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서로의 곁을 얼마만큼 내주고,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낼 수 있는 걸까. '사랑'이란 말이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순간이란, 얼마나 짧고도 덧없는 것일까.


영화에서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는 이 조형물..연인들은, 아늑한 공간을 확보한 저 높이만큼 계단을

올라가서 편안하고도 행복한 포즈를 취한다. 시간이 다소 흐르면, 남자는 당연한 듯 여자에게 반말을 하고,

여자와 남자는 어딘가의 찻집에서 말다툼도 한다. 위로 오를수록 가팔라지고 위태로와지는 계단.
 
오를수록 폭이 좁아지며 제 한몸 운신하기도 벅찬 계단은, 게다가 받침대마저 없다. 그 계단은 어디로도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여자는 흔들리는 계단 어딘가쯤에서 리셋을 원했고, 성형을 해서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해보지만..결국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나락.


'관계'에 '시간'이 더해지면 예외없는 나락이다. 껍데기를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몇가지 취향과 특징을

좇아 사람을 공들여 찾는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다. 결국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어야 나와 당신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김기덕의 답, 혹은 내가 읽은 김기덕의 답은..항상 그렇듯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변하는 것이다.

시간의 표백력은 그토록 강력한 것이고, 저 계단을 함께 설레며 올랐던 '관계'들은 어느순간 다 깨어져나간다.

행복했던 기억은 사진으로만 남을 뿐, 그 사진마저 바꿔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이래도 세상을 살아볼테냐, 이래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보겠단 거냐, 라고 그는 몰아세우는 거다. 사람이란

이토록 불완전하고 아름답지 못한 존재다라고.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초인(ubermensch)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사정없이 몰아부친 김기덕의 공격을 모두

긍정해 낼 수 있다면, 한자 남짓한 '재겨딛을' 공간조차 보이지 않는 그 코너에서 웃을 수 있다면. 하지만 영화는

수미상관, 다시 변주된다. A에서 A'로.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삶을 이어나가려면

적당한 타협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고. 내가 생각해낸 타협점은 이거다. "Art Of Love." 우리가 함께 딛고 오르기

시작한 이 계단이 우리를 아무데로도 데려다주지 못하는 건 변함이 없다 하더라도, 그 계단 한칸, 한칸을 지그시

즈려밟으며 가능한 오래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파국의 지연..이랄 수도. 통속적이게도, 오래 관계를 유지하려면

역시나 서로의 노력이 절실하단 거다.



더하기. 혈연(이른바 귀속지위 등)으로 묶인 관계를 제한다면,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엮어내는 관계란 얼마나

귀한 걸까..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랑한다는 거. 영화 도중, 살짝 쌩뚱맞아보이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많이 사랑하시나봐요"란 대사에서, 그래서 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어쩌면 연애지상주의자인가..라고 생각을 해보기도.ㅋ


더하기2. 김기덕..내가 이 감독에 환장하는 이유는, 그의 감성과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는 '계급, 계층, 젠더'같은

틀에 얽혀있지 않으며, '긍지높은 인간'이길 포기하되 관계와 소통의 가능성을 물고 늘어지도록 끝까지

몰아세운다. 어줍잖은 위로도, 환타지도 없는 그의 '보여주는(showing)' 영화 그자체는 항상 내게 모종의

좌절감을 맛보여주고, 나는 그 좌절감을 아껴 핥으며 바닥을 단단하게 감촉하는 것이다.
 
다소 드라마가 강화되고 대사의 비중이 늘어났으며, 하드보일드한 장면들이 많이 거세된 '시간' 역시, 그의

실험정신과 좌절스런 주제의식은 그대로여서..언제나 그렇듯 실망하지 않았다. 13th.



(2006.8.27)
#. 자동차의 앞모습을 보고 저녀석 웃고 있구나, 인상쓰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밍숭밍숭한

헤드라이트를 가진 프라이드는 왠지 멍청해 보였고, 캐피탈 정도는 왠지 지적이란 느낌을 주는 얼굴을 갖고

있었고. 마티즈 정도는 내게..상당히 세련되면서도 은근 얍쌉하다는 느낌을 주었고. 뉴그랜저 정도는 적당히

무게 있는 표정과 적당히 올라간 눈꼬리를 갖고 있고.


