1년 앞둔 김세균 교수가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김진숙씨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각보다 자그마했다. 호리호리해서 가냘프기까지 해 보였다. ‘85호 크레인의 여인’ 김진숙씨가 진분홍빛 스카프를 역삼각형으로 두르고 대학생들을 위한 강연 단상에 섰을 때 내가 받은 첫인상이었다. 전투적으로 활짝 웃는 사진이 주곤 했던 강인하고 억세 보이는 이미지는 실제 모습과 다른 것 같았다. 푸른 스웨터 색깔 때문에, 그녀를 수국꽃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 대중운동가에게는 최적의 자산일 맑고 힘찬 그녀의 목소리는 그런 생각들을 날려버리기에 족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멋있는 목소리로, 그렇게 감동적으로, 그렇게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강연을 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김진숙씨는 쉼 없이 흔들리는, 지상 35m 높이의 크레인 조종실에서 보낸 계절과 나날에 대해 말했다. 땅에 내려왔을 때는 멀미를 했고 토했고 계속 땅에 부딪혔고 위장이 아파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요컨대 그녀는 일상생활을 모두 잊고 잃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살아 내려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까마득한 높이로 발길을 디뎠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촉구하기 위해 크레인에 오르기 전에 그녀는 신변정리를 마쳤다. 그 높고 어지러운 곳에 올라 309일을 보내면서 그녀는 생사를 넘어서 있었으리라.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결코 죽음을 허투루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그저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아득하게만 보였으리라. 그런 그녀에게 용기와 희망을 되돌려준 것이 희망버스였다. 그녀는 희망버스에서 ‘눈이 맞은’ 뒤 크레인을 다시 찾아와 그 아래서 사랑의 언약을 맺은 청춘남녀 이야기를 했다. 내려다보는 그녀에게도 펄떡이는 삶의 의지가 전해졌으리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희망버스 덕에 그녀는 살아서 크레인 아래로 내려왔고, 해고노동자들도 복직할 수 있었다.

 

김진숙씨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이 겪고 있는 형극의 아픔에 대해서도 말했다. 듣는 사람들은 자연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위해서도 희망버스가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고. 쌍용차 사태가 덧내고 있는 깊은 사회적 상처와, 그래도 파국을 면하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귀결된 한진중공업 사태를 비교한다면 자본과 권력은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기여한 희망버스에 진작에 훈장이라도 주며 치하했어야 하리라.

 

김세균 교수는 정치학자다. 형님인 고 김진균 교수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진보적 사회과학 학술운동을 이끌어왔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20년 이상 재직하였고, 이제 정년을 1년 앞두고 있다. 그러한 그가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희망버스에 올라 김진숙씨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1차 희망버스를 타고 영도에 갔을 때 한진중공업 구내로 들어가 크레인에 접근했던 사람 중 하나다. 검찰이 무단침입죄로 기소했고 법원에서는 벌금 200만원을 부과했다. 교과부가 이를 빌미로 그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는 것이다.

 

서울대 법인화법이 통과된 뒤에도, 정년을 눈앞에 둔 김 교수는 신분 전환을 하지 않고 교육공무원으로 남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법인화법이 통과되자마자 교과부가 상급기관임을 내세워 스스로 교수 징계권을 행사하려고 한다니, 국립대 법인화가 진보적 교수들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추진된 것이라는 일부의 추측이 현실이 되고 있다. 원로교수를 이런 식으로 모욕하는 것은 야만이고 비열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35m 높이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희망버스를 탄 사람, 그들이 지닌 깊은 인간애를 이해할 영혼이 징계 추진자들에게는 없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올해의 인물로 안철수니 박원순이니, 김어준이니 하는 많은 이름들이 거명되지만 내겐 단연 그녀다. 김진숙.

영도조선소 75호 크레인, 소금꽃나무,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회, 그리고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도되었던 연대의 방식까지. 그녀는 2011년의 열쇳말들을 응축시킨 하나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미 그녀의 동료와 동지가 죽어갔던 그 크레인 위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벌이며 끝내 살아 내려온 그녀가

희망버스라는 형태로 연대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관심을 갖고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고 해서

잠시 읽어보다가 울컥하고 말았다. 희망버스라는 방식, 그리고 나꼼수 등 기타의 방식에 대한 유보적이고 회의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버스가 가진 가장 큰 힘은 각자 다른 깃발을 들고도 한 버스에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연말이라고 모든 걸 용서하고 내년엔 만사가 형통하고 잘 될 듯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냉정한 자세로 올 한해가 남긴 문제들을 되짚어보고 계속 이어가야 할 싸움들을 떠올려 보는 게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기사 내용)


희망버스가 오지 않았다면 난…
이름모를 그대들, 고맙습니다

한국사회 올해의 인물
김진숙

목숨 하나 살려야 한다는 그 애절함들이 만든 기적 누가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한겨레
» 김진숙씨가 지난 21일 저녁 부산구치소 앞에서 열린 송경동 시인 등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목도리를 다시 매고 있다. 크레인 농성 중 트위터로 친구가 된 ‘영도희야’씨가 김진숙씨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다. 부산/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는 ‘올해의 인물’로 309일간 고공 크레인 농성을 통해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연대의 소중함을 일깨운 김진숙씨를 선정했다. 그를 만나러 부산에 갔던 ‘희망버스’는 올해 한국 사회가 길어올린 가장 값진 성과물 중 하나다. 김진숙씨가 309일의 크레인농성을 되돌아보고 희망버스 탑승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글을 보내왔다. 국내 분야별 ‘올해의 인물’은 10면에서 만날 수 있다.


