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이란 곳은 항구에서 시작하는 도시의 한쪽 끝에서부터 다른 쪽 끄트머리까지, 내처 걸어도 한두시간이면 관통하고도 남는

 

그런 조그마한 소도시다. 지방을 다니다보면 서울이란 데가 얼마나 큰 도시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는데, 군산 역시 그렇다.

 

그런 군산에서 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 곳에, 항구 가까운 곳에 있는 작지 않은 공원이 있다. 공원보다 더 눈에 띄던 건,

 

해방후 피난민들의 판잣촌이었던 '해망동'의 고불고불한 골목길과 그 둥그스름한 실루엣들.

 

 

잔설이 남아있던 월명공원 앞의 주택들. 그리고 썰렁한 겨울 날씨만큼이나 썰렁하게 헐벗은 겨울나무들.

 

 

공원이라곤 하지만 야트막한 산을 따라 오르내리는 길을 그대로 품고 있어서, 살짝 트레킹 코스라는 느낌이 강하다.

 

공원이 품고 있는 능선 한쪽 비탈, 그러니까 바다가 내려보이는 쪽에는 말 그대로 바다가 바라보이는 동네, '해망동'의

 

골목길이 고스란히 남아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궤적을 기록하고 있다.

 

 

공원의 한 모퉁이에는 전망대도 세워져 있고, 군산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아저씨의 동상도 서 있고.

 

새초롬한 댓잎이 소담히 그러쥐고 있는 새하얀 눈뭉치는 꽤나 묵직해보인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난롯불을 쬐며 담배를 태우며 맥주를 마시며 고스톱을 하고 계신 공원 안 매점에는

 

겨우내 어르신들의 온기를 책임질 까만 연탄이 집게에 코를 꿰고는 얌전하게 자리잡았다.

 

 

매점 옆에선 어디서 터져나온 수돗물인지 아니면 약숫물인지, 쉼없이 흘러넘치는 물줄기가 만든 자잘한 고드름이 주렁주렁.

 

해망동의 전경. 파노라마 사진을 블로그에 올려봐야 자동으로 크기가 설정되고 마니 좀 그렇다.

 

 

이렇게, 나무 전봇대가 서 있고, 가장자리가 쥐에 파먹힌 듯 얼기설기한 슬레이트 지붕이 지친 듯 퍼져버린 풍경.

 

볕 한줌 쬐이기 쉽지 않을 좁다란 골목길에 찍힌 몇개 되지 않는 발자국, 여전히 눈밟는 소리가 뽀드득, 그런다.

 

 

어느 슬레이트 처마를 따라 쭉쭉 뻗어나간 고드름들. 가늘고 길게 뻗은 고드름, 수정고드름 발을 만들기에 딱이겠다.

 

 

한국전쟁 때 스러져간 영혼들을 위한 위령탑. 오래 묵은 나무 그림자를 따라 잔설이 고집스레 남았다.

 

 

그리고 군산의 조형탑. 커다란 등대 같기도 하고, 꺼지지 않는 횃불을 형상화한 거 같기도 하고.

 

 

조그마한 조각공원도 품고 있었는데, 그 입구 언저리에서 날개를 활짝 편 채 손님을 맞는 반짝반짝 갈매기 한마리.

 

 

군산에도 '구불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개발되었나 본데, 그렇게 따라 걷다가 저런 허름하지만 운치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숨도 고르고 귤도 까먹으며 하얀 입김 풍성하게 내뱉으면 좋겠다.

 

 

꾸역꾸역 이어지는 산들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 그렇게 다 걸어보려면 제법 시간도 오래 소요되겠기에

 

반절 정도만 돌아보는 걸로 만족했다. 꼭 다 돌아야 맛이 아니니, 쉬엄쉬엄 걸으며 얼음길에 이리 빼뚤 저리 빼뚤 했던 걸로

 

겨울철 산책의 묘미는 다 즐긴 걸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어느 가족의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보금자리였겠지만 이젠 한무더기의 건축폐기물로 변한 돌무덤

 

위를 밟고 올라가 아현동 일대의 재개발지역을 한눈에 내려보았다.

 

 

그 와중에 돌무덤 틈새를 비집고 노란 꽃줄기 한 가닥이 꿋꿋이 피어오른 모습이란.

