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이란 곳은 항구에서 시작하는 도시의 한쪽 끝에서부터 다른 쪽 끄트머리까지, 내처 걸어도 한두시간이면 관통하고도 남는

 

그런 조그마한 소도시다. 지방을 다니다보면 서울이란 데가 얼마나 큰 도시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는데, 군산 역시 그렇다.

 

그런 군산에서 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 곳에, 항구 가까운 곳에 있는 작지 않은 공원이 있다. 공원보다 더 눈에 띄던 건,

 

해방후 피난민들의 판잣촌이었던 '해망동'의 고불고불한 골목길과 그 둥그스름한 실루엣들.

 

 

잔설이 남아있던 월명공원 앞의 주택들. 그리고 썰렁한 겨울 날씨만큼이나 썰렁하게 헐벗은 겨울나무들.

 

 

공원이라곤 하지만 야트막한 산을 따라 오르내리는 길을 그대로 품고 있어서, 살짝 트레킹 코스라는 느낌이 강하다.

 

공원이 품고 있는 능선 한쪽 비탈, 그러니까 바다가 내려보이는 쪽에는 말 그대로 바다가 바라보이는 동네, '해망동'의

 

골목길이 고스란히 남아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궤적을 기록하고 있다.

 

 

공원의 한 모퉁이에는 전망대도 세워져 있고, 군산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아저씨의 동상도 서 있고.

 

새초롬한 댓잎이 소담히 그러쥐고 있는 새하얀 눈뭉치는 꽤나 묵직해보인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난롯불을 쬐며 담배를 태우며 맥주를 마시며 고스톱을 하고 계신 공원 안 매점에는

 

겨우내 어르신들의 온기를 책임질 까만 연탄이 집게에 코를 꿰고는 얌전하게 자리잡았다.

 

 

매점 옆에선 어디서 터져나온 수돗물인지 아니면 약숫물인지, 쉼없이 흘러넘치는 물줄기가 만든 자잘한 고드름이 주렁주렁.

 

해망동의 전경. 파노라마 사진을 블로그에 올려봐야 자동으로 크기가 설정되고 마니 좀 그렇다.

 

 

이렇게, 나무 전봇대가 서 있고, 가장자리가 쥐에 파먹힌 듯 얼기설기한 슬레이트 지붕이 지친 듯 퍼져버린 풍경.

 

볕 한줌 쬐이기 쉽지 않을 좁다란 골목길에 찍힌 몇개 되지 않는 발자국, 여전히 눈밟는 소리가 뽀드득, 그런다.

 

 

어느 슬레이트 처마를 따라 쭉쭉 뻗어나간 고드름들. 가늘고 길게 뻗은 고드름, 수정고드름 발을 만들기에 딱이겠다.

 

 

한국전쟁 때 스러져간 영혼들을 위한 위령탑. 오래 묵은 나무 그림자를 따라 잔설이 고집스레 남았다.

 

 

그리고 군산의 조형탑. 커다란 등대 같기도 하고, 꺼지지 않는 횃불을 형상화한 거 같기도 하고.

 

 

조그마한 조각공원도 품고 있었는데, 그 입구 언저리에서 날개를 활짝 편 채 손님을 맞는 반짝반짝 갈매기 한마리.

 

 

군산에도 '구불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개발되었나 본데, 그렇게 따라 걷다가 저런 허름하지만 운치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숨도 고르고 귤도 까먹으며 하얀 입김 풍성하게 내뱉으면 좋겠다.

 

 

꾸역꾸역 이어지는 산들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 그렇게 다 걸어보려면 제법 시간도 오래 소요되겠기에

 

반절 정도만 돌아보는 걸로 만족했다. 꼭 다 돌아야 맛이 아니니, 쉬엄쉬엄 걸으며 얼음길에 이리 빼뚤 저리 빼뚤 했던 걸로

 

겨울철 산책의 묘미는 다 즐긴 걸로.

 

 

 

 

정의란 무엇인가 - 4점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김영사
 

돌려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 맘을 잡고 읽어본 정의란 무엇인가 나부랭.