영도 바람은 유명하다. 일명 똥바람. 크레인은 24시간 흔들렸고, 바람이 심한 날은 토하기를 여러번.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난 어느날, 거짓말처럼 바람멀미가 멈췄다.


걱정하고 응원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눈물 속에 크레인을 내려와선 땅멀미에 시달렸다. 흔들리는 땅, 갑자기 커진 사람들. 멀찍이만 보이던 사물과 차들이 눈앞에서 번잡을 떠는 어지러움. 이번엔 땅 위에서 토했다. 땅멀미가 웬만큼 가라앉자 방향감각이 문제가 됐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법도, 계산하는 법도 새로 익혀야 했다. 그러면서 비로소 309일이 만만한 시간들이 아니었음을 깨달아 가고 있다.


힘든 날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 날은 크레인 위에 심은 상추, 치커리, 딸기, 방울토마토. 파르르 떠는 그 어린 것들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니들도 힘들지?”


추워서 힘들지 않으냐고, 이 더위를 쇳덩이 위에서 어떻게 견디냐고 사람들은 걱정하고 또 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건 사람으로부터 왔다. 끊임없는 강제침탈의 시도들, 한진 자본은 85크레인만 끌어낼 수 있으면 정리해고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자고 나면 불거지던 공권력 투입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구체화되더니 특공대가 84호 크레인을 면밀히 정찰하고 가는 걸로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런 움직임들이 트위터를 통해 알려지고, <알자지라>를 시작으로 외신들의 보도가 이어졌다.


‘공’권력으로는 더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동원된 게 ‘사’권력이었다. 6월27일. 공권력의 힘을 빌려 조합원들을 쫓아내고 크레인을 완벽히 접수한 용역들. 그날부터는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크레인을 둘러싼 용역들은 시도 때도 없이 크레인으로 뛰어올라왔고, 그게 여의치 않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리기 위해 크레인을 바닷가 쪽으로 끌고 가려는 작전이 매일매일 새롭게 펼쳐졌다. 크레인의 전기는 물론 주변의 전기까지 다 끊어진 깜깜절벽. 몸을 던지겠다는 의사를 행동으로 표현하는 걸로 저들의 시도를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그만 끝내고 싶은 유혹들.



그때마다 천사가 파견한 듯한 사람들이 왔다. 서울에서, 인천에서, 수원에서, 대전에서, 광주에서, 전주에서, 목포에서, 청주에서, 충주에서, 마산에서, 울산에서, 진해에서, 제주에서, 독일에서, 영국에서, 핀란드에서, 일본에서, 홍콩에서…. 그 먼 곳에서 달려와 온종일, 혹은 며칠씩 크레인만 바라보던 사람들,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크레인을 바라보며 밤을 새우던 사람들, 매일 저녁 백배서원을 올리던 사람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이 잉태한 웃음은 희망버스라는 기적을 낳았다. 희망버스가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희망버스가 한번으로 그쳤다면 2003년의 상황은 반복되었을 것이다.


1월6일 새벽, 크레인에 오르던 순간, 이미 삶과 죽음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강제침탈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내가 크레인에서 몸을 던지겠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저들은 바로 3, 4도크에 그물을 쳤다. ‘사람 목숨 하나쯤이야’ 할수록 그 목숨 하나를 살려야 한다는 애절함들. 그 애절함으로 만들어낸 희망버스. 희망버스의 모습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1차 750명이 2차에선 1만명이 되리라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사람의 얼굴을 겨냥해 뿌려대던 최루액, 색소 섞은 물대포, 그리고 무차별적인 연행과 폭력. 저들도 두려웠던 것이다.


무참할수록 시간의 흐름은 더디다. 그 길었던 밤과 새벽들, 어둠이 주던 공포, 누우면 몸을 펼 수도 없었던 춥고 작은 공간, 아홉 걸음이면 허공에 닿던 좁고 위태로운 난간. 그 좁은 곳에서 일어난 일상치곤 너무나 다양했던 시간들. 매일매일 시시각각이 달랐던 309일. 아무 기약이 없었던 크레인에서 기다림을 가르쳐준 희망버스. 쇳덩어리 위에서도 푸른 잎을 키워낸 바람과 햇살들.


내가 반평생을 싸웠듯 앞으로도 싸움은 이어질 것이다. 해고자들은 복직을 기다리고 있고, 저들은 민주노조를 무력화시킬 복수노조를 꿈꾼다. 재능, 쌍용자동차, 전북고속, 강정 등 희망을 기다리는 곳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희망버스를 탔던 우리 스스로 놀랐듯이 우린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희망버스가 가진 가장 큰 힘은 각자 다른 깃발을 들고도 한 버스에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송경동, 정진우가 출감하는 날, 맘껏 소리지르며 승리를 기뻐하자. 그리고 또다른 승리를 위해 희망을 싣고 달려보자.

 

 

2011년 12월22일 김진숙





"그래도 희망은 있다!"

