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놀러갈 때마다 슬쩍슬쩍 걷던 길이, 멀리 청사포항에서 달맞이고개, 달맞이고개에서 해운대를 지나 동백섬,

 

동백섬을 지나 광안리해수욕장까지 걷게 되다 보니 얼추 바닷가를 따라 내려오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된거

 

계속 이어서 가보자고 시작한 길이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이기대 공원을 지나 오륙도까지.

 

처음에 광안리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지날 때만 해도 그 코스가 의외로 길고 힘들 줄은

 

몰랐던지라 카메라며 노트북이 든 가방을 그대로 메고 걸었던 거다.

 

 

이렇게 바닷바람에 온통 시퍼렇게 녹이 슬고 만 송수구에도 굳이 무릎을 꿇어가며 사진을 찍을 만큼 여유롭던 출발.

 

그리고 이렇게 낚시대 네다섯개를 일정하게 벌여놓고 고기를 기다리는 아저씨 옆에서 잠시 구경할 만큼 느릿느릿.

 

 

길에 표지판도 있고 걸어온 거리, 앞으로 걸어가야 할 거리가 적혀 있긴 했다지만 꼭 끝까지 갈 생각도 아니었고,

 

그냥 되는 대로 설렁설렁 걸으며 사진이나 찍을 생각이었으니까.

 

 

 재미있는 조형미를 가진 등대를 구경하기도 하고.

 

 부산의 세찬 바닷바람에 떨어질세라 케이블타이로 꽁꽁 묶인 화분들의 열차놀이.

 

 어라, 그러다 보니까 이기대해안산책로의 입구쯤이다. 그리고 비로소 한눈에 잡히는 광안대교와 해운대 신시가지.

 

 제법 시가지와 떨어져 흙길을 밟는 느낌이 좋았다. 마치 울릉도나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느낌같기도 하고.

 

 

 이기대 해안산책로 초입의 웨딩홀이던가, 한적한 까페가 있는 곳에서 잠시 앉아 딴짓도 하고 책도 보고.

 

역시 이때만 해도 이기대 해안산책로가 한번 걷기 시작하면 중간에 빠져나오기가 힘든 통발같은 코스란 걸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계속 걸어갈수록 광안대교와 해운대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더 멋진 각도와 뷰포인트들이 나타났다.

 

 

 

예컨대 이런 장면. 우와...감탄감탄.

 

 

그리고 해안산책로를 따라 계속 이어지는 해안선의 거칠고 투박한 분위기도 맘에 들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지긴 했는지 야외촬영중인 예비부부들도 보이고, 곳곳에 커플들이 해바라기중이다.

 

 

나중에는 해가 지고 나서도 한번 와봐야겠다고 생각한 게, 영화 '해운대'에 나왔던 야경을 보던 장소가 여기라나.

 

아...이즈음부터 풍경이 살짝 등산과도 같다 싶었는데, 돌아나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왠지 한쪽에서 약숫물이 이렇게 흐르는 풍경도 그렇고.

 

 

 

다소 지루하다 싶도록 녹색의 짙은 숲길을 헤치고 나가는 해안산책로, 사실 제법 오르내리막도 있고 풍경도

 

심심하진 않았지만 전날의 숙취와 며칠전의 지리산 둘레길 트레킹 덕분인지 조금 녹색에 질려있던 참인 듯.

 

그래도 결국 이 구간의 종점이라는 오륙도까지 도착하니 좋다. 어쩌면 숲길을 뚫고 사람 사는 동네로 나왔다는 게

 

좋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늦게 출발하고 여유부리다보니 사실 바다아래로 넘어가려는 해가 조마조마했었다.

 

오륙도 전망대에 꽂힌 화살표들. 도쿄와 엘에이와 독도, 홍콩, 그리고 뜬금없는 질문이 하나. 당신과 나의 거리는?

 

언젠가 해운대의 바다를 보면서, 그리고 광안해수욕장의 바다를 보면서 여기는 동해인지 남해인지

 

궁금해했던 때가 있었다. 어차피 인간들이 붙인 자의적인 구분이긴 하지만, 비로소 여기에서 해답을 발견.

 

오륙도는 동해와 남해를 구분하는 분기점, 그러니까 오륙도 동쪽의 해운대니 광안리 앞은 동해바다 되시겠다.

 

오륙도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볼 수 있는 스카이워크도 있더라는. 오후6시인가가 마지막 시간대여서

 

들어가 밟아보진 못하고 이렇게 멀리서 어찌 생겼는지나 한장.

 

보는 각도, 그리고 밀물썰물에 따라 다섯개로도 보였다가 여섯개로도 보였다가 해서 이름이 오륙도.

 

이제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라는 노래가사에 떠올릴 수 있는 풍경이 생겼다.

 

알고보니 이곳 오륙도에서부터 해운대 끝의 미포까지가 동해를 따라 걷는 해파랑길 1코스란다.

 

지자체마다 해파랑길이니 갈맷길이니 강릉바우길이니 강화 나들길이니, 온갖 이름으로 트레킹 코스를 만들어놨지만

 

이런 식의 난립은 조금 곤란한 거 같기도.

 

그러니까 저 굽이굽이의 이기대 해안산책로를 지나 광안대교를 따라 광안해수욕장을 걷고 동백섬을 휘감아 한바퀴

 

돌아본 후에 해운대 해수욕장을 따라 달맞이고개까지, 대략 14키로정도의 해파랑 1코스.

 

삽시간에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가방은 사정없이 어깨를 조여와서 택시를 잡아탈까 하다가 눈앞에 버스정류장이

 

나타났다. 종점인지 버스 몇대가 출발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온통 바닷바람에 녹슨 양철표지판이 삐걱대던 곳.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오륙도의 모습. 제법 듬성듬성 초록빛 머리칼이 풍성한게 아직 미중년의 모습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케이블카, 파웰역(powell st.)에서부터 피어39(pier39)까지 한 이십분 걸리던가. 한번 맘먹고 걸어봤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 걸리는 길은 아니었다. 한..오십분 거리였던 듯. 아래는 그렇게 걸어가면서 마주친 풍경들 스냅샷.

 

왼켠집의 일층이 오른켠집의 이층이 될 만큼의 가파른 경사길, 나중에 자전거를 타고 여길 다녀보고야 그 극악한 경사도를 깨닫다.

 

손을 꼭 부여잡고 신나게 앞뒤로 흔들며 발걸음도 가벼운 커플의 뒷모습이 부러워 냉큼 도촬. 어디까지 가려나 내심 기대했지만

 

피어39까지는커녕 바로 앞 골목에서 홱 꺾어선 어디론가 들어가버려서 살짝 아쉬웠다.

 

 

사거리의 네 방향 모두 일단 스탑. 굉장히 천천히 서행하는 차들의 여유로움만 보면 이 도시도 참 살기 좋은 거 같은데,

 

십분이 멀다하고 빽빽거리는 불자동차 소리는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을 거 같다.

 

 

어디였더라, 무슨 호텔 앞에 있던 분수대에는 다소 뜬금없다 싶은 청동주물의 유럽 느낌 물씬한 조각들이 가득.

 

터널을 지나기도 하고, 터널 너머 차이나타운을 지나치기도 하고.

 

쓰레기로 하수구가 막히니 버리지 마시오, 라는 영어 메시지는 이해하겠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게의 그림은 뭐지. 바다가 머지 않았다.

 

역시나. 꼬부랑 고개를 여덟개쯤 넘고 나니 저 너머에 시퍼런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뉴욕 소호지구에서 특히나 많이 봤던, 건물 외벽에 설치된 접이식 층계.

 

문득 주거지역 한복판에서 아마도 버스 종점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수십대의 버스를 차곡차곡 채워놓은 공간도 만나고.

 

그러고 나니 피셔맨스워프(fisherman's wharf), 바다다. 짠내와 섞여나오던 스프레이 냄새는 이 아저씨의 것.

 

 

뉴욕의 브루클린과 맨하탄을 잇는 현수교, 브루클린 브리지의 브루클린 쪽 시작점이다.

 

맨하탄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길과 자전거가 오가는 길이 마치 차선처럼 분명히 그려져 있었는데

 

다리를 지나는 자전거들이 워낙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탓에 자연스레 차선을 신경쓰게 된다.

 

차들은 도보로 지날 수 있는 길 양쪽으로 쌩쌩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고. 건너에는 그라운드 제로에 새롭게

 

지어지는 WTC 건물 공사현장이 눈에 띈다.

 

그리고 맨하탄 브리지. 브루클린 브리지보다 북쪽에 위치한 현수교인데, 이 정도 거리를 두고 보니 외관이 한눈에 잡힌다.

 

 

다리를 넘어 맨하탄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제법 길고,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도 많다. 사진도 팔고, 그림도 팔고,

 

악기도 연주하는가 하면 온갖 뉴욕의 기념품들도 파는 사람들이 많다.

 

 

브루클린 브리지의 중간 지점. 아낌없이 건물마다 나부끼는 성조기들에 이미 질려있었지만, 이 다리에도 역시.

 

다리 위로 멀찍이 아마도 JFK 공항을 떠나거나 들어서고 있는 듯한 비행기 한 대가 보인다.

 

 

그리고 온통 주위를 칭칭 감아버리는 듯한 튼튼하고 두꺼운 밧줄들. 밧줄로 지탱되는 현수교인 브루클린 브리지는

 

애초 건설을 맡았던 사람과 그 뒤를 이은 아들이 각각 사고사로 유명을 달리하고 난 후 아들의 와이프, 그러니까

 

며느리가 뒤를 이어 완공시킨 다리라고 한다.

 

 

맨하탄 브리지 너머로 유난히 우뚝 솟아있는 건 바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그리고 브루클린 브리지 왼쪽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섬은 스테이튼 아일랜드, 거기 손들고 선 건 자유의 여신상이다.

 

 

브루클린 브리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새겨놓은 동판이 있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은 글자와 그림을 훑었다.

 

맨하탄의 다운타운, 월가와 9.11의 자취인 그라운드제로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미드타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고 그 주변으로는 코리아타운이 있을 텐데.

 

 

 

 

중간중간 벤치도 있어서 앉아서 쉬는 사람도 보이고, 맨하탄 방향과 브루클린 방향으로 자유로이 오가는 사람들 틈새를

 

문득 가로지르고 내달리는 자전거족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고.

 

 

 

어쩌다 시작된 걸까, 다리의 곳곳에 걸쇠가 있는 곳이면 이렇게 주렁주렁 포도처럼 영근 자물쇠들의 향연.

 

누가 왔었다느니, 사랑한다느니, 아니면 그저 단순하게 이름만 적어놓고 가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

 

 

 

그리고 어느덧 다리는 맨하탄 위로 뻗어올라오기 시작, 웰컴 투 맨하탄~!의 표지가 보이고, 브루클린 브리지 중앙에서부터

 

양쪽 다리 끝까지 뻗어나간 굵고 튼튼한 밧줄들이 어느결엔가 속도를 잃고 툭툭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브루클린 브리지 도보 산책은 끝. 생각보다 길다면 길 수도 있고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브루클린쪽에서부터

 

걸어오며 점점 눈앞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맨하탄의 존재감은 생각보다 커다랗다. 그저 하나의 스카이라인으로 존재했던

 

건물들이 하나씩 둘씩 무더기지어지며 다운타운과 미드타운을 만들고, 이내 건물 하나하나의 디테일까지 살아나는 풍경.

 

 

아, 다만 이 다리 위에 있는 한 NYPD가 CCTV로 감시하고 있다는 건 감안해야 할 일이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행남등대에서 도동 여객터미널로 향하는 길, 섬 곳곳에서 보이던 검정 염소들이 여기서도 심술궂은 눈빛을 하고 대기중.

 

 

등대에서 도동항까지는 약 1.8km, 그렇게 길지 않은 거리지만 작정하고 한걸음 한걸음 음미하며 걷기로 했다.

 

참고로 이 코스는 '1박2일'에서 울릉도를 다녀가며 꼭 짚고 갔던 바로 그 코스. 도동항~행남등대~촛대암 구간이다.

 

 

그래서 글보다는 사진 위주로 포스팅~* 슝슝 넘겨보시다 보면 바다와 함께 걷는 분위기가 1g이라도 풍기길 바라며.

 

 

 

 

 

높은 곳에 선 등대에서 내려와, 아까 소라계단으로 불쑥 올라선 높이만큼을 내려선 즈음 다시 바다가 보인다.

 

 

묵호에서 들어가는 배는 더이상 도동항을 쓰지 않고 그 아래쪽 사동항에서 입출항하게 되었다. 상인들의 반대가

 

없지 않다고는 하는데, 그런 점에서 산책로에 대한 접근성은 과거보다 좋지는 않을 듯.

 

 

쉼없이 철썩이는 파도 앞에서 굳이 꿋꿋하게 높다란 돌탑을 쌓아올린 인간들의 집요하고 무모한 소망들.

 

저 방송이 천년만년 갈 것도 아니고, 촬영지란 게 뭔 커다란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여하튼 페인트칠 지대로.

 

 

 

 

저렇게 기묘하게 돌을 세워둔 건 또 뭐지 싶어서 눈여겨 보게 되던 돌탑 하나. 본드로 붙였으려나.

 

짠기 다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꿋꿋이 꽃을 피워냈다. 꽃잎이 찌글찌글해졌을지언정 빛깔은 굽힘이 없다.

 

 

 

 

 

 

제법 오르내림이 크던 산책로. 두사람이 함께 지나기에도 부담스런 좁은 길, 바싹 몸을 당겨서 철퍽 앉아 쉬었다.

 

 

 

 

 

제법 가파른 계단에서 삼일째 혹사 중인 발에 급기야 경련이 살짝. 절룩거리며 걷다가 제멋대로 눌린 셔터에 한장.

 

 

 

멀찍이 보이기 시작한 도동항의 뱃전들.

 

 

 

 

 

이게 뭐라더라, 육손이였던가. 티비에 나왔던 그거라고 옆엣 어른들이 말씀하시던데, 뭔가 좋은 건가 싶어 일단 찍고 보기.

 

 

그리고 도동항 도착 전에 하나 나타나는 쉼터. 끊길 듯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산책로길이 재미있다.

