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좁고 비싼 서울에서 복닥거리며 버티느니 근교의 괜찮은 땅을 구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시겠다는 것이 우리 부모님의 오랜 꿈이셨다. 마침 건축 쪽에 종사하시는 아버님이신지라 벌써 십여년전부터 어떤 집을 어떻게 지을지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고치기를 여러번, 그러다가 올해 4월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전원주택을 짓는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제부터 올릴 사진들은 드문드문 내가 가서 찍은 사진들과 아버지가 현장을 관리하며 찍으신 사진들이 뒤섞일 예정이며, 가능한 집이 세워지는 시간순으로 실시간에 가깝게 업데이트하려 한다. 관련한 문의나 궁금한 점들이 있다면 비밀댓글로 남겨주시길.

 

 

21. 첫삽을 뜬 이래로 한달, 중간점검.

 

2015년 5월 23일, photo by myself



이제 건물의 근간은 어느 정도 선 상태, 화창한 날에 현장을 찾아서 요리조리 둘러봤다. 물론 어머니가 지적한 것들을


다시 반영하느라 아버지가 고쳐야 할 일들이 많이 생겼고, 그로 인해 창문이 더 커진다거나 하는 외관상의 변화도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실내외의 공간 구획은 확정이라 봐도 좋겠다.


개울가 바로 앞에 버티고 선 2층짜리 건물. 아시바..라고 하나, 건물 외벽의 작업용 구조물은 아직 떼어내려면 멀었다.


외벽에는 이제 절반 가량은 현무암으로 치장을 할 예정이고, 나머지 절반도 노출 콘크리트를 좀더 광택있고 부드럽게


다듬어야 하는 작업이 남았다고 한다.



사방에서 둘러본 외관. 


왼쪽 아래가 건물의 입구. 현관 되시겠다. 그러고 보니 건물의 2층 외벽면이 제법 울퉁불퉁하니 느낌이 좋다.



큼직큼직하게 사방에 난 창문들도 그렇지만, 콘크리트 벽면이 그대로 노출될 예정인 곳들의 질감이 눈에 확 띈다.


지금은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좀 다듬고 광택을 주는 작업을 하면 훨씬 이뻐질 거라고.


타단~ 현관을 거쳐 들어가면 보이는 첫 장면. 


그리고 1층 거실에서 보여질 외부 풍경이다. 좀더 키우기로 했으니 이보다 더 탁 트인 풍경이 보일 듯.


1층 안방의 화장실 창문. 


그리고 안방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 


1층에는 거실과 안방, 부엌 공간이 배치될 예정.


이게 아마 부엌이 될 공간에서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이던가. 


여기가 보일러실..이었던가. 아직 그다지 외부 풍경이 낯익지 않은데다가 내부에도 특징이 없으니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뭐, 하여튼 그렇다. 사방이 초록초록. 그리고 큼직한 창문들이 있다는 사실.



여긴 어디 창문이더라, 아래로 개울이 흐르고 저만치 다리가 놓인 게 한눈에 보이는 게 좋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 지적사항'은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일일이 체크하고 변경이 가능한지, 아니면 더 나은 대안이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시고, 그렇게 두분은 머리를 맞대고 후끈한 토론을 거치며 집을 지으시는 중. 여기는


이만큼 창문을 더 넓히라는 지시가 틀림없이 반영되기로 약조를 맺은 현장.


그리고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간이 계단. 나중에는 저 창문의 우측 경사도에 맞추어 나무 계단으로 제대로


만들어지겠지만 당장 공사중에는 이렇게 생긴,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고 아래로 내려갈 수만 있으면 된다는 계단으로


충분한 거다. 다소 흔들흔들하고 위험해 보이기는 해도 막상 올라가보니 잡을 데도 많고 안전하더라는.



2층 테라스. 다소 고심하게 되는 저 동그란 구멍 디자인. 그대로도 괜찮을지 아니면 다른 개선안이 있을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듯. 어쨌거나 여긴 비오는 날 흔들의자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며 와인 한병 까기에 딱 좋은 공간이다.


내려다 보이는 풍경.


그리고 2층에는 방이 두개. 그리고 창고가 하나. 여기는 그중 동생이 쓰게 될 방.




여기는 올라오는 계단이 끝나는 바로 옆에 만들어질 자그마한 창고방. 


