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 최진실, 노무현, 정몽헌, 최진영..활자화된 이름들의 죽음 이외에도 도처에서 학생이,

회사원이, 주부가, 아이가 죽음을 선택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선택에 대해

원망하고 훈계한다. 더러는 비웃음이 섞인 훈계일지도 모른다. 니가 힘들다는 그 삶, 난 잘 살고 있는데..하며.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 사람에 한번쯤 생각해본 사람까지 합한다 해도, 어쨌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그들은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의 이름으로 자살의 경박함과 무책임함을 비난하고, 사회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살을 단죄하는 판이라 그렇다. 이미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살려두기 위한 '반면교사'나 '예외'가 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같다.)

(참고 :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


"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생명 법칙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또 일견 그럴 듯 하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하고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채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역할과 기대가 그(녀)에게 감겨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변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아픔/손실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란다. 잠시의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나약함의 소산이라고도 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과 같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증좌라며 심리적/생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곁들여진다. 게다가 여전히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등의 종교적인 믿음이 단단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자살학의 진단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인생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당사자만이 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힘들다는 사람들을 끌어와 앉혀서는, 니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뭐가 되겠니, 하며 니가 맡아야 할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압박이다. 단적으로 최진영의 죽음이 그랬다.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조카는 어떡할 거냐, 엄마는 어떡할 거냐, 누나 볼 낯이 있겠냐, 따위 오지랖 넓은

한가한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본인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과정 끝에

죽음을 선택한 건지 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의 노력은 없었다. '우울증'이란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그(자살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메리가 굳이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쓸 만큼, 자살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래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으로 스러지고 만다는 깨달음을 거쳐야 가능한 거다.

자살하고 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고,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회성/기능성'에 기반한 사회의 협박 이외에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는 강렬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의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최고로 가치있는 자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고자 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자연본능과 사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다.

나는 자연적인 죽음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온갖 생산활동-애낳고 밥벌이하는-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부한다.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생명체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보전의 대원칙까지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하건대 더이상의 삶은 부질없는 생명의 연장일 뿐 죽음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지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그것은, 아메리가 말하듯, 삶을 던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지키겠다는 모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적인 판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개개인마다 다를 거다. 다르지만

또 같을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한다. 에셰크(Lechec), 치욕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죽음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더이상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더이상 없는 중증 환자, 삶의 전부라

여겼던 사랑의 실패자, 심지어는 대입시험에 실패한 사람, 남들 눈에 어이없고 하찮아 보일 문제라 해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다. 삶의 결정적 순간은 본인만이 안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그러나) 지성의 논리로 볼 때 자유죽음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자유죽음을 택한 결단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인간성'과 '존엄성'에 기댄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생과 '에셰크'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죽음으로 직접 끝낸 인생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자살할 권리'는

복권되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행하기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스스로의 자유를 체감하고 밀도높은

삶을 살았다고 본인이 느낀다면 본인 이외 다른 누가 그 삶에 대해 주제넘은 훈계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아메리는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욕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목하려고 한다. 꾸역꾸역 생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겠다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삶의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지켜낼 자유를 극한으로 수행하고자, 맹목적으로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하이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퀸,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융통성없고 고집스러운, 순진하다 못해 꽉 막힌 쑥맥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에셰크'에 공감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계와

비웃음, 그리고 권해지는 자연적인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인 거다. 우리 사회의 드높은 자살율엔 이유가 있다.







#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삐져나오면 '요새 삶이 힘드냐', '우울하냐'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그럴 때만 입에 올려야 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을지 살지의 문제가 김밥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의 문제만큼 유쾌하거나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꼭 우울하거나 피폐해졌을 때만 떠올려야

하는 건 아닌 거다. (그렇다고 요새 내가 삶이 힘들지 않다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건 아니..ㄹ 거다.)