 

베스트셀러니 어쩌구 하는 책들을 전혀 신뢰치 않기에 좀체 볼 마음이 동하지 않은 채 반년이 지난 셈이다.

 

마침 최근에 방한한 샌델이 스타 대접을 받으며 동시에 각종 찌라시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읽지 않은 채로

 

돌려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본심이다. 책을 읽기 전이나 읽고 나서나, 그런 양면의 거품은 불편하다.



간단한 소감. 이 책은 결국 '성찰'에 대한 책이다. 세사에 대해 신문 찌라시나 일상에 (잘난 척) 횡행하는 단언들과

 

자극적인 타이틀에 절어버린 입맛 앞에 대령하는 수십수백 페이지짜리 각주랄까. 세상사 간단하고 확실한 정답이나

 

규정은 없으며 난망한 이러저러한 면이 있다면서 각종 사례들을 사방으로 뒤채며 보여주고 있는, 그야말로 역시나 교과서다.

 

사고와 성찰이란 건 이런 베이스로 작동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학교 교양섭 기본 강의 수준.


 

예를 들어 최근 술마시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이른바 '주폭' 문제가 갑작스레 부각되고 있는데, 이를 보고 단순히

 

"술을 못 먹게 해야 돼"라거나 "술값을 올리면 돼"라는 처방을 제시하는 게 한국사회다. 심지어 '주폭' 문제를 진단한다는

 

TV 시사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이런 수준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는다. 샌델 식으로 말한다면 어떨까.

 

사회 전반을 짓누르는 높은 스트레스와 불만지수, 저소득층 성인의 유일한 즐길거리, 전반적인 놀이문화의 부재를 살피고,

 

조금 다른 면으로는 '주폭'을 방지하기 위해 술을 막아야 할지 범죄가 발생한 후 일벌백계해야 할지 등등 한없이 뻗어간다.

 

 

그런 수많은 결들이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 뒤에 숨어 있다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따지기 위해선

 

이쪽과 저쪽에 서서 가능한 모든 측면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건 사실 일종의 상식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영어 원제가

 

그러한 의미를 함축한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걸 생각하면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좀 '정의'라는 단어를

 

앞세웠다는 느낌이 있다. 그건 한국 사회가 그만큼 '정의'에 목말라있다는 걸 감지한 영리한 상술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사회의 또다른 상식은, '전봇대가 걸리적거리면 불도저를 동원해 깡그리 밀어버리'는 걸 추진력과 유능함으로

 

치부해 왔으니까. 내 판단으로는 성찰을 말하는 이 책 역시 베스트셀러로, 일종의 유행으로 소비해버리고는 저자에 대한 '팬질'을

 

시작해 버린 굉장한 나라다. ('팬질'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대상이 가진 입장과 의견에 대한 숙고 과정과 성찰이 생략되어 버린단

 

점에서 샌델의 메시지와 반하거나 최소한 무관하다.)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화려하고 선정적인 답을 찾을 게 아니라 답찾는 과정,

 

자못 지루하고 고루하며 담백한 그런 입맛을 길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책이, 우리 사회에 어떤 유익함과 성찰, 자기 반성을 남겼고 남기고 있을까. 2010년 '올해의 책'에 선정되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지 이미 수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정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은 채 '부자'가

 

되겠다는 야만과 몰상식이 횡행한다.(심지어 자장면 한 그릇 먹는데도 맛있게 먹고 부자되란 말이 복음처럼 전파된다.) 샌델에 대한

 

팬질은 물론이고 나꼼수니 노무현이니 김연아니, 보다 오랜 대상으로는 박정희니 박근혜니 등등 팬질은 거침없이 하이킥중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단숨에 밀어붙이고 싶은 열망은 곳곳에서 파열하며 총선과 야권연대를 말아먹었고, 사람들은 '140자'로 표상되는

 

 SNS 시대에 걸맞는 짧고 자극적인 이야기에 열중하는 와중에, 성찰을 말하는 책에 대고 '정의'가 뭔지 말해달라며 개미떼처럼

 

달려들고 말았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례없이 대히트를 치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나라의 이야기다. 암울한 세상이다.

