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어느 전시관에서 만난 이 때깔나는 옷들은 사람의 상상력을 마구마구 자극했다.

비에 젖거나 물이 묻으면 흐물흐물 녹아내리거나 힘없이 벗겨지지 않을까. 때가 묻으면

지우개로 그저 쓱쓱 지워버리면 되는 걸까. 여차하면 한 귀퉁이 찢어내어 수첩으로도

쓸 수 있는 걸까. 저 옷은 급하면 그냥 아무데나 잡고 쫙 찢어내리면 되는 걸까, 따위 온갖

흥미진진하고 살짝 야시시한 그림을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만드는 옷들의 재료는, 바로 종이다.


'종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아무리 찾아도 그런 의미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종이라고 하면

으레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좀더 머리를 굴리면 뭔가를 포장하고 덮는 정도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할 뿐인 거다. 찾다 찾다가, 무려 '식품과학기술대사전'에까지 가서 찾아본 종이의

만드는 법, 분류, 용례 등은 이런 거다.


식물섬유나 그 밖의 섬유로 제조한 펄프를 얽히게 하여 엷게 교착시켜 말려서 시트 상으로 만든 것. 광의로는 합성고분자물질로 제조한 합성지도 포함된다. 종이는 한지, 양지, 판지, 합성지로 나누어지나 용도에 따라서 인쇄용지, 필기용지, 도화용지, 지도용지, 여과지, 감광지 등 또는 백판지, 골판지원지 등으로도 분류한다. 종이의 제조원리로는 플라스틱이라든가 인청동의 망 위에 펄프를 부유시킨 물을 흘려, 수분을 제거하고 건조시켜 만들어진다.

약 3000~4000년 전, 이집트에서 파피루스(papyrus)의 육질부를 종횡으로 펴놓고, 압착하여 건조시켜 필기용으로 사용했던 것에서 유래하여 paper(영), papier(독일), papel(프랑스)의 어원이 되었다. 현재의 종이는 서력 105년 중국에서 채윤이 삼 또는 동백의 나무껍질을 원료로 발에 올려 종이로 한 것이 기원으로 되어 있다. 종이가 대량으로 쓰이게 된 것은 목재로부터 펄프가 만들어지고 원망, 장망 등 기계적으로 연속생산이 가능하여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지만 그전까지는 귀중품이었다.

종이에 의해서 인류는 과거의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종이의 소비량은 문화의 척도가 되고 있다. 컴퓨터시대가 되어 종이의 소비량이 감소할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실제로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용도별로는 중량비로 약 4할이 포장에 사용되고 있어 종이는 포장의 중요한 소재이다.

* 출전 : 식품과학기술대사전 한국식품과학회 저, 2008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뭔가를 접고 오려 만들거나, 단단하게 말려서 바람을 일으키거나, 혹은

벽에 바르거나 바람을 막는데 쓰는 건, 그 위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함께 오래전부터

활용되어 온 종이의 쓰임 중 하나인 거다. 그런데 옷이라니. 종이로 옷을 만든다는 건 어릴 적

여자애들과 같이 못 이기는 척 인형 옷입히기 놀이를 할 때 빼고는 생각도 안 해본 일이다.

그런데 그저 슬쩍 걸쳐놓기만 하는, 전혀 실제로 입을 엄두도 낼 수 없는 그 2차원의 옷이

실제 사람이 입고 생활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채 이 곳에 전시되어 있던 거다. 마치 아바타를

필두로 한 3D영화가 전혀 새로운 충격과 감각을 일깨우듯, 3차원으로 구현된 옷들이 눈앞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사실은 생각을 조금만 뒤집으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왜 하필 수의를 앞에 두고 그렇게

납득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옷이나 포장지나, 뭔가를 싼다는 것에선 같은 거다.

물론 수의와 달리 실생활에서 입을 수 있으려면 그 종이의 견고함이나 내구성, 부드러움

정도가 굉장히 특출해야 하겠지만.

여기가 바로 그런 한지를 만드는 곳이다. 이미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가 다녀간 안동 하회마을 옆의 안동한지공장이다. 얼마전 있었던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이 곳의 한지가 또다시 국제적으로 알려질 기회를 얻었는데 15개 회의장 전체의 실내공간을

장식할 도배지로 활용되었다는 것. 전국 최고의 품질임을 거푸 인증받은 셈이다.

이 곳에서는 단순히 한지를 전통적인 제조법에 따라 생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만들어진 한지를

전시하고 제작과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체험관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지를 원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들도 전시하고 있었고, 명함통이나 필통 같은 것들을 직접 한지로 만드는

체험 역시 해 볼 수 있었다. 단순히 만들어진 종이를 파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을 직접 경험해보고

앞으로도 한지를 볼 때마다 스스로의 이야깃거리와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랄까.