[손문상의 그림세상] 2011, 김진숙 그리고 희망 연대 (프레시안)

 


그래도 희망은 있다. 란 말이 참 절실하게 다가오는 순간.

세상이고 사람이고 다 염증이 나서 나몰라라 하고 눈감고 살테다 맘을 먹었다가도.

그래도.



▲ 김진숙 지도위원이 내려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 트위터 @ez2dj81 (프레시안에서 재인용)


김진숙 위원, 드디어 땅을 밟다!(1보)
크레인에 올라간 지 309일 만…경찰, 건강 진단 뒤 업무 방해 등의 혐의 조사
2011-11-10 15:36 부산CBS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해 영도조선소 내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벌여온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농성을 풀었다.

지난 1월 6일 크레인에 올라간 지 309일 만으로, 309일간 고공 농성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례 없는 기록이다.

김 씨는 오늘 노사의 잠정 합의안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무투표로 가결되자, 그동안 농성을 벌인 영도조선소 3도크 옆 높이 35m의 85호 크레인에 내려와 땅을 밟았다.

한편 경찰은 김 지도위원을 부산의 한 병원에서 건강 진단을 받도록 조치한 뒤 업무 방해 등의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한진중 사태, 309일 만에 종결…땅 밟은 김진숙 "고맙습니다" (프레시안)

“높은데 오니 전망이 좋다” 309일 그녀 웃음만은 여전 (한겨레)


                        ▲ 한겨레 표 재인용


드디어 내려오셨구나...안철수니 뭐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쪽으로 희망의 '촛불'이 몰린 사이, 여론이 잠깐 타올랐다가

주춤해진 사이, 그래도 그 짧고 허망한 열기를 딛고서 드디어 김진숙님이 내려오셨다고 한다. 309일만이다.


모쪼록 건강 검진 결과에 아무런 심각한 문제가 없기를. 그리고 이후 당신의 투쟁이 헛되지 않도록 한진중공업의

중재안이 제대로 실행되기를. 무엇보다, 당신이 앞서 싸우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에서 상식이 통용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큰 짐을 지고 여기까지 혼자 오셨다...당신의 진정성, 당신의 고민을 부디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나눠받기를.



(언론이 외면하는) 김진숙을 향한 '2차 희망버스' 참가기.

마석 모란공원묘지, 어제(9/7)가 이소선 여사 발인날인지는 몰랐다. 이미 이 곳 전태일 열사 옆자리에

모셔진 줄로 알고 있었고 마침 휴가를 내었기에 찾아가 봤던 것. 그런데 그곳에 이렇게 모셔질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 식은 네시부터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의 묘소보다 한줄 뒤로, 한칸 왼켠으로 모셔지게 되는 이소선 여사. 그녀의 민주사회장을

준비하는 장례위 소속 사람들이 식을 준비하다가는 전태일 열사의 묘를 바라보고, 바라보고 했다.

정리해고 철회! 라고 쓰인 소금꽃나무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회 투쟁위원회라 적힌 티를 입은

그분들의 뒷모습이 문득 굉장히 무겁고 답답하게 다가오던.


전태일 열사가 스스로 불꽃이 된 게 스물두살, 70년 11월의 그날 이후로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노동운동의

한복판에서 모든 억압받고 박해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했었다. 근로기준법을 안고 몸을 불사른 70년 그때와

2011년 지금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다고 비감해하던 그녀, 마지막 유언처럼 남은 말은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했다.

장례식은 추모예배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었고, 색소폰 등 약간의 추모공연이 있다고 했다.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늘어나는 현수막들. '어머니'란 단어 일색인 게 조금은 맘에 걸렸다. 여성에 대한

경의나 존중을 표하기 위해서는 꼭 '어머니'의 이미지가 씌워져야 하는 것일까. 그저 이소선 그녀,

한 사람의 위대했던 삶 그 자체로 존경하고 사랑하기에도 충분할 텐데. (물론 그녀가 전태일을 보낸

이후 모든 노동자들을 아들딸처럼 여겼다거나, 연배상으로 그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점은 있겠지만.)

이소선 그녀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거하는 곳. 인부들이 들어가서 땅을 고르고,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땅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어머니로서, 여자로서, 사람으로서, 비로소 행복하게

쉴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전태일의 불꽃을 이고 지고 살아온 한평생, 그 자체로 지난한

투쟁의 기록이었을 테니까.

사실, 모란공원묘지엔 '전태일'이나 '전태일의 어머니=이소선'과 같은 널리 알려진 사람들 이외에도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잠들어 있다.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네들의 삶이나 행적 역시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경외스럽다. 전태일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투쟁하고 산화해갔고, 이소선 전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굽힘없이 싸워왔던 거다.

4시가 좀 넘은 시각, 청계천을 지나 서울 곳곳을 들른 이소선 여사의 운구행렬이 드디어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도착했다. 만장이 길목 양켠으로 빼곡히 들이찼고, 그녀의 영정사진을 앞세운 사람들이 끝도 없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쥔 그녀의 모습, 개인적인 기억은 전혀 없는 내가 아는 유일한 그녀의 모습이다.