 

 

 

 

 

 

 

 

일본 아오모리현 도와다 호수의 오리배는 이렇게 생겼다. 지금 다시 보니 네스호의 괴물이라거나 공룡이 떠오르는

 

외모이기도 하지만, 그때는 딱 보자마자 원피스의 고잉메리호가 떠오르더라는.

 

나름 원피스의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는, 고잉 메리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장면.

 

 

호숫가 나룻터에 묶인 채 둥싯거리는 오리배들. 최근에 다시 색칠을 한 건지 부리나 리본이 화사하다.

 

둥싯거리다간 서로의 부리를 입맞춤하며 느그적 휘어진 모가지로 하트를 그리기도 하고.


나룻터 끝에서 바라본 도와다 호수는 어찌나 넓던지, 오리배 페달을 밟는 발놀림이 비장해 보였다.


오리배들을 어루만져주는 두 할아버지, 한가로이 파라솔 아래 앉아 담소를 나누시던 모습.

 

호수를 따라 죽 이어지는 산책로, 울창한 숲과 산을 옆에 끼고 있는 데다가 시선을 어지럽히는 가게나 매점도 없다.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의 푸르스름한 렌즈가 똘망똘망하다.

 


도와다 신사로 가는 길, 다른 관광대국들도 그렇지만 일본도 맨홀뚜껑을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나무 전봇대가 아직도 서 있는 도와다 신사 경내의 산책로.

나무뿌리가 잔뜩 헤집어진 건지, 아니면 벼락을 맞은 건지 위풍당당한 모습에 이끼가 잔뜩 슬었다.

 

곰이 출몰하는 지역이니 주의하라는. 굉장히 무시무시한 표정과 포즈의 곰 앞에서 손도 떨었나보다.



도와다 신사 도착.

 



나무의 잔뿌리가 지면 위에까지 핏줄처럼 툭툭 튀어나온 모습이 땅 속을 궁금하게 만든다.

나무 계단은 하얗게 바랬을지언정 말끔한데 정작 아래 돌받침은 둘로 쪼개진 채 이끼가 잔뜩이다.


 


석등을 둘둘 휘감고 기어오르는 덩굴도, 석등 위에 꽂힌 깃털처럼 나부끼는 풀떼기도 고작 한계절이면 저리도

 

그악스럽게 자라날 텐데, 왠지 바라보는 사람은 거기서 이 신사의 고색창연함을 느끼는 거다.



일본 신사의 '약수터'는 물을 마시는 곳이 아니라 손을 씻어 몸을 정갈히 하는 곳.

 

 

도와다 호수의 명물이라는 소녀상. 소녀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를 만든 작가와 평생 해로했던

 

아내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했던가. 호수의 물안개를 잘도 버티고 서 있다.

 

 



도와다 호수 주변을 좀 거닐면서 담은 풍경들.



차를 타고 좀더 올라가 도와다 호수 전망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희뿌연 간유리 너머

 

풍경처럼 어슴푸레한 호수 너머 풍경과 온통 짙푸른 녹색이 가득한 풍경. 아오모리, 푸른숲靑森이구나.

 


전망대 위로 올라가는 샛길이 하나, 무성한 수풀 뒤로 숨어있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지

 

낙엽이니 풀들이 온통 점령해버린 땅바닥엔 발딛은 맨땅 한뼘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자연에 정복당해버린 숲길을 혼자 걷고 있자니 왠지 무섬증도 살짝.

 

어디선가 곰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살짝 머릿속으로 이미지트레이닝도 해보고.

 


계속 신경을 긁던 까마귀 한마리가 숨어서 울어제끼던 곳을 결국 찾아냈다. 사진 속의 그곳.