진지한 것과 우울한 건 다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병들고 패배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봄이라고, 볕이 따시다고,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 죽음을 터부시할 이유가 하필이면 손꼽을 수 없을만큼 쌓여있는 이 때라도, 살아갈 자유가

있다면 동시에 죽을 자유도 있는 거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죽음 - 10점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김남시 해제/산책자


* 알라딘 4월 마지막주 이주의 TTB에 선정되었습니다.



저질 포스터가 망쳐버린 영화의 컨셉과 이미지.

영화 포스터를 다운받으러 네이*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랬다. 영화 평이 왜 이렇게 안 좋지?

내레이터가 쓰레기네, 좋은 영화를 이렇게 망쳐놨네, 하는 이야기들과 함께 왠지 내가 본 

영화와는 굉장히 달라 보이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던 거다.


세상에서 가장 큰 아쿠아리움이라고? 아빠가 딸애에게 재미있게 바다이야기를 해주는 식의

내레이션이라고? 정보석이나 '빵꾸똥꾸'양에게 사심은 없지만, 대체 이 영화를 수입해서 국내에

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싶다. 이건 아동용 교육영화도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말랑한 오락영화도 아니고, 단순히 해양의 신기한 볼거리들 보여주려는 괴수대백과사전같은

관상용 영화도 아닌 거다. 내 생각이 그렇단 얘기다.

'바다가 뭔가요'란 질문에서 비롯한 영화

아마도 외국에서 쓰였던 영화 포스터는 디비디 케이스의 이 그림이 쓰였던 듯 하다. 서로 판이한

영화 포스터의 이미지와 분위기만큼이나 원래 의도나 메시지는 한국에선 꽤나 뒤틀린 거 아닐까.

(사람의 시각에서) 귀엽고 독특한 '눈길을 끄는' 동물들이 우르르 배치된 한국 포스터와는 달리,

오리지널 포스터는 바다가 보인다. 영화 제목은 '오션스', 바다다. 영화는 '바다가 뭔가요'라는

아이의 질문에서 시작했다. 그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100분동안 바다 곳곳의 생명체들을 보여주는

이 영화, 그렇게 만만한 영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맞다. 굉장한 볼거리들이 우르르 나온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눈을 못 뗄만큼 굉장한

이미지들이 쉼없이 이어진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기기묘묘한 생명체들이 나왔고, 고래나 상어같은

거대한 생명체의 몸에 그어져있는 주름이나 툭툭 불거진 혹들도 완전 생생하게 보았으니 굉장히

신기했다. 화면 한장면한장면 눈을 뗄 수 없도록 순식간에 그들은 먹이를 삼켰고 사랑을 했으며

우아한 곡선을 그으며 몸을 뒤틀고 유영했다. 마치 '괴수대백과 사전'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스펙타클의 측면에서 가히 '해양 블록버스터'라 부를 만큼 압도적이기도 했었다.


어항은 바다가 아니다, 생명은 눈요깃거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건 단순히 물고기들이 가득 담긴 커다란 어항 이야기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어항과는

철학이 다른 영화다. 그들이 등장할 때 학명이니 뭐니 이름이 등장하던가. 인간이 제멋대로 분류하고

붙여놓은 이름 따위, 혹은 그들의 생태나 특징에 대한 박물학적이고 과시적인 지식의 편린 따위, 영화는

전혀 관심갖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보기 편하게 잘 꾸며진 공간에서 원래 삶의 신비나

생명력같은 것들이 거세된 것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저 그것들이 원래 살고 있는 방식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에게 보여지기 위해 정리되고 가다듬어진 모습이 아니라,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잡고

살아가는 생명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며 결국 바다가 뭔지 그 질문에 집중하고 싶은 거다.


