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에 여행을 다녀오시고 피지 맥주를 잔뜩 사오신 어머니 덕분에, 가보지도 않은 동네의 맥주를 맛보게 되었다.

 

무려 피지 골드맥주, FIJI GOLD BEER. 이런저런 세계맥주를 마셔보긴 했지만 피지산 맥주는 처음인 거 같다.

 

 

국내에서 파는 데가 있으려나 싶을 정도로 레어한 아이템이니 기억해두려면 역시 사진사진. 황금맥주라 역시 금빛이 번쩍번쩍.

 

향도 강하고 고소하고 달달한 맛도 강한 것이 꽤나 술술 들어가는 맥주다. 병과 캔이 살짝 맛이 다른 거 같긴 한데,

 

전반적으로 그렇게 탄산이 강하진 않으면서도 시원하고 향긋한 목넘김이 좋다고 해야 할까.

 

맥주만 몇 모금 홀짝이며 캔 하나쯤 비우고 나서야 생각났다. 스페인에 다녀온 동생이 사온 하몽. 그 중에서도

 

도토리를 먹여 키운 암퇘지를 직접 손으로 포를 떠서 만들었다는 최고급 하몽이 하나 냉장고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 

 

 

맛있게 먹으려면 먹기 전 삼십분 정도 전에 미리 개봉해두라는 지시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 맥주를 다시 한 캔 더 홀짝.

 

원래 하몽은 메론을 썰어서 같이 먹는 게 정석이긴 하지만, 여태 먹었던 것 중에 가장 맛있는 거 같긴 하다.

 

기름기도 적당하고, 쫀득이는 살의 식감도 훌륭하고, 게다가 그렇게 짜거나 질기지 않고 딱이다.

 

그렇게 캔을 몇 개 비우고, 병을 몇 개 비우고. 그제서야 병 윗도리에 돋을새김된 글자들이 눈에 밟힌다.

 

 

피지에 놀러가지 않는 한 언제 또 피지의 황금맥주를 먹어볼 수 있으려나. 스페인에 놀러가지 않는 한

 

언제 또 저런고가의 하몽-85그램들이 저거 하나에 삼만원 가까이 한다는-을 맛볼 수 있으려나.

 

 

그래도 한 번이라도 아쉬움없이 질펀하게 먹고 마실 수 있었으니 그쯤이면 만족할 만한지도 모르겟다.

 

 

 

 

 

 

 

뉴욕에서 돌아오는 길, 공항 라운지에서 맥주를 한 캔 마시는데 문득 병뚜껑에 시선이 갔다. 어라, 캔 뚜껑에서 왕관이 보인다.

 

아무래도 캔뚜껑에 이런 왕관 문양이 보이는 맥주는 처음인 거 같아서 새삼 맥주캔을 들고 요모조모 살펴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발견한, 빨갛고 파란 성조기 색깔을 따서 만든 화려한 캔 디자인 외에 카피 한 줄이 눈에 띄었다.

 

KING OF BEERS, 맥주의 왕이라. 그런 의미로 맥주 캔뚜껑에 왕관을 얹어넣은 거엿다. 버드와이저.

 

 

국내에 수입맥주가 거의 눈에 띄지 않던 시절, 유일무이하다시피했던 수입맥주는 버드와이저였지만 사실

 

그 때는 공장이 국내에 있다던가, 뭐 여하한 이유로던가 맛이 그다지 인상적이거나 호의적이진 않았던 거 같다.

 

그리고 얼핏 외국, 혹은 미국 본토에서 제대로 사먹는 버드와이저의 맛은 그것과 다르단 말은 들었었는데

 

어쩌면 진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맛은 났던 거 같은 맥주.

 

 

 

 

 

어제 '공기인형'을 보고 나서부터 기네스 맥주가 무지하게 땡겼었다.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퇴근하고 나서 장보러 가신다는 부모님을 따라 코스트코로, 농협으로. 코스트코엔 병맥주가 없었고 농협엔

수입맥주라곤 호가든과 버드와이저 뿐이었다. 농협에 수입맥주가 있단 사실에 더 놀랬다.

