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3. 

 

대한항공이 진행했던 여행사진 공모전, '5대양 6대주 여행이야기' 사진책을 제작하는데 무려 열일곱 점에 이르는

 

사진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113명의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괜한 치기에 한번 쭉 찾아보니 아무래도 제일 많은

 

분량의 사진이 올라간 거 같다.

 

 

아쉬운 점은 대한항공에서 이벤트나 선물로 활용하려는 취지에서 만든 사진책이라 비매품이라는 것. 서점에 가도

 

이 책을 찾아볼 수는 없다고 하니 그게 좀 아쉬울 따름이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그간 찍었던 사진중에서 맘에 드는

 

것들을 이렇게 출판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으로도 대만족.

 

 

 

 

 

 

 

읽고 나면 그 소설의 한 장면이 유난히 남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읽고 나서 소설에서 쓰인 소재나

묘사의 대상이 된 행동이나 장면을 재연하고 싶어지는 작품이 있다. 예컨대 체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을 읽고 나서 나도 어디 한번 다시 체스에 재미붙여 볼까, 하는 식인 거다.


스토리는 그렇다. 아무런 영특함을 갖추지 못한 시골뜨기가 유독 체스에는 재능을 보여 급기야

세계 챔피언이 되었는데, 그런 그가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대양 위의 한 유람선에서-맞닥뜨린

상대는 나치 치하에서 수개월간 독방 고문을 겪으며 체스를 독학했던 지식인인 거다. 활자 중독에

빠져 있다 해도 좋을 지식인이 수개월간 아무것도 못 읽고 고작 체스 교본 한 권만을 갖고 있었으니

그는 그 한 권을 달달 외우고 머릿속에 체스판을 구현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경지.

그들의 경기는 역시나 일반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서 펼쳐지지만, 끝내 무너지는 건 

실제 체스판과 말이 없으면 수를 생각하지도 못하는 혐오스런 챔피언이 아니라 지식인이란 반전까지.


결이 굉장히 많은 건 사실이다. 체스 게임을 둘러싸고 등장인물 간에 벌이는 심리적 갈등과

등장 인물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머리싸움이 긴박하게 묘사되는 것은 기본이고, '무지하고

교활한 챔피언 vs 생각많고 교양있는 지식인'이란 구도는 나치와 유럽 지식인이라는 역사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상징하는 듯 보인다. '독방 고문 vs 체스'에서 인류의 무지와 지적 탐구의 대립 구도도

선연하고, 느닷없이 치닫는 결말의 파국이 보이는 냉소와 배신감은 이차 세계대전 말기를 못 견디고

자살한 작가 자신의 비극적인 생의 결말과 맞물려 더욱 극대화되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런 결들을

하나하나 포개보면 초점이 은근슬쩍 하나로 맞춰진다. 8*8의 체스판에 구현된 인간의 정신.


여느 소설과 같이 작품 속에 등장인물이 존재하고 등장인물간의 사건과 그들 사이의 대화도

존재하지만, 이 작품 '체스 이야기'의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체스'라는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인간의 사고 흐름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것처럼 보인다. 나치 치하에서 인간이 겪었던

극한의 고문이나 반이성적인 처사들 모두 그렇게 체스에 몰입해 있는 상황을 설득력있게 제시하기

위한 조건인 것 같다. 체스 이외의 다른 점에서는 모조리 무지하고 천박한, 그 속내를 작가가 굳이

드러내지 않는 챔피언 역시 그렇게 체스에 불붙은 인간을 보여주기 위한 불쏘시개 같달까. 심지어

그 지식인에 대한 상세한 묘사조차 그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체스' 플레이어로서 그를 이해하고

설득력있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함은 아닐지.