거기서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


그리고 2층의 또다른 방, 내방. 


이건 내방 화장실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 주금산의 정상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간이 계단. 나중에 여기는 그냥 막힌 창문으로 마감될 듯.


비좁은 틈새로 가까스로 올라와보면 보이는 풍경. 여기는 이제 길쭉한 고깔 모양의 창문으로 덮일 거니깐.



이웃한 다른 전원주택들. 애초 부모님이 고려했던 모양새 중에도 저런 '유럽식' 고깔 지붕이 잠시 존재했다가


순식간에 지금과 같은 갤러리 형태의 건물로 바뀌었다.



여기는 테라스 바로 위. 이렇게 두개의 구멍이 위로 뚫려 있지만 나중에는 역시 고깔 모양의 창문으로 덮을 예정.




그리고 나중에 건물이 점점 정리되면서 비교해보는 재미를 위해 찍어둔 구석구석. 


아, 여기는 이 집에서 전적으로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공간. 나중에 연못이나 수조 같은 식으로 쓰실 거라는데


아직 어떤 형태가 될지는 오리무중.


어느새 한달, 생각보다 집은 빠르게 지어지고 있는 참이다.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고인돌의 나라, 강화를 재발견하다.)에서 올해로 벌써 14회째를 맞이한

축제가 있다. 다른 지자체들의 축제가 부침을 거듭할 때에도 흔들림없이 계속되어온 이 축제의

이름은 "강화고인돌문화축제", 아무래도 강화도를 대표할 뿐 아니라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에 이른 고인돌을 앞장세운 게 톡톡히 제 역할을 했지 싶다.


이틀동안 축제가 벌어지는 곳은 생각보다 너른 섬 강화도의 중앙쯤 위치한 고인돌광장,

강화도 지석묘를 둘러싸고 있는 초록잔디밭 광장 위로 특이한 형태의 연들이 줄지어

꼬리를 퍼덕이고 있었다. 올해의 경우 6월 11일(토)부터 12일(일)까지 이틀 열렸는데

광장을 꽉 채워 고인돌 행사장, 체험장, 사진전시장, 전통체험관, 먹거리장터들이 늘어섰다.



ㅇ 고인돌 축조 재현하기

무엇보다 눈을 사로잡았던 건 역시 고인돌을 쌓아올리는 모습을 직접 재현하는 모습이었다.

부족을 통솔하던 부족장이 죽자 하늘이 내려앉은 듯 탄식하며 비통해하는 원시인들의 모습,

그리고 커다란 덮개돌을 덩굴같은 줄로 단단히 묶어서는 흙으로 비탈을 만든 바닥돌 위로

힘을 합쳐 끌어올리는 모습, 재현 중에서는 열명 남짓한 원시인들이 힘을 합쳤지만 실제론

수백명에 달하는 인력이 동원되었을 거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건 실제보다는 상당히 축약된 무게와 규모로 재현된 미니어처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재현행사를 준비하는 스탭들이 저 커다란 덮개돌을 가뿐하게 들어올리는

모습을 얼핏 보았던 거 같기도 하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었으려나, 그렇지만 그걸 저렇게

리얼한 표정과 액션으로 소화해내며 재현 행사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원시인 여러분들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낼만 했다.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불러내어 으쌰으쌰, 덮개돌을 바닥돌 위에 확실히 얹어놓고나서는

두 손을 번쩍 치켜올리며 고인돌이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원시인들. 바퀴 역할을 하며 바닥에서

뒹굴었던 나무통과 비탈을 만들어 주었던 흙만 치워내면 이곳 강화도에 이미 존재하는 140여기의

고인돌에 하나가 더해지는 셈이다.

고인돌축제의 개막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인돌 축조과정을 재현하는 원시인들의 기합소리와

함께, 칠선녀들의 공연과 함께. 고인돌광장과 바로 붙어있는 강화역사박물관에 마네킹으로 전시된

선녀들의 복장이나 장신구는 완전히 똑같았던 그녀들은, 그렇지만 훨씬 뛰어난 미모와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칠선녀는 과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를 지낼때 일곱선녀가 옆에서 제를

도왔다던 고사로부터 등장하는데, 전국체전의 성화를 매년 새롭게 뽑히는 칠선녀들이 참성단에서

채화하고 있기도 하다고. 그리고 그녀들은 1956년 이래 강화여고에서 뽑혀왔다고 하니, '그녀들'이라

칭하기보다는 그 아이들, 이라는 표현이 낫겠다.