 

 

 

 

 

 

 

 

 

 

 

 

바닷물을 잔뜩 머금고 시뻘겋게 녹이 슬어버린 구름다리 하나가, 그저 살짝 시멘트더미 위에 얹힌 느낌으로 떠 있다.

 

잠시 앉아서, 1.8리터짜리 물통을 내려놓고, 삼각대와 옷가지로 꽉 찬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쉬는 참.

 

 

아이들이 쏟아내는 새우깡 부스럭지를 향해 엄청시리 달려드는 갈매기떼들.

 

 

 

 

 

 

 

바닷물에 삭아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군데군데 암석이 얇아지다가 녹아내린 듯한 풍경의 해안가 돌벼락.

 

 

 

거대한 돌과 돌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산책로를 따라, 앞서거니 뒷서거니 구멍을 희롱하는 바람을 따라.

 

 

 

 

 

저런 빛깔은 파란색 타일로 바닥이 덮여있는 실내 수영장에서나 봤던 거 같은데. 연신 산책로에 포말을 뱉어대는 바다의 빛깔.

 

 

 

 

 

 

 도동항이 가까워질 무렵, 해산물을 파는 노점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걸어놓은 게 틀림없는 울릉도산 오징어.

 

 

 그리고 도동항으로 내려서는 입구. 오징어 그림이 푹 파인 그림을 좇아 계단을 내려가면 해안산책로의 종점이다.

 

그렇게 울릉도에서 가장 번성한 항구이자 가장 번화한, 도동 도착.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저동항의 촛대암에서 도동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걷는 산책로가 시작되는 곳, 행남등대까지 약 2km 정도의 구간이다.

 

촛대암에 바싹 붙어선 방파제 위에서 멀찍이 보이는 곶, 그 위의 자그마한 구조물이 바로 행남등대. 그 너머가 도동항.

 

해안산책로, 말 그대로 해안에 바싹 붙어서 슬쩍슬쩍 오르내리며 바람소리 파도소리 귀기울이며 걷는 길이다.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죽도가 멀찍이 배웅해주고 있기도 하고.

 

 

빨강, 주황, 노랑, 녹색, 무지개 색깔을 빠짐없이 짚어가며 길을 이어가는 구름다리들. 발판 틈새로 퍼런 바다가 넘실넘실.

 

 

그리고 조금씩 크게 나타나는 소라계단. 드릴처럼 비비 꼬인 계단이 해수면에서부터 훌쩍 언덕 위로 치솟는다.

 

 

구름다리를 몇 개 지나고, 이따금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머릿칼을 한껏 나부끼며 산발을 한 즈음.

 

물빛이 참 곱다. 빛깔만 해도 화려한데 쉼없는 물결이 더해져서 몽롱하기까지 하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작은 드라이버 드릴심 같던 소라계단이 석유시추선의 드릴만큼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투명한 청색으로 반짝거리고 있는 울릉도 앞바다.

 

 

무려 57미터의 높이를 커버하는 소라계단. 노약자 및 임산부, 심신장애자는 조심하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사실 그렇게 어지럽거나 가파르진 않고, 그냥 좀 뱅글뱅글 가는구나 싶다보면 어느새 이만큼 눈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제 바다는 숨고 초록빛 숲 한가운데 길을 걷기 시작. 행남등대로 걷는 길이다.

 

 

 

등대까지 남은 거리는 300미터. 저 귀여운 오징어 캐릭터를 좀더 적극적으로 써도 좋겠다 싶다.

 

 

녹색 장막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울릉도의 풍경. 저동항과 촛대암이 저 멀리 보인다.

 

촛대암, 방파제가 저렇게 항구를 막아서서 이 곳의 어업 환경이 수월해졌다고는 하지만 촛대암이 아쉽다.

 

행남등대 도착!

 

 

옥상에 한번 올라가서 굽어 살펴주고, 다시 내려와서 야외 전망대로 향하는 길.

 

 

울릉도, 그리고 북저바위, 오른쪽 끄트머리에는 죽도.

 

저동항에서부터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와 구름다리들, 오는 내내 감탄했던 쪽빛바다의 색감은 그대로다.

 

 

울릉도의 단연 특출한 세가지를 꼽으라면 숲, 공기, 그리고 물이 아닐까 싶다. 섬 내의 모든 물은 수돗물이 아니라

 

울릉도 해양심층수라고 하는데, 정말 물맛이 확연히 다르다. 등대를 떠나 도동항으로 계속 이어지는 해안산책로를 다시 밟기 전

 

화장실에서 좀 씻기도 하고 머리도 감고 물통에 물도 다시 채우고 출발.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남양리에서 맞는 울릉도 세번째 날, 그대로 섬의 아랫도리를 따라 걸을까 하다가, 아무래도 동선이 애매하여

 

울릉도 입항한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중교통을 한번 타기로 했다.

 

 

3일차, 오후 5시반 배를 타고 나가기로 했으니 저동에까지 일단 버스를 타고 가서, 내수전을 거쳐 저동항,

 

촛대암, 행남등대를 지나는 해안산책로를 따라 도동으로 들어가 사동항으로 가는 코스를 잡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삼사십분 간격으로 오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안되겠다 싶어 정류장 앞의 따개비칼국수집에서

 

한그릇 말아먹고, 해군사령부에서 붙여준 간첩선 식별 스티커도 숙지하고.

 

 

저 멀리 보이는 옆구리 구멍 빵빵 나있는 터널도 구경하고, 남양리 앞바다도 굽어보고.

 

WARP~! 한 이십분 타고 나서 촛대암이 우뚝한 저동항에서 내렸다. 내수전은 이번에 못 가본 울릉도 동북쪽과 더불어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하고, 저동항부터 한바퀴 둘러보고 해안산책로 따라 도동쪽으로 넘어가는 걸로.

 

저동항 앞에 길게 방파제를 박정희 대통령때 만드는 바람에 촛대암이 그 이전과 같은 위엄은 상실했다지만.

 

저동항에 죽 늘어선 해산물시장, 이층짜리 회집타운에 올라가는 계단에서 아래를 향해 부리부리한 눈알을

 

굴리며 마치 천하대장군처럼 당당히 서 있는 오징어 한마리.

 

울릉도스럽다, 라고 해야 하려나. 오징어잡이 집어등을 따로 모으는 수거함이 항구 한쪽에 있고.

 

저동항 한 쪽에 있는 이 커다란 갈매기같은 기묘한 건물은..아마 배에 뭔가를 싣거나 부릴 때 쓰는 구조물이려나.

 

 

 

 

 

저동항을 거의 감싸다시피한 방파제 안의 차분한 바다에서 다닥다닥 주차된 배들이 곰실곰실 움직이고 있었다.

 

 

 

 

방파제를 따라 걸어서 촛대암 근접 촬영. 제법 크고 굵직한 게 위에 갈매기 둥지 여남은개는 품고도 남겠다.

 

 

울릉도 동쪽의 커다란 북저바위, 그너머로 보이는 한 가구가 살고 있다는 죽도. 이게 일본어로는 제대로 '다께시마'가

 

되겠다. 생긴 건 살짝 종합운동장처럼 생겼고, 왠지 위로 솟을수록 풍성해지는 모양새가 사람 살기 좋을 듯한.

 

 

보통 울릉도에서 배를 타고 나가서 돌아보는 코스로는 크게 독도 왕복, 아니면 죽도 왕복, 이렇게 두개 코스가 있다고

 

하니 다음에 또 울릉도를 오게 되면 나머지 울릉도를 돌아보고, 죽도랑 독도를 가봐야겠다.

 

 

 

방파제 안전난간에 자리를 잡고 저동항을 바라보는 갈매기 녀석의 매서운 눈빛.

 

 

그리고 저동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도동쪽, 해안도로가 저 바윗덩이 중간중간에 숨어있다.

 

그리고 저동에서 도동으로 이어지는 해안산책로 입구. 뭔가 두터운 콘크리트 벽을 넘어서면

 

새로운 풍경이 확 덤벼들 거 같은 느낌의 출입문이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태하 등대가 굽어보고 있는 동그란 만 형태의 바다, 짙은 에메랄드빛 잉크를 풀어내린 듯한 파도가 부서지던 곳.

 

태하 앞바다를 따라 걷는 해안 산책로, 뱅글뱅글 올라가는 길을 걸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저런 건 거리를 살짝

 

두고 보는 게 인상적이지 막상 저 나선궤도 위에 올라서면 별반 흥취가 없다며.

 

태하까지 왔으니 울릉도 북쪽 해안의 동에서 서까지 걸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

 

야트막하고 자그마한 집들이 좁다란 골목을 함께 나눠쓰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

 

뜨거운 계절엔 누군가의 수영복과 옷가지를 얹어두고 두팔 펼쳤을 빨랫대도 얌전히 쉬고 있다.

 

다시 태하삼거리로 돌아가는 길, 아무래도 저녁은 남양약소숯불구이를 먹어야겠다.

 

 

도로변에 이어진 너른 공터 한가득 나물을 말리고 있는 아주머니들. 트럭까지 동원해서 정말 대규모로 널고 계셨다.

 

거기서부터 이젠 남쪽으로 걷기로 했다. 울릉도에 있는 두개의 둘레길은 태하에서 남양을 잇는 길 하나,

 

그리고 내수전과 석포를 잇는 길 하나. 그중 태하에서 남양을 잇는 약 7km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

 

태하 등대에서부터 남양까지 치자면 대충 9km 정도 되는 거리, 그치만 결과적으로 길을 잘못 들어버려서

 

태하령입구를 지나 구암으로 빠져 남양까지 걸었으니 대충 11.2km 정도. 2km 정도야 대충 30분 더 걸으면 되는 정도니까.

 

예부터 있던 길을 다시 연결해서 만들어놓은 둘레길이라고 들었는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살짝 의심부터 든다.

 

차는 고사하고 인적조차 한동안 끊겼던 길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거다. 온통 범람한 녹색의 이파리들도 그렇고.

 

생각보다 길도 험하다. 오르내리막이 연속되는 꼬부랑 고개가 꼬불꼬불, 하늘을 온통 가린 두터운 녹색의 장막.

 

게다가 여기가 어디쯤인지, 제대로 된 길은 맞는지 알려주는 표지가 굉장히 귀했던 것도 뭔가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부채질했다. 사람 하나 없는 길에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울리면 사방에서 흑비둘기가 푸드덕거리는 짙은 숲속 외길.

 

 

그래도 한참 걷다보니 이런 정자도 나타나고. 숲에 대한 소개나 식생에 대한 정보가 담긴 안내판들도 정비되어 있고.

 

 

 

벤치도 중간에 조금 꾸며져 있긴 했는데, 정말 사람 손을 거의 타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에 잡아먹혀서는 이제 엉덩이 반쪽 자리할 공간도 없으니.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며 점점 고도가 올라간다 싶다가, 태하령에서 고비를 찍고는 본격적으로 다시 내려가는 길.

 

'구비구비 버혀낸 긴긴 겨울밤'이 이럴라나 싶을 정도로 배배 꼬인 창자같은 길을 슬슬 풀어내는 참에

 

거꾸로 눈돌려 확인한 울릉도 제2둘레길의 호젓함. 차량 통행이 금지되었는지라 굳이 걸어서 넘어갈 사람 아니고서는

 

이 길을 이용할 일이 없는 거다. 그게 이 길을 걷는 동안 사람 하나 발견하지 못한 채 짙은 숲을 음미할 수 있었던 이유.

 

둘레길의 시작점과 종점이 명확하지 않긴 하지만, 대충 사람의 흔적이 길 양옆으로 남아있는 즈음부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가로등이 양쪽에 늘어서고, 하늘까지 치솟은 나무들의 키높이가 곤두박질치고, 비료 봉투를

 

뒤집어 세워 허수아비를 갈음하는 자그마한 개간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체 시작점과 종점이 어디인지 명료하지 않은 상황,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안내판들이 세워진 상황에서

 

몇 km 남고 몇 km 걸었는지 따위 계산은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외길이어서 그저 걸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어느순간 옆길로 새더니 구암 쪽으로 걷고 있었단 걸 발견했을 때 좀 신기하긴 했지만.

 

뭐 잘못 들어선 길이긴 했지만, 꼭 다시 되짚어 바로잡을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손바닥만한 섬', 아무리 애를 써서

 

모로 가려 애써봐야 거기서 거기다. 시속 4km의 도보로는 나름 굉장히 광활한 땅처럼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아직 해가 한참 남았는데 번쩍 가로등이 불을 밝혔다. 알게 모르게 슬슬 조바심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순간.

 

 

구비구비, 저기만 지나면 눈앞에 울릉도 남쪽 바다가 보이겠거니, 생각하다가 헛탕치기를 몇 차례.

 

뭐 그래도 발걸음이 한가로운 완만한 내리막길.

 

이 사진의 제목은 왠지 그런 거 어떨까 싶다. '삼송의 최후'라거나 뭐 그런거.

 

 

드디어 울릉도 남쪽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가 저만치 땡겨지도록, 태하를 출발한 이후부터 사람 하나 못 보고.

 

 

그러다가 우르르 길가에 나와 맞이해주던 까망색 흑염소 녀석들. 무슨 고산지대 산양처럼 맘껏 뛰놀던.

 

구암마을, 울릉둘레길로 돌아가는 안내판이랑 버스정류장을 보며. 무엇보다 눈앞에 바로 놓인 바다를 보며.

 

 

이제 해안도로를 따라 남양리로 걷는 길이다. 남양엔 유명한 남양약소숯불구이집이 있다니 저녁은 그곳에서 먹기로 하고.

 

 

구암과 남양 사이의 사태감 터널. 여느 터널과는 좀 다르다 싶어 유심히 살피다가 이유를 알았다.

 

 

구멍이 뽕뽕 나있는 외벽은, 언제고 바다가 거칠어지고 높은 파도가 몰아칠 때 터널 구조물이 좀더 버티도록.

 

바닷물이 들이칠 때 타격이 덜하도록, 그리고 빠져나갈 때 좀더 쉽게 빠져나가도록 만들어진 거 같다.

 

 

그리고 남양 몽돌해변으로 이어지는 동글동글한 자갈 마당이 파도에 씻기우고.

 

 

울릉도에서 공사를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제법 여기저기 공사판이다. 그 앞에 보이는 게 구암터널.

