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꼬싸멧의 아침, 조금은 흐린 남국의 겨울 하늘이었지만 잔잔하게 찰박거리는 바다 위로 금비늘이 번뜩거렸다.

 

벌써부터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를 감각하고 있는 커플.

 

 

 

빠른 속도로 떠오르는 태양, 조가비 껍데기들 틈새로 잘도 비집고 쏘아지는 햇살.

 

 

금비늘이 번뜩이는 파도가 쓸고 간 해변 모래사장 위에는 금모래가 남았다.

 

그리고 어느틈엔가 리조트 앞바다의 단조로운 풍경 속으로 틈입해 들어오는 고기잡이배들.

 

 

태국 꼬싸멧의 동부 해안가, 핫 싸이 깨우(보석모래 해변)에서 아오 힌콕(돌 언덕 해변), 그리고 아오 파이(대나무 해변)이란

 

이름으로 이어지는 그곳에서 늘어지게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우선 아침 겸 점심. 탁한 색깔로 바래버린 먼지투성이 팬이

 

머리 위에서 빙빙 돌아가는 길가의 음식점에서 간단한 식사로 토스트, 햄과 베이컨 등.

 

텔레비전이 있는 음식점을 들어갈 때마다 꼭 한번씩은 한국 드라마나 한국 배우를 봤던 거 같다.

 

여전히 한국의 촌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시골 상회같은 느낌으로 번다한 음식점의 카운터.

 

그리고 꼬싸멧 동부해안의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어 쉽게 구분하기 쉽지 않은 어느 해안으로 들어가는 길목.

 

아마도 아오 힌 콕과 아오 파이의 사이쯤이랄까, 사실 해변의 이름이 중요하진 않다.

 

이렇게 하얗고 보드랍고 고운, 밀가루같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법한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을 하고 쉴 수 있다면.

 

뜨거운 햇살을 막아줄 천을 파는 아저씨가 온몸을 칭칭 가리고서 모래사장을 산책중이셨고.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파라솔과 긴의자들은 따끈하게 덥혀지는 중이었으며.

 

비로소 자리를 잡고 돌아본 주변 풍경은 정말이지..

 

구아바니 망고니 코코넛을 바구니에 담고 팔러다니시는 행상아주머니도 적절한 타이밍에 찾아주시고.

 

 

어느 중년의 부부는 양산을 하나씩 받쳐들고서, 한손엔 신발을 덜렁거리면서 나란히 백사장을 거닐고 있었다.

 

 

모래사장이 워낙 하얗고 깨끗해서 더욱 맑고 투명해보이는 바닷물.

 

 

바닷물이 이런 파스텔톤의 에메랄드빛이랄까, 청록빛으로 반짝거리는 데야 뭍에서 버틸 재간이 없는 거다.

 

 

잠시 뛰어들어 파도랑 놀다가 다시 파라솔 아래로 들어오면 파라솔에 걸러진 기분좋은 햇살이 몸을 말려준다.

 

이런 풍경을 보면 기분이 더 좋아지기도 한다..지만 잘 모르겠고. 크흠.

 

 

해가 슬금슬금 중천으로 오르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로 내몰렸나보다.

 

그러고 보니 긴의자 옆에 적힌 저 태국문자, 이국적이고 매력적이다.

 

 

사람들이 슬슬 많이 보인다 싶더니 패러세일링 하는 사람도 계속 보이고, 멀리 나간 배들도 많아진 듯 하다.

 

파라솔 이용료를 걷으러 다니는 아주머니의 움직임은 살짝 부산해진 거 같지만 역시 여유롭기만 하다.

 

 

파라솔 아래서 뒹굴, 청록빛 파도 아래서 뒹굴, 하다가 슬몃 몸을 일으켜 술을 찾으러 가는 길.

 

술집에는 시계를 걸어두지 않는다더니, 여긴 그래도 시간은 봐가며 마시라고 하나보다. 저 온갖 류의 신의 물방울들은 어쩌고.