영정사진 뒤 풍물패가 지나가고, 그리고 이소선 여사. 아..어머니. 그렇게 몇 번 집회에서 뵌 적이 있었던 거

말고는 늘 전태일의 그림자에 가려있던 분이었다.

부디..돌아가실 곳, 하늘나라란 게 있다면 40년 넘게 가슴에 묻어오셨을 전태일 열사 꼭 만나서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시민장례위원을 포함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묘역까지 함께 했다. 행렬의 앞섶에서 보이던 정치인들,

유명인사들이 있었지만 특히 노회찬 전 진보신당대표..최근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통합이 결렬되고나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실까. 권영길 전 민노당대표도 마찬가지.

좁다란 모란공원묘지 중앙길을 따라 양쪽으로 펼쳐진 만장들, 하나하나 씌여진 문구들을 읽어보았다.

시대의 어른이 또 한분 이렇게 떠나시는구나, 어려운 시기, 야만스러워지는 시대에 중심을 잡아줄 사람들이

떠나는가 싶어 왠지 울컥하고 말았다.

이소선 여사가 떠나기 직전까지 목소리를 높이던 한진중공업 사태, 비정규직 문제, 그런 수많은 난제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간의 의견차라거나, 노조로 조직되지조차 못한 수많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분리,

진보 진영 내에서 노선차라거나 비전의 차이로 힘을 모으지 못하는 상황..그 모든 것들도 그녀의 죽음

앞에서는 한순간이나마 극복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Vice versa. 남은 자들의 몫.

민주사회장이 시작되려는 찰나. 그녀를 보내는 늦은 여름날 날씨가 이렇게 선선한 것은 하늘이 내려준

큰 부조라고 어느 아주머니가 그랬다. 그 아주머니는 말하면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누구였을까.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녀를 떠나보내고, 다시 각자의 일터와 생활 공간으로 들어와

평소처럼 살아가게 될 사람들은. 아니, 어쩌면 대부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들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정리해고당하고, 철거당하고, 그렇게 삶의 가장자리로 불쑥 떼밀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던 이소선, 그녀가 돌아갔다.



▶◀ 이소선 여사의 명복을 빕니다.



* 이소선 여사 마지막 가신 곳.



‘눈물바다’ 된 85호크레인 앞, 가로막힌 ‘어머니의 영정’ (민중의소리, 2011.9.7)


다음으로, 전화연결을 통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눈물의 추도사가 울려 퍼지자 이내 추모제 현장은 울음바다를 이뤘다. 김 지도위원은 “희망버스 타고 가서 진숙이를 만나고 싶다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오셨냐”며 “희망버스 타고 가서 해고된 한진 노동자들 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이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고 울먹였다.

그녀는 “노동자들이 싸우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시던 어머니였고, 마지막 가시는 길마저 싸우는 노동자들을 이 먼 곳까지 찾아오신 분”이라며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던 말씀은 어머니 삶에서 나온 평생의 철학이었고 지혜였다”고 말했다.

“이제 편안히 가세요.
배가 고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아들 만나셔서
이승의 고통일랑 다 내려놓으시고 못다 한 얘기, 못다 나눈 정, 맘껏 나누세요.
어머니로 인해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지키지도,
달라지지도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어머니를 기억할 것입니다.”







"합동 장례식의 참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프레시안, 8/18)

18일 열리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한진중공업 청문회를 앞두고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220일 넘게 고공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편지글을 보내왔다. 김 지도위원이 자필로 작성해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보낸 편지글을 전문 공개한다. 편집자.

*                                                            *                                                        *

두 달째 전기가 끊어진 깜깜절벽 크레인위에서 랜턴 불빛에 의지해 이 글을 씁니다.

일요일날 자정이 다된 시간, 8차선 도로 건너편 인도에는 30여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오늘밤도 모기에 뜯기며 노숙을 하겠지요. 저들 중에는 이 크레인 중간 지점에 올라와 있는 해고 노동자의 아이들과 부인들도 있습니다.

이 염천더위에 가마솥처럼 달궈진 크레인위에서 가족들의 생존을 지키겠다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비가 오면 물위에서 밤을 지새우는 가장을 지켜보는 마음이 어떨까요.

저분들 중에는 서울에서 오셔서 주말을 길에서 보낸 분도 계시고 세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대전에서 오셔서 노숙을 하는 분도 계십니다. 제가 모르는 분들입니다. 사람이 있다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오신 분들입니다.

저분들을 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하는 분들이 저분들만큼의 애틋함이 있었다면 저분들만큼의 측은지심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정리해고가 막무가내로 자행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노동과 세계(이명익)


희망버스가 처음 오던 날이 제가 크레인에 오른 지 157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어떤 언론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야당 국회의원 서너분이 다녀가신 정도였습니다. 고립된 채 절망했고 그때마다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희망버스가 3차까지 이어지자 비로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게 됐고 마침내 국회청문회까지 열리게 됐습니다.