 

 

남쪽 해안이라 해넘이가 잘 보이진 않을 거 같고, 살짝 바다가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양리에 들어서는 길에 바로 보이는 사자바위, 그 앞에 남근바위도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남근 비스무레한 건 찾는데 실패. 사실 이녀석도 딱히 사자다워 보이진 않는데.

 

그리고 투구봉. 신라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의 우산국을 정벌했을 때 우산국 왕이 벗어놓은 투구가 봉우리가 되었다.

 

혹시나, 떨어지는 해와 경쟁해서 달리면 사진 한장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싶어 남양리 안쪽으로 들어가

 

남서일몰전망대를 찾아보았는데. 발은 아프고 배는 고프고 길도 모르겠고 하여 잠시 헤매이다 포기.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태하항 옆의 해안산책로, 뱅글뱅글 말려올라가는 골뱅이 계단이 전신주에서 뻗어나간 전선들마저 감아돌리려 든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해변마을. 민박집을 겸한 자그마한 슈퍼와 이발소와 음식점들.

 

 

 

태하 등대와 전망대로 가는 모노레일을 타는 길.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운행이나 하려나 싶었는데 그래도 수시 운행중이다.

 

 

몰랐었는데 위에 올라가고야 알게 된 사실. 태하등대까지 올라가는데 꼭 모노레일을 탈 필요는 없다. 살짝 걸어올라가는

 

길이 있다고 하는데 걸어보신 분 말씀으로는 그 길도 제법 가파르지만 이쁘다고 했다.

 

 

모노레일 타고 올라가는 길, 거의 수직 급상승하는 느낌으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눈높이를 따라 바닷물 수위가 모노레일

 

위로 넘실넘실 차오르기 시작했다.

 

 

모노레일 안에 붙어있던 울릉도 순환버스 시간표. 버스회사 이름이 '우산버스'다.

 

한때 우산국이라는 이름의 나라였던 자취가 이런 식으로나마 남아있었다.

 

 

모노레일은 한 육분 정도, 순식간에 해안가에서 가파른 야산 위로 올라왔다. 태하 등대 가는 길은 한때 굉장했다는 향나무숲.

 

태하 등대와 전망대의 갈림길에서 푯말을 들고 두뺨을 붉힌 오징오징 오징어.

 

 

 

전망대 한가운데에는 밑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나무를 위한 공간을 틔워놓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들이 국내의 10대 비경 중 하나로 손꼽았다는 태하 등대 앞의 푸른 바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동남아 어느 리조트 앞바다에서나 볼 법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저렇게 시시각각 다른 빛깔을 내뿜으며 반짝거리는 푸른 파도의 질감이라거나

 

하얀 포말을 포기할 수 없어서 사진들을 골라내고 버리기를 포기해 버렸다.

 

이쪽 끝으로 가서 내려다보다가, 또 다시 저쪽 끝으로 가서 하염없이 내려다보다가.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그 맑고 부드러운 색감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을 머물렀다.

 

어찌 바닷물 색깔이 저런 빛을 띌 수 있는 건지. 

 

 

그리고 등대. 태하 등대는 전망대 바로 옆에 붙어 있다시피 하다.

 

거대한 대왕오징어, 괴수 크라켄이 빨판이 그득한 다리를 꿈틀거리며 지상으로 솟아오르는 중.

 

 

다시 모노레일을 타러 내려가는 길, 아까는 조용하던 염소가 갑자기 울어제끼며 사진을 보챈다.

 

역시 이곳도, 도르레가 설치되어 있어 간단한 물품을 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모노레일이 내려가는 방향의 바다, 방파제가 저렇게 정연하게 차곡차곡 놓인 모습은 보기 쉽지 않은데.

 

두 량짜리 모노레일, 어렸을 적 타고 놀던 다람쥐통처럼 동그랗게 생겼다.

 

 

또다시 수직낙하하는 기분으로 가파르게 내려앉는 길, 같이 모노레일을 탔던 분들이 너른 유리창 너머 바다와

 

태하항의 풍경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울릉도 평리의 예림원(a.k.a. 문자조각공원)을 걸어나와서 다시 북쪽 해변을 따라 울릉도 서안으로 향하는 길.

 

둥글둥글 다듬어진 자갈들이 차르르륵 차르르륵 소리를 내며 파도랑 얼싸안고 나뒹구는 해변.

 

 

 

시멘트 옹벽 아래까지 도톨도톨한 돌기가 선연한 분홍빛 혀를 빼물고는 온통 흐드러진 꽃무더기.

 

그러고 보면, 바다로 향한 등대의 왼쪽은 꼭 빨간색, 오른쪽은 꼭 하얀색으로 반짝거린다. 일종의 약속인 듯 하다.

 

 

현포항에 들어서는 길목, 방파제가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있는 야트막한 내해에 소심하게 뻗어나간 구름다리.

 

뒷꿈치가 완전히 아작이 나서, 게다가 울릉도의 길가엔 편의점도 슈퍼도 흔치 않아서, 급기야 현포항에 들어서

 

가장 먼저 눈에 띄인 경찰서에 무작정 들어갔다. 밴드랑 기타 응급약상자가 있을까 했는데, 없다며 근처의 주민분께

 

밴드를 얻어주신 경찰 아저씨를 기다리다 한 컷. 걸음이 빠른 경찰 아저씨가 화면 한구석에 잡혔다.

 

 

맨발도 답이 아니고, 밴드를 발라봐야 이미 뒷꿈치는 피칠갑을 했고. 잠시 암담해하며 쉬어가던 참. 주머니에 꽂았던

 

핸드폰은 그냥 신발에 발 대신 우겨넣고 노래를 틀어버렸다. 신발이 그대로 주크박스로 변신해 버린 참이다.

 

그래도 돌아보면, 한걸음 한걸음 걷다보니 저만치 멀어져 버렸다.

 

 

잠시 앉아 쉬어가던 현포 전망대. 멀찍이 지나쳐온 코끼리바위니 노인봉이니, 송곳니처럼 삐쭉 튀어나온 송곳산도 보인다.

 

그리고 울릉도의 밭떼기에서 자주 보이던 저 조그마한 모노레일. 아니지, 레일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니 '모노'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워낙 경사가 심한 비탈을 일구고 가꿔야 하니 이동네엔 저게 필수품일 듯.

 

울릉도는 크게 북면, 서면, 그리고 울릉읍으로 나뉜다. 울릉도 북쪽 해변의 서쪽끝과 동쪽끝을 꼭지점으로 한 역삼각형

 

모양으로 울릉도 북쪽을 차지한 북면의 끄트머리를 지나는 참. 돈키호테를 기다리는 커다란 바람개비가 꽂힌 곳이다.

 

 

현포와 태하 사이, 그러니까 울릉도의 북면과 서면을 가로지르는 고갯길은 구불구불 꼬부랑길.

 

슬슬 짙푸른 군청빛의 바다가 하늘로 기어오르고.

 

조그마한 초등학교 분교 앞 운동장 가득 뭔가를 널어 말리는 계신 아주머니들을 지나.(아마도 울릉도 특산나물 '부지깽이'인 듯)

 

이처럼 씁쓸하고 잔인한 이야기가 서려있는 성하신당으로 도착.

 

 

나이 어린 동남동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백골이 되기까지 사람을 원망했을까, 울릉도 앞 험한 바다를 원망했을까.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눈이 뜨이고 나니 온몸이 아팠지만, 뒷꿈치는 얼얼함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나섰다. 천부항의 아침.

 

 

바다를 따라 시계반대방향으로, 현포를 지나 태하등대까지 가볼까 하는 참이었다. 울릉도의 북쪽 해변가를 따라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에어콘 바람같은 시원한 강풍이 불어오는 쉼터가 있길래 일단 쉬고 보겠다며 엉덩이를 붙였다.

 

 

 

 

조금이라도 일찍 나서길 잘했다 싶었던 게, 날이 삼일 내내 흐리리라던 예보와는 달리 둘째날엔 아침부터 햇볕이 쨍쨍.

 

 

바닷가와 도로를 구획하고 있는 콘크리트 블록이 해풍과 파도에 온통 삭아내려 페인트가 벗겨지고 자갈들이 드러났다.

 

버스 정류장. 제법 띄엄띄엄 눈에 밟히긴 했는데 막상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던 한적한 울릉도.

 

 

울릉도 북쪽 해변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선 송곳산. 그 앞으로는 추산 몽돌해변이 펼쳐지고, 해변 너머 바닷가에는

 

코끼리 바위가 보인다. 툭 튀어나와 몸뚱이랑 떨어져 있는 굵은 기둥 하나가 영락없는 코끼리 코다.

 

 

각도를 달리 해서-한참 더 서쪽으로 걸어가서- 확인한 코끼리 바위의 코끼리 코.

 

 

 

 

 

투명하고 시퍼런 파도가 넘실거리며 둥글둥글한 돌멩이들을 희롱하는 소리에도 아랑곳않고 부동자세중인 새들.

 

그리고 뒷꿈치가 온통 까져버려서 급기야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기 시작한 시점. 그다지 현명한 짓은 아니었던 게,

 

얼마 걷지 못하고 맨발바닥 아래에 물집이 잡혀서 다시 신발을 꿰어차야 했다.

 

 

바다에 이랑을 내고 씨를 뿌리러 갈 기세인 산뜻한 색감의 경운기 한대가 바다에 찰싹 붙어 주차 중이다.

 

그리고, 들어갈까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입장했던 예림원, 문자조각공원. 망설였던 이유는 4,000원의 입장료도 아니고

 

구경온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한적한 분위기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해안도로에서 걸어가려면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꽤나 걸어야 했다는 이유, 게다가 발바닥에 콕콕 박혀오는 잔돌멩이들이 너무 많은 길이었어서.

 

 

 

 

이 바위의 이름은 얼굴바위였던가, 얼굴의 옆 실루엣이 어찌어찌 잘만 따져보면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전망대 아래를 잘 살피면 파도가 철썩이며 부딪히는 전복 바위랑 조개 바위도 찾을 수 있다는데.

 

 

 

 

 

얼굴바위 위까지 이어지는 전망대로 오르는 길. 오를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저 높이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궁금해졌다.

 

 

 

 

얼굴바위 위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아침에 꾸역꾸역 걸어온 길. 맨발에 느껴지던 서늘한 콘크리트의 감촉이 서서히

 

달아올라 뜨거워지기에 이른 시간만큼 해가 내달려선 하늘 높이 솟았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이내 도착할 곳, 현포항이 미리 내다보인다. 빨갛고 하얀 등대가 배들을 항구로 이끄는 곳.

 

반듯한 직선에 가까운 도로가 섬세한 물결이 새겨진 에메랄드빛 바다와 싱싱한 초록의 보들보들한 기슭을 가른다.

 

 

 

그리고 전망대에서 발견한 '젖봉' 또는 '찌찌봉'이라 불린다는 제법 리얼한 느낌의 봉우리 하나.

 

 

현포항의 모습을 좀더 바싹 땡겨보고는, 저쯤에서 점심을 먹으면 되겠구나 가늠해보았다.

 

 

 

정말 향기가 그윽하던, 그리고 한번 손으로 훑고 나니 한참이나 손과 온몸에 향기가 배어있던 섬백리향. 이름도 참 이쁘다.

 

예림원, 특히 예림원 안쪽에 자리한 얼굴바위 전망대는 꼭 한번 올라가 보시길 권하고 싶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울릉도 성인봉에서 내려가는 길, 다시금 발아래 짙은 구름을 헤치는 나가는 길이다.

 

 

 

제법 가파른 하산길엔 나무도 눕고 바람보다 먼저 고사리(같은 것)들도 누웠다.

 

 

대체로 보자면 성인봉 끄트머리를 잡고 바싹 땡겨올린 원뿔 모양을 하고 있는 울릉도, 그 북쪽 사면에 움푹 패인

 

너른 분지가 바로 나리분지. 옛날부터 사람이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곳이 나리분지 쪽이라고 한다.

 

 

 

 

 

 

나리분지 중간쯤에서 만난 투막집. 울릉도 전통 가옥인 투막집은 저멀리 구름을 두른 채 뾰족한 봉우리들과 대치 중.

 

 

 

 

 

 

사실 그렇다. 어디서부터가 성인봉 등산로의 시작이고 끝인지, 어디서부터 성인봉이고 옆 봉우리인지 알기란 어렵다.

 

그저 길이 이어질 뿐.

 

 

제법 늦은 시간에 성인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했는데, 나리분지가 끝나도록 여전히 해가 중천이다.

 

어디에 묵겠단 계획은 없었지만 이렇게 된 거, 바다를 보기로 했다. 울릉도 남쪽 바다에서 시작했으니 이제 북쪽 바다로.

 

 

 

 

파꽃이 온통 피어있는 밭을 지나고 캠프장을 지나, 길을 조금 더듬으며 가다 문득 고개를 돌려 발견한 풍경.

 

이곳저것 집들에서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연기가 뭉게뭉게 모여서는 산 중턱에 구름으로 걸렸다.

 

 

그러고 나니 다시 오르막길. 생각해보니 여긴 나리'분지'. 분지를 빠져나가려면 다시 야트막하나마

 

고개를 하나 다시 넘어야 하는 거다. 그냥 여기에서 멈출까 3초쯤 생각하다가 그냥 계속 걸었다.

 

고개를 얼추 올라 돌아본 나리분지의 전경. 마을이랄 것도 없는 집 몇 채가 듬성하니 꽂혀 있는 초록빛 풀밭같은 곳.

 

그리고 내리막. 닳고 나면 재생되지 않는다는 도가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파르고 꼬불거리던 길.

 

그냥 한바퀴 빙글 돌아 전방낙법을 치고 나면 아랫목에 도달했음 좋겠다 싶도록 지치고 질리고 힘들던 걸음.

 

홍살문이 하나 갈림길에 서서 삿된 것들을 걸러내고.

 

산을 둥글둥글 타고 내려가는 길은 대체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 건지, 이쪽으로 가면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멀찍이 보이는 바다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만 믿고 계속 걷기.

 

해가 조금씩 가라앉는가 싶더니 가속이 붙었다. 어느새 어둠이 살라먹은 짙은 숲, 나무그늘, 그리고 비탈의 사면들.

 

 

조금 마음이 바빠지던 찰나, 길을 헤매거나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지던 차에 문득 나타난 천부 마을.