ㅇ 원시인의 일상 체험하기

이리저리 고인돌광장을 떠돌며 행사도 구경하고 체험관들도 구경하던 와중에 만난 꼬맹이들.

고인돌을 둘러싼 울타리에 기대앉아선 조금 쉬어가려는 듯 옥수수로 하모니카를 불고 있더니

카메라를 보자 불쑥 장난끼가 발동한 듯 옥수수랑 돌도끼를 양손에 쥐고는 흔들어준다.

원시인들이 다들 저런 레오파드 무늬가 뚜렷한 가죽옷을 입고 다녔을지는 상당히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벌거벗고 다니거나 잎사귀 한두장으로 코스프레를 하기엔

너무 전위적인 느낌이니까 원시인들은 모두들 표범 한두마리쯤 쉽사리 때려잡았을 거라

호의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호피무늬 원시인 복장을 머릿수건까지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돌도끼나 단검을 꼬나쥐고 나니까 다들 신났다. 거울 앞에서 요리보고 조리보고.

그렇다고 다들 폭력적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돌판과 돌확을 이용해서 낟알의 껍질을 까고 있는

진지한 표정의 아이의 손끝이 신중했다. 돌확은 원시인들이 곡식을 떨어내고 껍질을 제거하던

작업을 돕기 위한 도구인데, 저 정도로 원시적이어서야 손으로 하나씩 까는 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하지 않으려나 싶다. 하긴 워낙 발전속도가 빨랐으니, 수천년 전의 인류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터에 직접 '인간 탈곡기'가 되어 체험하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몇몇 시대를 구분짓고 공간을 구분지을 지표가 되어주는 토기들을 갖고 아이들에게

열심히 그 특징과 정보를 알려주고 계신 아저씨. 이 토기에 그려진 무늬는 빗살무늬라고 하는데

주로 곡식의 낟알등을 담아두었고 바닥이 뾰족한 건 땅에 묻어두었으리라 추측하는 근거가

된다 운운,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자세가 제법 의젓해서 보기만해도 흐뭇했다.

사냥감을 사냥해보는 체험, 이랄까. 새총들이 줄줄이 늘어선 가운데 꼬맹이들이 있는 힘껏

노랑 고무줄을 당겨서는 표적을 노리고 있었다. 공룡이 그려진 표적지를 보며 다시금 궁금해진 건,

인류의 조상인 원시인들이 공룡과 겹쳤던 적이 정말 없었을까. 일반적으로는 인류와 공룡은

서로 시기가 겹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고인돌 빠삐코'니 뭐니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원시인들은

늘 공룡들과 함께 노닌다.


ㅇ 강화도 문화 체험하기

강화도의 특산품, 하면 화문석. 어쩔 수 없는 암기식 교육의 부산물이다. 이름만 익히 듣고 외웠지

그게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여태껏 블랙박스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게 사실.

옆에서 하나씩 가르쳐주는 선생님 옆에서 입을 꼭 다문 채 화문석 만들기에 몰입해 있는 아이도

아이지만, 그 손놀림을 유심히 바라보며 대체 어떻게 저렇게 이어지고 묶이는 걸까 호기심에

가득찬 구경꾼들의 표정도 못지 않았다. 시간만 있다면 털썩 천막에 앉아서는 선생님한테

배워가며 직접 한땀한땀 정성으로 매만진 화문석 한장을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강화도에 많이 나는 약쑥으로 비누도 만들어보고, 상큼한 형광색 꼬리를 달고 있는 화살을

던져넣는 투호도 하고, 그렇게 몇걸음 채 걷지 못하고 무언가 직접 손목 걷어부치고 만들거나

경험해보거나 그렇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함께 즐길 거리들이 제법 솔찮았다. 아이가 탄

유모차를 끌고, 혹은 걷는 아이 손을 꼭 붙들고 온 부모들에겐 꽤나 수월한 나들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천연염색을 체험할 수 있는 부스를 포함해서, 고인돌마을 족장 체험, 도자기 만들기 체험,

연날리기 체험, 무형문화재 제14호 단청그리기 체험, 다도체험 등등 고인돌을 만들던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살던 인류가 축적해온 유무형의 독특한 문화유산들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넓게 열려있었다. 이정도면 굳이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는 단어를 동원해

교육과 놀이가 혼합되어있음을 강조한 주최 측에 수고했노라, 박수를 쳐줄 만 하다.