닥나무가 시래기와 함께 시름시름 마르고 있던 컴컴한 창고. 얼핏 보아서는 무슨 뱀가죽을

벗겨놓은 듯 길고 가늘고, 그렇지만 질겨보이는 것이 잔뜩이다.

가까이서 보면 겉껍데기는 칙칙하지만 속은 제법 하얀 빛깔을 숨기고 있는 게, 어찌어찌 살살

잘만 다뤄주면 하얗다 못해 뽀얀 빛깔을 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실제로 한지를 제조하는 건

이 녀석들을 사정없이 삶고 헹구고 햇볕 아래 표백하는 과정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한지만들기1. 커다랗고 네모난 솥에서 삶아지고 있는 닥나무 껍데기들, 슬쩍 만져보니

제법 낭창하게 많이 부드러워졌다. 물기도 흠뻑 머금은 데다가 불에 삶아진 덕분인 듯 했다.

한지만들기2. 창고에서 봤던 녀석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새하얀 빛깔로 변신한 닥나무 껍데기,

아주머니 둘이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무더기무더기 끄집어 내어 열심히 뭔가를 골라내고

있었다. 껍질 속에 혹여 섞여 들어간 티를 골라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한지만들기3. 잡티가 없이 깔끔하게 골라진 닥나무 껍질을 분쇄기에 들어가 잘게 짓이겨진다.

그때 아무 염료 없이 그대로 짓이기면 하얀 한지를 만들 원료가 되는 거고, 뭔가 빨갛거나

파랗거나 노란 염료를 첨가하면 그 색깔을 띈 한지가 만들어지는 거라 한다.

한지만들기4. 여기가 아마 제일 기술도 필요하고 힘도 필요한 작업이지 싶었다.

생각보다 훨씬 작고 열악한 공장에서 내리쬐는 형광등은 왜 그다지도 밝은지, 판을

휘젓는 아저씨의 팔뚝에 솟아오른 굵고 야성적인 힘줄과 핏줄들을 그대로 비췄다.


한지만들기5. 잘게 짓이겨진 닥나무 섬유들이 둥둥 떠다니는 물 속에 저 커다란 판을 넣고

좌우로 세번, 위아래로 세번, 그렇게 십여번 가까이 힘차게 흔들어주면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없던 판 안에 하얀 종이가 생겨나는 거다. 섬유들이 물풀처럼 흔들리며 좌우로 정렬하는

모습이 머릿속엔 생생하게 그려졌지만, 아저씨들의 두꺼운 팔목이 움직이는 아랫쪽을 아무리

눈 크게 뜨고 지켜보아도 한지가 생겨나는 과정은 좀체 신기롭기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지를 판에서 떼어내어 아랫쪽에 차곡차곡 쌓아올리곤, 다시 닥나무

섬유들이 흐늘거리는 물 속으로 판을 집어넣었다. 다시금 시작되는 좌우로 세번, 위아래로

세번의 십단콤보. 둘이 나란히 서서 하는 작업이니 아무래도 조금 덜 심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두분이서 슬쩍 장단을 맞춰가며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 분이 조금 앞선다

싶으면 다른 분이 금세 따라잡기도 하고.

그렇게 쌓여만 가는 한지는 아직 너무 축축하다. 축축하고 미끌거리고, 해서 좀처럼

손으로 잡아올릴 수가 없었다. 귀퉁이에 슬쩍 손가락을 댄다는 게 무슨 지문을 남기듯

깊은 흔적을 남겨버려서 시껍하곤 도망나와버렸다. 아직 종이라기보다는 뭔가..묵이나

전병같은, 먹을거리에 가까워보이는 네모판.

한지만들기6. 어느 정도 물을 빠지도록 방치했던 그 하얗고 네모진 묵덩어리에서는 이제

한장씩 '종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떨어져 나올만큼 형체가 잡혔다. 따뜻하다기보다는 뜨거운

철판 위에 한장씩 솜씨좋게 잡아당겨 붓질 한 방에 찰싹 붙여놓는 아주머니의 손놀림은

거의 춤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마른 종이는 이제 한장씩 다시 포개져선 밖으로.

한지 만들기 체험관에서는 '좌우 세번, 위아래 세번'의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손가락만 슬쩍 빠뜨려도 온통 닥나무 섬유들이 휘감기는 물 속에서 조그마한 판을 움직여

종이를 만들고, 수건 위에 올려 물을 뺀 후에 뜨거운 철판 위에서 바싹 말리는 과정. 그렇게

내가 만든 종이 양쪽 귀퉁이에는 서로 마주보도록 도장을 두 방 찍어줬다.


내가 만든 한지를 조심스레 접어서는 어디에 쓸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옆 방으로 옮겼더니

온통 화려하고 아름다운 종이들이다. 닥나무 섬유질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한 결하며, 정말

곱게 나염된 그 빛깔하며, 저런 종이는 포장지로 쓰거나 아님 아까 봤던 한지 옷의 허리띠로

써도 딱 좋을 거 같다.


