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뿌옇고 희끄무레하기만 하던 무채색의 겨울 풍경에 샛노란 개나리빛이 하나 풀어헤쳐졌더니 그냥 봄이다.

 

 

 

서울숲과 바로 이어지는, 금호역 옆의 응봉역과 가까운, '응봉산'. 가끔 차를 몰고 다니다가 문득 눈에

 

띄었던 적은 있을지언정 서울 시내에 이런 이름의 산이 있는지도, 또 이 산이 봄철이면 샛노랗게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곳인지도 전혀 모른 채 서울살이 30년이 넘었다.

 

 

 

중간에 나타난 쉼터에서 잠시 앉아 쉬는 참, 등산객처럼 몸풀기 운동을 하시는 건지 아이들처럼 마주보며

 

장난을 치는 건지 헷갈리는 두 어르신을 향해 아주머니의 폰이 찰칵 소리를 냈다. 절로 웃음지어지는 풍경.

 

 

 

산이 그냥 노랗다. 아니, 이럴 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어렸을 때 48색 크레파스를 썼던 거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산이 그냥 개나리색 지천이다. 유독 춥고 길던 겨울이다 했는데 어느덧 개나리꽃에 뒤이어 파릇한

 

새잎까지 돋는 4월이 되었다.

 

 

 

온통 개나리꽃 덤불이 지천이었는지라 새하얀 목련 한 그루가 확 눈에 띄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직 채

 

꽃망울도 여물지 않아서 가까스로 삐쭉삐쭉 꽃이파리를 내밀고 있는 정도지만 곧 도톰하고 풍만하게

 

물이 차오르면 시원하고 다복스런 꽃망울을 펑펑 잘도 터뜨려댈 거다. 아직 바람이야 좀 차다지만.

 

 

 

응봉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바로 오늘 2012년 4월 13일 14시~17시까지 응봉산

 

개나리축제를 벌이는 공간이기도 하다지만, 사실 이렇게 산 전체가 개나리색으로 출렁이고 있는대야

 

새삼 축제를 벌일 것이 또 무에 있겠는가. 금요일 오후라니, 딱 초등학생들을 위한 어린이 축제겠다.

 

 

그저 그 즈음이 개나리꽃 구경을 위한 최상의 타이밍이겠거니 참고삼으면 족하다. 축제 전전날, 그러니까

 

온통 전국이 시뻘개지던 4.11 총선날에도 사람이 이렇게 많았어서 줄 서서 돌아다녀야 할 정도였다.

 

 

팔각정 도착. 생각보다 너른 공간에는 이미 몇몇 아이들이 저..뭐라 그러더라, 저 그림판을 그려놓고 놀다가

 

잠시 앉아 쉬고 있던 참이었다. 어렸을 때 저거 진짜 많이 하고 놀았는데.

 

 

 

흐물흐물하니 멀찍이 보이는 남산N타워. 보듬어 주겠다는 듯 꽃무더기를 매달고 조심스레 들어올린 꽃가지.

 

아직까지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하기만 한 겨울나무들이 황량한 풍경 앞을 막아선 노란 담벼락.

 

 

 

산이란 게 으레 그렇듯 응봉산에 오르는 길도 꽤나 여러갈래다. 서울숲에서부터 길게 걸어오는 길도 있고,

 

아니면 응봉역이나 금호역에서부터 오는 길도 있고, 아니면 아예 응봉산 둔턱까지 차로 올라와 능청스레

 

슬몃 개나리꽃밭에 섞여드는 길도 있는 거다.

 

 

산에서 내려와 응봉역 쪽으로 걷는 길. 응봉산을 가득 채운 개나리빛 물감이 산비탈을 타고 줄줄 흐르더니

 

살짝 낡고 허름한 풍경에도 발랄하고 따스한 봄기운을 전한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햇살에 반짝거리는 때는 바야흐로 3월말. 무슨 벌레의 딱딱하고 안전한 고치처럼 섬세하고

보드라운 꽃잎을 단단히 품었던 꽃망울이 쭉, 봄볕에 잡아째지기 직전이다.

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단 말이 내 입안에서 뒹군지는 고작 몇 년, 이 녀석들은 수백수천년 전부터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인간들의 말따위와는 상관없이 때가 되면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중학교 다닐때던가, 왕님이 사시는 궁궐만 백칸짜리 건물로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양반댁들은 그보다 한 칸 모자란 구십구칸짜리 건물로 집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거 같다. 백 칸이면

방이 백 개, 구십구칸이면 방이 구십구개니까 고작 방 하나 차이일 뿐, 커다랗기는 매한가지다. 


충북 보은에 그런 구십구칸짜리 한옥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 '선병국 가옥'이란 곳이다. 더구나

1904년부터 1921년에 걸쳐 건축된 건물인지라 시멘트나 벽돌도 활용되었다는둥 나름 전통과 현대가 버무려진

곳이라 하여 더욱 호기심이 동했다.

선병국 가옥에 들어서는 초입, 보기만 해도 여유로운 정자 하나. 누렇게 익은 솔잎들을 처마 위에 소담하게

쌓아올린 모습이 맘에 팍 꽂혔다.

비록 구십구칸이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지는 않다지만 여전히 상당부분 그대로 남아서, 그 후손들과 객들의

일상생활을 떠받치는 제대로 된 집 구실을 한다고 한다. 사람 손을 계속 타야 온기도 느껴지고 보존도 되고,

그렇단 걸 알고 있는 분들이다. 장담그기 체험프로그램도 있다던가, 그래선지 와글와글 모여있는 장독들. 