사회의 무관심 속에 쌍용차에선 정리해고 이후 15명이 죽었고, 한진중공업에서도 2003년 두 사람이 생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3년도에도 650명의 대규모 구조정이 있었고 거기 반발한 노조가 2년을 싸웠습니다. 당시 김주익 지회장이 이 85호 크레인에 129일을 매달려 있었습니다. 회사는 물론 언론도, 정치권도 그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냉대속에 129일 만에 밥을 매달아 올렸던 밧줄에 목을 맸습니다. 지회장의 시신은 2주가 넘도록 이 크레인을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사측의 어떤 조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5일 만에 곽재규라는 노동자가 또다시 목숨을 끊고 나서야 합의가 이루어졌고 한사람의 시신은 크레인에서 내려오고 또 한사람의 시신은 도크바닥에서 끌어 올리는 기가 막힌 합동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스물 한 살 청춘시절에 같은 공장에서 만나 거의 매일 얼굴 보며 같은 꿈을 꿨던 사람들입니다. 여름이면 온몸에 땀띠가 돋고 땀으로 안전화가 질퍽거리는 고단한 노동을 하면서도 그 사람들이 있어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질풍노도 같은 시절을 옛말삼아 얘기하며 좀 달라진 세상에서 같이 늙어갈 수 있을거라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두 사람을 한꺼번에 땅에 묻고 돌아온 날 밤, 보일러는 올리기 위해 무심코 스위치에 손을 대다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묻은 손으로 저만 살겠다고 보일러를 켜는가. 차가운 땅바닥에 20년지기 두 사람들 묻고 저만 따뜻하게 살겠다고 보일러를 켜는 나도 인간인가. 그 후로 8년 동안 단 한번도 보일러를 켜지 못했고 크레인에 올라오기 전날 밤 처음으로 따뜻한 방에서 잤습니다.

2010년, 회사는 다시 432명의 정리해고를 통보했고 조합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구조조정 중단에 노사합의 했습니다. 그리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400명의 정리해고를 다시 통보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정규직들은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하청노동자들은 찍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이 공장에서 3000명 가까이 일자릴 잃었습니다.

왜 막대한 흑자가 난 기업에서 그 흑자를 만들어낸 노동자들만 고통 받아야 하는지 꼭 밝혀주십시오. 경영진들은 경영실패의 책임은커녕 주식배당금에 현금배당에 연봉까지 인상시킨 기업에서 왜 노동자들만 거듭되는 정리해고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반드시 밝혀주십시오.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의하더라도 조합원들의 노조사무실 출입이 허용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역들을 동원해 출입을 막는 회사에 대해서도 밝혀주십시오. 쌍용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저항하여 외쳤던 구호가 '해고는 살인이다'였습니다. 그 비극이 한진에서 되풀이 되지 않도록, 2003년 합동 장례식을 치렀던 그 참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는 일하고 싶다."

해고된 조합원들이 공장안에 있을 때 누군가 크레인 밑에 써놓고 간 구호입니다. 우리 조합원들 일하게 해주십시오. 9개월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거리를 헤매는 우리 조합원들 가정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환노위 국회 의원님들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광복절 66주년 85호크레인
222일차 새벽을 맞으며 김진숙 올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분노하라 - 10점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돌베개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 책읽기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자신의 사고 궤적을 이어나가는 행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설이나 문학류 이외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서적을 본다는 건 당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점,

고민이라거나 관심분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독서 리스트를 쭉 이어나가보면

그자체로 나름의 스토리랄까 문제의식이 뻗어나가는 그림이 잡히는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하라'라는 책이 내 손에 쥐어진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쥐고

있는 이른바 '핫한' 책들은 일단 피하려고 하는 묘한 청개구리 심리에다가-아직 '정의란 무엇인가'는

좀체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지구 반대편 레지스탕스의 목소리를 빌려 굳이 '분노하라'는 말을

전해듣지 않아도 될만큼 무시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워낙 감각적인 표지가 맘에 들었다.


삶으로 말한다, '앵디녜부(Indignezvous)!'

저자는 이제 무관심과 냉소를 넘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행동을

위한 에너지로서 분노를 말하고, 분노의 결과로 행복을 말한다. 삶의 안전망으로 기능해야할 사회보장

제도의 축소, '일반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을 앞세우'게 된 경제 시스템, 정부와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고 있는 찌라시 언론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대물림하는 교육. 분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식의 현실분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배포되는 얇은 전단에

더욱 정밀하고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에 기반한 결론, 혹은 주장도 같다. 이제 그만 속고,

그만 참고, 그만 당하자고. 분노하고 저항하자는 거다. 다만 이 책은, 그 뻔하고 당위적이며 선동적인

이야기에 담긴 무게가 다르다. 메시지의 진정성, 신뢰성이 다른 거다. 그러니 울림이 다를 수 밖에.
 

1917년에 태어난 저자는, 나치와 싸우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힌 채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출하고 다시 투쟁,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여전히

인권과 환경 등 사회문제 전반에 발언하며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아흔네살이다. 그런 '늙은이'가,

그런 '꼰대'가 좋은 게 좋다느니, 철 좀 들으라느니 따위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하라'는 거다.


90대 노인의 '격렬한 희망'에 위로받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발견한 건, 육체적인 쇠락에 지지 않고 탄탄하며 쌩쌩한 열정과 젊음을 가진

어느 존경할 만한 투사의 삶이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로 느껴지는 위로다. 나보다 앞선 그의 삶과

신념과 가치를 발견하고는, 왠지 그의 여전히 탄탄할 것 같은 등을 바라보는 안온함과 믿음직함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근 한세기동안 명멸해온 거대한 폭력과 광기를 지켜봐온 그가 희망을 말하니까.