체스의 공간 속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사고하고 승리를 기획할 뿐인 순수한 인간 이성이 어떻게

작용하고 반응하는지, 그 과정과 깊이를 하나하나 관찰하고 기록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밖의 것들이 전부 곁가지라거나 부수적인 해석은 아니겠지만, 정말이지 그의 작품에서 읽혀지는

체스 플레이어의 심리와 체스 게임 자체의 묘사는 집요하고 섬세하다. 당장이라도 체스판을 펼치고

말을 들먹이고 싶도록. 그렇게 체스판 위를 놀며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과정을 조금 멀찍이

떨어져 주시하고 뜯어보고 싶도록. 그리고 가장 놀랍고도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게 '체스' 판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사고와 반응이 다른 인간세계의 일들, 나치의 비인간성, 전쟁의 광기, 무지와 독선의

잔인함..같은 것들마저 모두 포괄하고 마는 거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체스라는 게임이 원래 그런 거 같다.

"(체스는) 절대적으로 우연의 독재에서 벗어나 있고 그 승리의 영광은 오로지 정신에, 아니 어떤 특정한 형태의 정신적 재능에 있었다...체스는 태곳적인 것이면서도 영원히 새로운 것이요, 그 구도가 메커니즘적이면서도 판타지를 통해서만 작동하며, 기하학적으로 일정 공간에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그 조합에서는 무제한적이고...그 존재 자체가 어떤 책이나 작품보다 영속적이며,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에 속하는 유일한 게임이면서도, 지루함을 죽이고 감각들을 예리하게 하며 영혼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신이 이 땅에 가져온 게임"

이렇게까지 격찬을 받는 게임, 그리고 그 게임플레이어의 내밀한 속내를 샅샅이 핥아서 보여주는

소설의 흡인력있는 묘사가 더해졌으니 당장 체스판을 꺼낸다고 해도 이상할 거 하나 없겠다.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반양장) - 10점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문학동네
가면의 고백 - 10점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잔뜩 힘이 들어가기 쉽다.

자신의 지난 사랑, 심지어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토록 진실되고 아름답고 뜨거웠던 사랑은

두 번 다시 못 올 거라는 듯이,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또 자신에 대한 상대의 마음이 단색으로 칠해진다.


사실은 아니다. 금송아지라도 껴안고 있었던 듯한 지난 삶은 사실 적지않이 누덕누덕한 채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모인 것에 불과했으며, 지난 사랑 역시 어거지로 강변했던 단심(丹心)의 모노톤이 아닌

선명하고 흐릿한 스펙트럼 내에서 빨주노초파남보 쉼없이 급변하며-그렇지만 역시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냉온탕을 거쳤던 거다.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렇게 어렵다. 나의 삶, 나의 사랑 이야기란.


미시마 유키오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가면의 고백'이란 아이러니한 제목으로, 자신의 삶과 첫사랑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자신의 탄생부터 유년시절, 청년시절에 이르는 성장기를 자세히 묘사하며 동시에 자신의

성 관념이 어떻게 변전해 나가는지, 동성애적 성향이 어떻게 발현되고 자신을 괴롭혀 왔는지 고백한다.


그의 첫사랑은 아마도 동성과 이성, 양자를 나누어 따져야 할 듯 하다. 동성애적 성향을 발견시켜주고 이후

하나의 전범이 되었던 동성의 첫사랑,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싸우며 키워나가다 무참히 깨뜨리고 말았던

이성의 첫사랑. 그러니 어쩌면 '첫사랑'이라는 무디고 닳아빠진 단어에는 잡히지 않는 게 그의 복잡다단하고

종잡기도 어려운 첫사랑 이야기, 혹은 첫사랑을 경과하는 그의 심리관찰 이야기다.


아니, 비단 '첫사랑'이란 단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불연속적이고 중첩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총보를 악장별로, 파트별로 구별해 채보하는 작업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덩어리진 채 자신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어렴풋이 느끼기만 할 뿐인 그런 불안감, 초조감, 만족감, 기대감...그런 것들의 카오스적인

혼합물에 제각기 이름을 붙여내고 인과관계의 레시피를 구성해 내는 것. 비록 어느순간 자신이 실제와는 한참

동떨어진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지라도.
 