유지태의 코란도는 그런 거였다. 이영애와 잠시 분위기가 틀어져 분위기가 싸해지면 디젤엔진 특유의 덜덜거리는
 
소음이 그 공간을 더욱 야박하게 했고, 새로 뽑은 이영애의 마티즈와 엇갈려 한눈에 잡힐 때에는 더욱더 그

무지근한 덩치와 투박함이 두드러져 보이는. 봄날은간다, 이영화에서 자동차는 그 인물들의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하나의 적나라한 힌트였다.


이영애가 끌린 다른 남자, 그의 뉴그랜저는 그녀가 그에게 첨으로 관심보였던 선그라스만큼이나 짙은 검은색의

반들반들한 보디를 갖고 있었고, 유지태의 각진 코란도는 제대로 광이라곤 났던 적이 없는 거 같다.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내겐 '사랑은 역시 변하는구나', 정도로 들렸다. 관계가 힘들어지거나, 유지태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시계나, 하다못해 달력이라도 나왔다. 조막만한 공간이었고, 그만큼

시계가 세상에 널려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와 그가 충일감을 느끼던 그런 시간들에는 한번도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가 첨으로 화를 내던 시간 아침 10시반, 그후 혼자 남자가 꾸역꾸역 밥먹는 시간 11시, 남자의 할머니를 찾은

시간 밤 10시..그런 식으로, 계속 화면의 한구석에서 집요하게 시간이 흐르고, 안쓰러운 감정의 흐름과 관계의

변천을 의식시킨다. 결국 그런 아연스러운 시간의 흐름...그 극단의 형태는 마지막...남자와 여자가 서로 등을

돌리기까지..화면의 모서리로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몇번씩 서로 눈길이 엇갈리며 하염없이 부질없는 희망을

갖게 만드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거 같다.
 

그간의 관계를 집약해서 보여주듯 때론 같이, 때론 홀로..상대를 되돌아보고, 무언가를 기다리듯 애절하게 잠시

멈춰서 마주보지만..시간이 멈춰진다면 잠시나마 기대앉아 울어보기라도 하겠지만...


시간은 흐르고 봄날은 가고.


마티즈의 세련된 이미지를 가진 그녀였지만, 악수를 핑계로 먼저 등을 보여주는데 성공했지만, 역시 사랑을

세련되게 혹은 잘 정돈된 모습으로 한단 건 불가능하다. 가슴이 터질듯한 안타까움..대체 세상은 왜 이따위인

거냐고 고래고래 내지를법한.


#. 그래도 남자에겐 기댈 곳이 없다. 이미 훌쩍 커버린 그에게는 고작 친구녀석과의 짧막한 대화나, 할머니가 주는

사탕 정도가 남아있을 뿐...떠나간 사람을 내처 못잊는 할머니에게, 자신에게 화를 내고, 고함치고,

울어버리지만...허물어질듯, 무너져내릴듯 하면서도 자그마한 할머니의 어깨는 너무도 야위고 약하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서 둘은 세상 한가운데서 오직 서로의 품에서만 기댈 곳을 찾았던 거였고.

그런데 더이상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거둬내고 씻어주지 못한다. 외로움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영혼에 스며있는 것. 둘이 되어 그 외로움이 더욱 커질 때, 빈틈이 늘어나고 균열이 깊어질 때 봄날이

가버렸다. 최악보다 차악,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남자는 다시금 시간의 흐름이 숨겨진 곳에서 바람을 느끼며 헤어진 후 처음으로 웃음을 띄우지만...글쎄,

그 뒤에는 아마도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정도...를 붙여서 생각해야 하지않을까.


봄날은 가버렸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봄날이 오겠지만, 시간을 비끄러매고 태양을 묶어둘 재간이 없는 이상..

다시 봄날은 가고. 언젠가 분홍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분홍빛 양산을 드리운채로 햇살 가득한 봄날의

끝물쯤에서 세상을 등질지 모른다.