 

 

 

누군가 신었을 발레슈즈도 탁하고 무거운 시멘트 덩어리들 사이에서 하늘하늘, 반짝거리고 있었다.

 

 

 

B&W 모드의 사진 몇 장. 뒤에 우뚝 서 있는 삼성 아파트와 그 앞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 건물들이 뚜렷한 온도차를 보인다.

 

 

화장실 창문만한 조그마한 창에 엉성하게 덧붙은 가림막.

 

붕괴 위험으로 막아놓은 길 너머엔 이십년 전에나 보았을 법한 비디오테잎이 나뒹굴고 있다. 저 안은, 1990년대인 건가.

 

낚시바늘로 성을 지은 것처럼 살벌한 담장 끝 방범창살.

 

 

빛과 그림자. 왠지 딱 그런 문구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집앞에 잔뜩 쟁여진 쓰레기들, 그리고 생활 폐품과 재활용품들.

 

 

저 집은 아무래도 사람 얼굴이다. 눈썹 붙인 게 뜯어져버린 오른쪽 눈에 너덜거리는 왼쪽 눈,

 

게다가 젓가락을 꼽고 있는 한쪽 콧구멍. 뭔가 일본식으로 즐기며 술을 마시는 중인가 싶은.

 

 

 

 

 

어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부지런히 모아서 꽁꽁 동여매 놓으셨을 폐지 묶음들. 어렸을 땐 그러고보니 저거 챙겨서

 

학교에 가져가서 무게도 달고 그랬는데.

 

애오개 고개에 자리잡은 철거촌, 그 곳에 핀 꽃들은 이쁘다기보다는 왠지 풀죽은 채, 그렇지만 가시를 세운 어린 왕자의

 

장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다.

 

 

 

 

아마도 저 허름하고 시트조차 다 사라져버린 소파는 이 곳 어르신들의 사랑방 같은 거 아닐까.

 

 

재개발지역을 떠나 차들이 씽씽 다니는 큰길로 올라서는 계단, 시멘트 계단에 녹물이 흐르고 흘렀는지

 

붉게 염색이 되어 버렸다.

 


늘 궁금했었다. 차디차게 식어버린 연탄, 까만 기운이 모두 쇠잔해버린 연탄은 어디로 갈까.

어렸을 적 동네에서 심심찮게 보였던 연탄재들은 더러는 짖궂은 아이들의 장난질에 깨지고

더러는 아래층 할머니가 가꾸는 텃밭에 가루로 뿌려졌더랬다. 다 타고 남은 연탄에 어떤

영양분이 남았는지, 혹은 어떤 재미난 구석이 남아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신발을

넘어 바지 아랫춤까지 풀풀 날려오는 먼지만 만들어낼 뿐이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 는 어느 시인의 시구는 외려 연탄재가 얼마나 함부로 대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이다. 처음과 같이 뜨거운 마음이 아니어서, 처음과 같이 초롱초롱하고 씽씽

돌아가는 눈빛과 머리가 아니어서, 또 처음과 같이 뭐든 가능성으로 남아있던 미지의 낯설고

곤혹스런 두려움이 아니어서, 식어지고 둔해지고 익숙해져서 모든 것들은 연탄재가 되고 만다.


때로는 하얗게 재가 되어버린 연탄재를 까만 봉지에 담아놓듯 까만 척, 아직은 이루어진 것보다

이룰 것들이 많은 척을 하기도 한다.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빈 공간이 아직은 뭔가에 더럽혀진

공간보다 많은 척 위장을 하기도 한다. 그건, 걷고 있는 길의 끝이 보일 때에도 마찬가지다.

길을 걷고 있으니까, 어쨌든 끝을 알 것 같더라도 그 끝에 이를 때까지는 잘 해내고 싶으니까.


계속해서 덜컥덜컥, 내 주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오는 '내일'이란 것들이 가끔은 굉장히 거슬릴

때도 있지만, 또 어느 때는 그다지 거슬리지 않아 마치 내 몸에 맞는 옷인 양 느껴질 때도 있는 거다.

생각하기 나름. 내 몸에 얼추 맞아들어가는 단단한 옷 한 벌을 입고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간편하게 입력해두는 거일 수도 있고, 혹은 내 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속구일 수도 있고.