그의 견지로 봤을 때 MB치하 3년간의 고난, 괴로움은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갈 것'이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제 한세기를 살아온 노인의 혜안으로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총대를 넘겨 받으라, 분노하라는 거다.


수많은 한국의 레지스탕스에게. 특히 김진숙에게.

이 책의 소감은 사실 책에 씌여질 종류의 것은 아닌지 모른다.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그의 분명한

메시지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국에 태어난 건 다행인지 모른다.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고 분노의 대상이나 책임의 소재를 밝히기 어려워지도록 복잡해지고 은폐되어지는

사회시스템의 진화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날것의 국가폭력, 비인간적인 자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용역깡패의 모습으로, 어용 언론의 모습으로, 유치한 고소고발로,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밥줄을 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분노하기 유리할지도.


역시, 내게 책읽기는 사유의 연장이다. 요새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그녀, 김진숙.

사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할아버지까지 찾아갈 것도 없었다. 젊어서부터 안 해본 것 없이 노동해온

오십대의 그녀가 도무지 한눈에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대항해서 크레인에

올라간지 180여일이 가까워진 참이다. 한국의 자본권력, 그리고 그를 비호하는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설탕코팅조차 없이 쓰디쓴 현실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참이다.


스테판 할아버지(저자)는, 그녀의 이런 투쟁을 안다면 노구를 이끌고 크레인 위에라도 오를 사람이다.

그리고 김진숙 그녀는, 레지스탕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신부님이나 다른 한국의

이름없는 레지스탕스들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고 육체가 노쇠해져도, 지금과 같이 그런 열정과 분노를

가지고 우리에게 든든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려면 이 팬시하고 '깔쌈한' 표지의 책은 서가에

꽂아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꽂아두어야 할 일이다.


그러면 혹시 또 아나, 우리는 백발 성성해진 김진숙이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야기하며 분노하라,

그리고 저항하라며 쓴 또다른 뜨거운 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트윗을 보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오랜동안 눈으로만 좇던 그녀, 김진숙의 트윗을 퍼나르고 여기도 당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있으니 울지 말라며, 죽지 말라며 하루종일 몸만 회사에 두고 있던 어제였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과 한진중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과 용역깡패들의 침탈이 시작되던 순간, 이 사람은 '그런' 강의를 듣고 있어 마음 둘 곳을

모르겠다지만, 난 '그런'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지원하는데 일조하는 곳에 몸담고 있다니.


그녀가 내 타임라인에서 언제부터 날짜를 하루하루 세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진중공업, 유성기업 같은 파업현장이나 명동성당 앞, 포이동 판자촌같은 재개발(예정)

지역들의 이야기들로 온통 무거워지기만 하던 공간, 그녀에게 조금더 일찍 내 목소리를

전하지 못한 게 안타깝다. 그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나의 침묵이 행여나

부정적이거나 힘빠지는, 그렇게 전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노조'의 이름으로 평노조원들의 인생과 신조를 둘둘 말아서 투항해버린 노조

집행부..비겁하단 말로 부족하다. 비열한 배신행위, 그야말로 등에 칼 꼽는 이적행위를

한 거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핏대세워 분노하기엔 스스로 떳떳치 못하단 생각이

들어서..지금이라도 한진중공업 파업사태의 배경을 알만한 글 하나 펌..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진숙 그녀는 살아 내려와야 한다.


*                                                              *                                                     *

"작가가 울고 카메라도 울고 나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정희준의 '어퍼컷'] 조남호 회장님, 이건 살인입니다!


지난 1월부터 한국방송(KBS) 부산방송총국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 '시사인 부산'의 진행을 하고 있다.

지난 수요일도 여느 때처럼 '시사인 부산' 진행을 위해 남천동 KBS로 갔다. 그날 방송의 주제가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의 농성장과 이곳을 방문한 희망 버스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탐사 보도 프로그램의 특성상 열 받는 이야기, 억울한 이야기, 기가 찬 이야기, 귀신 곡할 이야기를 많이 다뤄봤기에 솔직히 그날도 분장실에 들른 후 무덤덤하게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이 프로그램은 피디와 작가들이 사전에 7~12분짜리 비디오 세 개를 준비하면 내가 그 사이사이를 연결하며 진행하는 30분짜리 프로그램이다. 최근엔 진행이 꽤 익숙해졌다. 미리 집에서 대본을 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판단하고 오기 때문에 내가 맡은 부분이 끝나면 스튜디오 안의 모니터를 통해 이어지는 비디오를 보곤 했다. 그런데 이날은 조금 달랐다.

내리는 비 때문인지, 피디와 카메라맨이 오늘은 더 잘하려 해서인지 어딘가 어수선했다. 나도 몇 번을 버벅거렸다. 왠지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그날 유난히 실수를 많이 했다. 끝나고 나서 담당 피디가 "교수님이 자꾸 틀리니까 나도 틀리잖아요!" 하며 투정이다. 왜 그랬을까.

자꾸 눈물이 나올라 그러잖아 XX…

첫 비디오는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들은 농성을 시작한 2010년 12월부터 집에 들어가지 못한 관계로 식구들과의 유일한 통로는 휴대 전화다. 가족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이곳 농성자들은 영상 통화를 많이 한다. 한 농성 노동자가 아내와 통화를 하다가 아들을 바꿔보라 한다. 큰아들이다.