(2005.4.25)

카센터 김씨와 처음 만났을 때, 밀양의 한자 의미를 아냐는 생뚱한 질문을 던져 대화의 허리를 댕겅 잘라버렸던

그녀. 그 질문은, 어지럽게 자란 둑방 풀섶에 앉아 뜬금없이 '좋다~'라는 말을 내뱉었던 만큼이나 맥락이 없었다.

그래도 횡뎅그레하게 던져진 이 말에는 되바라진 아들녀석이 "뭐가 좋아?"라고 받아치기라도 했었다. 도시인인

자신이 촌에 '내려왔다'는 현실에 더해 그럴듯한 비장미와 낭만이 서려있음을 만끽하는 그녀.


그녀는 허영쟁이다. 그녀는, 밀양에 내려온 자신이 무언가 특별해 보이기를 원했고, "죽은 남편을 못잊어 남편의

고향에 내려와 살기까지 하는 여자", "서울에서 내려온 돈많은 여자", 혹은 (김씨의 장단에 맞추어) "국제 콩쿨서
 
우승도 한 피아니스트"같은 아우라를 덮어쓰고 싶어했다.


이런 자잘한 허영심은 그녀의 아이를 데려간다. 이제 "남편에 이어 자식까지 잡아먹고 만" 신애에겐 남은 게 없다.

신을 믿노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감염되어, 그녀는 신의 허울을 빌린 거대한 허영심으로 살아남고자 한다.

신, 신을 아는 자, 신을 모르는 가엾고 불쌍한 자의 위계 속에서 그녀는 다시금 굽어볼 발판을 마련했다. 급기야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빗발치는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러 나선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자에 대해 갈갈이 찢어죽이겠다는 증오 대신 주님의 사랑을 전파하러. 메조키스트나 할 법한 묘한 방식의 승리

선언을 위해.


그녀가 '사랑과 용서'로 굽어보려 했던 그는 이미 같은 무기, '신의 사랑과 용서'를 장착하고 있었다. 좌절한

그녀의 허영심. 십자가 아래 그를 무릎꿇리고 가련한 존재로 격하하려던 사디스트적 욕망이 픽 소리를 내며 꺼져

버렸다.


그렇다, 신애는 깨닫는다. 처음 교회에 나가 온몸으로 울던 것은 신의 가피 따위에 위로받은 것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로운 그녀는 예기치 못한 지렁이 한마리에도 와락 허물어지지 않았던가.

신 = 지렁이. BGM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전두환이 이노래듣고 불같이 화내며 방송금지시킬만 하다고

처음으로 공감했다.ㅋ)


그녀는 경건한(?) 야외 집회를 망치고, 집사의 성욕을 불지르고, 끝내는 한결같은 김씨의 감정마저 농락하면서,

신에게 복수하려 한다. 그녀의 복수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결정적으로 상처받고 만 그녀의 허영심? 끊임없이

주기만 하는 연애같은 종교에 대한 실망? 허영심에 젖어있던 그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스스로의 의지로

2등칸에서 '불쌍하고 가련한' 3등칸으로 물러난 그녀는, 신에 대한 복수의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 손목을 긋고서야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이었다. 살려주세요. 나 지금 아파요. 사람 살려요..


왜 하필 그시간에 그곳에 있었냐던 미용실을 뛰쳐나온 그녀는, 장독 위에 거울을 걸쳐놓고 혼자 힘으로 머리를

깎으려 한다. 목을 이리저리 빼고, 팔은 불편하게 굽힌 채다. 김씨의 등장, 그리고 적당한 높이에 든든히 세워진

거울. 햇빛 한 조각에 신이 숨어있던 말던, 그녀는 인간스러운 그로부터 베풀어진 그 정도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위계에 기댄 자기파괴적인 허영심이 무독하고 고상한 자존심으로 순화되는 순간. 그것은 또한, 살려달라던

그녀의 호소가 답을 얻은 순간.


김씨는, 여러모로 놀라운 인물이다. 교도소에 굳이 찾아가겠다는 신애에게 사람들이 '화이팅' 어쩌구 외칠 때

코웃음을 던지고, 계속 교회에 다니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안나가면 섭섭하고 나가면 맘편해서, 습관이

되어서 계속 다닌다고. 아편의 사용법에 대한 그 나름의 갈파가 아니었을까.