하얗게 태워버린 연탄들이 까망색 비닐봉다리를 옷인 양 걸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순간 온갖

잡생각이 들어버렸었다. 저 연탄이 나인지 아니면 저 봉다리가 나인지 운운.



@ 경주, 분황사와 황룡사지 언저리.
'향수', 鄕愁. 아련한 느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가슴먹먹한 상실감이 뒤범벅된 느낌의 단어다.

다소 멍한 눈빛으로 흐르는 물을 부질없이 갈퀴질하는 듯한 그런 이미지랄까.

정지용의 번듯한 생가가 마치 민속촌의 그것처럼 초현실적으로 시골 한복판에 박혀있는 그 곳, 곱게 입혀진

이엉지붕 아래로 낡고 헤진 슬레이트 지붕이 보였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지 않아 깨끗하고 주름지지 않은 채

박제된 '유물'과 수십년동안 사람손타고 때묻은 채 헐벗은 60년대식 슬레이트 건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간다는 그 실개천 옆으로는 허름한 시멘트담벼락,

그리고 드문드문 녹이 슬은 다홍빛 철문이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에 연해있다.

이렇게 이쁜 간판들을 찾아 사방으로 선불맞은 멧돼지마냥 뛰어다니다가도,

어느새 이런 건물 앞에 서게 된다. 어쩌면 어떤 세대들에겐 이런 건물들이 이상화된 단정한 초가지붕보다 더욱

생생한 '향수'를 자극하는 모티브가 될지 모르겠다. 정지용이 살던 시기에도 저렇게 깔끔하고 아름답도록 잘

꾸며진 초가지붕을 얹고 있었을까 싶은 의구심도 한 몫 했는지 자꾸 이런 슬레이트 지붕들에 눈이 간다.

나중에 저런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도 깨끗하게 잘 정돈된 채 '박물화'되어 있을까.

그나마 아슬하게 서있는 전면과는 달리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의 뒷면.

그리고 80년대 향토예비군 훈련공고 내용을 적어두었을 양철판 하나가 잔뜩 녹슨 채 내걸려 있었다. 어쩌면

여긴 이미 '추억의 그 시절' 쯤 될 만한 운치를 구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본 것도 같고.

하얗게 식은 연탄재가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곳, 살짝만 걷어차도 떨어져나갈 듯한 문짝이 바람결에 철컹이는 곳.

이렇게 연탄을 잔뜩 쟁여두고 겨울을 보내던 풍경은 사실 내 어릴적만 해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향수'랄 것 떠올릴 만큼 나이를 먹지도, 상실감을 느낄 만한 풍경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초가지붕보단

저 연탄무데기에서 '향수'에 가까운 걸 느끼고 말았다.

구멍 퐁퐁 뚫린 벽돌담 위의 도둑고양이. 보통 어렸을 적엔 저런 벽돌담 위에 시멘트를 얹어선 깨진 유리병조각을

촘촘히 박아두곤 했었더랬는데.

허름한 창고, 곰표 밀가루도 취급하고 설탕도 취급한다는 곳의 시꺼먼 내부는 뭔가가 숨어있는 듯. 어렸을 적엔

학교 지하실 창고니, 저런 버려진 건물이니 어둑어둑한 곳들에 손전등 들고 친구들이랑 많이 싸돌아다녔었다.

녹슨 철문 뒤, 할머니댁같기도 하고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문과 그런 오톨도톨 시멘트 장식의 기둥.

괜시리 신발주머니를 질질질 벽에 대고 문대고 다니던 그 시절.

그러고 보니 정지용 생가에서 마주쳤던 부엌의 분위기는 얼마전 '신식 슬레이트' 지붕 얹힌 양옥으로 바뀌기

전까지 넓고 시원한 툇마루를 지키던 작은 할아버지 댁과 꼭 닮았다. 물론 좀더 퀘퀘하고, 닦이지도 않는

그을음이 온통 끼어있었지만.

정지용의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의 그 곳은, 사실 여느 머릿속 이상향들처럼 현실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그 머릿속 그림을 아무리 재현하려 노력해봐야 백인백색, 저마다 다른

그림을 그려내지 않을까. '향수'가 homesick이라기보다 nostalgia에 가까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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