슬쩍 제2 전망대까지만 찍고 내려오는 길. 인적끊긴지 오래인 듯한 괴괴한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 하나하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며 불안하게 만들었는지라 내려오는 길은 카메라를 꼭 쥐고 거의 날 듯이 뛰었지만,

 

그래도 푸른 숲과 퍼런 호수의 풍경은 놓칠 수 없어 시선은 계속 도와다 호수에 붙박혀 있었다.

 

 

 

 

 

 

 

 


 


대체 '부산의 산토리니'는 어디를 말하는 걸까.


부산에 '그리스 산토리니'마을처럼 이쁜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켜켜이 오붓한 마을이 어딘가 있다는 이야기는

계속 들었었다. 다만 그 어딘가가 정말 어딘지에 대해서는 인터넷 상의 정보가 워낙 분분하고 혼란스럽다고 느꼈던 게,

'부산 산토리니'로 찾으면 '감천동 문화마을, 태극마을, 태극도마을, 영도 흰여울길, 영선동, 이송도 마을..' 등등 굉장히

다양한 지명들이 쏟아져 나온 탓이다. 직접 가보고서야, 그 혼란스러움은 어느정도 정리가 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부산 산토리니 = 감천동 문화마을, 태극(도) 마을, 감천2동, 감정초등학교 골목..전부 같은 곳을 말함.

부산의 또다른 산토리니 = 영도 영선동 이송도 마을(영도 절영 해안 산책로)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노닐다가 택시를 타고 '감정초등학교'를 가자고 했는데, 기사분이 잘 모르신다. 왜 그 부산의

산토리니가 있다는 곳 모르세요, 해도 모르신다 하고 자꾸 감천초등학교 아니냐고 되묻기만 하시기에, 손가락을

바싹 여며서 내비게이션에 찍어드렸다. 그리고 도착한 감정초등학교 앞. 이 벽화사진은 이미 숱한 블로그에서

잔뜩 본지라 꼭 많이 와본 곳 다시 방문한 느낌이었다. 여기서부터 감정 문화마을, 혹은 '부산 산토리니'의 골목길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출발하기 전 우선 옆에 있는 안내지도 하나 찍어두고 출발. 빨간 길을 따라가는 게 정석이라는데 뭐, 골목길이란 게

가다가 내키는대로 요리조리 비트는 맛에 다니는 거니까 위치 확인만 할 정도로 참고할 생각이다.

문화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건, 산비탈을 따라 쭉 올라세워진 달동네 마을이 낡고 허름해진 위에다가, 예술가들이

채색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조형물도 설치하며 마을 주민들과의 협업으로 일군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입구는

제법 여기저기에 유쾌한 조형물들이 심심찮게 보이고 있었다.

입구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얼굴 모양의 새, 인면조들.


감천동 문화마을, '부산의 산토리니' 안으로 들어서는 길은 기본적으로 저렇게 생긴 화살표를 따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파스텔톤의 색색가지 물감으로 칠해진 건물 외벽에 절대 놓칠리 없는 크고 작은 화살표들의 무리가 지긋이 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골목은 좁았지만 말끔했다. 페인트칠이 위부터 아래까지 꼼꼼하게 칠해져 있었고, 골목 양쪽에 마주본 벽면의

색감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데다가 여기저기서 쉽게 눈에 띄는 꽃나무들이 분위기를 한결 화사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야트막한 건물 위에서부터 슬몃 기어들어오는 분무기로 뿌린 듯한 햇살까지.

경사는 매우 가팔랐고, 이 곳에 사시는 할머니 몇분이 따뜻하게 덥혀진 시멘트 계단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앞서 걷고 있던 두 여학생들에게 뭐라뭐라 촬영하기 이쁜 데나 전망대를 알려주시는 분도

계셨고, 우리는 찍지 말라며 굳이 자리를 피하려 하시는 분도 계신듯 했으며, 여기 뭐 볼게 있다고 이리들 기어와

귀찮게 구냐고 한소리 하시는 분도 계셨다. 그렇지만 사진은 말이 없고, 찍고 나면 그뿐. 풍경속 할머니들의

등저리로 내려쏟는 부드러운 햇살이 노곤해 보인다.