낯설게 만드는 CG효과라거나, 구름갖고 장난치거나 뜬금없이 환타지틱한 화면이 중간중간 끼어들어간 것.

그리고, 마냥 냉막한 듯이 보이던 금자씨가 아파트 계단에서 화들짝 놀라는 장면, 끝내 자기가 살포시 엎어주었던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고 딸에게 돌아가는 장면..복수가 진행되어 정점에 달한 상황에서도 최민식은

야릇하게 끙끙거리는가 하면, 금자씨와 딸 사이의 대화는 정말 실감나게 '더빙'이 되고.

영화가 뱉어내는 스토리에 그저 함몰되려 했다면 순간순간 무기력해짐을 느끼게 되고 만다.


복수 삼부작 시리즈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생각하더라도, 금자씨 이 영화는 글쎄..복수에 어울릴법하지 않은..

다시 말해 온몸으로 '복수'에만 몰입할 수는 없는 인간들의 불철저한 감정과, 복수를 위한 불성실한 자세..그런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아무리 이를 갈고 13년 반동안 계획을 세워나왔대도, 복수란 순식간에 해치워지는 작업도 아닐

뿐더러, 인간의 감정이란 순식간에 평온모드-복수모드-평온모드로 구획지어 구분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금자씨는 착해보이지 않으려 하고 감정을 죽인 듯 목소리를 깔고 눈빛을 예리하게 떠보지만..목사의 예기치 못한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억지로 쓰고 있던 가면을 순간 노출시키고 만다.


딸을 찾으러 간 호주에서도 마찬가지, 금자씨의 행동은 장중하고 피비린내나는 복수의 우울함과 비장함을

계속해서 가볍게 만들고 점점 금자씨 스스로 복수에 대해 몰입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그래서

결국 아주 크리에이티브한 그런...복수 전략의 생중계..그리고 집단적 복수의 이벤트까지도 끌어내며 최민식에

대한 복수심의 총량을 키워내려 한거고. 그치만 무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순수한 '복수심'에 기대어 자신의

나약해져가는 복수심을 다시 불붙이려 했던 금자씨의 기도는...그들의 혼란스럽고도 현실적인, 그리고

속물적이랄 수도 있는 감정의 비빔속에서 허망해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조커처럼, 입을 쫙째고

웃는듯 우는듯..그렇게 총을 버린다. 13년여의 수감생활을 통해 얻어냈던 그 총을 버리는 순간 복수는 끝나지만.


역시, 그녀가 유괴했던 그 아이는 금자씨에게 웃어주지 않는다. 그나마 함께 백선생을 처단했던 가족들은

뜬금없이라도 '천사가 지나간다'며 상상속에서 자신의 복수심과 그로 인한 모종의 후련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금자씨는 아무도 없다. 그저 속죄의 의미로 잘라냈던 손가락의 깁스가 그녀의 과거 행위와 현재의 감정을

이어주는 하나의 가시화된 상징일 뿐, 조만간 그것은 시간에 쓸려갈 부질없는 이미지.


그래서, '화이트' 두부 케이크를 얼굴에 마구 부비며라도, 하얘져서 다시 딸과 행복해졌으면 한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복수를 마쳐서 행복해져도 된다? 아님 복수를 한 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렇다고 무작정

용서해라.라 이야기할 생각은 감독도 없는 듯한게..관객을 끊임없이 흔들고 낯설게 하며, 봐라봐 나지금 복수에

살짝 질렸거든? 살짝 이쯤서 갸우뚱해보는 건 어때?라고 의도하는 것 같아서.


13년간은 삶의 희망이자 의지였을지도 모르지만, 막상 그걸 직접 실현하는 중에 시간이 흐르고, 감정이 흐르다

보니 '복수'에 애초 부여했던 순수함이 퇴락하고, 몰입했던 감정이 시들어버렸다.

그다음에는 마치 의무와도 같은 방어전으로, 복수심에 떠밀린 채 스스로 갈피를 못잡게 된 듯한. 하긴 순수한

감정으로 쭉 복수 하나만을 그리는 캐릭터는 영화속에서나 그럴듯 하다.


