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 10점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부키


수많은, 그렇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뿐인, 자기계발서 나부랭이들.

왜 이렇게 자기계발서니, 에세이니, 심리서적 따위가 많아진 걸까. 어느 순간 '멘토'를 자처한 사람들의 도덕교과서는

어떻고. 서점에 가서 자기계발서류의 도서가 빼곡한 공간에 가거나, 그런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굳이 섭렵하고 있다며

자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 어쩔 수 없는 답답함과 일종의 혐오감이 스물거리곤 한다는 걸 솔직히 고백한다.


"암은 내게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멋진 일이었다." - 고환암 생존자인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

"부정적인 인간들은 역겹다! 그들은 당신과 나처럼 긍정적인 사람들의 기운을 빨아먹는다. 그들은 훌륭한 회사, 팀, 관계의 에너지와 생명을 빨아먹는다...그런 사람들을 피하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 해도 당신을 고갈시키는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버려라. 당신은 그런 사람들 없이 더 잘 살 수 있다."

(* 보라색 구절들은 책에서 인용. 딱히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됨)


누군가 누군가에게 작정하고 가르치는 말투로 내리는 '교시'는 대개 뻔하다. 긍정적 사고, 긍정적 태도가 성공을 부른다!

긍정적인 생각은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끌어당깁니다, 라고 말하는 책들 말이다. '좋은 생각'류의

야릇한 '군대 정훈도서'같은 책이나 '시크릿'같은 책들은 제목만 바뀌고 저자만 바뀐 채 같은 메시지를 반복한다.


'긍정의 배신'이 보여주는 긍정적 사고의 허위성.

'긍정의 배신'은 이런 쓰레기들을 수십수백권 읽는 것보다 나은 하나의 성찰을 던진다.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메시지는 눈앞에 닥친 엄연한 위기와 곤란함을 오로지 자신의 마음의 문제로만 치환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자신 이외엔

오로지 '자신의 성장, 발전,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외부세계일 뿐이라는 자폐적이고 허위적인 태도를 낳고, 위기에 처한다.

(당연하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없이 무조건 답은 마음가짐의 문제, 한가지라고 하니까.)


"긍정적 사고에서 말하는 우주에 다른 사람들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것을, 예를 들어 똑같은 목걸이를 원한다면 어쩔 것인가? 아니면 선거나 축구 경기에서 우리와는 반대 결과를 희망한다면? '시크릿'에는 디즈니월드에 놀러갔다가 기구를 타기 위해 너무 오래 기다리는 바람에 실망한 콜린이라는 열 살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년은 '시크릿' 영화를 보고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다른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콜린이 '시크릿'에서 얻은 힘 탓에 뒤로 밀려나 기다리게 된 아이들은? 원하는 대로 여자에게 끌어당겨진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 역시 그녀와의 만남을 원했을까? 아니면 그녀의 환상 속에서 인질이 되어버린 것일까?"

"긍정적 사고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은 당신의 보살핌을 받거나 당신에게 달갑잖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당신을 보살펴 주고, 칭찬하고, 긍정해 주기 위한 존재다...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차단하고, 그 결과 심각한 감정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진정한 드라마로부터 물러선다는 것은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 깊은 무력감이 놓여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왜 뉴스를 나 몰라라 하는가?...아무리 태도를 개조해도 '민간인 사상자 수가 늘고 있습니다.'라거나 '기근이 확산되어..'로 시작하는 뉴스 헤드라인을 좋은 소식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부정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뉴스를 보지 말라는 것, 그러니까 환경을 바꾸라는 얘기는 우리가 희망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진짜 세상'이 저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이런 무서운 가능성에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찬성과 지지, 좋은 뉴스, 미소 짓는 사람들로만 조심스럽게 구성해둔 자신의 세계로 후퇴하는 것 뿐이다."



마음만 잘 먹으면 자신의 마음도 몸도, 심지어 온 세계가 자신에게 복종할 거라는 엉성한 환타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구라'일 뿐이다. 그 구라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신의 세계를 만들어낸 중세의 종교적 사고겠지만, 지금

'긍정적 사고'를 설파하는 저간의 흐름들은 이미 종교적 도그마를 넘어선 수준에서 사람들의 뇌를 딱딱하게 만들고 있다.


알면서 속아주는 '구라'의 효용(?)

물론 '구라' 나름의 효용은 있을 수 있다. 애초 이 책, '긍정의 배신'을 쓴 작가가 겪었듯 암이라거나 실직같은, 당장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난 안 될 거야, 라는 패배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보다는 조금이라도 밝은 면을 보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의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태도를

강요하는 병원의, 사회의, 사람들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건 절대로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에 형을 면제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매달린, 죽어가는 사람의 낙관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실제로 암을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자기들 용어로 '이점 발견'이라고 하는, 암에 긍정적인 감정을 키우는 방식으로 기울었다."