"오늘따라 니 와이리 잘 생겼노."

참으로 싱겁고도 썰렁한 그 말에 작은 화면 속 아들은 덤덤해 보인다. 이어 아버지는 동생 잘 챙겨주라는 말도 한다. 그런데 아들은 대답이 없다. 나 혼자 속으로 '요즘 애들 참 버릇없어, 대답을 안 해' 하며 내 아들을 떠올리는 순간 내 귓전을 때리는 아버지의 한 마디.

"또 운다 이놈 자슥."

이어서 집에 있는 둘째 아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분신과도 같다는 둘째는 최근 가족의 그림을 그리는데 아버지를 그리지 않았단다. 아이 엄마는 둘째가 요즘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울까봐 아버지의 전화를 안 받는다고 자기도 울먹이며 말한다. 엄마가 인터뷰를 하는 사이 결국 둘째는 머리를 양 무릎에 파묻고 울기 시작한다. 양팔로 마구 눈물을 훔치면서.

또 다른 농성자는 딸 이야기를 한다. 배가 아픈데도 말을 않고 있다가 결국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큰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면서도 아빠 걱정을 했다고 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면 될 것이지, 이 곰 같은 노무 새끼가 계속 참았던 모양이에요. 병원 가면서도 하는 말이…. 지가 뭐할라꼬 병원비 걱정을 하냔 말이야."

비디오를 보고 있는데 문제를 직감했다. 내 마음 속에 이미 눈물이 한바가지 고여 버린 것이다. 눈 크게 뜨고 껌벅이며 참는데, 이걸 계속 보다간 다음 순서 진행을 못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안 보기로 했다. 그래서 대본을 보려는데 소리는 계속 들리는 게다. 눈이 다시 모니터로 간다. 결국 스튜디오 구석으로 가서 대본을 들고 소리 내서 읽기 시작했다.

어수선하게 두 번째 진행을 마치고 다음 비디오가 나올 때 나는 마침 작가와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는 이 비디오를 만드느라 아마도 수십 번은 봤을 것이다. 그런 그가 모니터를 보며 한 마디 한다.

"아~ 눈물 난다."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면 다 울어요!"

그가 방송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해준다.

해고된 남편들이 해고와 함께 농성에 들어가면서 월급이 끊기자 아내들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우선 애들 학원을 그만 두게 해야 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사원 임대 아파트 단지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논다.) 그리고 뭐라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 있는 여성들이라 흔한 식당일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점이다. 그래도 아이들 먹여 살리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처음엔 스티로폼 만드는 새벽 공장에 나갔단다. 아이들을 재우고 한밤중 11시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하는 일당 5만 원짜리였단다. 그래서 손에 쥐는 게 한 달 70여만 원. 그런데 이게 곧 일이 끊겨 다른 일을 알아보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집에서 냉장고 냉각기 부품 조립하는 것. 이건 얼마? 개당 15원. 새벽까지 하루 1000개 정도 만들어봐야 일당 1만5000원이다. 한 달이면 30~40만 원.

그렇게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회사는 사원 아파트에서 나가라고 통보했단다. 그래서 34가구가 쫓겨날 판이다. 이들은 냉장고 부품 조립을 모여서 한다. 그러나 사실은 무서워서 모이는 것이다. 퇴거나 가압류 통보하러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게 무서워 이들은 모여서 작업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쫓겨나면 이들에겐 다른 방법이 없다. 갑자기 부모에게 쫓아가 손을 벌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최근 부산의 전셋값이 오르는 바람에 내쫓기면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과의 인터뷰가 이제까지의 어떤 인터뷰보다 힘들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면 다 운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 방송은 눈물 없이 보기 힘들다. 아버지를 보고 아들이 울고, 전화 끊고 아버지가 울고, 아들 이야기 하며 엄마가 울고, 그 엄마를 보며 아들이 또 울고, 엄마들이 부품 조립하다 인터뷰 하며 울고, 한 엄마가 우니까 옆의 엄마들이 다 울고, 그들과 인터뷰한 작가는 집에 가서 울고, 진행자는 다음날 다시보기 보며 울고.

사실 그날 스튜디오 풍경도 평소와는 달랐다. 비디오가 나가는 동안 카메라맨들을 포함한 7~8명의 스태프가 모두 모니터 앞에 모였다. 이제까지 이들 스태프는 비디오가 나가는 10여 분 동안 이를 보는 이도 있었지만 전화나 잡담을 하며 각자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은 모두들 골똘히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 한진중공업의 정리 해고에 맞서 6개월 넘게 총파업을 벌이던 노동조합은 6월 27일 결국 파업을 철회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업무 복귀를 거부한 약 30여 명의 조합원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있는 타워 크레인 중간에서 장기 농성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법원이 퇴거 명령 강제 집행을 실시하면서 약 300여 명의 용역 직원이 업무 복귀를 거부하는 노동자를 강제 퇴거했다. ⓒ노동과세계

한마디로 '악덕 기업주'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의 가정은 붕괴하고 있다. 이게 바로 가족의 생이별이고 가족의 해체다. 다른 말로는 날벼락이다.