올드보이에서 느끼던 비장미와 그 파괴적인 아름다움이 금자씨에서 안 느껴지는 이유, 대신 올드보이에서 안

느껴지던 다차원적인 인간의 감정과 흔들림..좀더 인간적이고 불순하며 잡종틱한 혼란스러움이 금자씨에서

부각된 이유. 내가 보기에는.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니들끼리 잘해봐라"였던가? 06년 한국을 강타한 괴물의 오프닝에서 나오는 대사다.

아마도 한강에서 투신 자살을 꾀할 정도로 삶의 극한에 몰렸던 그는, 칙칙한 강물 바닥 아래서 그 무언가를

감지한다.



#1st '둔함'-괴물이 존재하던 말던..

강두(송강호)의 가족은,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마주한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마스크를

공구해서 일괄착용하고, 상상된 '바이러스'를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의사는 강두 머리에 구멍을 내고,

경찰은 그들을 잡기 위해 애쓰며, 국과수직원은 연무소독에 여념이 없다.(이로써 그들의 임무는 완수된다)

어쩌면 어이없다 싶을 정도로 강두 딸의 생존 가능성이나 괴물의 존재에 무관심한 사람들.

괴물을 잡으려는 노력은 전적으로 송강호들의 몫이다. 괴물에 대한 사람들의 둔감함이 일부 깨어나는 것은,

자신이 그로 인해 피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다. 환경'운동권'으로 표현된 사람들이랄까..



#2nd '둔함'-영화 '괴물'의 괴물은 누구?

바이러스의 숙주는, 옐로우 뭐라는 그 축늘어진 돌고래같은 '괴물'이었다. 날것으로 인간을 잡아먹고 뼈를

토해내는 다른 괴물은, 변태적인 기형일지언정 생태피라미드의 한 부분에 살짝 걸쳐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그 돌고래시체같은 노란 '괴물'이 요동하는 순간 사람들은 귀에서 피를 뿜으며 한강변에 쓰러진다. 물론

강두의 가족은 그 '바이러스 vs 사회'라는 틀을 벗어나 있었고, 개인사적인 원한 관계로 '올챙이 괴물 vs 가족'의

구도를 갖고 있었다. 해서 화염병 석유+불화살+쇠파이프 라는 사상 초유의 무기로 괴물을 해치우는 것이

가능했고 의미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정말 두려워하던 바이러스는, 혹은 바이러스와 같이 생체를

갉아먹는 것은 그 노란 '괴물'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이었지만 이는 순수한 형태의 폭력을 행사하는

올챙이 괴물에 가리워져버렸다.

괴물과 송강호들이 조우하기 위해 넘어야 했던 온갖 괴물스러운 작태들, 시스템들. 그 극단의 형태가 바로

노란돌고래였을 수도.



#3rd '둔함'-재생시킨 행복조차 둔해빠진.

엔딩 어디메쯤에서 송강호는 매점 창밖의 기척에도 총을 움켜쥐며 괴물을 경계하지만, 정작 바이러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그럴듯한 발표를 낭독하던 티비는 무심하고 둔한 발가락으로 꺼버린다. 언제고 한강에 사람을 잡아먹는

올챙이같은 것이 나타나는 순간 작동하기 시작하는 '괴물'. 그 아가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훨씬 세련되어서

'빠이'프를 쑤셔넣기도 불가능할 텐데도, 송강호는 현상수배됐던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삐라'를 액자에 꼽아넣고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끝까지 둔해빠진 색퀴".

따스한 불빛은 그의 조그마한 매점 주위만을 밝힐 뿐, 푸지게 쏟아지는 하얀 눈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온통 어둠에

먹혀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최초의 발견자가 한강에서 보았던 건, 과연 뭐였을까. 그 검은 그림자는 올챙이 괴물의

그것이었을까.



더하기. 반미영화?

정말, 이제 '반미'는 문화적 상품이자 시대의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포름알데히드'라는 단어를

반복학습시키는 영화인지라, 강력한 반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선전됐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송강호와 함께 괴물에 맞섰던 그 미군은? 바베큐 파티를 함께 하던 미군과 한국군은? 구도는 좀더 명료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미국(과 미국에 복종하는 한국 기득권층) vs 미국에 반대하는 한국(혹은 민중)은 아닌 것 같다.