그들은 인간들의 편의나 필요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다. 단순하고 당연하지만 너무도 쉽게 잊고 마는

사실이다. 때로는 경이롭고 섬뜩하기까지 한 바다 생명들은 인간의 눈으로 재단되지 않은 스스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수만년에 걸쳐 진화를 하고, 먹이 사슬에 따라 포식하고 포식당하며, 제각기의 목소리로

울부짖고, 그렇게 아침해가 뜨고 저녁해가 진다. 그들의 생생한 피부 질감과 지느러미나 촉수가

움직이는 방식, 그런 디테일을 망연히 보다보면 '생명의 귀중함'이란 말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그림이나

조악한 모형으로 익숙하던 고래들의 모습이 실제 날것의 그들 모습과는 또 얼마나 다르던지.


달달하고 말랑한 대신, 불편하고 딱딱하게 읽어야 할 영화

영화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사고가 개입되는 걸 느끼기도 했다. 문득문득 쟤들의 저런 삶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어지는 거다. 그 의미란 것 자체가 지극히 인간적인 거겠지만, 그저 눈뜨면 먹이를 찾아

움직이고 때가 되면 교미를 하고. 운좋으면 살아남고 운없으면 먹이가 되는 세상이란 게 너무 잔혹해

보였다. 그렇지만 인간의 세상과 인간이 사는 방식과 계속해서 비교하게 되면서 '인간우월'의 감정은

혼란에 빠지기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 녀석이 먹이로 바쳐져 포식자의 배가 부르면 아무리 먹잇감이

눈앞에 있어도 평화로운 정경, 자족할 줄 아는 그 자연스러움이란 건 인간에겐 참 쉽지 않은 경지다.


결국 그런 인간의 마음이 빚어내는 결과는 바다에서도 참담하다. 상어를 잡아서는 지느러미만 베어내고

다시 바다로 던지는 무표정한 어부들, 바다에 방치된 그물에 휘감긴 채 죽어가는 바다 생명들, 하늘에서

바다 수면 아래로 쏘아내려지던 바닷새들처럼 돌고래와 고래를 향해 쏘아지던 작살들, 그리고 곳곳에서

망가지는 자연 환경들. 앞서 잔뜩 놀래켰던 경이로운 바다와 바다 생명체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바다란 뭘까. 단순히 인간을 위한 거대한 어항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이로운 공간이라 감탄만 하는 것도 아닌 거 같다.


바다 생명들에게 바다란 뭘까

그래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 시야가 넓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여태까지 어쩌면 '바다란 뭘까요'

그 질문 앞에는 '우리(인간)에게'라는 말이 숨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꼬마도 암묵적으로

그렇게 물었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바다는 뭘까요"라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오션스'란 영화를 보고 나서는 질문을 좀더 명확하게, 그리고 바르게 고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인간과 바다 생명들에게, 바다는 뭘까요."


* 스포일링의 가능성은 최대한 비켜내고자 하는, 영화를 보고 삐쭉삐쭉 뻗어나간 사변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은 비켜내기로 하자. 개인적으로는 사형제도에 반대하지만 자칫-아니 백방-구구절절히

사형을 반대한다고 처벌에 반대한다거나 정당한 죗값을 주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라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주렁주렁 엮여야 할 것은 뻔하니, 그냥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고 싶다.


사람을 죽인다. 냉정하게 말하건대 별 거 아니다. 실수로, 사고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심지어 스스로

목숨줄을 놔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 생명이란 게 얼마나 취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여느 영화에서처럼 목 한번 돌려주거나 숨통에 바늘 하나 꼽는다고 켁, 나자빠져 버리지야 않겠지만 그냥 목에

밧줄 한번 감아서 땡겨주거나 전기로 지지거나, 여차하면 독액이 든 주사액을 주입해버리면 그뿐이다. 실제로

사형은 그런 식으로 집행된다. 어쩌면 흔히 벌어지는 일들과 같이 차에 치이거나 높은 곳에서 밀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고 수고로울지 모른다.