 

꽁무니에 태국 국기를 펄럭이며 앞코를 들썩들썩, 벌름벌름하는 게 어지간히 배고픈 모양새다. 내달리는 모터보트.

 

숨은 쉬고 있나, 걱정될 정도로 몸을 운신하지 못하던 검둥개 녀석. 만사 귀찮거나 어지간히 나른한 게다.

 

 

꺄아..이런 물빛을 맨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건 정말.

 

패러세일링이나 스노클링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직접 찾아다녀주시는 서비스.

 

흠..찍으려던 게 뭐였냐면..저 푸른 바다..

 

아니면 이렇게 의자까지 갖고 다니시는 간식 파는 아주머니 아저씨.

 

그러고 보면 파라솔 아래 긴의자 밑에는 예기치 않게 강아지들이 숨어있다. 곳곳에 숨은 강아지를 찾아라.

 

그치만 다시 시선은 푸른 바다..로 쏠리고.

 

서양 꼬맹이들은 왜케 인형처럼 귀엽게 생긴 건지, 금새 커버리고 징그러워지겠지만서도.

 

어느 험난한 시절엔가 목을 잘린 불상이런가, 해변 들머리에 놓여있던 부처의 미소가 은근하다.

 

MEDITATION이란 글자 왼쪽에 이렇게 내리깔고 있는 눈매도 인상적이고.

 

그러고 보면, 여기서 이렇게 목걸이도 꿰고 팔찌도 꿰는 이네들의 눈매가 저 그림이랑 닮았다. 순하고 정신적인 느낌.

 

꼬싸멧의 동쪽 해변,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굴려대며 보낸 한나절.

 

달리 해야 할 것도 보다 중요할 것도 없던 그런 더할나위없던 시간.

 

 

태국 꼬싸멧, 역삼각형 섬을 둘러 하얗고 고운 백사장이 끊이지 않는 천혜의 휴양섬.

 

넉넉한 잎사귀가 짙은 그늘을 드리운 아래 색색의 긴 의자가 사람들을 유혹하던 그 곳.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일랑 시크하게 무시해주고 긴의자 아래 자리를 잡고는 아침 댓바람부터 퍼져버린 검둥개 한 마리.

한 장의 사진을 기억하며 찾았던 강릉 경포해수욕장. 해풍을 막는 야트막한 솔숲 너머로 깔끔한 흔들의자가,

그리고 그 너머로 탈색되어버린 듯한 누런 빛의 모래사장과 퍼러딩딩한 바다가 있었다.

바다에 도달하면 더 나아갈 곳이 없다 멈추게 되지만, 사실 조금만 몸을 틀면 될 일이다. 바다와 함께, 파도소리와

함께 발맞춰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무한하게 뻗어가는 거다.

모래사장엔 경사에 기대어 꽁꽁 얼어있는 잔설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여름철 뜨겁게 달궈졌던 누런 모래사장이

색이 바랜듯 창백해져버린지라 시퍼렇게 차가운 얼음눈들은 자연스레 보호색을 맞춰입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다를 따라 앞서 걸어간 걸음걸이들. 발자욱들이 줄맞춰 정연히 늘어선 게 왠지 땅을 헤집어둔 공동묘지같다.

무언가 저 구덩이에 넣고 봉긋하게 흙을 쌓아올리면 파도가 와서 다 쓸어버릴 것 같은. 그런 세기말적 풍경.

바다를 따라 걷는 기분이 그랬다. 파티나 잔치가 끝난 뒤의 적막함이랄까, 50연발 폭죽이 숨쉴틈 없이 터지고 나서

텅 비어버린 채 모래사장에 나뒹구는 느낌. 겨울바다의 풍경들이 하얗게 재만 남아버린 가슴에 날아와 박혔댔다.

BGM은 서영은의 '겨울바다', 경포해수욕장에서 무작정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뭐 뾰족한 일정이 있는 것도

가야 할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냥 저 위쪽 어딘가에 테라로사라는 까페가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슬슬 걸어보기로 했던 참이었다. 바다를 따라 걷다가 불쑥 기습하는 파도에 발걸음이 뒤척거리기도 하고,

문득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발걸음이 파도에 씻겨내리기도 하는 길.

