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그래도 좀 이쁘게 포장되려나. 자그레브 구시가, 성모승천 대성당에서 성마르크 성당으로 가는 길에

 

문득 마주친 흥미로운 뮤지엄 하나.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다. '깨진 커플 박물관' 정도로 의역하면 될까 싶다.

 

 

연애가 되었건 결혼생활이 되었건, 아니면 짧디짧은 하룻밤의 유희가 되었건 상처받은 이들의 추억과 스토리가 흥건한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건 온갖 인형과 신발, 의류들. 이곳은 세계 각지에서 깨진 커플들의 스토리와 사랑의 징표들을

 

기부받아 세워진 박물관이라고 한다. 이미 꽤나 유명해져서 세계를 돌며 순회 전시도 할 만큼 규모면에서나 인지도면에서 성장했다고.

 

누군가 배 위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썼던 편지와 지도 그림. 흔들리는 배 위에서, 편지지조차 없어서 읽던 책을 찢어서 썼을 만큼

 

그 마음이 뜨거웠을 텐데, 이제는 이렇게 깨지고 부질없는 사랑의 징표로 받은 이의 손을 떠나 대중 앞에 전시되는 중이다.

 

여기서부터는 살짝 19금. 이런 걸 선물해주고 또 착용해서 보여줬을 그들의 내밀하고도 달콤한 이야기들, 덧없고 덧없구나 싶다.

 

 

 

관계가 틀어지고 난 이후에도 이런 걸 계속 지니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약간의 후회와 약간의 아쉬움과 민망함이 교차되었을 듯.

 

 

관계의 마지막을 고하던 날, 그 극렬하던 싸움의 흔적이란다. 깨진 유리 조각을 이곳에 기증한 사람도 대단하다.

 

아예 이런 사람도 있었다. 둘이 주고받던 사랑의 편지들을 유리에 붙여서는 산산조각내버리곤 그 조각을 여기에 넘겼단다.

 

 

 

누군가가 아마도 이런 느끼한 대사를 치며 선물하지 않았을까. '내 마음을 여는 열쇠야, 당신이 처음 발견한.'

 

사람을 시니컬하게 만드는 전시인 거 같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들기 시작했다.

 

 

제법 값나가 보이는 옷들도 말짱하니 전시되어 있었다. 사연은 제각각이어서 처음 사귀던 날 입었던 옷이라거나,

 

프로포즈받을 때 입었던 옷이라거나, 결혼식때 입었던 옷이라거나. 그들에겐 이 옷이 그대로 자신들 삶의 한 조각이었을 거다.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쪼개져 나가며 벌어졌던 전쟁의 와중에도, 피난을 떠나던 꼬맹이들의 맘속에는 사랑이 일렁였다.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낀 채 병원에서 재활 훈련을 받던 상이용사와 간호사의 사랑이야기도 있었고.

 

잊을 수 없는 사랑이 남긴 거라곤 프랑스 국적밖에 없다는 한탄이 그대로 들리던 전시품도 있었고.

 

 

 

결혼식날 입었던 웨딩드레스나 혼인 증명서가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나중에 결혼 10주년에 다시 입고서 남편과 춤을 추리라던

 

아름다운 소망이 물거품으로 꺼져버린 후에, 그 웨딩드레스를 볼 때마다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아팠을까.

 

이 뮤지엄에 기증하고 나서 이제 자신은 다른 드레스를 입고 자신만의 춤을 추겠다는 기증자의 다짐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비록 조그마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선물이었을 망정, 그 물건 하나에 담긴 곡절과 의미와 추억은 이토록 길고도 깊다.

 

 

이 뮤지엄의 기념품 중 하나. 나쁜 기억을 지워준다는 지우개를 팔고 있었다. 이런 뮤지엄을 설립해 전세계의 실연한 이들로부터

 

스토리와 가슴아픈 징표들을 기증받는다는 아이디어도 굉장히 참신했는데 이런 깜찍한, 그렇지만 제법 위로가 되는 기념품이라니.

 

이런 것도 있었다. '당신은 최고에요, 그렇지만 ________', '당신 뿐이에요, 그렇지만 ________' 따위의 빈칸이 있는 카드들.

 

영원할 것만 같던 찬란한 사랑이 지고 난 후의 씁쓸하고도 가슴 아픈 시간을 그대로 직시하게 만들어주는 아이템들이다.