집앞 편의점도 두군데 들렀다. 한군데에서 드디어 기네스 캔맥주와 조우해서, 분명 다음 편의점에선 짤랑대는

기네스 병맥주를 만날 수 있으리라 가슴이 벅차올랐었다. 웬걸, 아예 기네스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여 다시 처음 편의점으로 돌아가 두 캔 사버렸다. 캔이지만 살짝 달그락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져서, 타협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맥주캔 두개를 한 손에 계주 바통처럼 옴쳐쥐고는 내달렸다. 캬~ 소리내어 마시고 싶었다.

꼴꼴꼴...맥주가 흘러나오면서 짙고도 자욱한 안개 덩어리를 만들다간 조금씩 검정 액체와 뽀얀 거품의 형체를

만들어 간다. 진한 커피같이 쌉쌀하면서도 굉장히 부드럽고 매끈한 느낌의 갈색 거품이다.

그리고, 마음. 공기인형 그녀가 백 안에 넣고 방울처럼 흔들어대던 그런 짤랑짤랑 소리가 아니라 조금은 탁성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던 이유다. 캔 속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탈탈 털고 나니 기네스의 마음이 얼핏 나타났다.

이리저리 굴려가며 자세히 살피니 하얀 플라스틱 탁구공같이 생겼다. 세련된 검정색의 중후한 알루미늄 외양

속에 저런 가뿐한 느낌의 플라스틱을 굴리고 있었다니, 다시금 공기인형을 생각한다.


텅 비어있는 속을 채우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그 결락감만 더욱 또렷이 떠오르게 만드는.

그런 게 마음. 하찮은 플라스틱 한 조각일 뿐인데도, 그게 이렇게 다르다.

무려 "기네스 고유의 맛인 크리미 헤드(부드러운 거품층)을 생성시키"는 능력을 가진 거다. 공기인형에게

마음이란 게 덜컥 생겨버리고 나서는 마냥 쓰잘데기없고 가슴 아픈 일들만 있었던 게 아니듯, 기네스 캔을

덜그럭덜그럭 귀찮게 부딪혀댔던 녀석도 마냥 쓸데없이 굴러다닌 건 아닌 셈이다. (물론 위젯 때문에 기네스는

일단 흔들거려서 흥분하고 나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 같다. 풍요로운 거품이 팝콘처럼 튀곤 하는 거다.)

마시고 나면 꼭 아쉬워지는 거품. 맥주라곤 마신 적이 없다는 결백함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깔끔이 주걱으로

싹싹 야무지게 닦아낸 것만큼 거품이 한점 남김없이 모조리 내게 흘러들어온다면 참 좋을 텐데. 게다가 기네스,

비싸단 말이다. 편의점에서 무려 캔 하나에 3,500원.

복부 절개를 시술했다. 그녀의 마음이 보고 싶었다. 주둥이에서 흘깃흘깃 비치는 마음조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불끈 힘줄이 선 손가락이 껍데기를 와그작, 찌그러뜨려 버렸더니 거품범벅의 '마음'이 잔뜩 당황한 채

배회하고 있었다.

기네스의 마음을 얻으려면 마법의 성을 지나 숲을 건너..어둠의 동굴 속 멀리멀리 나아가야 한다. 날카로운

알루미늄제 이빨을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달그락달그락 떨고 있는 매끌한 마음이 튕겨나가지 않도록 손끝에

감각을 집중한 채 섬세하게 쥐어야 한다. 너무 세게 쥐어도 안 되지만 너무 약하게 쥐어도 안 된다. 너무 많은

손가락들을 들이밀어도 빼내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최소 두 손가락은 집어넣어줘야 한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기네스의 '마음'. 일곱개를 모아서 소원을 빌면 기네스의 신이 나타난다나.




*                                                     *                                                     *

기네스 드래프트. 알콜 4.2%, 원산국은 아일랜드.

안에는 '위젯'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플라스틱공이 들어가서 제멋대로 휘젓고 있어 기네스 흑맥주 특유의

풍성하고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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