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국제시장 위로 조금 걷다보면 나오는 보수동 책방골목. 이곳저곳에 '책방골목'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간판, 그리고

서점들의 간판들이 큰소리로 호객중이다. 어느 서점 앞에 나온 앉은뱅이 의자 두개 위에 앉은 돼지 두마리가 귀엽다.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자갈치시장, 족발골목, 40계단, 그리고 보수동 책방골목까지. 쉬엄쉬엄 하루 걸어다니며 볼 거리.

정말 골목이다. 큰길에서 비스듬이 꺽여들어가는 좁은 길, 가뜩이나 좁은 길을 양쪽에서 툭툭 치고나온 온갖

종류의 서적들이 더욱 좁게 보이게 만든 데다가 하늘까지 차양이 가리고 있어 더욱 좁아보인다.


어느 서점에선가 헌책을 손보고 계신 아저씨. 책의 구겨진 부분이라거나 겉면에 붙은 스티커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계신 듯.

골목 위로 기세좋게 쌓아올려진 오르막계단길. 가파른 계단 양쪽으로도 서점들 간판이 보인다.


헌책방을 좋아하는 건, 그 책의 종이들이 적당히 누렇게 바래가며 삭아가는 냄새가 좋아서다. 대학교에서도

중앙도서관 같은 커다란 헌책방을 가면 넘 냄새가 좋아서 똥이 마려울 지경이었다. 여긴 심수봉 1집 같은

오랜 LP판도 함께 취급하는 헌책방이었다.

앗, 그런데 이리저리 둘러보던 헌책 중에서 하나 눈에 들어온 책이 한 권 있었다. 내 방에 있는 세계문학전집 중

한권이 비는데, 마침 딱 그 책이 보이는 거다.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들어있는. 덥썩 집어들고 가격을

물으니 사천원이라던가. 늘 이가 빠진 책장이 맘에 걸렸는데 횡재라는 기분으로 냉큼 들고 나왔다.

또 뭔가 건질 게 없을까 싶어서 여기저기 살피는데 가장 많이 보이던 건, 온갖 종류의 문제집 참고서들. 그리고 뭣보다도

영어교재들. 내가 중학교때 썼던 걸로 기억하는 초록색 성문기초영문법이 보이고 막 그런다.

그리고 골목 어귀쯤에서 비탈을 타고 오르는 길, 고양이 한마리가 당당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뭔가 공공미술기획이 있었나보다. 벽면을 타고 카멜레온 한마리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글자들을 풀어넣고 있었다.

색색으로 깜찍하게 정비된 풍경 덕에 회색빛 시멘트의 차가운 느낌이 많이 희석되는 거 같다.

물론 중간에 이렇게 페인트가 온통 붉게 벗겨지고 녹물이 줄줄 타내려오는 문짝같은 게 그대로 남아있기도 했다.

저런 건 발로 한방만 뻥 걷어차도 구멍이 뻥 뚫리지 않을까, 싶도록 옴팡지게 삭아내린 철문. 이미 철문 안과 밖을

가르고 버틸만큼의 힘도 없거니와 철문 안에는 막다른 골목만 남아버린, 맹장같은 철문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원색으로 화사하게 칠해진 담벼락을 따라 오르다 보면 한아름 꽃다발같은 카멜레온을 안고 있는

흰곰 한마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책방골목 3길, 이라 씌인 푯말이 가파르게 고개를 굽혔다.


골목 위에 올라섰다가, 다시 돌아내려오는데 세상 곳곳에 왕관같은 깃털을 날리고 있는 비둘기 한마리도 만나고.


올라올 때는 미처 못 봤던, 심통 가득한 표정의 다부진 백곰 한 마리.

그리고 이녀석은 아까 보초서고 있던 고양이랑 바톤 체인지한 뉴페이스 괭이.

놓쳤던 풍경 하나. 비탈길 오르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난간 따라 이어진 줄에 조그마한 표찰들이 즐비했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살게 해주세요, 행복하면 좋겠어요, 남자친구 생겼으면 좋겠어요..저마다의 소원들이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바닥에 이름난 한국 소설들과 그 작가의 이름이 대리석으로 박혀 있었다. 이상의 날개,

염상섭의 표본실 청개구리,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읽지 않았다 해도 이름은 모두가 알만한 그런 작품들이다.

배수구 뚜껑도 특별한 보수동 책방골목. 헌책의 살짝 맵싸하고 습습한 냄새가 그득한 이곳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

딱 좋겠다 싶었고 괜찮은 까페도 요기조기 숨어있었으니 잠시 앉아 책장을 들척이기에 딱 좋을 듯.

심지어는 문닫고 있는 서점들조차 이렇게 독특한 그림들을 셔터에 그려두었고, 그 앞에 빈 책장들도 나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듯한 골목이다.

어느 일본서 헌책 전문점 앞에서. 마음껏 사진찍으라는 안내판을 보고 안심하고 이리저리 구경했는데 제일 눈에 들어왔던

건 역시 고무고무의 원피스 친구들. 니들은 대체 언제 해적왕이 되고 이야기를 완결할 셈이냐.