 

 

이제야 안심하고 널 보낼 수 있을 듯 하여. 저물어가는 해를 잠시 구경해주며 아스팔트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가.

 

 

반나절만에 다시 만난 건물들이 반갑기도 하고, 그래봐야 울릉도의 조그마한 마을이라 아기자기하기도 하고.

 

 

'독도수호 중점학교'란 게 뭔지 모르겠지만, 독도의용대라도 양성하는 곳인지 뭔지. 여하간 자그마한 학교.

 

이 조그마한 마을에 내려서는 와중에 놀란 건,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건물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에 십자가가

 

네다섯 개나 꼽혀 있었던 모습. 그것도 하나같이 크고 높고 뾰족한. 음...

 

드디어 천부 도착. 다행히 여전히 밝은 중에 도착했다.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지 다음날이라 재수가 좋았던 걸지도.

 

 

잠시 바닷가를 거닐다가 바다를 코앞에 낀 전망 좋고 파도소리 좋은 펜션에 절룩거리며 들어갔더니 맘좋은

 

주인아주머니가 우뭇가사리로 만든 냉콩국을 한 사발 내어주셨다. 어찌나 감사하고 맛있게 먹었던지.

 

금세 어둠이 나리고, 밥먹을 곳을 찾아 조금 마을을 헤집고는 부둣가 제방에 앉아 바람 쐬며 파도소리 듣다가 한장.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KBS중계소부터 울릉도 성인봉 오르는 길, 계획없이 일행없이, 또 정해진 숙소없이 가는 길이었는지라 그냥

 

내키는 대로 걷고 쉬고 걸었다. 초반에 가팔랐던 비탈길은 정말 쉬엄쉬엄 올랐고.

 

 

 

나무데크로 잘 꾸며진 길을 지나 구름다리를 출렁출렁, 그냥 얌전히 지나려다가 괜히 우다다 뛰어서 건너보기도 하고

 

다시 돌아와 잠시 앉았다가 누웠다가 온몸으로 그 출렁이는 진동을 맛보기도 하고.

 

 

고사리같은 양치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에선 바람이 일일이 그 조그마한 이파리들을 손잡아주는 걸 보았고.

 

 

안개가 슬슬 서리기 시작하는 울릉도 깊은 산속의 흐릿한 풍경.

 

 

 

 

어디선가 숲의 정령이 톡 튀어나올 것만 같은 그런 풍경이 이어졌다.

 

 

그냥 아무 말없이, 가슴속 깊이 숲의 초록향을 들이마시며,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

 

 

나무들이 드릴처럼 윙윙 뿌리를 맹렬히 땅에다 대고 회전시켜 박아버린 느낌이다. 덕분에 좁다란 숲길마저 같이 휘감긴.

 

 

 

인적조차 없는 등산로. 쓰레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이 깨끗하게 관리되는 숲길이어서 문득 현실감이 희박해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퍼뜩 현실에 발딛게 해줬던 건 저런 산악회들의 끄나풀, 그리고 살짝 거슬리던 쥐새끼들.

 

 * 울릉도 때아닌 ‘들쥐와의 전쟁’ (2012. 6. 21, 문화일보)

 

 

기사에 여러 차례 다뤄질 만큼 들쥐들이 창궐한 것도 사실인 거 같고, 고양이가 있는 민가나 마을이 아닌 천적이 없는

 

산으로 전부 올라와 사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뭐..피리부는 사나이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다. (하여간 쥐가 문제...)

 

 

그래도, 들쥐 한마리가 길 앞섶에서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울릉도에서 사는 검은비둘기가 푸드덕거리며 머리 위 나뭇가지를 박차고 도망가는 게 더 사람을 놀래킨다.

 

 

 

 

이런 정경에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그저 아슴프레하고 꿈결같던 풍경.

 

촉촉하게 젖은 공기에 오래 묵은 나무 향기와 흙내음이 가득 담겨있던.

 

 

 

 

그리고 성인봉을 900미터 남겨둔 지점. 도동에서 출발하면 성인봉까지 대충 4~5km정도 소요된다고 생각함 될 듯.

 

KBS중계소를 기점으로 해서도 거리가 별반 차이는 없을 듯.

 

 

 

그리고 초록빛 운무를 꿰뚫고 나려든 빛무리.

 

 

오히려 정상에 오르니 구름인지 안개인지 뿌옇던 시야가 말끔해졌다. 성인봉 중턱에 짙게 드리웠던 커튼을 뚫고 올랐다.

 

 

성인봉 정상의 표석.

 

 

울릉도를 에워싼 푸른 바다와 하얀 구름바다. 그리고 희뿌연 하늘.

 

울릉도의 듬성듬성한 봉우리들이 구름바다 위로 섬처럼 솟았다.

 

 

검은 비둘기가 날고, 온갖 산새들이 지저귀고, 그리고 구름은 잠시동안 지켜보는 와중에도 시시각각 물결친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KBS중계소를 지나 울릉도 성인봉으로 오르는 길, 갈수록 가팔라지는 계단이나 비탈길에 지치다가도

 

잠시 옆 나무에 털썩 몸을 부려놓고 있으면 평생 처음 맡아보는 짙고 진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숲향이 그득.

 

 

위로 올라가며 어느순간 희뿌연 안개 같은 구름이 사방을 가리웠다. 일년 중 대부분의 날들을 이렇게

 

구름으로 휘감고 있는 봉우리인지라 성스럽다 하여 성인봉이라 이름지었다던가.

 

뭔가 네이쳐 리퍼블릭 광고 같이 초록빛이 농염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광고를 찍기에 딱 맞춤한,

 

그런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 이런 게 어쩌면 깊은 숲이나 원시림에 대한 뿌리깊은 경외심을 자아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숲향에 흠뻑 취해서 나무 사이를 뒤채며 내달리는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숲바람을 쐬노라면

 

금세 기운이 다시 회복되는 거다. 정말 취한 듯한 기분으로, 모세혈관 하나하나 깨어나는 기분으로.

 

 

그렇다고는 해도 몇 걸음 걷다가 이내 에라 모르겠다, 굳이 서둘러야 할 이유 따위 없으니 털썩.

 

오후 세네시쯤이어선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등산객들. 세상에 혼자 존재하는 느낌이다. 온갖 새소리들 빼고.

 

 

그렇게 쉬엄쉬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농밀하고 강렬한 숲향에 취하고 산바람에 희롱당하며 오르다가 문득.

 

어느 나무 등걸에 몸을 거의 뉘이고 있는데 불쑥 초록빛 운무를 뚫고 빛이 내렸다.

 

 

온통 희뿌옇고 어른어른한 풍경들 속에서 불쑥 땅바닥에까지 늘어뜨려진 햇살 몇 가닥.

 

 

 

 

 

아마도,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풍경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느닷없는 빛살이 내려 초록빛 운무와 짙은 숲향을

 

일렁이고는 마음까지 흔들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사동항 앞의 몽돌해변. 돌들이 파도에 쓸려 뒤척이며 내는 소리가 하나하나 포개지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하모니.

 

 

초록빛 무성한 잡초사이로 점점이 붉은 꽃이 인상적으로 콕콕 박혀 있었다.

 

원래 울릉도의 전통가옥은 너와지붕을 얼기설기 엮은 투막집이었던가, 강원도 동부쪽에도 비슷했던 거 같은데

 

그 현대적인 형태랄까. 함석조각을 얼기설기 이어붙인 해변가의 집들. 사실 울릉도의 외딴 집들은 대개 이런 모습이었다.

 

 

도동으로 걷는 길, 어느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왠지 눈에 익은 풍경인 거 같기도 하고. 1박2일에 나왔던가.

 

울릉군의 상징은 오징어, 그리고 호박꽃.

 

 

해안선을 따라 드문드문 박혀있는 간첩잡는 건물. 그냥 하얀색 콘크리트 건물인데, 살짝 벙커처럼 생긴 채 낡아가는 중.

 

 

 

 

도동에 도착해서 본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함석 집들. 도로시와 함께 다녔다는 양철 나뭇꾼을 연상시키곤 하는 함석판.

 

생각보다 울릉도의 도로는 경사가 오르락내리락 가파르다. 아무래도 섬이란 게 바다 밖으로 삐쭉 튀어나온 산봉우리

 

같은 거니까 그렇겠지만, 걸어다니기에 편한 길은 분명 아니다.

 

울릉도 내에서 돌아다니는 차들, 특히 택시들은 전부 SUV라는 게 그런 이유일 거다. 워낙 꼬불꼬불한 길에다가

 

경사도 솔찮은, 포장이 되지 않은 길도 드문드문 있는 소금섞인 해풍이 심한 섬, 울릉도.

 

 

그런 탓에 곳곳에서 이런 케이블이 보인다. 가파른 언덕 위와 아래를 연결해서 새참이던 뭐던 자그마한 것들을

 

이동시킬 수 있는 케이블카. 사람이 타면 아마..기둥 뿌리가 뽑혀 나뒹굴지 싶지만 왠만한 무게는 견딜 거 같다.

 

 

이제 울릉중계소 푯말이 보인다. KBS중계소 등산로입구 안내판이 나왔으니, 그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길을 혼자

 

걸어오며 제대로 가고 있는지 조금은 불안했던 마음이 씻겨내렸다.

 

 

충혼탑을 지나.

 

직사광선이 내리쬐이는 붉은 열매 한웅큼을 지나.

 

짙고 끈적한 구름이 산을 허리춤까지 집어삼킨 길을 향해 계속 걷는 길.

 

 

 그리고 '언론 자유 보장하라!' 라고 누군가 써놓은 KBS 울릉중계소. 저거 누가 썼을까. 누굴까ㅋㅋㅋ

 

 여기가 바로 'KBS 중계소' 구간의 기점, 성인봉 등산로의 공식 출발지점이다. 할머니가 약술과 얼음물을 팔고 계신.

 

 

 지금부터 '공식적으로' 성인봉 등산을 시작하려는데 옆에서는 아저씨가 흔치 않은 나무 전봇대를 등산하고 계시고.

 

 

여기서 천부까지..음..5시간 40분은 굉장히 넉넉하게 잡은 시간인 거다. 여행용 짐을 전부 챙기고, DSLR과

 

삼각대를 바리바리 싸짊어지고 밤새 운전하고 세시간반 배를 타고 이미 두세시간 걸었던 성인 남자가 걸린 시간.

 

이미 중계소 기점으로 내려다보이는 울릉도 도동쪽의 풍경. 울퉁불퉁 돋아난 근육질 산맥 사이로 폭 파묻힌 마을이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강원도 묵호항에서 울릉도로 가는 배편을 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 한 좌석만 챙기면 되는 싱글 여행자라면 언제고

 

그냥 인터넷을 통하거나 전화로 예매하면 내일이고 모레고 떠나는 배를 잡을 수 있는 것 같다. (http://www.daea.com/)

 

꼭 그렇지 않아도 사실 한 좌석 정도라면 그냥 여객선터미널에 가면 대충 그까이꺼 구할 수 있을지도.

 

아침 9시 배를 타기로 전화로 예약했는데, 티켓 창구가 8시부터 연다는 이야기에 아침을 챙겨먹으려 근처를 배회.

 

 

'아침식사 됩니다'란 간판을 따라 걷는 길에는 머리를 조심해야 하는 높이 1.7미터 짜리 터널을 지나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뚜껑 덮인 재래시장을 지날 즈음.

 

울릉도 떠나는 배를 아침저녁으로 보시면서도 여태 울릉도를 못 가보셨다는 아주머니가 생태찌개를 맛있게

 

끓여주시던 '향로식당'에서 든든히 아침을 먹고. 원래는 생선구이를 먹을까 했는데 세시간여 배를 타고 가려면

 

멀미를 조심해야 한다며 생태찌개를 권해주셨던 아주머니.

 

비행기 타는 만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배 역시 위험하기 때문일까. 주민번호와 비상연락처를 적는 승선표.

 

뭔 일이 생기면 '신원불상'의 사상자가 아니라 '홍길동(31세, 남)' 뭐 이정도로 식별은 가능하겠구나 싶다.

 

꾸역꾸역 배를 타는 사람들. 대개가 단체관광객들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아주머니들인지 사투리도 각양각색.

 

이상하게도 묵호에서 울릉도로 떠나는 배는 파도가 심한 편이라 한다. 나올 때는 잔잔한 편인데, 아무래도 조수 탓인 듯.

 

배를 타고 한시간이 지나기 전, 양손으로 봉지를 쥐고 배 바닥 곳곳에서 힘든 작업을 펼치다가 널부러진 어르신들.

 

(선창으로 나갈 수 없는 밀폐형 고속정이어서 배 안 가득한 냄새와 소리는..가히 지옥도의 한장면을 방불케했다.)

 

그리고 세시간 반. 시퍼런 물결이 넘실거리던 망망대해 저쪽에서부터 삽시간에 거대해지는 섬 하나. 꽤나 크다.

2012년 6월부터 강원도 묵호에서 울릉도로 들어가는 배는 도동항이 아니라 사동항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도동쪽의 번화한 상권을 형성한 상인분들의 반대가 없지 않다고는 하는데, 사동항은 도동항에 비기면-굳이 비기지 않아도-

 

완전한 허허벌판. 이제 항구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고 상권이 조성되면 또 금세 이런 모습은 사라지겠지만.

 

 

 

울릉도에 와서 가장 먼저 눈에 띄인 건 오징어가 매달려 있는 가로등.

 

아무 생각없이 섬을 시계방향으로 돌아볼까, 하고 무작정 한 삼십분 걷다가 그래도 기운 빵빵한 첫날인데

 

성인봉을 쉬엄쉬엄 오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다시 뒤로 돌아 걷기 시작한 기점. 성인봉을 만만히 봤었던 거다.

 

그렇게 다시 사동항을 지나가는 길에, 아까의 배가 한껏 토해놓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대형버스와 봉고를 타고 떠나버린 한적한 풍경을 다시 한 컷.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한없이 걷고 싶은데 어디까지 얼마나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는, 섬이 답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한뼘만한 땅덩이, 울릉도에서 2박 3일동안 정신나간 도보여행을 하고 싶을 때 추천하는 일정.

 

눈뜨면 걷고, 어두워지면 멈췄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건 삼일차, 남양에서 저동까지 움직이는 데까지만 한 번.