그러다 문득 발에 채인 유리병 하나. 와인병에 코르크 마개로 단단히 막힌 게,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까지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게 한눈에도 파도에 실려온 메시지를 담고 있어 보였다. 뭐지, 일본에서 왔나. 아님 미국..?

그 자리에서 코르크마개를 따고 안의 종이두루마리를 꺼내 보았다. 약간 습기가 차 있긴 했지만 까끌한 종이의

질감이 그대로 남아있고, 테이프로 허리춤이 둘둘 감겨 있어 슬쩍 들춰본 속지엔 한글이 써져 있는 듯. 일단은

들고 가다가 나중에 따뜻한 데 앉아서 읽어보기로 했다.

꽁꽁 언 민물길이 바다로 향하는 길, 얼음에 반사된 빛무리들이 시멘트 교각 바닥을 긁으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삼면이 바다라는 한국의 해안가에 빼놓을 수 없는, 군부대와 군대 시설물들. 여긴 심지어 탱크가 한대

바닷바람에 녹슬어가고 있었다.

뭍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모래사장 사이로 야트막한 개울을 만들었다. 찰박거리며 위태로이 바다로 향하는

물길을 시시각각 얼리며 덮쳐오는 얼음판, 그 위로 성글게 번지는 빛그림자.


더이상 물의 흐름이 읽히지 않는 빙판, 여러번 깨지고 얼고 깨지고 얼고의 과정을 반복한 듯 조각난 얼음판들이

조각보처럼 이리저리 얽혔다.

그리고 어느 모래사장에 꽂힌 채 당당히 바다를 굽어보던 팽팽한 낚시대 하나. 가늘고 약해 보이는 낚시대가

바싹 성난 듯이 머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게 제법 긴장감을 머금고 있다.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뒷주머니가 허전해졌다. 아까 그 와인병 안에서 꺼냈던 메시지를 뒷춤에 꼽아넣고 있었는데

여러번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카메라를 만지다 보니 어느 틈에 도망가 버린 것. 왠지, 그 종이쪼가리를 꼭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발걸음을 되짚어 거꾸로 걷길 십여분. 이렇게 얌전히 구덩이에 놓여있는 걸 용케 다시 만났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가슴이 시원해진다. 바다가 떠밀어 보내준 메시지도 다시 찾았고,

방파제를 때려부술 듯한 소리를 내며 들썩이는 파도를 보며 계속 걸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깨어졌을 유리조각조차 이렇게 부드럽고 둥그런 모습으로 바꿔버리는 파도의, 바다의 위력.

특히나 겨울바다가 주는 신산하고 허한 느낌이란 건,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고 잘게 부숴버리다가

종국에는 남는 것 하나 없이 지워버리는 그 압도적이고 거대한 힘에 대한 경외감이나 허무함일지도 모르겠다.

겨울이라 그런지, 바다 색깔이 한결 더 검푸르다. 잉크처럼 검푸른 바닷물이 수면으로 밀어올려져서는 점점

에메랄드빛으로 연해지다간 하얀 파도로 보글보글. 모래사장까지 끌려나온 파도는 뒤미쳐 온 파도에 익사해버린다.

이쯤이 좋겠다 싶어서, 메시지를 펼쳐 보았다. 누군가의 글씨가 하얀 종이 가득 적힌 채 인연을 칭하며 친구를

청하고 있었고, 언제나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인사까지 적혀있었던 메시지. 이메일 주소도 적혀있었지만

알아볼 수가 없어 연락할 도리는 없고, 배를 접어 바다에 띄워보내는 게 최선이지 싶었다.

그렇게 뭍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개울에 띄워서 바다로 흘려보내며. 중간중간 모래톱에

걸쳐 멈추기도 하고, 빙글빙글 제자리에 맴을 돌기도 했지만 어쨌든 바다까지 나가는데 성공.