아, 내 방에 이빠진 책장. 초등학교 때부터 보던 책들이라 제법 손때도 묻고 애착이 있는 전집이었는데. 한국문학,

세계문학 전집중에서 유일하게 한 권 빠진 게 '오만과 편견'이 들어있는 6권.

이번에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발견한 책으로 메꿨다. 어랏. 근데 사이즈가 조금 작고 책 번호도 그게 아니다. 빠진 건

6번, 새로 구한 건 9번. 뒷장을 펼쳐보니 출판년도가 일년 차이가 나는 게 원인인 듯. 근데 분명히 오만과 편견은 있다는거.

뭐, 그러니 됐다.

 

부산에서 돌아보았던 곳곳들. 남포동을 중심으로 돌아봤던 곳들을 정리해본 지도.



서울 고양이와는 달리 지나는 사람에 스스럼없이 굴던 부산 괭이들, 보수동 책방골목의 어느 가파른 계단 앞을

지키던 녀석의 위풍당당한 수염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리고 저 고양이발들. 하악하악.


그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또다른 녀석, 토실토실하니 눈매가 잔뜩 째져서 조금은 심퉁맞다거나 삐진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섬세하게 바람을 가르며 미묘하게 움직이던 꼬리의 율동감은 녀석이 결코 만만하거나 게으른

녀석만은 아님을 대변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아니라 괭이라 그런가, 한결 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발모으고

자리를 지키는 시크한 모습이라니.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만난 책 한 권, 책을 슬쩍 열어보니 미스코리아 머리를 한 어느 여자가 보인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 모르겠지만, 93년 11월에 나온 책이니만치 그 이전에 찍은 사진일텐데 지금이나 그때나

별 차이가 없다. 표정이 어색한 건 비슷하려나.

93년까지 썼던 일기들을 모아 발간했다는 책인데, 다시 한번 실감한다. 말이나 글을 그럴 듯하게 잘하기는 참 쉽다.

문제는 그런 번드르르하고 군자연한 말들이 아니라, 꾸준히 관찰하고 지켜보지 않으면 알수 없는 행동의 격.

93년 11월 1일 발간된 박근혜의 일기 모음집,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눈에 띄인 책, 사실 눈에 뜨이게 전면에 배치되어 있기도 했다. 상실의 시대니 문화유산답사기가 저렇게 빼곡히

꽂혀있어 찾기가 쉽지 않은 것에 비하면, 책방에서도 공주 대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이 참 자극적이다 싶었는데-자기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나지 못해 아쉽다는 함의 속에 약간의

선민의식과 잘난척하는 '공주' 냄새가 난다면 과한 걸까-아니나 다를까, 몇년 후 이 일기 모음집은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라는 이름으로 증보된다. 그 이름은 근데 더 잘못 지었단 느낌을 지울 길 없다. 고난과 진실이라.


기념삼아 사둘까 하다가 말고서는 집에 와서 찾아보니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이 책은 이미 오래전 절판된 책.

헌책방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그렇지만 다소 찝찝한 책이다.

당신이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생색내기 식 김치담기 쑈를 하면서 스티로폼 박스에 그대로

김치를 담지는 않았겠지요. 아이들한테 환경 호르몬을 잔뜩 주입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사진은 연합뉴스)




부산 중앙동 '40계단' 일대,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의 판자촌이 형성되고 부두 노동자들이 구호물자를 부리던 장소가

바로 이 일대라고 한다. 2004년에 당시 분위기를 고스란히 재현한 문화거리로 만들어 '40계단 문화관광 테마거리'로

조성했다고 하는데, 그 계단을 오르는 길에 만난 아코디언 연주자의 찌그러진 중절모나 투박한 손매가 딱 그때 그시절,

고되고 허름한 삶의 편린을 보여주는 거 같다. 더구나 분위기를 띄우는 저 주황색 가로등 불빛까지.

길가에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는 다른 조각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여긴 '뻥 아저씨'의 뻥튀기는 소리가 금세라도

터질 듯 꼬맹이들이 귀를 꽉 틀어막고 있는 풍경이 담겼다.

그 외에도 1950-60년대 부산역이나 부산항 근처에서 쉬이 볼 수 있던 풍경들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해가 금방 저물어 더이상 찾는 건 포기하고 혹시나 몰라 동광동 주민센터로 올라가 보았다.

동광동 주민센터로 오르는 나선 모양으로 배배 꼬인 길, 360도가 한 바퀴니까 한 720도나 900도 정도 돌았다는

느낌이 들 즈음 주민센터가 나타났지만, 5/6층에 '40계단' 관련한 전시가 있다는 안내판만 버티고 섰을 뿐

문은 단단히 잠겨있더라는. 주민센터가 쉬는 주말, 연휴에는 운영하지 않는 듯 하다.

남포동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보수동 책방골목, 용두산공원, 롯데백화점 광복점 그리고 40계단에 이르기까지 올망졸망

모여있어 하루쯤 시간 내어 휘적휘적 걸어다니며 구경하기 딱 좋은 거 같다. 지도에 나와있는 곳들에 더해 택시를 타고

기본 요금 조금 넘어 도착하는 '감천동 문화마을'(태극도마을, 부산 산토리니 등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도 가면

하루 일정으로 딱 맞춤한 스케줄이 나올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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