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모리현이 품고 있는 세계 최대의 너도밤나무 원생림, 시라카미 산지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로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일반에 개방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추정수령이
 
400년에 이른다는 아름드리 너도밤나무 'Mother Tree'의 압도적인 커다란 줄기가 사방으로 뻗친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그 방대한 면적과 귀중한 자연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에서도 가장 처음으로

세계유산 등록이 되었다고.

 

시라카미 산지에서 일반에 개방된 부분은 정말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어마어마한 숲이 뿜어내는

좋은 공기와 피톤치드 덕분일까, 근처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도 좋아지고 공기맛도 다른

거 같다. 우선 비지터 센터에 들어가서 시라카미 산지의 식생에 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 다른 것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3살짜리 너도밤나무의 키가 고작 저만큼이란 사실. 3년이나 묵었는데 수첩만도 못하다니.

20살쯤 되어야 이제 사람이랑 눈높이를 맞출만한 크기로 자라난다고 한다. 다른 동물들은 어렸을 때 쑤욱

자라나서는 그대로 쭉 멈춰있기 마련인데, 너도밤나무같은 저런 나무들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그렇지만

꾸준히 자라나서 수첩만한 높이에서 어른 사람만한 높이로, 그리고 몇층짜리 건물만한 높이로 자라난다는 게

실감이 나는 전시였다. 그리고 대형 스크린으로 이 곳에 사는 식물과 동물들을 만나볼 수 있기도 했고.

그리고 드디어 시라카미 산지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월령공주'를 만들 때 자주 찾아와 장면을 참고하는 등

일본의 여러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배경이자 영감을 준 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벌써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산세라거나 숲의 울창한 정도가 차원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비지터 센터에서 받아온 한글 버전 지도 겸 안내팜플렛. 좀 어색한 번역투가 거슬리긴 했는데, 특히나

4번, '화장실은 적절히!'라는 항목이 특히 웃겼다. 트레킹 코스 중에 화장실이 별도로 없으니 미리 해결하고

입산하라는 이야기일 텐데, '할수 없을 경우에는 구멍을 파서 묻어 달라'는 아주 세심한 지침까지.

정말, 하야오의 월령공주에서 나왓던 커다란 늑대들이 사방에서 불쑥 튀어나올 거 같은 울창한 숲길이었다.

초록색 식물들이 지천으로 온통 삼엄하게 점령한 가운데 잔뜩 쪼그라들어버린 흙길을 한 줄로 서서 조심조심

걸어가는 트레킹 코스. 길은 꼭 필요한 최소한의 손길만으로 정비되어 있다는 게 느껴질 만큼, 이 곳은

사람보다 자연을 우선하여 관리되고 있었다.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한 공간.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숲들이 조금 몸을 웅크려 내어준 길을 따라 걸었다.

자극적인 볼거리나 흥밋거리는 없지만 수천년이나 묵었다는 원시림의 생명력이랄까 신비스러운 아우라를

체감하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거대한 산이나 바다 앞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낀 적은 있었지만

숲을 걸으며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들 줄이야.

숲길을 따라 걸으면서 눈길 닿는 대로, 그리고 숲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싶은 장면들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숲의 생태계에 대해서 중간에 드문드문 설명이 적혀 있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온다면 나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이 곳에서 제대로 생태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아쉽게도 일본은 대개

외국인에 대한 설명에 인색하더라는. 저런 거 최소한 영어로라도 병기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다.

울룩불룩 실핏줄처럼 툭툭 튀어나온 나무의 잔뿌리들이 대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다 마르고 시들어 쓰러진 나무는 또다시 다른 나무들이나 식물을 위한 양분이 되고.

그리고 우뚝 우뚝 솟아있는 싱싱한 나무들은 또다른 식물들이 의지하고 살아갈 기둥이 되어 주고.


더러는 비비 틀어진 채 사방으로 꼬이는 사랑의 작대기마냥 나무들 사이를 종횡하는 덩굴식물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도 한 거다.

그리고 시냇물. 보기만 해도 굉장히 맑고 투명해보이는 물은, 손으로 살짝 움켜보니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잠시 손을 담궈 몇 번 비비기만 했는데도 온몸에 땀이 쏙 들어가버리는 느낌.

그렇게 온통 초록빛 일색이었지만 전혀 지루하지도, 심심하지도 않더라는. 그렇게 가파르거나 힘든 길이

아니어서 그랬기도 하겠지만, 그냥 이 길이 한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너무도 좋았던 길.

그리고 너무도 좋았던 시라카미 원시림.


그렇지만 일반에 개방된 코스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는 구간이었다. 어느새 길은

살짝 내리막으로 바뀌어 되돌아나오는 중이었다.

이런 곳에 나무에 저렇게 칼로 낙서를 남기다니, 그나마 한글이 안 보이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려나.

일본인들은 예의를 중시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게 국민성이라고들 하지만, 그것도 요즘 젊은 세대들이나

그 아랫세대에는 별로 해당되지는 않는 이야기인 듯 하다. 한국에서도, 젊거나 어린 일본인 관광객들은

버스 안이던 전철 안에서도 주위를 개의치 않고 큰소리로 떠드는 경우를 종종 봤었다.

한바퀴 돌아서 나온 길, 들어갈 때는 딱히 시선을 두지 않았던 약수터가 엄청 반가웠다. 다른 사람들도

한모금씩 물을 들이키고는 그 차가움에 놀라고, 그리 힘들지 않았던 한시간여의 트레킹이 가져다 준

기분좋은 피로감마저 싹 지워버리는 듯 하다고 한마디씩.

다리를 건너 차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 워낙 깊은 산중, 깊은 숲속인지라 딱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트레킹 코스고 일반 차도인지 구분하기도 애매할 정도다. 이렇게 울창한 숲이 풍겨내는 독특하고도

생생한 그 분위기에 매료되어서 일본의 애니메이터나 영화 감독들이 이곳을 즐겨 배경으로 활용하는 게 아닐까.


주차장 옆에는 왠 뜬금없는 놀이터가, 그렇지만 제법 그럴 듯한 스케일로 미끄럼틀도 몇 개씩 갖추고 있었다.

이정도면 거의 놀이터계의 '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럴 듯 해서, 그대로 지나치긴 아쉬워

굳이 위로 꾸역꾸역 올라가선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줬다. 밑에서 보기보단 중간중간 속도를 줄여주는

구간들이 작용해서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내려오진 않았지만 엉덩이는 후끈해졌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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