"그 도그마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감정과 병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유방암 환자들에게 뭔가 할 일을 부여한다. 치료 효과가 나타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환자는 자기 기분을 관찰하면서 세포 차원의 전투를 돕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한다...동시에 그런 도그마는 암 연구 및 치료 산업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외과 의사나 종양학 의사 이외에 행동과학자, 치료사, 동기 유발 카운슬러, 훈계를 늘어놓는 자기계발서 저자들도 참여할 길이 열렸다."

"유방암을 선물로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자리에서 밀려나 빈곤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실업자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기회'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는다...긍정적이 되면 구직 기간에 기분을 더 좋게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더 빠르고 행복하게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들일지 모른다. 다들 알고 있지만 애써 눈돌려 밝게 보려고 하는 와중에 굳이 찬물을 끼얹는 건 무슨 놀부 심보냐고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력으로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일들에 대응하고 버텨내기 위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도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도전에 잘 대응하면 '더 큰 성취, 발전, 성숙' 따위가 수반될 거라는 믿음. 다만, 그 이면이 문제라 그렇다.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기 위해 억압되는 감정과 정당한 분노는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음에도 끝내 실패하는 경우에는 어떡해야 하는가. 나아가서는, 개인적 차원의 긍정적인 사고 말고도

예컨대 발암물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거나 정리해고 실시요건을 강화하는 식의 구조적 해결책이 옳은 경우도 있지 않을까.


다시 묻는다. 가난, 실업, 비만은 개인의 마음의 문제인가.

그렇게 낙관론과 긍정적 사고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왔다. 병을 이겨내고 취직을 하고자 긍정적인 마음, 밝은 생각만을 줄곧 가지려 노력하고, 가난을 이겨내고자 '치즈는

누가 옮겼는지' 주저앉아 따져볼 겨를도 없이 치즈를 찾아 바삐 헤매게 된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이제 그건 중요치 않다.


"암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은 감정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끔찍한 비용을 강요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긍정적 사고는 분노와 공포라는 실체적 감정을 부정하고 쾌활함의 분칠 아래 묻어 두도록 요구한다. 불평을 듣느니 가짜 쾌활함을 상대하는 것이 나은 만큼 의료 종사자나 환자의 친구들에게는 몹시 편리하다."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제는 성공을 이끄는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고용주나 긍정적 사고를 믿는 동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의미심장한 실패로 이어진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권위자들은 부정적인 사람들을 떨쳐 버리라고 강조하면서 또 하나의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항상 미소를 띠고, 쾌활하게 행동하고, 흐름을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배척될 각오를 하라."

"긍정적 사고가 실패해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암이 퍼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럴 때 환자가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했다고, 애초에 암이 생긴 것도 부정적인 태도 탓이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는 '이미 피폐해진 환자에게 추가적인 부담이 된다'고 한다."

"작가로 변신한 한 생존자는 유방암이라는 선물을 계시적인 힘의 발현으로 해석했다. 그녀는 '암이 준 선물'이라는 책에서 '암은 진정한 삶으로 가는 차표다. 암은 진정한 뜻에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으로 가는 여권이다.'라고 썼다...이 모든 긍정적 사고는 유방암을 통과의례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렇게 불만과 분노, 현실에 대한 성찰같은 걸 도외시한 결과는 자신의 내부에서, 외부에서, 그야말로 사방에서 드러났다.

긍정적인 사고, 밝은 사고의 마법을 믿는 사람들의 눈빛은 대개 광신도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턱없이 순진한 기대와 희망을

부지런히 배반하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더욱 코너로 몰린다. 무조건 믿고 위로받을 것이 절실해질 만큼. 비합리의 세계다.


외부적으로는 당장의 현실적인 경고와 신호들을 무시한 채 긍정적 사고만 따르다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세계금융위기가

책에서는 큰 예시로 꼽혔다. 나더러 예를 하나 꼽으라면, MB 정부의 숱한 정책적 실패 중 하나를 꼽겠다. 4대강 사업은 어떨까.

회의적인 목소리, 불평과 비판 여론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의 낙관론 속에서 미친 듯 내달렸던 4대강은 파국을 맞고 있다.


인민의 아편, '긍정敎' 혹은 '정신승리법'을 권하는 사회.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않거나 못한 채 무조건 긍정하자는 절대적 메시지는 당연히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위험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처음에 말했듯 갈수록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쓰레기같은 책들을 볼 때

느낀 답답함과 혐오감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정신승리법'을 점점 더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했다.


왜 그렇게 된 걸까. 왜 서점엔 갈수록 자기계발서니 동기유발 코치서적이니 따위가 기승을 부리는 걸까. 사람들이 '긍정적'이

되려 한다고 해서, 꼭 합리적인 의심이나 성찰, 회의적인 태도 따위를 버리기로 작정했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류의

책들이 잘 팔려나간다는 건 하나의 징후다. 거대한 무기력감, 절박함, 패배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반증 같은 것.