ㅇ다양하게 즐기기

강화고인돌문화축제를 즐기러 와서 찍은 사진 중에서 맘에 드는 사진은 즉석에서 인화해서

콘테스트에 응모할 수 있다나, 이미 응모된 사진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다들 욕심이 그득하다.

일등해서 상품가져갈려는 의욕이 넘치는지 사진들이 다들 범상치 않았달까.

원시인 복장을 챙기고 돌도끼를 들지는 않더라도, 뺨이든 손등이든 뭔가 고인돌축제에 어울릴

페인팅을 하나 하고 나면 뭔가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된 느낌인 거다. 특히나 아이들이 엄마손

잡고서 길게 늘어선 그 줄을 슬쩍 지나치고 나니 또 다른 긴 줄이 나타난다. 삐에로 아저씨가

풍선으로 강아지를 만들어주는 건, 정말 어디서나 아이들을 모으는 최고의 방법인 듯.

그 와중에 바쁘게 돌아가는 먹거리장터와 행사장 주변 스탭들의 발놀림. 축제의 분위기를

돋우는 건 심장 박동을 따라 노니는 풍물의 흥겨운 장단과 함께, 빤짝거리는 새틴 재질의

'가죽옷'을 입은 '원시인'이 어색한 옷차림에 불편해하면서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행사가

잘 되도록 움직이고 있는 모습인 거다.
 

공연도 이틀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짜여있었다. CBS에서 녹음방송을 하는가 하면, 마야가

초청가수로 와서 노래를 부르고, 평양예술단이니 인천시무형문화재협회 공연이니, 심지어는

웃찾사 공연팀이 와서 개그공연까지 하도록 스케줄이 짜여있었다. 나름 강화군 차원에서 심혈을

쏟아붓는 행사라는 게 빈말은 아닌 거 같다.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조금 아쉬웠던 건 '에어바운스' 축하비행이었다. 등뒤에 커다란 프로펠러를

메고서는 그 힘으로 날아올라 낙하산에 의지하여 두둥실 떠다니는 것, 처음에 굉장히 커다란

선풍기 소리가 날 때만 해도 설마 저게 날겠어 싶었는데 정말 훌쩍 떠오르더라는. 아쉬웠던 건

바람이 너무 쎄서 비행에 성공하기까지 어려움이 좀 많았고, 그나마 떠올랐던 것도 생각보다

일찍 내려온 거 같았다. 그치만 정말, 저렇게도 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줬달까.

그 옆의 역사박물관에서는 축제 기간에 맞추어 인천무형문화재 기능장들의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대금, 단소 같은 전통악기나 화문석, 도자기나 전통의상 등이 강화역사박물관 1층의

로비에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으니, 잠깐 더위도 식힐 겸 에어콘 바람도 쐴 겸 들어가서

휘 둘러보기에 딱 좋았던 거 같다.  

 

2011년 강화 고인돌문화축제는 여러모로 좋은 계기가 되었던 거 같다. 강화도에 있다고만 들었던,

실물을 제대로 보거나 체험해본 적은 없는 고인돌이니 화문석이니 그런 것들에 대해서 작정하고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고, 축제 자체도 '고인돌'이라는 뚜렷한 아이템을 가지고 특색있게 잘

꾸며놓아 중구난방식의 여느 지방 축제와는 격을 달리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강화 고인돌광장 인근으로 산재해 있는 고인돌군을 돌아보기에도 좋은 위치라는 점,

그리고 강화도도 제주도나 다른 곳들처럼 트레킹 코스를 사방으로 개발하고 있으니만치 더욱

즐길 것이 많아졌다는 점도 축제에 맞추어 강화도를 향해 발걸음을 쉽게 떼도록 이끈다.