순긋해변이던가, 간소하게 만들어진 부두가 방파제의 품 속에 안겨 있었다. 시뻘겋게 녹슨 철제구조물 위로

앙상하게 덮인 나무판때기, 그리고 딱딱한 부두시설과 딱딱하고 약한 배 사이의 완충을 위한 고무타이어.


파도가 철썩철썩 방파제에 속절없이 부딪혀 깨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부두의 외곽을 단단히 감싼 방파제,

언뜻 보면 아무렇게나 팔다리를 쩍쩍 벌린 채 내팽개친 탕녀나 탕아 같기도 하다.

모래사장을 따라 계속 걷고 있는 참이었다. 경포대에서 사근진, 순긋, 순포해변까지 이름이 계속 바뀌고는

있었지만, 모래사장은 죽 이어진 한 길이었다. 물론 이렇게 중간중간 민물이 넘실거리며 모래사장을 가르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물이 마른 겨울철이라 잔뜩 녹슨 다리는 아무 쓰임도 없이 그저 거기 있을 뿐.


바다를 계속 끼고 걷자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까는 바다가 모든 걸 지워버리고 무화시켜 버리는 힘을

갖고 있어서 허무하다 했지만, 아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아무리 잘게 깨고 부수고 으깨어도 뭔가는


남는다. 그렇게 남은 것들이 조금씩 쌓여 모래사장을 이룬 걸 테니까. 말하자면 저건 수백년, 수만년 전의

감정과 희로애락이 그대로 담겨 있는 거대한 아카이브인지도 모른다.

사념(思念), 사념(沙念), 모래들의 사념들. 파도가 아무리 으깨고 바스라뜨릴 기세로 억겁년을 덤벼든다 해도

사념들은 고스란히 남는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한다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씩 해가 기울어갔다. 쉬엄쉬엄 사진도 찍고 돌아보기도 하며 걸은 길인지라, 게다가 바닥이 단단하지 않아

걷기 쉽지 않은 모래사장으로만 따라 걸어온 길인지라 꽤나 시간을 들여 걷고 있었다.

저 너머 고래등처럼 수면 위로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에는 갈매기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석들이

싸질렀을 게 뻔한 배설물들이 성난 파도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하얀 줄무늬가 얼룩덜룩.

순포해변을 지나 계속 올라가려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다. 해안가를 따라 철망을 얹은 철책이 끝없이

이어져있고 중간중간 저렇게 침투 대비용 표찰까지 붙여놨다. 어렸을 때는 돌멩이를 철책에 꼽아놨었던 거 같은데.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 녹슨 깡통만 굴러다니며 버려진 해변이나 마찬가지다.

한쪽엔 바다를, 한쪽엔 부대를 끼고서 아예 쭉 주파해버릴 생각으로 열심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난리가

났다. 호루라기를 불고 손을 흔들고. 더이상 접근하지 말라길래 은근 부아가 나서 걍 지나간다는데 왜 난리냐고

한마디 했다가, 그냥 왔던 걸음 되짚어 돌아가기로. 불쌍한 군바리들, 까라면 까는 그들이 무슨 잘못인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트리 위에 얹었던 탈지면 솜뭉치를 닮은 얼어붙은 눈 한조각. 밟으면 아작아작 소리가 나는게

좋아서 한참 밟고 돌아다니다가 조그마한 이 녀석은 차마 밟지 못하고 사진 한장.

이 녀석은 얼마나 묵은 걸까. 모래를 잔뜩 묵은 이 녀석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단단한 알루미늄 캔이 호일처럼

얊고 약해질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조금씩 몸이 헐어가며 모래알로 변해갈 거다.

돌아나와선 부대 뒷켠의 차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앙상한 싸리비를 거꾸로 꽂아놓은 듯한 겨울 나무, 그 위로

싸리비에 이리저리 쓸리고 번져버린 듯한 겨울 하늘. 슬몃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애초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걷던 참이었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이 근방에 테라로사라는 까페가 있다고 했었다.