실제 삶이란 건 정신병자의 읊조림같은 분절적인 자동기술법에 지나지 않거나,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미친년 널뛰듯 하는 조증과 울증의 연속과 오히려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너무 위태롭고 위험하다. 사건과

감정의 선후, 인과관계에 대한 명료하고 선명한 정리가 필요한 거다. 자신의 불안정하고 규정불가능한 감정선에
 
규칙적이고 모범적인 법칙을 부여하고 특정한 이름을 붙여내어 가닥가닥 구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불안스럽도록

구체적인 카오스 덩어리는 그저 하나의 식별가능하고 이해가능한, 그리고 무독무해한 추상으로 변해버린다.



그의 고백은 그런 '가면'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너무도 잘 의식하고 있어서, 차라리 그 '가면'과의 대결이라

하는 게 낫겠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가능한 가감없이 철저하게 되새기고 손실없이 전달하고자 한문장 한문장

심혈을 기울여 뽑아낸다. 너무도 무디고 둔탁한 언어와 어휘를 가지고 종횡무진 사방으로 뛰노는 감정선들을

추스려 표현하기란, 거의 잠자리채로 바람을 잡아보겠다고 나대는 꼴과 같을지 모른다. 비록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한 '가면'을 벗을 수야 없겠지만, 잠자리채로 바람을 낚을 수야 없겠지만, 그는 정말 낚아챌 기세다.


그의 삶의 행적과 사고과정을 오늘의 시각에서 아귀가 딱딱 맞도록 시간과 인과에 맞추어 재구성하고 몇가지
 
대표적 감정으로 칠하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하려는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 행동하는 그 순간, 심지어

그 이후의 순간까지도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고 중첩되는 수만가지 온갖 단상들이 머릿속에 가득차 윙윙대고

있었음을 힘들여 기억해내고 있다. 거기에는 삶과 사랑을 미화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 단지 자신의 내면에

철저하게 솔직하고자 한다. 그게 그의 '고백'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삶이 마치 모네의 '수련' 작품과 같음을 보이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는 그 형체란 게 사실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물감 범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굳이 그가 왜 단순하여 아름다울 '사랑'과 '삶'의 궤적을 그토록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아 온갖 진창과 같은 감정과 진실들을 떠올리고 말았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의 삶과

지난 사랑을 스스로 납득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일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아기곰 푸우가 변태랍니다. 아랫도리가 휑한 이녀석 주전자도 변태인가 봅니다. 상후하박, 하체부실, 그런

단어들을 머릿 속에서 퍼올리게 만드는 주전자로군요.


주전자군은 누가 볼세라 소변기에 바싹 붙어 볼일을 봐야 할 겁니다. 그의 위풍당당한 '부리'는 마치 헛한데다

헛힘쓴 결과로 울퉁불퉁해진 초콜렛 복근을 연상케 하네요.

찻잔은 순진한 척 발갛게 물들고 말았습니다. 겉껍데기처럼 속껍데기까지 꽃무늬가 화려한 찻잔에겐, 거의

자연상태나 다름없이 헐벗은 차주전자의 자태가 부끄러웠던 거겠죠.


혹은 흥분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주전자와 찻잔은 어쨌거나 한 쌍인 데다가, 게다가 음양의 조화를 따지건대 

성별은 명확하여 주전자군, 찻잔양이 맞지 않으려나요. 뭐, 찻잔이 무슨 생각을 했던 찻잔 속 태풍이지만요.

방심하고 있던 차주전자는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버린 찻잔을 뒤쫓습니다. 아랫도리에 찬바람이 쎄하니

들어와 바싹 말려올리는 지금은, 같잖은 봄 3월말.


그러고 보면 그들의 무늬는 어디선가 부자연스럽게 끊겨 있었습니다. 뚝 분질러 나눠가졌다던 정인의 증표처럼

왠지 그들의 꽃무늬는 서로에게 힌트가 되어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주전자의 selling point랄까요.

이윽히, 자웅동체가 되어버렸습니다. 달팽이처럼 뽈뽈뽈, 찻잔과 주전자는 찻잔받침 위를 조용히 기어가지만

성마르게 다그치는 눈길 아래선 그저 멈춰선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렇게 만개한 꽃 한송이가 풍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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