지방에 그럴 듯한 박물관이 있다는 건 꽤나 행복한 일이다. 모든 게 서울에만 편중되어 있는 이 지독한

'서울공화국'이라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슬쩍 맘만 내키면 훌륭한 전시품들을 둘러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일이기도 하고, 각 지역의 지방색이 드러나는 좀더 특성화된 전시 테마나 기획을 통해

국가 단위의 역사인 '국사' 속에 숨겨져 있는 지방사나 홀대되었던 역사를 발굴하는 일이기도 할 거다.


무엇보다도, 날씨가 죽도록 촙던 날 사방으로 쏘다니다가 잠시 들어가 몸을 녹이며 설렁설렁 둘러보기에

딱 좋은 경유지라는 점. 전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높지 않은 2층짜리 아담한 국립전주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일 뿐더러 이 지역에 위치했던 마한이라거나 가야의 유물들이 제법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은 가야의 철제 갑옷, 굉장히 이국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로 가야의 역사나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던 거 같다.


이 곳이 정말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느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유물들에 붙어있는 이름표들에 있었다.

'점을 치는 뼈', 이 정도면 뭔가 갸우뚱하면서도 그럭저럭 별다른 낯선 느낌없이 넘길만하다 치더라도,

'신께 바친 다양한 제물', '크기를 줄여 만든 석제품'이라니. 왠지 이런 건 '제사공헌물', '석제모조품'

따위 한자어로 퉁명스럽고 고압적인 느낌으로 이름이 붙어있었던 게 일반적이지 않았나.


그런 식의 '친절한 이름표'종결자랄까, '고종 황제의 도장'이란다. 나이 든 사람들은, 아니 당장

나부터도 '어보'라거나 '옥새'라거나 '국새'라거나 따위 한자어로 적혀야 뭔가 있어보이고 격에

맞다고 얼핏 느껴지는데 과감하게 '도장'이란 단어를 써버렸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쉽게 풀어쓴

이름표를 보니까 그 유물이 뭐에 쓰인 건지 감이 확 온다. '네귀달린청자항아리'라니 실제 유물

특징이랑도 딱 와닿고, 이름만 들어도 상상이 대충 되고.


아이들을 데리고 교육삼아 오는 학부모들이 급격히 많아진 걸 생각하면 바람직한 변화인 듯 하다.

게다가 사실 괜히 어렵고 함축적인 한자어로만 이름표를 적어두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 전주국립박물관에서처럼 한글로 풀어쓴 이름을 크게, 한자어로 작게 병기하는 정도가

딱 좋은 거 같다.


박물관에서 본 신기한 것들이 몇 점 있었다. '시가 새겨진 청자 조롱박모양 주자',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신기하다기보다는 집에 저런 거 있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 청자에 저렇게

술을 권하고 풍류를 즐기는 시를 새겨두고 술을 담아 주거니 받거니. 얼마나 멋졌을까.

집에서 저런 청자 주전자에 술을 담고 분위기 맞는 깔맞춤한 잔에 따라마시면 멋질 텐데.

그리고 실내 전시관 한켠 장독대에 뜬금없이 붙어있던 하얀 버선발 한짝. 알고 보니 집의 장맛을

지키기 위해서 숯도 깔고 꼬추낀 금줄도 두르고, 요기까지가 익히 알고들 있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버선발을 거꾸로 장독에 붙여두는 것도 '잡귀'를 쫓는 방법 중 하나였다고.

그리고, 사방에서 출몰하는 쥐는 '토끼의 해'특별전시 공간도 비켜가지 않았다는. 정작 토끼에

관련된 전시도 몇 점 되지 않는 상황에서 눈에 번뜩 뜨인 쥐 녀석. 요새 엿기름에도 빠지고

케잌속에도 들어가고 파란집에도 들어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얼마전 회사의 홍보대사를 뽑는다는 자리에 면접관으로 갔었다. 88, 89년생이 대부분인 대학교 2,3학년. 남자는

그래도 군대도 다녀오고 이러저러하여 85년생까지도 보이던 자리.