겨울바다라봐야, 도착하면 금세 추워져서 이내 돌아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저런 까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거짓말처럼 눈 앞에 번쩍 나타났다.

그렇게 근 세시간, 경포대에서부터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모래사장을 밟아 걷던 길이 끝나고, 테라로사에 앉아

다시 또 네다섯시간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글도 끼적이고.


잔뜩 걸었지만, 쉼없이 뭔가를 생각했던 것 같지만. 막상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다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따뜻한 까페 안에서 이상한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던. 그렇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




투르크의 아쉬하바드, 사막으로 유명한 그 건조하고 뜨거운 나라에서 대로변에 꽃으로 조경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모래먼지가 섞여 대개 뿌옇게 번져나는 하늘 아래, 물이 부족하고 양분이 부족해서 시들시들하게

자라난 나무들도 힘겹게 버티고 있는 그 땅에 여릿하고 가냘픈 꽃들을 심어놓는다는 건.

바싹 말라서 물기나 윤기라곤 없는 퍽퍽한 흙이 갈라져나가는 균열 틈새로 잘못 빠져버린 듯한 꽃뭉치들은,

그나마도 아직 모래폭풍에 당하기 전이라 그런지 꽃잎색깔이 선연했다.

모래폭풍이 다가오는 순간, 저 멀리서부터 웅웅거리며 다가오는 거무스름하고 기분나쁜 형체가 건물을 한채씩

집어삼키면서 착실히,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겁고 걸쭉한 액체가 압도적인 느낌으로

퍼져나가며 흐르듯 모래폭풍은 그렇게 건조하지만 굉장히 밀도높고 걸쭉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리고 부실한 나무들을 열지어 촘촘하게 박아둔 조림지에 마치 쓰나미가 휩쓸어오듯 모래폭풍이 다가왔다.

그나마 띄엄띄엄 있던 건물들이 파도에 안 먹히려 잠시나마 저항하다가 꿀꺽, 한 입에 삼켜졌다.

그리고 눈앞을 지나, 내가 있는 곳까지 삼켜버린 모래폭풍. 난 이때쯤 모래폭풍의 뱃속에 들어있던 셈일까.

내다볼 수 있는 가시거리가 급격하게 짧아졌고, 숨을 들여마시면 거칠고 푸석한 흙냄새가 뱃속까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이 모래폭풍의 아가리는 내 뒤로 쉼없이 내달리고 있을 텐데, 대체 몸통은 얼마나 큰거지.

기다리기 지루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모래폭풍이 지났구나 싶었다. 사실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계속

대기의 색깔이 시시각각 변했겠지만, 어느 순간 흙빛에서 그나마 푸른빛을 회복했다고 느낀 것.

그렇지만 사실 아쉬하바드에서 보았던 하늘은 대개 이렇게 뿌옇고 답답하고 잿빛이었던 거 같다. 햇빛이

좋을 때야 굉장히 쨍쨍, 신나게 반짝반짝거렸다지만. 그나마 투르크메니스탄에, 아쉬하바드 근교에 산업시설이

고도로 갖춰지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 흙먼지에 온갖 공업 부산물이나 오염물질이

합쳐진다고 생각하면.










 
타이완 도로에는 유난히 스쿠터들이 많다. 평소엔 버스니 승용차니 차선을 오롯이 차지한 차들과 다름없이 씽씽

잘만 달리다가, 일단 어디에고 신호등에 걸려 차들의 속도가 떨어지고 나면 맨 앞으로 스물스물 모여들어

그들만의 무리를 이루는 거다. 그들을 위해 신호등 앞에는 이렇게 스쿠터 전용 신호대기 공간까지 네모지게

만들어두고 스쿠터 모양의 표지까지 그려 두었다.

꼭 그것만 같다. 초등학교 때 자갈과 모래를 막 섞어둔 혼합물을 통안에 넣고 열심히 흔들면 모래는 밑으로 다

가라앉고 자갈들만 슝슝 모래를 뚫고 올라오는 분리 실험. 하나둘 차들 사이를 비집고 앞까지 기어나온

오토바이들이 늘어나다가 신호가 바뀔 무렵이 되면 거의 무슨 폭주족처럼 모여버린다.