낡고 녹슨 사다리가 단층 건물 옥상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인 듯 했다. 페인트칠이 잘 되어있는 벽면에 비해

벌써 많이 녹슬고 피곤한 모습이라 눈에 띄었다. 벽을 칠할 때 같이 칠했을 텐데, 생각보다 페인트가 오래 못

버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한번 칠해서 될 일이 아니다. 달동네의 고되고 신산한 풍경에 '산토리니'의

느낌을 부여하고 유지하기란 생각보다 많은 페인트통이 소요될 거다.


골목을 걷다 어느 탁 트인 시점에서 내려다본 풍경. 다닥다닥, 서로의 어깨를 내주고 모서리를 공굴리며 세워진 집들이라

집 모양이 네모반듯한게 아니라 삼각형, 마름모, 사다리꼴..유치원생들 도형 공부하기 딱 좋겠다. 그런 분방한 집들이 버틴

틈새로 차마 길이랄 것도 없는 골목들이 이리저리 꺽이는 게 또 매력적이다.

그리고 나름 배합에 신경을 쓴 듯 연두빛 분홍빛 파랑빛 페인트들이 골고루 쓰인 집들, 그 사이로 놓인 시멘트

계단을 자근자근 밟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그 빛깔따라 조금이라도 화사해졌다면 좋겠다.

감천 문화마을, 이 '부산 산토리니'를 표방한, 혹은 '마추픽추'를 표방한 동네의 또 하나 특징은 온통 전선이 하늘을

달리고 있다는 점. 고작해야 이삼층 짜리 야트막한 건물들이 가파른 비탈 위에서 미끌리고 있는 와중에 우뚝 솟은

갸냘픈 전봇대 위에서 사방팔방으로 뻗는 전깃줄이 한뭉치다.

어느 집 슬레이트 지붕에 살짝 몸을 얹은 채 내려다본 풍경. 완만하게 휘어진 산비탈을 따라 맞은편 등성이에 비슷한

높이에 있는 집들이 보인다. 파란색 물탱크는 하나씩 죄다 옥상 위에 올린 건물들.

저렇게 사람 하나 지나기도 힘든, 지나면서 가방이고 겉옷이고 다 거칠하기 그지없는 시멘트 맨벽에 긁고 지나는

골목길을 품고 있기도 했다. 감천동 문화마을.

전깃줄이 사방으로 뻗은 하늘 아래, 조그마한 공간이 남아 푸른 빛이 맴돌았다. 사람과 건물과 골목이 온통

서로에게 한곁을 내어주고 살고 있는 듯한 풍경이 정겹기도 하고, 살짝 서글프기도 하고. 혹은 운치랄 수도.

빨랫감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여기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고, 골목을 다니며 만나는 건 커다란 카메라를

이고 진 외부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소리없이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빨랫줄에

도달하기 위해 밟아야 하는 네칸짜리 사다리가 앙증맞다.

여행객들, 관람객들, 관광객들을 인도하는 화살표가 곳곳에서 발견되어 길을 잃거나 엄한 데로 빠지기도 쉽지 않겠다.

굳이 길을 비틀어 다른 곳으로 가도 금세 어디선가 안내를 발견하게 되어 내심 안심도 되고 했지만, 그런 친절한 화살표

아래에도 이 곳의 풍경은 묻어난다. 누군가 내어놓은 쓰레기들, 그리고 누군가 써둔 '재활용 분리바람'이란 문구.

워낙 경사가 가팔라서, 몇개 건물들만 슥슥 지나치면 금방 달동네의 바닥 아스팔트 차도로 내려올 수가 있을 거 같다.

굳이 같은 높이에서 좌우로 돌아보며 이것저것 찾아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야, 저런 화살표 무더기들을 보고서

얌전하게 내려온다면 생각보다 금방 끝나버릴 '부산 산토리니' 투어가 될 듯.

그 길위에는 이렇게 아직도 생생하게 보랏빛깔이 살아있는 벽도 있고. 색색이 재미있게 칠해진 공중화장실도 있다.