마치 '살인의 추억'에서 미국의 회신이 결정적으로 한국의 수사 향방을 좌우했듯 미국은 하나의 '상수'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냥 우리가 놓인 환경..이란 정도. 송강호에게 재갈을 물린 건 미국, 미군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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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애초 기획단계에서부터 이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기대를 꽤나 했었고, 꽤나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 것을

보면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흥미진진했었다. 그렇지만 칸영화제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는 수다스런

언론의 설레발이 확대재생산되고, 마치 한국영화의 새로운 부흥을 알리는 전기가 될지 계속 침체일로를 걸을지

막중한 역사적 의미까지 띈 영화처럼 부각되면서 차츰 우려스럽기 시작했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단

사실만으로 이미 맘속으로 몇 수 접어주고 관대한 갈채를 보냈던 분위기 속에서, 생각보다 별로였다..란 조심스런

얘기조차 돌팔매질당하는 분위기가 또다시 재연될까봐 불편했다.(이미 '디-워'를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논란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던 데다가, '밀양'같은 '어려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 역시 외국영화제로부터 빌려온

아우라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한다.)


이미 스스로도 너무 영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것은 아닐까, 이러다간 왠만한 영화를 봐도 좀처럼 만족스럽지

않겠다..란 생각도 하고 있던 터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치솟기만 한 기대치를 어떻게든 낮추고 봐야겠다는

경계심이 들었달까. 개봉 나흘만에 100만에 육박한다는 실로 과열된 신드롬 현상-한국에서 흥행했던 많은

영화들의 첫 궤적-을 따르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약간의 우려와 스스로에 대한 경계, 그 두가지가
 
아마도 이 '놈,놈,놈'을 보는 나의 준비자세였지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생각없이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라고 생각하며, 두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 그다지

길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볼거리와 긴장감도 팽팽한 영화인 것 같다. 이런 영화를 볼 때 탄탄한 스토리를

기대하거나 배우들의 연기에 주목하는 편이라면 다소 실망했을 수도 있겠지만, 여름방학을 맞이한 본격적인

오락영화 그자체의 본분에는 매우 충실하다. 그렇게 진지하게 뭔가 잡아내서 이야기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그리고 이 영화가 몇백만이 들만한 영화일지에 대해서도 그다지 평가하기도 그런-재밌으면 보는 거지 뭐..

다만 남들이 보니까 따라보는 게 아니기만을 바랄뿐..아니 실은 그랬대도 별말 하고 싶지는 않다-영화.



최근에 씨네21이었던가, 어느 영화잡지에서 본 거 같은데 김지운 감독이 분명 '마카로니 웨스턴'의 광팬이었을

거라고 평했던 적이 있었다. 착한 놈과 나쁜 놈의 대결이 아니라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의 대결.


* 마카로니웨스턴 [macaroni western],

미국 서부극과 같은 개척정신의 요소는 없고, 주로 멕시코를 무대로 총잡이를 등장시켜 잔혹한 장면을 강렬하게 묘사한 것이 특색이다. 1964년 세르지오 레오네가 《황야의 무법자》를 제작한 이래 미국 서부극을 압도할 기세로 선풍을 일으켰다. 한국에도 1966년 《황야의 무법자》(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가 상영된 이래 여러 편이 수입되어 마카로니 웨스턴 붐을 일으켰다. (네이버 백과사전 中)


그에 더해, CGV 골드클래스 경험담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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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연인에서 나온 CGV골드클래스 장면)

영화 시작 한시간전부터 골드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데, 골드클래스 상영관에 붙어서 바로 라운지가 있다.

주류를 포함해 약간의 음료와 간식류를 팔고 있으며 조그마한 카페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영화 시작전

아늑하게 미리 입장해서 편히 앉아 놀거나 쉴 수 있는 장소.