밤이라고 다르지 않다. 가게들의 불빛이 대부분 꺼져버린 열두시 가까운 시간에도 일단 빨간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고 차들이 멈춰서면, 산개해서 달리던 오토바이들이 어느순간 신호등 코앞에 몰려든 채 부릉거리며

달려나갈 준비를 하는 거다.




시와라는 오아시스 마을이 있다.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쭈욱 달리다가 리비아 국경근처까지 한 15시간 버스 달림 나오는 아주아주 조그마한

마을인데, 주변은 온통 사막이다.

밤에 여우가 다녀간 모양이다. 우리가 자던 주변에 온통 동물발자국이 가득했고, 저만치 던져진 빵조각과 생선뼛조각

주위에는 거의 난장판 상태다. 6시쯤 인나서 서늘한, 아니 거의 춥다시피한 공기에 부르르 떨고선, 꽁꽁 얼어붙은 몸을

살살 달래며 모래 언덕을 오르내려주곤 해뜨는 걸 구경했다. 여긴 정말 왜 이렇게도 멋진 건지.

시와 사막에 이름자 새기기. 별달리 새길 만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발을 질질 끌며 커다란 이름을 새겼다.

알리가 모는 차를 타고 성난 파도에 비척거리는 자그마한 돛단배처럼 듄을 타고 오르내리며 신나라 하다가 차밖으로

떨어질 뻔 했다. 로데오 기분을 내보겠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놓고 있었던 탓이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음에도

좀체 눈이 사막에서 떨어지질 않으니 실감도 안 났다. 결국 호텔로 돌아와서도 아침을 대충 먹고서는 자전거를 빌려서는
 
다시 사막으로 나섰다.

우선 가깝다는 Fatnas Springs를 들러 사막으로 갔다. 거기서 바라보는 일출, 일몰도 아주 그림이라던데, 한참 달려

도착해보니 어쨌든 사막만은 못하다. 야자수숲이 운치있게 우거져있어서 사막이란 느낌도 다 죽어버렸달까. 이미

이 때 내게 미의 기준이란, 사막이다, 아니다로 갈려있을 정도였으니.


자전거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던데다가 길도 아주 달리기 좋은 정도여서 타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딱

멈춰서니 등덜미에 땀이 흥건하다. 망고주스를 한잔하고 Palm Tree Hotel의 자랑인 야자수정원서 한두시간 낮잠을 자곤

다시 사탕수수주스. 이번엔 바로 남쪽으로, Grand Sand Sea로 달렸다. 알렉산드리아로 나갈 표를 구하는 문제로

좀 주춤하긴 했지만, 역시 친절하게 길안내에 용건까지 대신 설명해주는 아저씨 덕분에 금방 '졸라 큰 사막바다'로.

자전거로는 더이상 전진이 불가능한 모래사장 속에서 허부적대다가 잠시 자전거를 버려두고 방랑. 그렇지, 사막에 꼭

있어야 할 법한 하얗게 백골이 되고 만 동물의 잔해, 그 립 하나를 쥐고 괴물처럼 뜯어먹는 시늉...은 좀 심했나.


조금 걷다가 문득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붉은기운 도는 누런 모래밖에 없음에 살짝 두려움마저 느끼고는 서둘러

자전거쪽으로 돌아나오길 수차례, 그저 사막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홀린듯이 바라봤댔다. 뭐랄까...

사막의 지평을 자아내는 그 온갖 모양의 선들...밋밋하다가도 휘영청 굽어지고, 잔뜩 곡선을 그리다가도 어느 순간 탁,

하고 급전직하하는 그런 선들. 혹은 부드러운 능선으로, 혹은 각잡힌 깍아지름으로. 때론 그저 한없이 펼쳐진 양 하다가도

때론 휘영청 감아돌아가는 그런 끝없는 선. 더불어 태양이 쏘아내는 햇살에 따라 변화무쌍한 그 음양감이라니.