 

 

제주도 올레길이 조금은 편하고 아기자기한 코스라면, 울릉도 도보여행길은 좀더 거칠고 날것의 느낌.

 

대부분 성인봉 등반만 하고 마는 단체 등산객이거나 버스로 찍고 찍고 다니는 단체 여행객들만 찾는 곳이니만치

 

하루종일 걸어도 만나는 사람들은 손 꼽을 만큼인 곳. '둘레길'도 말만 둘레길이지 그냥 버려진 옛길이랄까.

 

 

미친 짓 한번 하고 싶을 때, 러닝-하이가 아닌 워킹-하이(Walking-high)를 맛보고 싶을 때 한번쯤,

 

내키는 대로 한없이 걷다가 바다가 나오면 발길을 틀면 그뿐이었다. 딱히 정해진 일정도 계획도 없었던 코스.

 

그렇게 3일동안 한걸음씩 꾹꾹 내딛었던 발걸음들을 잇고 나니 저런 길들이 그려졌다. 시속 4km의 세상.

 

 

 

ㅇ 1일차 : 사동항 - 성인봉(KBS중계소 코스) - 천부

 

 

(03:00 서울 출발, 05:30 추암 촛대바위 도착)

 

07:00 묵호여객선터미널 도착

 

07:00~08:00 아침식사

 

09:00 묵호항 출발 (by 씨플라워호)

 

12:30 사동항 도착

 

14:30 KBS중계소(성인봉 등산코스 출발지) 도착

 

17:00 성인봉 도착

 

18:30 나리분지 도착(성인봉 등산코스 도착지)

 

20:00 천부리 도착

 

20:00~21:00 저녁식사 (울릉도식 백반정식)

 

 

 

 

 

 

 

 

ㅇ 2일차 : 천부 - 현포 - 태하 - 둘레길2코스 - 구암 - 남양

 

 

10:00 숙소 출발

 

10:30~12:00 예림원(문자조각공원) 체류

 

13:00 현포 도착

 

13:00~14:00 점심식사 (울릉도식 백반정식)

 

15:00 태하항 도착

 

15:30~16:20 태하등대(모노레일) 체류

 

16:40 태하삼거리(울릉둘레길 2코스 시작점) 도착

 

18:30 구암 도착

 

19:00 남양 일몰전망대 도착

 

19:30~20:30 저녁식사 (약소숯불구이)

 

 

 

 

 

 

 

 

 

ㅇ 3일차 : 저동항 - 행남등대 -  도동항 - 독도전망대 - 사동항

 

 

10:00~10:30 아침식사 (따개비 칼국수)

 

10:40~11:20  저동항 도착 (by BUS)

 

12:00 소라계단 도착

 

12:30 행남등대 도착, 행남해안산책로 시작

 

14:00 도동항 도착 (행남해안산책로)

 

14:30 도동약수공원 도착

 

15:00 독도전망대 도착 (케이블카 왕복)

 

17:00 사동항 도착

 

17:30 사동항 출발 (by 씨플라워호)

 

21:00 묵호항 도착 

 

23:40 서울 도착

 

 

 

 

 

 

 

 

 

 

 

 

 

 

 

 

 

유후인역에서부터 유후인아동공원을 지나 드디어 유후인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는 곳, 긴린코 호수 초입에 도달했다.

 

슬슬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살짝 목이 마르다 싶던 타이밍, 일본까지 와서 물을 사 마시느니 음료를 사마시고 까페에서 차를 마시는 게

 

낫겠다며 계속 그런 걸 마셨던 차에, 저렇게 신기한 '오이 막대'라니. 살짝 짭조름하게 간이 밴 오이가 와삭와삭.

 

기운이 불끈 돋아 씩씩하게 걷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보이는 한글들, 그리고 한국인들의 한국말 소리들.

 

 

긴린코 호수 주변을 어슬렁대는 오리들, 처음에 조우했을 때는 정말 화들짝 놀랐는데, 그런 사람 따위 관심도 없는 듯

 

시크하고 여유로운 뒤뚱거림으로 이내 시야를 벗어났던 오리 한 마리.

 

 

드디어 눈 앞에 호수가 펼쳐지기 시작!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호수가 쫙쫙 양팔을 벌린 만큼 커지는 것만 같았다.

 

'긴린코'라는 호수 이름은 金鱗湖, 즉 금색 비늘 호수라는 뜻으로 풀이하면 될 텐데, 석양에 비친 물고기들의 비늘이

 

금빛으로 번쩍거린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호수 수면 아래로 팔뚝보다 굵은 물고기들이 미끄러지듯 유영중이었다. 아침해가 빛날 때나

 

저녁해가 가라앉을 때쯤에는 정말 꽤나 볼만하겠다 싶다.

 

 

알고 보니 이 '긴린코 호수'의 물 절반은 뜨거운 온천수, 나머지 절반은 차가운 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자욱하게 물안개를 피워올린다고 하는데 일정상 그 풍경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그래도 한낮의 쨍쨍한 햇살 아래에도 짙푸른 녹색이 시원하게 수면 위로 내리깔린 긴린코 호수의 호젓한 분위기나

 

드문드문 호수를 내려다보는 찻집이나 레스토랑들, 잠시 앉아 쉬어가며 시간을 붙잡아 두기에 딱 좋은 곳.

 

멀찍이 신사도 보이고, 저건 왠지 일본 애니메이션 '지옥소녀' 오프닝에 나오는 그 곳 같은 느낌.

 

 

긴린코 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산은 유후인의 명산 유후다케, 유후인 마을에서도 멀찍이 보이던 그 산자락이다.

 

 

 

호수변에 피어난 노란 꽃들이 제법 뜨거운 햇살에 축축 늘어졌다. 호숫물을 쭉쭉 빨아올리란 말이다.

 

 

유후인의 소로들을 거닐 때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들, 울창하게 숲을 이룬 커다란 나무들과 드문드문 호숫가에

 

모로 누워버린 나무들이라니. 꽤나 깊숙한 자연 속에 안겨 있는 느낌이 들었다.

 

 

 

 

호수를 한 바퀴 돌거나 이리저리 에둘러가는 길들이 꼬불꼬불 서로 꼬리를 물고 있었지만, 이미 유후인 료칸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오며 체력도 많이 소모되었으니 굳이 다 돌아보진 않기로 했다. 잠시 짙은 녹색 그늘 아래서 쉬다가 유턴.

 

긴린코 호수 옆을 빠져나가고 다시 샵들이 즐비한 거리로 나가기 전, 아까는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이쁜 가게가 하나.

 

 

인력거가 조금 탐이 나는 순간도 있었지만, 과연 이런 뜨거운 날씨에 사람이 헉헉거리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끄는데

 

나몰라라 맘 편하게 저 위에 앉아서 갈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어서 패스.

 

슬슬 유후인역까지 걸었다. 유후인역에서 긴린코 호수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무지무지 오래, 대충 네다섯 시간 걸렸던 거 같은데

 

여기저기 한눈 안 팔고 적당히 슬슬 내려오니깐 고작 30분쯤 걸렸으려나. 조금 이르지만 유후인에서 먹는 마지막 간식..이랄까

 

혹은 이른 저녁 part1이랄까, 유후인 수제버거.

 

 

이제 유후인에서 후쿠오카로 나가는 가장 늦은 고속버스를 타고 후쿠오카 하카다역 버스터미널로~*

 

 

 

 

 

 

 

유후인 료칸의 체크아웃 시간은 보통 오전 10시, 그때쯤 나서서 후쿠오카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기 마련이지만 아예

 

하루를 유후인 마을에서 보내기로 했다. 유후인 역의 라커에 가방을 보관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걷기 시작.

 

인력거 아저씨가 토막난 한국어로 흥정을 걸어왔지만 기력이 쌩쌩한 상태에서 저런 걸 탈 리가 있나.

 

 

전날 밤에 미처 걷지 못했던 골목을 좀더 헤집어 보기도 하고, 밝은 대낮에 보니 또다른 풍경에 감탄하며 연방 사진을.

 

 

 

뭐지, 여기가 유후인의 긴자 거리쯤 된다는 걸까. 잔뜩 색바랜 간판을 보면 도저히 그럴 리는 없는데.

 

자판기 왕국답게 담배 자판기가 네다섯대 즐비하게 늘어선 건 제법 장관이었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숯의 정령을 만났던 곳, 여러 귀여운 아이템들이 많았다.

 

 

이렇게 굵은 터치로 파내어진 등불이 반짝반짝거리기도 했고.

 

 

이 정도 인테리어에, 이렇게 사람 없는 샵이라면 한번 앉아서 쉬어주는 게 예의지만, 아직은 몇 걸음 떼지도 않아서 패스.

 

 

샵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조그마한 왕복 이차선의 길거리. 그런 샵중엔 퇴마 효과를 연구하는 샵도 있다.

 

 

이런 류의 사이비 과학이랄까, 운명론이 발달한 나라답게 손가락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반지를 끼라고 유혹하는.

 

그러고 보니 일본은 아버지의 날이 있었다. 6월 17일, 아버지의 날.

 

조촐하지만 확연한 메인도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골목길은 틈틈이 나타나서 손짓했지만, 꾹 참았다. 일단은

 

긴린코 호수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준보석이라 불리는 돌멩이마다 '능력치'를 표시하고 있던 그림. 우와, 이런 건 역시 온갖 종류의 게임이 발달한

 

나라라서 그런지 굉장히 시각적이고 확연하다. 마치 삼국지의 장수들 능력치를 따지는 것 같잖아. 지력, 매력, 무력..

 

이 복을 던져주는 고양이는, 그 주인의 복을 사방으로 던져버릴 셈인지 굉장히 몸값이 비쌌다. 무려 28만엔. 헉.

 

 

그리고 완전완전 귀여운 것들이 가득하던 샵 하나 발견.

 

 

 

날씨도 적당히 따뜻하다 싶었다. 아직 오전이라 그랬겠지만, 5시 버스로 유후인을 뜰 생각이었으니 근 6시간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었다. 흐느적흐느적 걷다가 쉬고 배고프면 군것질하고 차마시고 그러기로 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그래서 이렇게 샅샅이 샵을 순례하며 사진도 찍고 이것저것 살까 말까 재보기도 하고.

 

 

이 고양이는 가게 앞에 놓인 의자에 배를 깔고 누워서는 슈퍼맨 놀이 중이었다.

 

이 곰인형은 어메리칸 스타일의 바이크에 기우뚱 앉아서 시크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역시 고양이, 고양이. 일본은 왜 이리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걸까.

 

그리고 술을 파는 가게 앞에서 빗자루를 쥐고 있던 고질라.

 

잠시 앉아 쉬었다. 사실 직선거리로만 따지면 얼마 걷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샵들이 많아서 꼬불꼬불 걸었던 걸 헤아리면

 

마치 꽁꽁 감겨있던 실타래를 풀어놓은 것처럼 왕창 늘어날 거다.

 

 

너무너무 유명한-아마도 한국인 사이에서 특히?-롤케잌집 비스픽은 이미 가게 안이 바글바글하길래 스킵.

 

다리를 건너고 나서 만난 또다른 샛길. 개울을 따라 쭉 걷는 길 옆에 색색의 꽃들이 만발해서 유혹하는 중.

 

어느 길 모퉁이에는 누가 만들었을까, 페트병을 잘라서 어찌어찌 만들어낸 바람개비가 팽글거리며 돌고 있었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군부대의 움직임. 뭔가 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유후인에는 자위대 주둔지가 인접해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더 고급스럽고 세련되어 보이는 상점들, 음식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간단하게 브런치랄까, 가볍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여행 중에는 가볍게 여러 끼를 먹는 게 현지의 다양한

 

음식도 맛볼 수 있고 특히나 유후인 같은 데에서는 길거리 음식이라거나 군것질거리들을 위한 여지를 남기는 방법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막상 메뉴판을 보니 이것저것 맛있어 보이는 게 잔뜩. 치즈 케잌이니 단팥죽이니 고구마 세트는 뭘까.

 

그래서 이것저것 맛보고 일본의 맛난 커피도 마시고, 시원한 에어콘 바람 맞으며 쉬다가 정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그렇게 유후인 마을을 샅샅이 살펴보기로 한 하루 일정의 반나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을의 분위기만큼 고즈넉하고 여유롭게.

 

 

 

어느 야트막한 담장을 따라 이파리를 늘어뜨린 채 해바라기 중이던 초록빛깔 덩굴식물. 삼지천 마을,

혹은 삼지내 마을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이나 차분함이란 건 저런 덩굴이 꼬물대며 이파리를 밀치는 소리와

움직임이 보일 거 같은 그런 정도의 질감을 갖고 있었다.

A탐방로니 B탐방로니 일견 복잡해 보이는 코스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어려울 거 없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눈길 닿고 마음 동하는 대로 걷다보면 어느새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거다. 미처 못 가본 샛길의 풍경이 못내

궁금하다거나 아쉽다거나 하면 그저 또다시 휘적휘적 걸어가면 될 일. 그런 게 '슬로우시티'의 호흡이 아닐까.

이리저리 휘휘 감기며 이어지는 돌담길이 끊긴다 싶은 곳엔 반쯤 열린 나무대문이 버티고 섰다. 안 그래도

나뭇살이 조금씩 휘어지고 뒤틀려 안의 풍경이 속살처럼 드러나고 있었는데, 대청마루가 시원해 보인다.

마을 곳곳에 빈 벽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들. 이 곳에서 민박을 하는 집들이 꾸며 놓은 거기도 하겠지만

딱히 광고나 영리 목적의 홍보가 아니라 마을을 치장하고 소개하는데 더 마음을 쓴 거 같다.

 

한눈에 확 매료되고 만 전통 가옥 한 채가 있었다. 지붕에 촘촘이 얹은 기와 한장한장이 비바람에 씻기고

세월에 퇴락해선 저마다 다른 얼룩과 상처를 갖고 있었지만, 그 제각기의 표정과 분위기를 가진 기와들이

삐뚤빼뚤하는 듯하면서도 제법 정연하게 늘어서서 풍겨내는 그 느낌이란 건 참. 틈새 하나 벌어지지 않고

기왓장 한장한장 반짝거리며 단정한 검은색을 뽐내는 새로 올린 기와지붕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런

사람 냄새 나는 흐트러짐과 깨어짐. 얼마나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저 기와지붕은 표정이 있었다.