입장을 하게 되면 좌석은 총 30개, 130도까지 꺽이는 편안하고 커다란 가죽의자가 두개씩 붙어서 있고 커플석당

테이블이 하나씩 놓여있다. 한껏 젖혀서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 영화관을 전세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조조를 봐서 그런지 대략 10명도 안되는-그니까 네 커플도 안되는-사람들이 엉성히 앉아있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실 영화시작전 한시간동안 라운지에서 무료음료와 보드게임 어쩌구..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건

CGV입장에서도 일종의 수익사업이지 관람객의 편의를 기한다는 느낌이 크지 않고, 영화관의 좌석 배치와

안락한 좌석...그게 골드클래스의 가장 큰 메리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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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놈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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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놈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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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마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시도되었을 열차탈취씬. '서부영화' 혹은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는 장르
역시 한국에서 최초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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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상한놈 송강호. 자칫 '가오'만 잔뜩 잡고 엉성해지기 쉬웠을 영화를 끝까지 붙잡고 갈 줄 아는 배우.
그는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생생한 캐릭터를 연기해냈다고 생각한다.

묘한 이질감을 주는 제목처럼, 한풀이식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돋우는 영화는 아니었다.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누가 정말 적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어진 상황에서..오지에서 독특한 가면 문화와 삶을 꾸려나가던 사람들은

럭비도 배우고, 창가도 즐기고, 인종과 이념 같은 것이 부질없어지는 '환상적인' 상황에 처한다. 뙤놈이나 왜놈

운운하는 대사가 있지만, 그다지 현실적이라거나 실제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동막골은, 그런 곳이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연출되는데, 그중에서도 맘에 툭 꽂혔던 장면이 있다. 무엇이 불안한지, 아니면

두려운지, 무릎을 바싹 땡긴채 웅크리고 자는 앳된 군인의 옆머리에 강혜정이 꽃을 꽂아주는 장면. 그리고는,

아주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꽃잎을 두어번 쓸어내리는. 촉촉한, 보들보들하면서도 생생한 그 감촉..은, 그네들이

'작대기'라 부르던 우왁스럽고 둔탁한, 그리고 선뜻한 총의 감촉과 정확히 대척하고 있다. 풍선처럼 유유히

낙하하는 폭탄의 질감 역시. 꽃잎을 쓰다듬으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미친X, 아님 광년이라 불릴 수 있는

세상이다. 다행히도, 동막골은 그런 미친X를 포용, 아니 이해하고 있었고..그녀의 죽음은 그래서 마을 전체의

슬픔이 된다.


언젠가부터 나비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혹여 흰나비를 백의민족 어쩌구의 상징으로

생각하지 않는한. 다만 호접지몽, 장자지몽 이전에..나비효과 같은 걸 연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딘가의 나비

날갯짓으로부터 불러들여지는 폭풍.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건지, 무엇이 어긋나 이렇게 누군가에게 분노를

투사하고 총을 겨누며, 맨몸으로 폭격기에 맞서야 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대답은, 도식적인 구도로 나타나지도

않으며 쉽게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그런 간단한 관계가 아니라는.


예측할 수 없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인간들은 서로가 원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 부지불식간에 쌓아올린 업?

구조? 관계? 아님...간주관성?--; 그런 것들로 보이지 않게 서로 구속되어, 싸우고 웃고 울고 죽어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며칠전에 본 박수칠 때 떠나라의 신하균은 두가지 작품을 동시에 했음에도 캐릭터가 하나도 안 섞였다. 멋진
 
배우에 멋진 영화들. 올여름 대박 세영화다 가족들이랑 심야로 봤다. 이사가기전에 가까운 센트럴시티 무지

이용한다.ㅋ


난 항상 사랑니가 났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문득 이가 아파 병원에 가면 사랑니가 이미 다 난 상태라 하고,

그것때문에 아프단다. 너무 쉽게 생겨나고, 너무 금방 아파지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님 살짝 둔해서 무지하고,

다 자라고 나서야 뽑아버리는..참 멍청한..어쨌거나 어제는 입안으로 망치와 메스(조각칼같은), 뽁뽁이가

들어갔고..염증을 제거한다고 엄지손톱만큼 살을 잘라냈다. 치료받고 담주에나 뽑아낼거 같은데..항상

뽑혀나가기만 한다. 달이 삼분지이가 지났다. 근데, 전화요금이 기본료 더하기 2614원.


이번달, 군대 녀석들이랑 논다고 전화 은근 많이 썼지 싶었는데, 아마 저번달 기록 경신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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