멀찍이 가파른 옹벽 위로 차곡차곡 놓인 화분들도 보이고. 그 위로 분홍빛 상아빛 페인트칠이 곱게 된 건물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다. 그러고 보면 저렇게 좁디좁은 옹벽 위에 화분을 하나씩 끌어다 놓았을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느 집 앞, 온통 유리테이프와 누렁테이프로 발린 우체통 위에는 북어 한 마리가 제물로 바쳐져 있었다. 가게나 집에

들어오는 입구에 저렇게 북어 한마리를 걸어두면 복이 들어온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면 언젠가 티비에서 생활풍수,

어쩌구 내용이 나온 이후로 어머니도 변기 뚜껑을 잊지 않고 꼭꼭 닫아두셨었다. 그런 마음 아닐까.

이렇게 국자를 재활용한 듯한 풍차도 지붕 위에 얹어놓고 있는 집이 있는가 하면.

차갑고 거친 시멘트 벽면 위에 스마일 표시가 하얗게 웃고 있는 집도 있었고.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인 것처럼 비탈길 한 면에 위태하게 솟은 다용도 공간. 지붕조차 없는 그 옆면으로 자유롭게

만들어져 달린 스텐레스 문짝과, 지붕 없이 그냥 흉내처럼 달려있는 문 아닌 문.

이렇게 부분부분 끊긴 채 담긴 사진으로는 감천동 문화마을, 혹은 태극마을, 태극도마을, 혹은 부산 산토리니라는

거창한 수식을 가진 이 마을의 풍경이 오롯이 담기지 않아서 아쉬울 뿐.

옹기종기 모여앉은 장독들, 위에 하나씩 얹힌 돌멩이, 시멘트덩어리, 벽돌 따위 모양과 형체는 다르지만 그런 다름조차

장독대 위에선 별달리 다툴 의미를 잃고 만다. 멀찍이 보이는, 이 골목들을 쏘다니며 사람보다 더 많이 발견했던 가스통.

곳곳에 잘 정비된 깔끔하고 귀여운 색감의 공중화장실이 있단 건 꽤나 인상적인 일이었다. 꼭 방문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가파르고 좁고 불편한 달동네에 사시는 분들에 아주 실용적인 도움이 될 거 같아서다.

그리고 발견한 공부방 하나. 왠지 모르겠지만 일본, 터키, 중국, 프랑스, 베트남, 대만..온갖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는 벽면,

그리고 각국의 언어로 쓰인 응원의 말들이 발길을 잡았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국기 아래 씌인 문구가 참 좋았는데.

"감천동, 난 너희들이 좋아. 그저 너희들과 함께 하고픈 마음 뿐이야." 미래에 대한 약속도, 현재에 대한 위로도 없이 그저

지금 이순간 함께 하고 싶다는 그 마음만으로 충만한 메시지. 그만큼 솔직하고 절절하게 느껴지는 거 같다.

아마 각국에서 봉사활동으로 왔던 교육 활동가들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그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꽤나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 보이는 '우리누리 공부방' 나무 현판 옆으로 보이는 에펠탑이니 뭐니 글로벌한 풍경을 보니 그런 거 같다. 이곳이 비단

부산 사람들, 혹은 한국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곳을 알고 챙기려는 사람이 있다는 훈훈함.

 

그렇지만 문이 닫힌 채 불이 꺼져있던 공부방, 아이들을 볼 수 없던 감천동 문화마을 어딘가의 골목에서 내려다본 풍경에

옥상에서 열심히 줄넘기를 하는 소녀가 잡혔다. 아이들은 전부 옥상에서 날아갈듯 맹렬하게 줄넘기를 하고 있는 걸까.


누가 여기를 '부산의 산토리니'라고 이름붙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편하고 럭셔리한 이름이 이 곳에 맞는 옷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산토리니를 연상케하는 파스텔톤의 껍데기는 말고, 좀더 골목을 헤집으며 살폈던 속살 사진들은 다음 포스팅에...


부산 감천 문화마을의 속살, '산토리니'란 별칭은 내려놓는 게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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