 

좀처럼 돌아나오기 아쉬웠던 가옥. 아마 집 주인이신 듯한 분께선 왜 이 쪽만 계속 사진을 찍냐고, 새로

기와를 올린 다른 쪽도 좀 보고 그러냐고 하시며, 며칠 전에 다녀간 건축학과 학생들도 이 건물만 죽어라

사진을 찍어대더라며 은근히 뿌듯해 하셨다. 그 건축학도들이 봤던 건 뭘까. 내가 본 건, 건물의 표정.

나팔꽃을 푸짐하게도 얹고 있던 돌담에 자전거 두대의 무게까지 얹혔다. '슬로우시티'라는 인증마크 없이도,

나른하게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는 게 딱 어울리는 풍경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살지 못할, 박물관이나 민속촌 같은 느낌도 절대 아니었다. 품위있게 올라간 기와지붕이나

재래의 냄새 가득한 초가지붕만 있던 게 아니라 잔뜩 삭아버린 슬레이트 지붕도 한쪽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고,

지금도 이곳에선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흔적과 냄새가 여기저기서 남아있었다. 그 흔들림없는

증거로 이렇게, 사람들이 더께를 밀어내고 씻어내는 목욕탕에서 여전히 뜨거운 김이 펄펄 오르고 있던 거다.

마을의 구석구석 풍경들. 어느 골목에선가 뜬금없이 조우한 저 석상은, 원래 커다란 무덤을 지키는 문신상

무신상 뭐 이런 거 아닌가. 덜렁 혼자 남아서 파란 하늘을 이고 있었다.

 

기왓장 위의 고양이, 시멘트담벼락을 거칠하게 기어오른 나팔꽃, 멀찍이 보이는 (여기도 예외없는) 교회

첨탑만큼이나 뾰족뾰족하게 선 녹슨 철문.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주기도 한다는데, 걷는 것도 좋지만 자전거로 슬슬 다니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동네를

한바퀴 돌아본 사이 목욕탕 남탕 문이 열렸다. 돌담길 옆 나무가 Y자 모양으로 가지를 벌렸다.

 

누렇게 녹슨 형광등 갓이라거나, 문짝을 걷어올려 걸어둘 수 있는 새모양 등자,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둥이며 마룻바닥이라거나. 게다가 담쟁이덩굴이 온통 건물 벽을 따라 기어올라 처마까지 매달린 이런 집,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맘이 물씬 드는 곳이었다.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빨갛게 익어가는 석류, 그리고 마당 앞 귀퉁이에서 피어있는 별모양의 이름모를 꽃,

그리고 고랭지배추 꼬갱이같이 찌글찌글 얄포름한 호박꽃잎하며, 의외의 곳에서 만나는 의외로 어울리는

영단어들, LETTERS.

다음에 이곳에 오게 되면 꼭 한옥 민박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골 할아버지댁같은 느낌이면서도

아기자기한 풍경이라거나 둥글둥글하게 깍이고 다듬어진 사물의 모서리들이 넘 좋은 거다. 게다가

활짝 열린 문이 겸연쩍었던 듯 얼기설기 낡은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둥 마는 둥 해둔 저런 제스쳐까지.

눈길 함부로 밟지 말라고 했던가, 갓 부어놓은 시멘트길도 역시 함부로 밟아서는 안 되겠단 걸 보여주는 사진.

저 멀리 마을 입구까지 이어지는 저벅대는 발걸음이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할머니였을까, 무슨 급한

일이 있던 건 아닐까, 손주 녀석이 소식도 없이 내려온 건가.

아직은 신선한 노랑빛이 반짝거리는 논, 좀더 햇살을 먹고 가을바람에 다독여지면 한층 가라앉아 무겁고도

차분한 누런 빛깔을 띄게 될 거다. 논두렁길을 따라 걸어 나오며, 비로소 삼지천마을의 마법같은 시간의

흐름에서 차츰 벗어나는 걸 느꼈다. 조금씩 빨라지는 초침 소리.




 

충북 괴산의 산막이옛길, 예전에는 산골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옆 마을로 넘나들거나 장터갈때

이용하던 길이라던데 점차 마을이 조그매지면서 잊혀져가던 길이라고 한다. 최근에야 휘적휘적

구비진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내달리는 산길을 정비해서 근 삼 킬로미터에 이르는 '옛길'을

되살려냈다던가. 제주 올레길의 예기치 못한 성공담이 지자체에 던진 울림은 이다지도 컸지싶다.

세 그루의 연리지, 아니 여섯 그루의 연리지라고 해야 하나. 서로 사이좋게 몸을 섞은 채

고개를 살풋 외로 꼬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한 세 커플나무들. 연리지 하나가 생겨나기만 해도

울타리도 치고 포토존도 만들고 수액도 맞아가며 특별대접을 받는 판인데 무려 세 쌍이라니.

옛길 초입부터 계속 유유한 호흡으로 따라오는 건 괴강. 그러고 보니 이곳의 지명은 괴산,

강이름은 괴강. 57년에 이승만대통령이 괴산수력발전소를 만들고선 호수가 되어버려 괴산호라

불리게 되었다곤 하지만, 조금씩 방류되고 있는 건지 바람이 미는 건지 아니면 드문드문 다니는

조그만 철선과 목선이 만드는 건지 수면에 잔물결이 꼼꼼히 새겨져 있었다.

나무에 묶인 그네에선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질러대며 산아래쪽을 향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저러다 휘잉~ 하고 날면 그대로 괴강, 괴산호까지 날아가겠고만 겁나지도 않는지 마냥 즐거운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 살벌한 그네 대신 조용조용 잔물결처럼 일렁이는 흔들의자에서 잠시

앉아 쉬었다. 전날 내렸던 비가 어느결에 말랐는지 보송보송한 의자에서 슬몃 나무냄새가 났다.

출렁다리, 어렸을 적 고성 잼버리장에서도 뛰놀아보고 했지만 이렇게 길고 출렁대는 다리는

처음 본 거 같다.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서 우다다 걷다가 일부러 흔들기도 하고, 그러다가

뒤의 꼬맹이가 완전 겁먹은 거 보고 미안해져버려서 사뿐사뿐 흔들림없이 걸어보려 했지만

몇걸음 가지 못해 다시 출렁출렁. 처음 느낌 그대로, 어른들한테도 꽤나 길고 재미있던 코스. 

출렁다리에서 내려와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이는 단단한 흙길을 밟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흔들리던 발아래 나무판자 대신 땅을 딛으니 시선이 자연스레 주변을 스캔하게 되는 거다.

약간 뜨겁긴 하지만 아직 설익어 부드러운 느낌의 오전 봄햇살도 그렇고, 본격적으로

짙어지기 전의 싱그러운 녹색 풀떼기 같은 것들.

산막이옛길은 그냥 하이킹 삼아 가볍게 걷는 길도 좋지만 저 위로 본격 등산로를 따라 걷는 것도

꽤나 좋을 거 같다. 대충 코스를 짜보자면 등산로로 크게 돌아서 산막이마을까지 가서는 옛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 정도가 좋지 않으려나. 여기가 바로 등산로와 옛길이 갈라지는 지점인데

등산로라기엔 넘 푸릇푸릇하고 완만한 길이 시작되는게 꽤나 유혹적이었다.


괴산수력발전소가 물을 가두고 나서 몇개 마을이 잠기고 구불구불하던 강의 생김생김도 많이

변했다지만 여전히 옛길 옆을 따라 출렁이는 강물은 구불한 실루엣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법

폭이 넓은 강, 호수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바람이 굉장히 시원하다. 미처 땀이 솟을 겨를도

없이 에어콘바람처럼 시원한 산바람 강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연화담. 지금은 연꽃이 피워올려지는 저 연못이라지만 이전에는 천수답, 논이었다고 한다.

충북 괴산, 여기 옛길까지 차로 달리며 놀랐던 건 마치 강원도의 느낌처럼 쉼없이 울룩불룩

높진 않아도 야무진 삼각산들이 늘어서있던 풍경. 논농사를 짓기엔 땅이 부족했던 걸까,

저 손바닥만한 세모땅에까지 벼를 심었다니. 직각이등변삼각형 모양, 올만에 떠올린 단어.

산막이옛길을 따라 걷다가 발견한 큼지막한 동굴이 있었고 왠 뜬금없는 호랑이 상과 인형이

놓여있었다. 앞에 세워진 표지판을 보기도 전에 뭐야 이거, 호랑이굴이야 했더니 역시나.

믿거나 말거나 1960년대까지 호랑이나 다른 산짐승이 자리잡고 살던 굴이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 놀라웠던 건 대체 왼쪽의 호랑이 인형은-ZOO COFFEE에서 들고 온 듯한-

어제의 장대비를 견디고 저리도 뽀송거리는 걸까.


적당한 강약으로 오르내리는 계단도 있고, 그리 좁지 않은 너비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나무

데크 길이 쭉 이어지고 있어서 아이들도 신나라 걷고 뛰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지칠 만하면

나타나는 전망대니 약수터니. 앉은뱅이가 물을 마시고 벌떡 일어났다나, 그런 약수터의 전설이

무색하게 물이 아낌없이 펑펑 흘러나오던 물맛은 나쁘지 않았다.

비가 그친 연후라 그런지 완전완전 산뜻한 초록색을 뽐내며 옛길을 터널처럼 감싸고 있던

나무들, 그리고 제법 울창해진 그 틈새를 비집고 기어이 불어오는 산바람과 이따금씩 뚝뚝

떨어지는 봄볕 쪼가리들. 어디선가 풍기는 나무냄새, 꽃냄새까지 더해지니 정말, 한없이

걸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야말로 풀향기 가득한 이런 길만 쭉 이어진다면.

괴강에서는 선착장과 선착장, 산막이옛길의 처음과 끝을 잇는 목선과 철선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옛길 위의 사람들을 앞서 달리고 있었다. 배를 몇번을 보내고 맞이하며 급할 것 없이

걷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선 반짝, 초록빛 나뭇잎새를 뚫고 햇살이 눈부셨다.


중간중간 지게에 얹혀있던 것들은 이곳, 산막이옛길을 노래하는 시들이 적혀있었다. 제법 많은

시들이 이곳의 경치와 분위기와 역사에 감동하고 감탄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렇다. 풍경이 이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말을 건네 들을 필요가 있나. 그래서 내용은 늘 스킵,

차라리 지게 위에 늘어뜨려진 성긴 나뭇잎을 보며 안구를 정화. 피톤치드를 달라며.

어디였더라, 그랜드캐년이었던가, 바닥이 유리로 된 이 전망대는 분명 그걸 염두에 두고 만든 게다.

뭔가 바닥을 보고 겁먹기에는 온통 초록빛의 여리여리한 이파리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보들거리는

괴강의 잔물결들이었는지라 저런 꼬맹이도 펄쩍펄쩍 겁먹지도 않고 뛰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만큼

밖으로 불룩 나가서 바라본 풍경은, 강 한복판은 아니어도 대충 깊숙히 들어와 강의 좌우를 바라보는

느낌을 줬다. 잔뜩 굽어진 강물, 강물 따라 잔뜩 굽어진 산등성들, 또 산등성들 따라 굽어진 초록빛들.

총 길이가 채 삼 킬로미터가 안 된다는 거 같던데,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제

슬슬 길이 끝날 때가 되어가려나. 좀더 길면 좋겠는데. 좀더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마음이

가득한 채 아껴 핥듯이 한걸음 한걸음 길을 뒤로 밀어보내고 있었다. 갈수록 멈춰서서 사진을

찍어 남기고 싶은 마음만 강해지다 보니 사진은 어느새 기백장을 헤아릴만큼 찍어대고 있었고.

산딸기길. 6월이 되어야 산딸기가 길 좌우로 잔뜩 피어나 붉고 푸른 색감이 강렬할 텐데

지금은 그저 푸른 색 일색이었다. 날이 좋은 주말에는 이 길 가득 사람들이 걷는다는데

이때는 그래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주차장은 이미 만차가 되어

주변 골목까지 차들로 빼곡하게 넘쳐나는 상황이었지만.

뭘 파종한 걸까, 갈빛 땅위에 초록색으로 가지런히 빗질을 한 듯한 평행선들 너머로 잔뜩 여윈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선착장 도착. 여기가 산막이옛길의 끝 '산막이마을' 선착장이고, 애초 출발했던 지점은

'차돌바위' 선착장이라던가. 십오분만에 바로 가는 소형배는 오천원, 그리고 멀리 한바퀴

돌아서 한시간여 유람까지 하는 유람선은 만원.

11인승인 소형배는 두 종류가 있었다. 목선이랑 철선이라고 부르던데, 이게 그 목선.

뭔가 정신사나운 만국기가 무당집처럼 내걸려 있는 거 빼고는 그래도 좀 운치가 있달까.

배 뒤로 남겨두는 궤적도 뭔가 뽈뽈뽈뽈, 통통거리는 엔진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다.


아쉽게도 내가 탔던 건 목선이 아닌 철선. 11명 이상이 타면 뽀글대며 가라앉지 않을까 싶은

간단하기 짝이 없는 모터배였다. 그래도 뭐, 괴강 한복판에서 올려다보는 양쪽 강가의

풍경이란 건 다른 맛이 있었으니 배가 어쨌거나.

산막이옛길 반대편 강가에도 습지가 제법 발달해 있었고, 나무가 뭉텅이뭉텅이 소보록하니

자라나 있었는데 아직 그쪽에는 이런 길이 나있지는 않다고 한다. 거참..딜레마다. 좋은

길을 보면 걷고 싶은데, 또 사람들이 한둘 모여 걷다 보면 길이 황폐해지고 자연도 조금씩

상해버릴 텐데. 산막이옛길도 잘 관리되고 보전되었으면 좋겠는데..그런 점에서 나무데크로

단단하게 만들어놓은 길이 조금 아쉽긴 했다.