그 굵은 몇개의 선들로 이뤄진 경관에 촘촘히 그려진 바람무늬를 보고 있으면, 아무도 밟은 자국 없는 그 순결한 땅에

차마 발자욱을 내기가 저어스러워질 정도였단 말이다.

내가 밟고 걸어간 발자국...그것이 그린 자그마한 모래언덕을 보고 있으면 어찌나 이건 아니다 싶은지, 우악스럽거나

혹은 무지하게 푸욱 파묻혀있을 뿐이거나. 내가 딛은 발자국에 드러난 모래굴곡은 너무도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데, 사막에 펼쳐진 굴곡은 그냥..어쩔 줄 모를 정도로 아름답다. 사막은, 딱 그대로 있어야 할 모습이란 말이다.

게다가 그 능선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세상의 절반으로 시야를 차지한다면야. 휴우...

사막에 딱 서면...그냥 나하고 모래...그것만 있는 셈인데, 그게 그렇게 좋다니. 무언가 완벽한 것이랑 마주하고 있는 그런

가슴벅참이 느껴졌다. 신이 있다면, 신을 마주한다면 그런 막막하고도 거대한 것을 마주한 느낌이지 않을까.




밤에 몇 번씩 깨어서 남은 포도 마저 먹고, 모기향도 다시 갈아줄 정도로 잠을 뒤척였다. 5시반쯤에 인나서 6시에 떠나는

투어를 준비하고 보니 일행 두 명이 슬며시 로비로 나온다. 체코인 파블로와 마르코, 처음엔 걍 몇 마디 주고받는 선에서

그치고, 이제 드디어 직접 밟을 수 있었던 사막에서의 일출을 감상하는데 집중..

사막은 생각했던만큼이나 굉장했는데 그 깨끗함이나 우아함, 그리고 순수함이랄까. 오로지 모래만으로 언덕을 이루고,

골짜기를 이루고 벌판이 되고. 게다가 그 고아하고 부드러운, 때로는 비현실적일만큼 아름답고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실루엣이라니. 아무리 보아도 성에 차지 않아, 결국 신발도 벗고 언덕에서 구르기도 하고, 전력으로 달리기도 해보고,

여태 바닷가에서도 제대로 해본 기억이 없는 모래찜질을 순식간에 해치우기도 하고. 그렇게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조금씩 사막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샌드보드. 사막에서 타는 보드는 정말 그럴 듯했다. 어찌나 재미나던지, 점점 경사가 급한 곳을 찾아서는

거침없이 내달려주고, 다시 헉헉거리며 보드를 들고 올라서는 또 순식간에 훅~ 달려주고. 휘영청 만곡한 듄을

타고 달리는데 몇 번을 타도 질리지가 않을 정도..결국 내가 급경사를 타고 내려오던 중 쫄아서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보드 발걸이를 뿌셔먹고서야 어쩔 수 없이 보드에서 내렸다.

그렇게 사막과의 첫대면을 질펀하게 해주시고, 핫스프링이랑 콜드스프링, 솔트레이크-온천, 냉천, 그리고 소금호수..

라고 바꿔 말하면 되려나-를 향했다.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이상적인 오아시스, 뭐랄까 손바닥만한 맑은 호수 주위를

추욱추욱 늘어진 초록빛 싱그런 야자수들이 뺑글하게 둘러싸고 있고, 야자가 툭툭 떨어지는 짙은 그늘 아래엔 왠지

파라솔이나 해먹이 매어져 있을 법한 그림과는 영 달랐다. 내가 그리던 맑고 깨끗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 워낙

만화적이란 건 알고 있었는데도 깜짝 놀랐다.