 

 

뮤지엄을 나와 다시 성마르크성당으로 향하는 길, 왠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운운하는 이들에게 어디 한번 보고서 이야기하라고

 

강추하고 싶은 뮤지엄에서 세계 각지의 사람들 마음이 깨지고 부서진 흔적들을 보고 나니 건물벽 균열조차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이집트 룩소에서 만난 Hassan에게 소개를 받아 직접 공장까지 가서 만들어온 카르투쉬 반지.

그에 따르면 이런 상형문자를 새긴 반지는 과거 파라오들이 왕의 상징으로 들고 있던 왕의 홀(인장)과 같은 의미를

띄고 있다고 했다. 엷은 웃음과 함께, 그는 그랬다. 넌 왕이 될 거야.


공장이라지만, 비어있는 은색 반지에 알파벳에 해당하는 그림들을 하나씩 녹여붙이는 작업을 손수 하는 조그마한

가내수공업 현장같은 느낌이었달까. 여덟 혹은 아홉 글자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이리저리 내 이름을

짜맞추어도 딱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사실 저기엔 y, t, z, s, c, h, e 그리고 앞뒤로는 '호루스의 눈' 그림과

또다른 수호상의 상징이 들어갔다. 그게 2004년 8월에 있었던 일.


그 이후로는 잠을 잘 때 빼고는 한번도 빼지 않았던 반지였다. 아, 저 오돌토돌한 문양 사이로 비누가 끼곤 했어서

씻을 때도 빼기는 했다. 반지를 끼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이집트의 풍경들이 떠올랐으며, 그때 내가 했던

생각들을 계속 쥐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이집트에서 발에 채이던 수다스런 옛사람들의 말풍선들..이 다시 그리워지는 날이다.

이집트에서 해온 카르투쉬 반지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 The Hieroglyphic Alphab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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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밭을 따라 걷고 있는데 왠 아저씨가 시야에서 얼쩡거리더니 갑자기 허리를 굽혔다.
다시 허리를 편 그의 손에서 빛나는 금반지 하나.

약간은 야단스런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금반지를 줏었다며 주인 아니냐는 시늉을 한다. 혹은 한번 보라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는 자기 손에 안 들어간다며 세째, 네째, 다섯째 손가락에 한번씩 넣어보고는 내게 들려준다.

엉겁결에 받아들고는 본능적으로 관찰한 반지의 안쪽엔 18K 어쩌구 찍힌 자국이 선명하고, 무게감도 이정도면 금반지 맞네 싶다. 순간 이게 왠 반지냐..내가 잊어버린 거라고 할까, 오만생각이 쿠앙, 하고 뻗쳐오른다.

자기한테는 안 맞는다며 선물로 준다더니 성큼성큼 네댓걸음 걸어가버리는 뒷모습이 수상했다. 이럴리가 없는데..분명 돈달라고 매달려야 정상일 텐데..고개 한번 갸웃거릴 타이밍 쯤, 뒤로 돌아서서 나를 보는 그의 심상찮은 눈빛.

배를 쓰다듬으며 배고프다고 하고, 스몰머니~스몰머니를 외치며 내 주머니와 가방을 가리키는 폼이 딱 예상했던 수준의 절반쯤이다. 이집트에선 내 시계와 반지, 목걸이까지 빼가려고 하던 녀석들과 마주쳤던 터라, 기대치가 높았나 보다. 여긴 아무리 그래도 빠리라구 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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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하게 반지를 땅에 내려놓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뒤에서 뭐라뭐라 소리치고 어쩌고 했지만, 그 사람 손에 쥐어주려해봐야 안 받을 거고 자꾸 말상대해봐야 분위기만 엄해질 거고. 마치 서로 총을 겨눈 두 사람이 눈치를 보며 가만히 땅바닥에 권총을 내려놓고 살며시 뒷걸음치듯, 그런 뽄새를 머릿속에 그리며 반지를 내려놓았댔다.

조금 따라오는 듯 싶어 살짝 겁도 났지만, 그렇게 흉악한 사람같지는 않았고 또 어찌됐건 내가 걷던 길이 콩코드광장으로 향하는 세느강변이었기에 사람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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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비슷한 일을 더 겪으면서, 최초의 준비단계부터 유심히 관찰할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알고 보니, 반지 따위 땅에 굴러다니지도 않았다. 애초 손에 쥐어졌던 반지, 골프 스윙하듯 땅바닥에 한번 스쳐준 거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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