설렁설렁 걷긴 했지만 한시간반 정도 걸려 꼼꼼이 걸었던 길을 이십분도 안 되어서 훌쩍

되돌아오다니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눈으로 옛길을 되짚다가 불쑥 뜨인 난파선에 시선이

가기도 하고,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으로 칠해둔 남한 최초의 수력발전소라는

괴산수력발전소의 유머러스함에 웃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한 세네시간동안 잘 돌아본 산막이옛길, 다시 돌아나오는데 아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인이 샛노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목,

큼지막하고 선명하게 새겨진 산막이옛길. 그리고 빨간 화살표가 선연한데 아까는 왜

저걸 못 봤나 했더니 주차장이 만차라 반대쪽으로 돌았더랬다.





아무 목적지 없이 그냥 걷기..가 이번 여행을 하면서 괜히 별 이유도 없이 세웠던 고집이었는데

생각보다 그런 건 쉽지 않았던 거다. 가다 보면 문득 지금 방향에 대해 두려움이 생기고,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야 뭔가 중요하고 귀한 걸 놓치지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 목적지 없이

휘청대는 걸음 자체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던 거 같다. 망망대해에서 무작정 항해하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조금 타협하기로 했다. 걷다가 여기가 어디쯤인지 지도만 슬쩍 보고 확인하기. 지도를 보고

그곳의 몇몇 이름난 명소를 향해 졸졸 따라가는 길을 인도받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정말로

지금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만 확인하면 족한 걸로. 누군가 일러주는 대로 길을 가는 건 이미

한국에서 내비게이션의 지령을 따라 운전하는 걸로 질릴만큼 질려버렸으니까.

그러고 나니 조금은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한참 걸으며 대충 머릿속으로 여기가 어디쯤일지를

상상하다가, 내키는 곳에서 오렌지주스나 망고를 먹으며 쉬기도 하고, 아님 아예 그럴 듯한

까페에 눌러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슬쩍 지도를 곁눈질하며 어디쯤인지를 확인하는 건 나름의

밀고 당기는 리듬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길을 가다보면 문득 차들이 쌩쌩 다니는 고가 도로 위를 걷기도 하고, 맨발의 소년이 낚시찌를

던지는 냄새나는 강둑을 지나기도 했다. 누군가가 굳이 담벼락 위에 CCTV처럼 걸어둔 노랑색

물총을 보며 궁금해 하기도 하고, 차도 옆까지 온통 꽃밭으로 가꿔둔 태국인들의 꽃 사랑에

감탄하기도 하고. 더러 황량한 골목으로 부러 꺽어지며 어떤 풍경과 사람들이 숨어있나 슬쩍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동서남북의 방향감, 얼만큼 걸었는지의 거리감이 상실되면

적당한 표지판 앞에서 지도를 펼치는 거다. 여기가 어디지, 하며.

어쩔 수 없이, 랄까 가다 보면 뭔가가 가까워지고 그럼 자연스레 발길이 그리로 향하기도 했다.

뭔가 커다랗고 특이하고 사람과 가게들이 몰려있는 곳들, 몇 대의 대형버스가 관광객들을 토해내고

거두어가는 그런 곳. 인적없는 곳을 한참 떠다니다가 그런 부산한 지점이 가까워진다 싶으면

마치 철가루가 자석의 자장에 이끌리듯 내 궤적 역시 몇 개 지점으로 수렴하고 마는 거다.

그래도, 그렇게 덥썩 일로직진하여 그곳으로 돌입하고 싶진 않았다. 쿡쿡 찔러보고 슬슬

에둘러가며 멀찍이서 감각하다가 우연처럼 이쁜 까페를 발견해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선그라스를 벗고 시원한 망고&라임 쉐이크를 쭉 빨아서 땀을 식히려다가 차가운 두통에

조금 인상도 써주고. 쿠션을 껴안고 늘어지게 앉아서는 다시 책을 꺼내들어 조금 읽기도 하고.

그렇게 설렁설렁, 이날의 반환점은 왓 아룬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저 걷다가 쉬고 또 걷고, 그렇게 어디로든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선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또다시 어쩔 수 없이, 나의 걷기 자체도 해와 달에 귀속되고 마는 거였으니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나리면 슬슬 돌아갈 염려를 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러다 보면 언제나 커다란 원의

궤적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해가 정점을 찍고 낙하할 무렵 방향을 홱 틀어야 하는 거다.

러시아 민담이었던가, 하루종일 걸어서 원위치로 돌아온 땅이 전부 자기 것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에 빗대자면 나는 하루치 걸어서 무얼 갖게 된 걸까. 어느 광장에 따끈한 대리석 위에서

엉덩이만 비비가 뭐해서 아예 가방을 베고 에라, 누운 채 해가 떨어지고 퍼렇게 멍들다가

까뭇해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 여행을 떠나도 돌아갈 곳은 남는다.

여행을 떠나도 돌아갈 곳은 남는다. 원하던 원치 않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다.

조그만 골목에 기대어 테이블을 세우고 음식을 팔았을 허름한 길거리식당,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태국 국왕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둥실 떠올랐다.





강정천을 뒤로 하고 얼마 남지 않은 7코스를 계속 걷기 시작했다. 올레길 공식홈페이지(www.jejuolle.org)에서

뽑은 지도에 따르자면 남은 포스트는, 강정포구, 알강정을 지나 월평포구까지 총 세개밖에 안 남았다.

8코스를 전날 걸었던 엄마와 여동생이 흥분하며 했던 말들에 따르자면, 8코스에는 이런 쉼터나 매점이 거의 없다한다.

코스도 7코스보다 길고 더 힘들었다고는 하는데, 7코스만큼이나 8코스도 좋았다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이다. 그리고 나서 바로 나타나는 소철 '농장'.

비닐하우스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 종묘들. 뭔지 궁금해서 한참 봤지만, 짧막한 내 식물학적 지식으론

도무지 모르겠다. 넓적한 건 잎이요, 쭉 뻗은 건 줄기랄까.

비닐하우스 단지 내에서 길을 잃을세라, 바닥에 큼지막하게 그려놓은 올레길 화살표. 자세히 보면 페인트칠 직후에

차바퀴가 밟고 지나간 듯 뽈, 뽈, 뽈 페인트 자국이 남아 있다.

온통 시뻘겋게 녹슬어버린 물탱크, 도로까지 무성하게 뻗어나온 하룻강아지녀석 풀떼기들. 왠지 방금까지 걷던

인적없어도 넉넉하고 여유롭던 바닷길과는 영 딴판으로 황량하고, 뭔가 괴괴한 느낌이다.

그런 길인데, 비닐하우스 안은 또 딴판이다. 온통 꽃밭 가득.

이것은 꽃. 아까 미처 영글기 전의 종묘가 "넓적한 건 잎이요, 쭉 뻗은 건 줄기"랬다면, 꽃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벌어진 건 꽃잎이요 뭉쳐있는 건 암수술이랄까. 아...너무 무식하다.

그렇게, 황량하고 살짝 불안하기까지한 느낌이 감도는 길 옆에 무덕무덕 무더기로 피어난 꽃들을 위로삼아

강정포구로 가는 길이다.




서건도를 지나 다음 기점, 풍림리조트로 가는 길이다. 어제 신문이었던가, "올레길 싸우멍 다투멍(서울신문, 9/16)에

나왔듯 올레길을 둘러싼 이야기가 온통 찬사 일색인 건 아니다. 걷기 좋게 흙길로 포장하려 하는 측과 먼지나고

지저분하다고 싫다는 땅주인 측, 그리고 사유지 통행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올레길 폐쇄까지 이르기도 한다.

"올레길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제7코스 돔베낭골과 야자수나무숲 길 등 일부 코스는 최근 땅 주인과 마찰을 빚은 끝에 조만간 폐쇄될 전망이다. 올레꾼들은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이런...사유지에 대한 적정 수준의 보상과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았으면 좋겠다. 다녀온지 며칠 되었다고 폐쇄 이야기가.

제주도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 제주도민들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 곳이라 한다.

정오가 가까워져서인지, 파도가 조금씩 거칠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선가 해가 높을수록 파도가 거칠단 '속설'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아마 그래서 거칠어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옛날 세탁기가 한참 윙윙 돌 때 슬쩍 열어보면, 안전장치가 작동해서 내부에서 정신없이 돌던 빨래통이 금세

멈추곤 했다. 무슨 먹음직스러운 크림을 떠내듯 손가락 끝으로 풍성하게 떠올리던 비누거품. 딱 저렇게 생겼었다.

앞에서 걷던 엄마가 문득 저 돌을 가리켰다. 저거 무슨 환상속의 동물 같지 않냐고. 황소가 콧김 내뿜는 거 같기도,

혹은 용이 입을 히죽 벌리고 지긋이 응시하는 것 같기도 하지 않냐는. 난 두꺼비가 떠올랐을 뿐이고.

바로 옆에도 뭔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바위가 놓여 있었다. 엄마는 사자 같은 동물 두마리 같지 않냐고, 한마리는 밑에

늘어지게 눕고 또 한마리는 그 허리춤 위로 턱을 괴고 기댄 거 같지 않냐는 말씀. 나는, 왠 건방진 배불뚝이 자식이

옆으로 누워 한 팔로 턱을 괸 거 같다.

조그마한 내를 가로지르는 하이얀 나무뼈다귀. 생각보다 많이 흔들려서 여성들에겐 조금 쉽지 않았던 듯.

다리 삼아 누워있던 나무뼈다귀를 밟고 지나고 나니 잔잔하게 흐르는 내 한가운데 가지런히 올려진 돌무더기가
 
그제서야 보인다.

바닷가 우체국이랜다. 뭔가 했더니, 인근 리조트에서 직접 짓고 운영하고 있다는 자그마한 정자, 그리고 무료 엽서와

배송 서비스. 나쁘진 않은데, 엽서 전면에 광고처럼 붙어있는 리조트 시설물의 그림이 좀 아쉬웠다. 좀더 은근하게,

거부감도 덜하면서 더욱 기억에도 남을 방법으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한쪽엔 이미 온통 낙서로 자욱해진 '소원기원벽'. 색연필도 넉넉히 비치되어 있었고, 차근차근 읽으면 재미도 있었다.

우체통이 있고 엽서가 있고 펜이 있으며 마침 아픈 다리 쉬어갈 바람솔솔 정자도 있으니,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엽서 한 통 적고 싶어지는 건 인지상정 아닐까.

그리고 얼마전 누군가 지적하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치 일본 신사에 주렁주렁 매달린 소원기원 푯말들을 벤치마킹한

소원기원 패..라고 해야 하나. 뭐, 좋으면 벤치마킹할 수도 있는 거지. 이게 무슨 사당도 아니고, 소원을 적어 걸어둔단

정도의 아이디어 갖고 베꼈다고 말하는 건 좀 과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정자를 둘러싼 울타리엔 통나무를 걸어놨다. 거기 역시 소원을 적을 수 있도록 충분히 비치된 펜들.

오호......누군가 빨간 펜으로 "MB OUT"을 적어놓았다. 누굴까, 이거 누가 그랬을까.ㅋㅋㅋ

올레길이라고 전부 올레길 손수건 같은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랜다. 코스 중에서도 7코스를 비롯한 몇몇 코스,

그리고 7코스중에서도 몇몇 포스트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찾아간 풍림리조트. 그 앞에 그럴듯한 이끼벽.

토토로가 뛰어놀듯한 분위기다.

아마도 여기가 강정천? 리조트 옆을 끼고 흐르는, 아니 정확한 선후사실대로 따지자면 강정천을 끼고 리조트를

지었겠지만, 사계절 내내 맑은 물이 흐르는 은어 서식지랜다. 물이 엄청 맑지 않고서야 코빼기도 안 비친다는

우윳빛깔 은어씨, 수박냄새 은어씨.

그러고 보면 과거 제주도, 하면 떠오르던 돌하르방과 전통 형태의 대문 같은 이미지의 농도가 많이 옅어졌다.

그만큼 제주도에 다른 볼거리와 먹을거리, 이야기거리가 많아졌다는 의미인 거 같아 다행스럽다.






법환포구에 들어섰구나,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한 징표는 역시 바다 위에 둥둥 뜬 채 매어있는 배들.

남/녀 노천탕이 있어서 깜짝 놀랬다. 알고 보니 제주도에서 흔치 않은 담수가 용출한다는 곳, 역시 그러니 근처에

법성포구 마을이 자리잡은 거겠지만. 여자 노천탕을 얼쩡거려봤는데 아쉽게도(?!) 양말만 벗은 아주머니들만 계셨다.

길바닥에 널어놓은 게, 돌담에 기대어 놓은 게  뭔가 했더니 깨란다. 도로가에 널어놓으면 먼지가 풀풀 쌓일 거 같은데

여긴 별로 오가는 사람도 없고 차도 없으니 괜찮지 싶다.

울룩불룩한 해안선. 울퉁불퉁한 돌멩이.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조각배.

법환 잠녀 마을. 해녀가 일제 시대의 잔재라는 걸 알았던 건 대학교 일학년 때, 제주도를 자전거로 일주할 때였다.

굳이 일제 시대 만들어진 단어를 싸그리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순전히 어감상 해녀보다 잠녀가 로맨틱한 게 좋다.

이런 식의 공공미술 기획이 늘어나면 좋겠다. 뭔가 늙어가는 사람처럼 퇴락하고 벗겨지고 날로 촌스러워져가는 풍경에

새롭게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작업. 요새 오히려 이런 수혜는 지방이나 상대적으로 소외된 곳이 받는 듯 한데, 삭막하고

위압적인 도심에도 마찬가지 생기가 필요하지 싶다.

해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달리는 배, 보아하니 막 출항해서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잠녀 체험이 가능하다는 간판을 보고 들어가 본 건물에서 만난 잠녀복장. 알고 보니 식당이어서 성게국수를 맛보았고,

다시 알고 보니 식당을 빙자한 마을 아주머니들의 모임장소여서 갖고 있던 간식거리도 나눠먹고, 재밌었다.

해안가에 연한 어느 집 야트막한 담장 위에 얹혀 있는 조개껍질들.

유모차를 끌고 저기까지 왜 나가셨나 했더니, 빨랫감을 싣고 나르는 역할을 하나 보다. 동그마니 서서는 빨래가

끝나길 기다리는 얌전한 유모차.

이 나무기둥위에 얹힌 돌들이란. 허참, 이란 감탄사 이외엔 별로 할 말이 없어진다. 아니 요새는 '올레~'라던가.

바닷바람에 장렬하게 펄럭이며 꿋꿋이 길을 알려주는 저 기개는, 왠지 이순신장군의 최후같이 비장감이 감돈다.