이미 넓게 펼쳐진 야자수숲 가운데쯤 엉성한 풀장 같은 게 있다. 이끼가 잔뜩 끼고 물고기도 잔뜩 사는..깊이도

무지하게 깊어 보이는 짙은 푸른색의 물. 여행을 떠나기 전 '물가를 멀리 하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되새기며 혹시 어젯밤 꿈이 더러웠던가 잠시 상기했다. 겨우 물에 들어갈 엄두를 냈던 건, 간밤에
 
꿈을 꾼 기억이 없었던 데다가, 이미 들어가서 유유히 놀고 있는 체코 친구들한테 꿀려보이기도 싫었고, 워낙

덥기도 했으며(이미 난 피부 때깔이 달라져 있었다..8월의 이집트란..), 그렇게 깊은 데를 여태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는 자각도 한 몫했다.

다이빙, 발이 닿지 않는다. 허부적대다가 오아시스의 가장자리를 테두리지어둔 바위에 겨우 의지하고, 다시 다이빙.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물에 대한 공포가 많이 사그라들었다. 도무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퍼런 물의

심연이나 문득문득 팔다리에 스치는 이끼의 매끈하고 섬뜩한 느낌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싶어서, 살짝살짝 수영해

나가는 거리를 높여가다가 결국 오아시스 횡단 성공. 힘이 빠져 중간에 퍼뜩 죽음을 떠올리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신났다. 파블로와 마르코가 사륜구동 차위에 올라 오아시스로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고 불끈, 나도 버둥버둥 차에

기어오르긴 했으나...차마 뛸 용기는 안 생겨서 패스. 사진만 찍어달라고 하고는 쪼르르 내려와버렸다.

그렇게 두어시간 놀다가 점심먹고 걸어간 곳이 소금호수. 팬티를 콜드스프링에서 벗어놓고 말린 참이라 바지를

입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지만, 바닥에 잔뜩 형성된 소금결정들이 가시처럼 온통 꽂히고 박히는 통에 차라리 

바지차림이 나았던 듯 하다. 절로 몸이 둥둥 뜨는 게 물장구치려는 몸짓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곳의

물이 피부에 좋다는 이야기에 나름대로 열심히 세수도 하고 몸도 여러차례 앞뒤로 뒤집어 주고. 

핫스프링은 그냥, 온천물같았다. 거기서조차 이끼가 잔뜩 끼고 하도 더러워보여서 발만 좀 담가보고 세수 한번

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콜드스프링에 가서, 소금 가시들이 잔뜩 박혀있는 바지도 빨 겸 열심히 놀다가

호텔로 돌아와 휴식. 밤에는 사막에서 자며 별을 보기로 했는지라, 좀 자두는 만치 오늘밤 사막에서 별을 더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다시 출발해서 템플 오브 오라클, 아문,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연못까지. 생각보다 좀 다 별로였다. 아무래도

문명 세계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인지라 붕괴되기 전의 유적들도 좀 급이 낮은 것들 아니었을까. 클레오파트라의

연못은 잠깐 클레오파트라가 쉬었다 갔다던가...뭐 그래서 붙은 이름이라니 말 다했다. 그치만 역시 사막에서 

듄에 올라 바라본 석양이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다.  

사막에서 언덕을 오르내리고 초승달처럼 잔뜩 휘어진 언덕 아래 자리를 깔고 생선이랑 빵, 밥이랑 해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 그리고 그보다 빠르게 날아와 박히는 별, 별, 별들. 그렇게

많은 별들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은하수란 게 저토록 선명하리라곤. 우윳길, 혹은 젖길이라고 불리웠다던

과거의 이름이 왜 붙게 되었는지 실감했을 정도로, 그렇게 이쁜 줄은 몰랐다. 안내인 알리와 압둘라를 비롯한

우리 일행들은 한국어, 체코어와 아랍어 등 저마다의 언어로 말하다가 영어로 말하다가.

별구경하며 사막의 밤을 보내면 은근히 엄습하리라 예상했던 괜시리 센치한 고민 따위로 다운될 여지조차 없었다.

완벽한 항복. 완전한 충일감. 쉼없이 떨어져내리는 별똥별 역시, 넌 떨어져라 난 즐길란다. 딱히 빌 소원조차 없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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