무려 천 년 이상 보존된다는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 한지는 '조선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특징과 개성이 묻어 있다고 한다. 종이 한 장이라도 직접 만들어보고 나니

그 과정에서 천년을 버틴 사람들의 지혜와 미감의 한켠이나마 엿본 듯 했다. 아무래도 앞으론

한옥집이나 한지로 된 포장지만 보아도, 아니 한지 비스무레한 아름다운 종이 한 장만 보아도

마음이 설렐 듯 하다.





선물이 있는 퀴즈. 풀죽은 말 두마리를 내달리게 하려면? 에 대한 답이 되는 포스팅입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퀴즈지만 저 빼고 다른 사람들은 많이 알지 않을까 싶었는데, 쉽지 않았던 문제인 듯 해요.ㅎ


종이를 접건 자르건 뒤집건, 이 종이 위의 말 두마리가 신나게 내달리는 포즈만 연출해 낼 수 있으면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몇가지 재미있는 답이 나왔습니다.

A1. 쟤네들은 원래 달리고 있었다. 지금은 잠시 쉬고 있을 뿐. : 그렇다고 보기엔 좀 동작이 ㅄ같죠?ㅋㅋ

A2. 그냥 기수 둘이 나가고 두 말끼리 관계를 맺게 해 준다 아닙니까? : ...이렇게요? ...뭔가 내달리긴 하는 듯.;

A3. 남들 못 보게 종이를 구겨버리고 그냥 지들끼리 알아서 달리겠거니 생각한다. : 정답~*

은 아니고,  우선 이렇게 종이를 자릅니다.

양 쪽의 말 두 마리 그림을 서로 등을 마주보게 옮겨놓습니다.

벌써 눈치빠르신 분들은 아셨겠지만, 말 두마리가 네 토막으로 나뉘어 뭔가 새로운 그림을 품고 있군요.
짠~* 이제 기수 그림만 그 위에 살포시 얹으면 끝입니다.

뜀박질한다기보다는 거의 '퍼어어얼쩌어억~' 날고 있다는 느낌으로 떠 있는 말 두마리네요.





"나는 나의 과거를 싫어하고 다른 누구의 과거도 싫어한다. 나는 체념, 인내, 직업적 영웅주의, 의무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을 혐오한다. 나는 또한 장식미술, 민속학, 광고, 발표하는 목소리, 공기 역학, 보이스카우트, 방충제 냄새, 순간의 사건, 술 취한 사람들도 싫어한다."

2월은 진중권의 마그리트 강연회, 그리고 시립미술관에 가서 마그리트를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확정.


이번달에 언어교육원에서 3월개강프로그램 홍보 포스터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두번이나 했었다. 엊그제에

친한 후배랑 같이 경영대서
301동까지 걸어다니며 200장 가까운 포스터를 붙였는데, 그만 내 실수로 포스터

종이에 그녀석 손을 베어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종이에 손을 많이 베어본지라, 베일 때의 화끈함과 살꺼풀이

쫘악 갈라진 그 선명한 비주얼함, 그리고 그 따꼼따꼼한 느낌같은 것들이 그대로 내게 재현되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문제는,
그리고 나서 학교 곳곳에 우리가 붙인 포스터를 보거나, 그러한 빳빳한 종이로 된

포스터 종류를 볼 때마다 내 손에서 그런 감각이 되살아난다는 것.

종이베임공포증..이랄까. paper-scar phobia.(이런 단어가 있으려나 몰겠다)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오늘은 어떤 종이를 보던 그 느낌이 생생히 살아난다.

순서도 :

종이를 본다 -> 종이가 칼날처럼 내 손을 가르는 걸 상상한다 -> 화끈한 느낌이 손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

살이 열린다 -> 빨간피가 스물스물 배어나온다 -> 찌릿찌릿하게 아픈 느낌이 이제야 전해진다 -> 호기심에

상처를 잡고 양쪽으로 벌려본다 -> (휴지로 피를 닦고 나면) 안쪽의 하얀 부위가 보이는데 뼈가 보이는 거라고

내맘대로 생각해버린다 -> 겁먹는다 ->약처바르고 일주일동안 밴드감고 다닌다, 너넨 뼈본적 있냐고 자랑한다

-> 이 상처로 인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가까운 이들이 안타까워하며 울부짖는 모습을 그리며 눈시울이

붉어진다..이상의 사고과정 도합 2초 어간.


흠..빨리 치유해야겠다. 이놈의 종이베임공포증. 일부러 종이 모서리에 슬슬슬 손가락을 비비대고 있다.

공포의 대상과 친숙해지는 것이 효과적일 거라는 나름의 처방.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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