법환마을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친 매점. 뭔가 분위기가 꽤나 이국적이었다. 100% 망고주스를 팔길래

한번 맛보고 싶었는데, 생망고가 아니라 엑기스나 그런 거 아닐까 싶어서 그냥 포기.

이제 바닷가에 보다 바싹 붙어서 걷기 시작했다. 검은 빛의 현무암 덩어리들이, 살짝 침침한 날씨 아래 빛을 머금었다.

이건 일종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인 거다. 돌이 두 개 이상만 다소곳이 쌓여 있으면, 삼층이 되고 사층이 되는 건

순간이다.

눈앞에 보이는 건 서건도, "썩은 섬"이란 우리말 지명을 굳이 한자로 옮기다 보니 서건도가 되었다 한다. 섬의 토질이

부식되어 있어서 썩은 섬이라 했다던가. 만조 때는 섬이 되고, 간조 때는 짧으나마 '모세의 기적'이 벌어지는 곳.

서건도로 향하는 구간은 일명 '일강정바당올레'라고도 한다. 일일이 손으로 돌을 골라낸 끝에 새로운 바닷길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한번 그어진 얇은 선 위에 숱한 덧칠을 통해 굵게 만들어내듯, 올레길은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며 더욱 뚜렷이 패일 거 같다.

서건도. 썩은 섬. 맘먹으면 섬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제주도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물이 차들어오는 건 또 금방인지라

조금 가보다가 말았다. 가봐야 뭐 별거 있겠어, '저건 신포도야' 이런 마음으로.

바닷가에 떠밀려 온 거겠지. 하얗게 표백되어 버린 나무가 해안가에 길게 누워있었다. 넌, 어디까지 가봤니.(이러고)

바닷가에 바로 붙어있으니 토질이 좋을리가 없다. 소금기 짭짤한 바람이 사시사철 24시간 불어올 텐데, 그 바로

옆에서도 이렇게 흙을 일구고 작물을 돌보시는 분. 대체 저 고랑 사이로 무엇이 튀어올라올지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튼튼하게 잘 여물었으면 좋겠다.

물질 나가시나보다. 잠녀 아주머니 두 분이 바삐 걸음을 옮기셨고, 나는 그 빨갛고 노란 장갑의 색감이 너무 좋아

카메라를 바삐 들이대고 말았다.




찻길 옆으로 걷다가 마주친 '건설자재 야적장'. 무슨 "때묻지 않은" 천혜의 비경이나 자연만을 보는 길이라면 자칫

일상을 도외시한 잠시지간의 탈출로 끝나기 쉬울지 모른다. 제주도를 삶터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고,
 
학생들은 통학하며, 먹고사니즘의 굴레를 놓지않고 사는 현장이 생생히 있어서 걸음걸음 더 재미지다.

윗둥치를 뚝뚝 끊어놓은 나무들에서 몽실몽실 이파리가 돋아놓으니, 왠지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거꾸로 꽂아놓은

느낌이다. 이파리들이 좀더 길게 자라나면 위아래를 분간하기도 좀더 쉬워질 듯.

어디로 가야 할 지, 갈림길이 나타나면 두리번두리번 숨어있는 화살표부터 찾는다. 사실은 갈래길에선 딱 화살표

두 개면 해결될 텐데. 갈림길 나타났을 때 당황하지 말라고, 진즉에 길 안내표시 해놨다고 하나, 그리고 갈림길에

서서 멀찍이 양쪽 길을 바라봤을 때 어느 한 쪽을 가리키는 화살표 하나.

아마도 여름엔 사람들이 바글바글댔을 길가 행상의 흔적. 인걸은 간데 없고 천막만 남았다.

문득 즈려밟고 가야 할 징검다리. 보폭에 맞게 잘 배치된 징검다리는 그 위를 밟고 걸으면 도, 레, 미 소리가

경쾌하게 날 듯 하지만, 다리를 억지로 잡아찢게 만드는 징검다리나 계단은 짜증만 난다.

역시 남도라 식생이 다르긴 다르다. 선인장이 꽃을 틔우고, 뾰족뾰족 가시를 드러냈다.

걸으며 지나친 어느 공원. 엉성하게 세워진 탑과 야자수길이 인상적이었다. 이 곳의 야자수는 아랍국가나 동남아의

야자수와는 또 느낌이 다르다. 좀더 조그맣고 부드러운 인상을 남긴다.

거대 알로에..처럼 생긴 선인장..일 게다 아마 저건. 알로에는 토실토실 배가 부른 잎사귀를 갖고 있을 텐데 이건

얄포름한 잎사귀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추측. 잎사귀 하나 잘라내서 칼처럼 휘두르면 재밌겠다 싶었다는.

왜 언젠가 홍길동이던가, 티비 속 퓨전사극에서 휘두르던 연검이랑 닮았다.

화살표를 그려넣기가 애매한 곳에는 등산로를 표시하듯 이렇게 노란끈 파란끈이 묶여 있다. 올레길의 대표색상인지도.

문득 눈에 띈 돌하루방, 돌하르방인가? 어쨌거나 올레길을 걸으면서나 제주도 와서 생각보다 눈에 잘 안 띈다.

올레길을 걸으러 왔던 가족인 듯 한데, 어느 틈에 이런 코팅된 표식까지 준비한 걸까. 그 세심한 마음씀씀이에 놀랬고,

또 저런 멘트는 언제 준비해서 적어넣은 걸까 궁금증이 끝이 없다. 집에서부터 "엄마아빠 힘내세요"라 적어왔을려나.

코팅을 제주도에서 올레길 걷는 와중에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학교 앞 문방구에서 했을 수도 있겠구나..등등.

아마도 여기가 수봉로. 염소만 다니던 길을 삽과 곡괭이로 올레지기 한분이 직접 개척해서 만든 길이 수봉로라던데,

딱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올레지기님의 이름을 딴 '수봉로'인지는 걷고 나서도 모르겠다. 그냥, 제주도의 어느 길.

이렇게 돌들이 몽글몽글한 해안가를 바로 곁에 두고, 조금씩 뜨거워지는 태양을 느끼며 걷는 건 여전히 유쾌했다.

등엔 어느 틈엔가 솔찮이 땀이 배어나고 다리도 조금은 묵직해지는 느낌이었지만, 흔히 원형으로 돌게 되는 산책과
 
달리 그저 가고 또 가는 걸음이란 사실 자체가 유쾌했던 것 같다.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이라던가.

해삼과 오분작이를 체포한다고? 채취는 알겠습니다만 체포는 무엇인지. 한자를 알면 뜻은 헤아릴 수 있다지만,

이왕이면 조금 더 대중적인 단어를 써도 될 거 같은데 말이다.(잘 안 쓰이는 단어라면 한자를 병기해주던가 차라리.)

이것..난꽃 맞지 싶은데, 꽃들 너머로 열기구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눈에 섬의 사면, 그러니까 바다로 둘러싸인

땅덩이를 실감할 수 있다는 건 꽤나 매력적이긴 한데...일단 제주도는 섬이라기엔 너무 크다. 실감이 안 날 정도로.

그러고 보면 제주도의 해안이 걸음직한 이유는, 김기덕의 영화 '해안선' 마지막에 나왔던 것처럼 반도 삼면의 해안은

모두 군대에 점령되어 있기 때문이다. 밤에 마음대로 내려가 밟아보지도 못하는 가시돋힌 철조망의 땅. 여기도

그다지 자유롭진 못해서, 파란색으로 색칠된 초소가 드문드문 현무암 사이에 박혀 있다.

소철..이던가. 어렸을 적 집에서 키웠던 뾰족뾰족하고 딱딱한 잎사귀의 식물을 재배중인 듯한 비닐하우스다. 근데

이렇게 관리 안되는 비닐하우스는, 일부러 천장을 뜯어내고 벽면의 비닐도 헐어버린 걸까. 열맞춘 소철 병정들에
 
점령당해버린 듯한 비닐하우스.



여기가 돔베낭길 쯤일까, 옆으로 담장돌들이 가지런히 이빨맞춰 늘어서 있고, 머리위엔 꽃을 잔뜩 얹었다.

색소폰을 형상화한 거 같기도 하고, 다른 악기 같기도 하고. 알고 보니 여긴 무슨무슨 펜션의 정원이랄까,

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올레길 코스도 그런 사적 영역에 기댄 바가 없지 않다.

호텔에 부속된 산책길이라거나, 호텔 홍보를 위해 기증된 정자라거나.

그래도 그런 공간들이 올레길 순례자들에게 (물건을 사라거나 자신의 호텔을 이용해달라는 등의) 강한 압박, 그래서

불쾌할 수 있는 부담감을 주지 않아 다행이다. 그냥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느낌이다. 그 펜션 정원에 들어가 잠시

앉아 쉬며 바라본 꽃과 나비.

거푸 크게 심호흡하는 리듬으로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나비. 후읍, 하아, 후읍, 하아.

약간 흑백 사진처럼 나와버렸는데, 왠지 분위기가 살아있는 사진같다. 걷기 시작한지 30분도 안 됐으니, 아침 7시반도

안 된 살짝 이른 아침의 제주 앞바다.

그리고 제주의 하늘. 구름이 몽실몽실 한켠으로 우르르.

계속 이렇게 잘 관리되고 '공원'같이 다소 인위적인 느낌의 길만 걷나 했더니,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잘 닦이고 주변

경관도 잘 조성된 길은 끝나고 '날 것'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껏 낮은 자세로 웅크린 저 차양들처럼 서서히. 저건 뭘 길러내기 위한 보호막인 걸까.

올레길이라고 샛길이나 곁길이 없을리 없다. 잠깐 샛길로 빠졌더니 바닷가에 내려섰다.

시커먼 돌과 푸르딩딩한 바다, 그리고 그야말로 하늘색 하늘.

다시 올레길 코스로 복귀, 이번엔 문득 호박길이다. 호박이 넝쿨째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는 길가.

이런 찻길이나 대로변 인도를 걷기도 한다. 온통 '허'로 시작하는 렌트카들이 씽씽 달리는 찻길이라 조금 주춤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찻길 근처에 기댄 구간이 길지 않아 다행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아버지를 빼고 엄마랑 여동생이 함께 갔다. 앞에서 부지런히 걷는 두 모녀.

그렇게 대로변을 지나다 마주친 어느 집의 '팥색' 지붕. 퇴색한 느낌이 너무 좋은 거다. 군데군데 잘 벗겨진

페인트칠도 무지하게 매력적이고. 이게 바로 엣지있는 빈티지스러움..?

공항버스 600번. 제주국제공항에서 15분마다 출발하는 이 버스는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 제주도를 종단한다.

서귀포시 옆 제주월드컵경기장 근처 펜션에 머무느라, 목요일 퇴근후 비행기 잡아타고 이 버스를 잡아탔댔다.

올레~! 갈래갈래 갈린 길 앞에 서면 이런 식으로 된 스티커던, 파랑색 페인트로 찍찍 그려진 화살표던, 뭔가

표식을 찾게 된다. 스티커가 이뻐서 하나 떼어올까 하는 마음이 0.1초간 들었으나 후인들을 위해 참기로 했다.

서귀포여고를 지나가는 길에 문득 마주한 어느 집 대문. 제주도의 대문이라 하면 나무기둥 세 개를 가로누인 전통적인

그게 생각나는데, 이 녹슨 철문도 못잖은 포스를 뿜고 있다.

아직은 싱싱하니 파랗기만 한 귤. 희끗희끗한 액체가 말라붙어 있길래 혹시 농약인가 해서 물었더니, 영양제란다.

지금 나오는 귤들은 하우스 재배라는 것 같던데, 그래도 인심좋은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받은 귤은 크고 달았다.

어느 집 지붕 위에 불쑥 피어난 꽃무더기. 여린 꽃잎 여기저기 벌레먹은 양 너덜너덜한 게 살짝 민망하지만서도,

외려 '보여주기'용이 아니라 그냥 제 멋에 싹트고 자라고 꽃피웠겠거니 생각하니 또 그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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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8월 30일

- 13:35 인천 OUT
- 17:55 암스텔담 IN
- 20:50 암스텔담 OUT
- 22:05 파리 IN

- 숙소 도착, 휴식

ㅇ 8월 31일 (라데팡스-포름 데알 ; 서-동 중심부 횡단)

- 라데팡스
- 개선문
- 샹젤리제 거리
- 콩코드 광장
- 튈를리 정원
- 카루젤 개선문
- 루브르 궁전
- 시청
- 포름 데 알

ㅇ 9월 1일 (시테섬-스트라빈스키 광장 ; 파리 중심부-동북부)

- 시테섬
- 노틀담 성당
- 콩시에르주리
- 생트 사펠
- 퐁뇌프
- 퐁피두센터
- 스트라빈스키광장

ㅇ 9월 2일 (에펠탑 - 오랑주르 미술관 ; 파리 서남부-중심부)

- 에펠탑
- 샤요 궁전
- 앵발리드
- 오르세미술관
- 생제르망거리
- 오랑주르 미술관

ㅇ 9월 3일 (마들렌 교회 - 오페라 극장 ; 파리 중심부-북부)

- 마들렌 교회
- 몽마르뜨 언덕
- 사크레쾨르 성당
- 오페라 극장 (공연 감상)

ㅇ 9월 4일 (루브르 미술관 - 몽파르나스 ; 파리 중심부-남부)

- 루브르 미술관
- 소르본 대학(제4대학)
- 팡테온
- 룩상브르 공원
- 생쉴피스 교회
- 몽파르나스

ㅇ 9월 5일 (베르사유 등)

- 베르사유
- 생뚜앙 벼룩시장
- 유람선

ㅇ 9월 6일

- 16:25 파리 OUT
- 17:40 암스텔담 IN
- 18:40 암스텔담 OUT
- (+1일) 11:55 인천 IN

* 몇 가지 원칙들

 - 걷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 여유있게, 느긋하게.
 - 원칙 따위 없는 게 여행, 스케줄에 구속받지 않기.

* 더 넣고 싶은 일정 혹은 장소

 - 페르 라세르 묘지 혹은 다른 공동묘지
 - 방돔광장
 - 불로뉴 숲 혹은 뱅센 숲
 - 샤르트르/퐁텐블로/생 드니 등 파리 교외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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