이 책이 아쉬운 건 그 지점이다. '긍정'의 힘을 전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예견하지 못한 경제위기나 삶의 위기가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 반대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 시기는 아닐지, 그렇게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난관에 봉착해 하릴없이 '정신승리법' 따위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거라면. 그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답은 있긴 할까.


"물질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태도를 바로잡고, 감정의 반응을 수정하고, 자신의 마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자기를 향상시키는 다른 방법, 예컨대 교육을 통해 어려운 신기술을 습득한다거나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사회 변혁에 나서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까? 하지만 긍정적 사고에서는 모든 도전이 내면적인 것이며 의지를 통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회사에 봉사 동호회 하나쯤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던 차에, 동기들과 의기투합해 뚝딱 만들고는 오늘 첫 봉사활동을 갔다.

서울 어디메쯤에 있는 한 아동 보육시설, 3세미만 영유아부터 초등학생들까지 한 60여명이 머물고 있는 자그마한 2층

건물이었다. 앞뒷 마당을 깔끔하게 쓸고, 마침 고장나 버린 세탁기를 대신해 세탁물을 헹구고 널고, 아가들 밥먹이고

대여섯살짜리 꼬맹이들이랑 놀아주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그냥 아이들하고 잘 놀아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끊임없이 안아줘, 업어줘, 한번만,을

외치는 극성스러운 아이들 틈에서 동기 하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말로 변신한 채 천지사방을 기어다니고 있었고, 나 역시

어느 순간 앞에 두 녀석을 안고 뒤에 한 녀석을 업고 말았다. 자기들 맘대로 해주지 않으면 미워! 하면서 연속 로우킥도

서슴치 않는 무서운 대여섯살 짜리 아이들, 서로 안기고 업히겠다고 아우성치다간 서로의 머리통을 그야말로 퍽, 소리

나도록 내려치는 서슬에 살짝 움찔해 버렸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3살미만 어린애들의 점심을 챙기면서 시설 근무자는 제대로 본을 보이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밥 다먹어가는데 넌 왜 이리 늦어, 봉사하는 사람들 왔다고 더 칭얼거리는 거야? 얼른 안 씹을래? 갓 24개월 지났다는

애가 미처 밥을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우악스럽게 숟가락으로 입술을 눌러대고, 책으로 머리를 탁탁 쳐가며 재우쳤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는 과장님 말로는 자기 애는 밥먹는데 한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했는데, 그 아이들은 이십분만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봉사자들 앞에서도 전혀 거리낌없는 그 말투와 태도와 손속이라니. 한쪽에선 갓난애가 죽어라

울어대고 있었는데, 자꾸 어르고 달래주면 버릇만 나빠진다고 그냥 냅두라고 했다. 그런 분위기.


2층의 대여섯살 아이들은 1층으로 내려오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안고 업고 마당에 나가려고 계단을 한걸음
 
내딛다가 방안 가득 아이들의 새된 비명소리가, 게다가 내 가슴팍과 등언저리에서도, 뽑아져 나왔다. 안 되요, 혼나요.
 
그런가 하면, 애들 손이 안닿는 한구석 높은 곳에 쌓여있는 블럭이니 장난감들은 먼지가 묵은 때로 변해 두껍게 쌓여
 
있었다. 누가 봐도 이건 장식용이구나, 싶을 정도의 먼지 두께하며, 건네준 블럭을 주저주저하며 받아드는 아이의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태도하며.


그 시설 근무자들을 도덕적으로 탓하려는 생각은 별로 없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고

여건의 문제로 봐야 하는 게 맞을 거다.
애들은 많고, 근무자 수는 적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는 이야기는

사실 친부모에게조차도 쉽지 않은 이야기인 것을. 더구나 '봉사'를 한다는 마음에 고양되어 있는 '뜨내기' 봉사자와는
 
달리 근무자들은 그것이 비일상적인 봉사가 아니라 일종의 업무, 주어진 작업일 테다.

오히려 내가 착잡해졌던 건 다른 문제였다.


