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억십억백억천억조십조백조...무려 백조짜리 지폐다.

2011년 한국 국가예산이 채 300조원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단순히 숫자에

줄줄이 늘어붙어있는 동그라미 숫자만 세도 무려 14개.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숫자다.


얼마전 어떤 뉴스에선가 짐바브웨에서 2008년경 쓰이던 이 미친 고액권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인터넷을 뒤져서 덥썩 구매해버렸다. 당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있었고

화폐개혁이 이루어지기 전 한 반년정도 실제로 쓰이다가 폐지되어 버린 화폐라고 한다.

백조원, 아니지 정확하게는 백조 짐바브웨 달러(ZWD) 지폐 말고도 오십조 ZWD,

이십조 ZWD와 십조 ZWD가 기본으로 통용되었던 사회라니 아마도 빵 하나 사는데

십조 ZWD, 물 한병 사는데 이십조 ZWD, 뭐 이런 식 아니었을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 화폐 도안이나 인쇄 품질도 엉성하다는 느낌이 있다. 물론

빛에 비추어보았을 때 앞뒤에 인쇄된 그림이 딱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거나 종이 속에

숨어 있는 그림, 정교하게 인쇄된 금박띠 따위 위조를 방지하는 장치들이 있긴 한데..

아무래도 돈 만드는 사람들도 얼마나 한심했을까. 대체 돈 뒤에 저렇게 쓸데없이 동그라미를

많이 붙여서 어따가 쓰나 싶었겠지.

다행히 지금 짐바브웨 화폐는 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에서 유지되고 있는 듯 하다.

세계 모든 화폐간의 교환비율을 알 수 있는 사이트(www.xe.com)에서 찾아본 짐바브웨

달러의 미국 달러와의 교환비율은 361.9. 1 USD가 361.9 ZWD란다.

그 정도면 짐바브웨 돈이 한국 원화보다 값어치가 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한국물가도

갈수록 가파르게 치솟아 쓸데없이 동그라미가 너무 많이 붙고 있다는 지적, 그래서 화폐개혁,

동그라미를 제거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고액권만

자꾸 만들어내고 있다.

정확하게 따져보자면 1 ZWD는 대략 3원. 만약 이 비율 그대로 저 백조+오십조+이십조+십조의

짐바브웨 달러를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180조 곱하기 3이니까...540조원. 아이쿠. 대충 한국이란

나라의 이년치 예산은 되겠다. (물론 저 짐바브웨 달러는 화폐개혁 이전의 돈들이니 아마도

국가 예산은 커녕 내 하루치 용돈이나 되려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돈이 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시리 마음이 뿌듯해지고 부자가 된 듯한 느낌.

로또를 사는 것보다 저걸 사두는 게 훨씬 정신건강에 좋을지도 모르겠다. 뭐랄까,

마음의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백팔십조 짐바브웨달러.





헤이리의 아프리칸 갤러리. 국내에서 유일하게 아프리카 목조각상들을 전문취급한다는 곳이다. 입장료는 천원.

무료로 개방된 공간에 하도 사람들이 바글바글대길래 냉큼 천원을 내고 유료 공간으로 넘어와버렸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무료에서 유료로 넘어가는 계단 벽면을 빼곡하게 장식한 전통탈.

각도에 따라 느낌이 제법 다르다. 대충 눈높이를 맞춘 상태에서 보면 나름 우스꽝스럽고 친근한 구석까지도

읽혀지는 표정이지만, 이렇게 밑에서 올려다보니까 차갑게 눈을 흘기는 것 같기도 하고 볼이 잔뜩 부은 채

금세라도 시니컬하게 갈굴 것만 같다.

며칠 전 트위터에서 누군가 알려준 인도의 소식. 코끼리떼가 이동하다가 새끼 코끼리 발이 철로에 끼고 말았다나,

기차가 달려들 때까지 수십마리의 어른 코끼리들이 새끼를 둘러싼 채 버텼고 결국 일곱마리인가 기차에 치여

숨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했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던 너무 리얼한 코끼리,

그리고 그 살점을 뜯어먹는 콘도르떼들.

아프리카, 하면 기린떼도 빼놓을 수 없다. 드넓은 초원을 달리다가 문득 나무처럼 삐죽삐죽 솟아있는 그들의

긴 목부터 마주치는 순간은 아프리카에 대한 일종의 로망. 에버랜드에 생겼다는 초식동물 사파리에 가서 기어이

기린에 먹을 풀떼기를 쥐어주고 말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아프리카의 이 생생한 표정들, 조개껍질과 돌멩이를 활용해서 저런 얼굴을 표현해 낸다는 건, 대담하기도 하고

창의적이기도 하고. 군대 있을 때 '야전성'이란 표현을 우리끼리 썼던 적이 있는데, 뭐랄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재빨리 해결하는 응급조치의 순발력이랄까 유연한 발상이랄까. 그런 게 아프리카의 것들에서 느껴졌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식으로 조금은 더 '갖춰진' 인형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옷도 제대로 갖춰입었을 뿐 아니라

눈코입의 묘사 역시 클래식한 아프리카 토속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아프리카스러운 느낌은 살아있는.

조약돌 세개씩 깜장돌과 하얀돌을 늘어세운 뭔가 단촐한 게임판을 앞에 둔 채 맞은편에 놓인 화려한 의자. 저건

진짜 무슨 게임인지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꽤나 단순한 외양 때문인지 쉬워 보이기도 하고.

강아지가 고개를 슬몃 쳐들고 눈망울을 또르륵 굴려대는 이건, 흔들의자. 반질하게 잘 다듬어진 뒷마무리가 좋다.

책을 세원둔 채 양쪽에서 받쳐두는 책꽂이가 이정도 포스를 풍기다니. 이런 아이템이 제대로 분위기를 가지려면

꽤나 그럴듯한 서재가 있어야 할 듯. 왜 그 마호가니 나무 책상에 벨벳 카펫이 깔려있는 아늑한 방.

기린 모양을 따서 만든 경쾌한 느낌의 의자들. 기린 다리 네 개로 의자의 내 다리를 형상화하고 나니 기린

모가지가 남는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 바닥으로 잔뜩 꿇어박음으로써 모가지도 해결.

험상궂고 단호한 턱을 가진, 아마도 짐바브웨에서 왔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전사의 목각상. 전사의 얼굴 생김이

왠지 동네 어귀 장승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게다가 짚으로 엮은 머리띠며 목걸이를 칭칭 감고 있는 것도

낯설지 않은 느낌.

이쁜 아이템들도 많았지만, 아무래도 이런 것들은 하나만 덜렁 놓여있으면 참 멍청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냥

이렇게 이쁜 것들 눈요기하는 것으로도 잠시나마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빛을 머리에 부어내리며 돌아다닌듯

여행의 즐거움을 살풋 맛볼 수 있어서 만족.

아프리칸 갤러리를 나와 경기도 헤이리의 햇살을 한바가지 뒤집어 썼다. 갤러리 앞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빙빙 돌고 있던 앵무새가 인사를 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