대학생들인지라 자기소개서는 꽤나 '신선'했다. 반말투로 적은 자기소개서, '성별 : 남'이 아니라 '성별 : 건장한

남', 느낌표와 말줄임표와 이모티콘이 난무하던 자기소개서까지. 아, 볼에 바람 불어넣은 셀카사진을 첨부한

여학생도 빼놓을 수 없겠다. 나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사진과 실물이 다르니 '실망'이라 부를 만한 감정이

불끈, 오른 건 사실이었고, 그보다 자기소개서 같은 공식적인 글은 조금은 형식을 갖추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면접 자리에서도 꽤나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정식 직원이 아니라 홍보대사를 뽑으려는 거라 본인의 적극성과

사교성을 보여주려는 응시자들이 많았다. 대입 면접을 대비하며 지하철 객차 안에서 했다던 인사말을 정말 큰

소리로 다시 해보이는 학생, GEE 가사를 개사해서 개다리춤과 함께 노래하는 학생, 본인의 계획과 의지를

스케치북에 적어서는 발표해보겠다는 학생, 핸드폰을 팔아보이겠다는 학생도 있었으니, 반나절 내내 백 명

가까이 보면서 심심하진 않았다.


제주에서 비행기 타고 왔다는 학생은 그랬다. "여기까지 오는데 한시간 반밖에 안 걸립니다. 제주라고 넘

멀다고만 생각지 마시고, 그런 선입견 없이 저를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멋진 멘트, 멋진 학생이었다. 지방은

확실히 서울 근교에 비해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스펙 업'할 기회도, 경력도 적어 보였다. 이력서에 적힌 온갖

인턴, 홍보대사, 봉사활동이니 단체활동이니, 절대적인 양에서 차이가 엄연하지만, 그래도 이런 배짱이라면.


GEE를 부르며 개다리춤을 춘 학생은 정말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었다. 옆자리의 차장님이 부끄러워 하시며

그만하라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난 끝까지 듣고 나선 다시 한번 앵콜을 청했을지도. 그리고 나선 아마도

무한재생 버튼을 눌렀겠지. 그치만 정말 가사를 적절히 개사하고 외워서 면접관들 앞에서 흔들림없이 춤과

함께 노래할 수 있단 건 굉장한 일이다.


둘이 맞춰서 보핍보핍~을 재연해보려던 학생들은 합이 전혀 맞지 않아 왠지 캥거루 권투시합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을 연출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뭔가 보여주려는 의지가 강해보였다. 아무리 기회를 주려고 해도,
 
잔뜩 옹송그린 채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지원자들도 적지 않았기에 그 권투시합이 좋게 보였던 게다. 더구나

이건 '조용히 중간만 가도 되는' 그런 거라기보다는, 아무래도 본인이 홍보대사에 적합함을 어필하는 게 나은

전략일 텐데 묻어가려는 지원자들이 의외로 많았다.(어쩜 정말 되면 좋고 아님 말고, 그런 식이었는지도.)


혹시 '소'수염을 굳이 깍으라 한다면 어쩔 건지, 란 질문에 그건 오히려 학생들에게 우리 회사의 자유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일 수 있는 데다가 본인의 개성이라 말하던 학생도 있었다. 내가 인턴 면접보러 가서

귀걸이 못 빼겠다고 뻔뻔히 이야기하고 합격했던 게 생각나서 만점을 줘버렸다. 회사의 입장에서도, 직원

채용과 홍보대사/인턴 채용이 엄연히 다른데 그정도의 유연함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이런 면접 경험이라곤 대입 때나 알바 구하는 첫자리 정도였을 미숙함에 더해서, 게다가 요새 여기저기

공공기관과 사기업에서 온갖 인턴이다 홍보대사다 '스펙 업'하라며 숙제만 잔뜩 내어주는 터라 나름 긴장도

적지 않았나 보다. 생각보다 많은 응시자들이 확연히 떨고 있었다. 별 것도 아닌 홍보대사인데, 안쓰러워서

농담도 해주고 기회도 두번세번 주고 했지만 끝내 버벅이고 움츠러드는 게 넘 마음이 안 좋았다. 그만큼 정말

부담이 커지기도 한 게 사실이니까. 괜히 개나소나 다 인턴이니 뭐니 뽑겠다며 대학생들을 괴롭히니 원.


이왕 뽑는 거면 좀 잘 썼으면 좋겠다. 인턴 뽑는 거야 내가 함께 일하며 가르쳐주고 잘해주고 하면 되지만

홍보 대사는 직접 함께 상시적으로 일하는 것도 아니어서. UCC니 블로그니 활용할 줄 아는 능력자도 많고

말잘하고 열정적인 사람도 많았는데, 회사나 뽑힌 사람이나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관건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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