(그리고 반대편께로 와글와글 모여있는 '파워블로거'분들..굉장한 장비와 굉장굉장한 글빨/말빨을 가지신.)

뒤로 산을 이고 있었다. 풍수란 거,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은

차치하고라도 미감의 측면에서, 자연의 어디메쯤 놓이면 이쁜 그림이 나올지에 대한 경험적 미감이 축적된

심미안으로부터 비롯한 걸지 모르겠다고. 구름이 솔찮이 낀 하늘, 덩굴이 솔찮이 휘감은 담장, 이뻤다.

조금 징그럽다 싶을 정도로 빽빽한 덩굴들, 북쪽의 응달진 곳이라 저렇게 더욱 비비적대며 살겠다고 아우성인

건가보다. 본채와 따로 떨어져서 배치된 '효열각' 기왓장 위로 삐쭉삐쭉 자란 풀떼기들이 보인다.

효열각 안으로 들어서니, 모처럼 보는 듯한 자연스레 퇴락한 단청이 멋스럽다. 너무 선명하고 작위적이다 싶은

모습, 혹은 아예 미미한 맛조차 남지 않은 모습들은 쉽게 보이지만 이렇게 살짝 바래고 씻겨나가기란 쉽지

않을 거 같다. 적당히 인간의 것이기도, 또 적당히 자연의 것이기도 한 그 기교랄까, 신비랄까.

어흥. 호랑이는 아니고 무슨 괴물딱지같긴 하지만 어쨌든, 백호의 해 기념삼아 어흥.

벽에 찰싹 붙은 채 사방으로 종횡하는 덩굴 줄기를 보노라면, 파직파직 사방으로 균열이 번져나가며 깨어지는

유리창을 초고속카메라로 돌려보는 느낌이다.

효열각을 마지막으로 올려봐주고, 안에 있는 비석을 촬영하려 몇 번 시도하다 전부 실패. 살풋 말려올라간 처마

끝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곡선이 편안하다.

만리장성만큼은 아니지만 구불구불 꽤나 긴 담장으로 둘러쳐진 선병국 가옥채에 들어서는 입구.

옆으로 계속 이어지는 담장따라 시선을 넘겨보면 운치있고 담백한 느낌의 건물들이 차곡차곡 들어서 있다.

그리고 마당엔 제법 수령이 되어보이는 잘 생긴 나무 하나, 뒤로는 구름을 뒤집어쓴 아늑한 산 하나.

"이리오너라"를 여기서 아무리 외쳐봐야 건물 안에까지 안 들렸을 거 같은데. 예전에는 과객실, 방앗간채까지

있었다고 하니 아마 이옆에도 뭔가 발레파킹할 때 쓰이는 간이천막같은 거라도 있지 않았을까.

사랑채. 건물 기둥이 모두 둥글둥글한 원기둥인 게 눈에 띈다. 안채는 네모기둥과 원기둥이 모두 쓰였다던데

뭐가 전통적인 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쩜 둘다 전통적으로 쓰이던 스타일인지도. 
 
바람소리를 기다리는 풍경.
 
나무 자체의 발색이 그대로 살아있는 문틀이 고상해 보인다. 화려하지 않고 깔끔하다 싶으면서.

바싹 마른 해바라기는 그런, 갓 베어낸 나무색이다.

따뜻한 발바닥을 기다리는 추운 털신.

삐뚤게 박힌 석등, 살풋 열린 정지간 문짝. 발랄한 노란빛 토담을 지그시 눌러주는 기왓장.

안채, 사실은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서있었지만 살짝 돌고 나왔다. 시멘트로 마감된 기와지붕, 벽돌로

정돈된 한옥집의 아랫도리. 끝에서 끝까지 이어진 빨랫줄에 쭉 늘어선 옷가지와 이불들이 다정하다.

두툼한 패딩점퍼를 벗어던지듯 쭉 찢어진 목련꽃방울, 그 곳에서 봄기운이 쏟아져내린다.

부엌에서 이어진 연통이 ㄴ자 형태로 하늘을 향했다. 문짝 하나하나가 세심하게 공들여 만들어졌다는 느낌은

여기서도 계속됐다.

잘 손질된 생선, 조기인지 뭔지, 안채의 어느 나무기둥에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연목구어, 가끔은 통한다.

바닥에 철퍽 떨어지는 생생한 소리와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걸 보면 분명 재래식 화장실인데, 이런 식으로

'현대화된' 재래식 화장실은 첨이다. 차마 찍을 순 없었지만 나름 발로 조종가능한 뚜껑도 있고, 찍지는 못해도

체험은 해볼 수 있었다. 다만 그 주황빛 함석지붕이 주변 경치를 흐트려놓아 아쉬웠달까.

돌아나서는 길, 작년 가을에 나리워졌을 낙엽들이 여전히 소복하다. 왠지 테이프를 거꾸로 감듯 저 낙엽들이

다시 물기를 쭉쭉 빨아선 초록빛 가득 채워 포르르 날아오르는 걸 상상하니 즐겁다. 착착, 자신들이 의탁했던

가지로 다시 돌아가 단단히 붙는 초록잎새들의 향연이라면.

살짝 삐뚤게 매달린 우편함이 외려 편안해 보인다.

둘러보고 나오는 길, 놓쳤던 풍경이 하나 시선을 끌었다. 저긴 뭔데 한쪽 면이 전부 저렇게 나무로 짜여져 있는

걸까. 굉장히 독특해 보이는 나무빗살무늬가 가득하다.

토담길 옆 나무 한그루가 땅거죽을 뚫고 허리케인처럼 솟아올랐다.

잘 가라고 배웅하는 풍선춤 나무 두 그루. 온 몸이 오글오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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