정리 해고된 170명 노동자들의 가족은 남편 없는 생활, 아버지 없는 생활을 반년 가까이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울증에 걸린 아내들이 늘기 시작했고 이미 이혼을 한 부부들이 있는데 점점 늘어갈 조짐이란다. 지금 이들은 벼랑 끝에 내몰린 정도가 아니다. 추락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들은 졸지에 이런 막다른 처지에 내몰리게 됐는가.

요즘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한진중공업이 자리한 영도구를 지역구로 가진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국회의장을 지낸 그 지역 정치인인 내가 면담이나 통화 요청을 해도 거부하기를 벌써 십수 번인데 노동자들에게는 오죽 했겠는가"라며 그의 국회 청문회 출석 거부는 "국회를 무시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라며 조 회장을 비판했다.

주변의 말을 종합해 보면 조남호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주 독한 기업인인 듯하다. "사람 몇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않을 사람이에요"라는 말도 들었다. 지난 몇 년간 회사가 보인 회사의 행적도 양식을 가진 회사라 보기 힘들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영도 조선소 죽이기'에 나선 것이 아닌가 싶다. 이쯤 되면 '악덕 기업주' 아닐까.

회사는 정리 해고의 이유로 '긴박한 경영난'을 핑계 대지만 한진중공업은 지난 10년간 4277억 원의 흑자를 본 회사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수익성도 좋았다. 2010년 조선 부문 영업 이익률은 13.7%였다. 이번 정리 해고 직후 한진중공업은 174억 원의 주식 배당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긴박한 경영난이라니. 노동자들 정리 해고 시키면서 돈 잔치 하는 걸 보면 이들은 참으로 앞뒤도 없고 낯짝도 없는 인간들이다.

한진중공업은 수주 물량이 없어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4월 한 해운 조선 전문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조선 산업은 조선 수주량에서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고 한다. 특히 한진중공업 연결재무제표를 보면, 2010년 말 기준으로 수주 잔액이 5조500억 원. 2010년 중에도 1조7000억 원 수주 계약을 달성했다. 그런데 수주 물량이 없다니.

문제는 이 물량이 모두 한진중공업의 자회사인 필리핀 수빅 조선소에 배치됐다는 것이다. 2006년 이후 수빅 조선소는 67척을 수주했는데 영도 조선소엔 2008년 이후 한 척의 수주도 없는 것이다. 회사 측이 한마디로 필리핀의 조선소로 '몰빵'한 거다. 회사가 영도 조선소를 죽이기 위해, 결국 노동자들 해고의 근거를 마련키 위해 영도에 수주 물량을 배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도 조선소의 문제는 수주 물량이 없는 것 아니라 수주 물량 배분의 문제이다.

노동자 해고는 '가족 살인'

사실 이 수빅 조선소 때문에 2007년 노사는 '해외 공장 관련 특별 단체 교섭'에 합의했다. 당시 사측은 해외 공장을 운영해도 노동자들의 정년을 보장하고 "특히 해외 공장 운영으로 인해 국내 공장 조합원의 고용 불안이 발생치 않도록 한다"는 조항까지 넣어 노조와 합의했다.

그럼에도 한진중공업은 2009년 12월 조선업 불황을 이유로 400여 명(희망 퇴직 349명 포함)을 감원했다. 2010년 2월 정리 해고 중단을 노동조합과 합의했지만 그해 연말 이를 또 깨고 노동자들을 내쫓은 것이다.

1931년 설립된 한진중공업은 74년 역사의 향토기업이다. 그 재벌은 영도 조선소에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됐고 그 재벌 일가를 부자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영도 조선소의 노동자들이다. 그럼에도 그 재벌은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준 수많은 노동자를 무더기로 해고해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또 그 가정을 파괴하는 만행을 부끄러움도 없이 저지르고 있다. 그 뻔뻔스러움과 파렴치함 때문에 나는 그런 이들을 재벌이라기보다는 악덕 기업주라 부른다.

노동자들은 재벌만큼 부자가 될 생각도 없고 재벌의 재산을 뺏을 생각도 없다. 그냥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꿈이고 행복이다.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했고, 방송에 나왔듯 아이들도 아빠의 회사 한진중공업을 (지금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돈독 오른 악덕 기업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이들 노동자와 그 가족의 행복을,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아 무참히 짓밟는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해고 노동자 가족을 취재한 작가는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그 가족에겐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렇다. 채 2년도 되지 않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가족 15명이 생을 달리했다. 한진중공업은 이미 6개월이 지났다.

증오하라!

요즘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돌베개 펴냄)는 책이 유행이라는 이야길 들었다. 백번 동감하면서도 지금 우리 한국사회의 현실에는 뭔가 2퍼센트 부족하다. '분노하라'에는 그 방향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대상이 누락된 듯하다. 정확히, 다시 조준하자.

"증오하라!"

우리 사회는 그들을 증오할 권리가 있다. 상생과 공존을 거부하고 수많은 노동자의 고통을 딛고 자신의 배만 불리려는 그들을 증오할 권리가 있단 말이다. 그리고 이는 일방적 권리가 아니다. 그들에겐 자격이 있다. 그들이 우리의 증오를 받을 자격은 차고도 넘친다.

/정희준 동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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