죽이는 건 별 거 아니다. 사람의 육신을,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건 쉽다. 문제는 그 임팩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밖에서 보기엔 법원의 판결이, 공문 한 장이, 국가의 이름 하에 국가가 사람을 죽이는 거였지만,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아무리 국가의 공무(公務)라는 휘광 뒤에 숨으려 해도, 사회의 법과 정의를

위해서라는 대의를 내세우려 해도, 혹은 피해자의 아픔과 가해자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인 공명이라 해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건 사람이다. 비록 그게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거라 해도,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신성하고 지고한 '초인간적인' 국가 따위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는 부르조아

소위원회..한줌의 사람-그들 역시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과격한 거일라나.)


갈림길이 나온다. 이사람은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보이)고, 죄값도 치렀(다고 생각하)으며, 결과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사람은 죄를 뉘우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고, 사회에 돌아가면 계속 죄를 저지를

(처럼 보)이고, 갱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사람을 살릴지 저사람을 살릴지,

누굴 죽여도 되고 누굴 안 죽여야 할지의 갈림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과 '신'의 갈림길이다. 앞선 문장

중간중간을 얼기설기 묶어둔 괄호들, 그게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징표들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오바하는

걸까. 다른 생명을 판단하고 소멸시키는 건 신, 혹은 만물을 주재하는 운명 따위가 존재한다면 그가 맡을

역할이지, 동일한 생명, 인간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저사람을 죽일 때의 죄책감이 다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리 강호순 사건 때나

조두순 사건 때 골프장 갤러리들처럼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쳐죽일 놈, 광화문 네거리에 육시를 할 놈, 어쩌구

막말을 내뱉던 사람들도 밝고 맑은 정의로움과 숭고함을 유지하며 사람을 죽일 수는 없을 거다.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히니까 막말을 하고 저주를 내뱉고 '죽여라'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다. 설혹 '내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해도, 또 설마 실제로 직접 손을 써 죽여버린다 해도, 영화 속 집행자들처럼 뭔가가 하나둘씩

무너져버리고 말 거다.


처음에 말을 잘못한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형제도를 건드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사람을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것이 그간 주목받지 못해온 사형제도의 비인간적인 한 측면인 거다.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안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집행'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상한 게 있다. 왜,

집행의 선고자들, 이 사회와 제도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가. 저승에 있다는 

길고 긴 젓가락을 휘두르듯, 그렇게 누군가 다른 사람을 들어 '집행'시키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격무에

시달리거나 피곤해서는 아닐 텐데. 


"우리는 망나니였어" 어쩌구 하는 대사가 있었다. 사회를 위해 법을 집행하는, 좀더 적나라하게는 살인을

떠맡는 존재들. 사회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그들 안의 무엇인가는 어쩌면 사회로부터 죽임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걸 또 다른 '살인'이라 부르기는 무리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져

버리는 건 틀림없는 거다.



* 고백 하나, 사실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순간은 꼭 정말로 사람을 죽일 때만은 아닌 거 같다.

거리에서 전경들과 마주 선 채 투석이 난무하거나 파이프를 맞대고 있을 때, 전쟁터와 같은 그런 상황에서 역시

분노와 공포, 혹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뭔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 뭔가

눈먼 야수같은 광기가 뿜어지는 듯한 감각은 두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무엇이었다. 단지 문제가 사형이

살인인지 아닌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을 조장하는 시스템, 문화, 분위기, 그리고 감수성의 차원까지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하는 이야기다. 꼭 생명을 말그대로 끊어버려야 살인이 아닐 거다.

(물론 당연히도 이른바 '폭력집회'가 잘못되었다거나 비인간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과 정책의

문제를 틀 내에서 해결치 못하고 거리에서 파열음을 내게 만드는 기제 자체가 비인간적인 상황을 이끈다는

말이다. 2미터 앞에서 돌을 던지는 보호장구 완비한 전경들이나, 자위적 차원에서 무장을 한 시위대, 문제의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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