뾰족한 기술이나 실질적인 도움될 만한 게 없어 사실상 '몸빵'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닌 봉사였다. 그저 애들하고 잘

놀아주고, 조금이라도 웃게 해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어쩌면 시설 근무자들이나 아이들에게나 역효과를
 
일으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아이는 마냥 이쁘지만, 막상 같이 사는 '가족'(시설 근무자)의 입장에선
 
그게 또 아닐 거다. 아이들이랑 놀아주고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그렇게 아이들의 요구사항에 싫은 내색 한번 없이

예스로 일관하러 온 봉사자들이란, 어쩌면 애들을 망치고 애들과 시설근무자들의 관계마저 악화시키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잠깐씩 손님처럼(손님으로) 왔다 가는 봉사자들의 선심쓴 관대함을 최대한 이용하려 들고, 근무자들은 관심의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성격만 극성스러워지고 (사회적인 어법으로 말하건대) '버릇만 나빠지는' 아이들을 다루느라

진이 빠질 거다. 아이들과의 마주침은 흡사 전쟁과도 같아지고, 늘어나는 건 제재요 후퇴하는 건 '당위적인 도덕률'들일
 
거다. 아마도 그렇게 진행되어 오는 상황일 텐데 거기에다가 '애들은 사랑으로'라느니, '절대 때리면 안 된다'느니

배부른 이야기는 차마 못 하겠다.


그 와중에 회사에 제출하기 위해 사진찍고 찍힌다는 행위가, 뜬금없게도 얼마전 고양이까페에 갔을 때의 그것과 중첩되어

보였다. 다소의 어이없음과 불쾌감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아동 보육시설에서의 (일회성) 몸빵

봉사활동과 고양이 까페에서의 고양이 사파리-고양이들과 놀아주는 것-의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두드러졌다. 몇가지만
 
떠오르는 대로 적어봐도 꽤나 많다.


아이들이 드글드글대는 공간, 고양이가 드글드글대는 공간.
 
적절하고 꾸준한 관심을 줄 수 있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 주인이 없는 고양이들. 

로우킥을 날리고 머리채를 잡아도 귀엽다고 마냥 관대해지는 자세, 고양이가 바지에 오줌을 싸도 마냥 귀엽다는 자세.

아이들(의 버릇, 생활)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 홀가분한 입장, 고양이에 대한 책임은 질 필요없는 홀가분한 입장.

아마도 노인이나 장애인보다 아이들을 좋아할 취향, 아마도 개나 예컨대 쥐보다 고양이를 좋아할 취향의 문제.


뭐..시니컬하게 나가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비교적 온건한 것들도 벌써 이만큼이다. 어린 왕자의 여우가 갈파한 바

서로를 책임지지 않는, 길들여지지 않은 관계란 것은 온실 속 백만송이 장미꽃과 나의 관계다. 일회적인, 혹은 비일상적인

'봉사'가 갖는 치명적인 허점이 아닐까 싶다. 책임질 필요없는 대상에 대한, 취향이 반영된 선심. 더구나 그

누군가의 새삼스런 선심으로 인해서 더욱 사태가 악화될 가능성마저 생겨버린다면.


봉사란 뭘까.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 걸까. 한번 다녀오고 고민만 늘었다.

어쩌면, 비일상적인 봉사는, 그야말로 비일상적인 부분에 그쳐야 할지도 모른다. 쓸고 닦고 빨고, 그런 부분. 부족한

사랑을 채워준다는 미명으로 아이들과 놀아주고 마냥 귀엽다며 다 받아주는 '봉사'란 건 길게 봐선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키우는 맘으로,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아니라면.







티비에서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어리벙벙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실감이 안나던 기억.

2001년, 3개월 동안 뉴욕에 머물다 돌아온지 채 며칠이 안 되었을 때였다.


비몽사몽 늦잠에 취해있는데 잠을 덜컥 깨운 엄마의 한마디. "노무현 죽었다".

뭐라고? 이건 흡사 9.11때 기억의 반복 아닌가. 난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여전히 티비 속보들은 잠에 취했는지,

자살이네 실족이네 서거네 운명이네, 온갖 단어들을 동원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투신자살'이라니. 노무현의 허약하고 위세없는 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단어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글쎄, 개인적으로 노무현을 좋아하지 않았고, '진보'를 표상-혹은 위장-했던 그가 끝내 이렇게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며 더더욱 실망했지만. 아니, '진보'라는 단어에 똥물을 뿌리고 '도덕성'이란 기준 자체를 회의에

빠뜨리고 말았던 그가 끝내 자신의 언행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죽음을 선택하다니. 또다시 '경망스럽다'는

표현을 듣지 않을까 저어스럽다.


주위 사람들의 몇 가지 반응.

"광주학살을 부르고 몇백억씩 해처먹은 인간도 잘만 살고 있는데 왜 죽고 그러냐.."라는 안타까움.

"이건 결국 이명박이 초래한 거 아니냐.."라는 분노.

"남겼다는 유서에 대체 무슨 내용이 담겼을지 모르지만, 혹시 다 까고 간 거 아니냐.."라는 기대(?).


모르겠다. 장자연리스트때도 그랬지만 죽은 사람은 더이상 말이 없고, 죽은 사람은 더이상 (쥐뿔 남은) 권력도

행사하지 못하며, 그는 이제 주위 사람들을 남기고 온갖 문제들을 남기고 홀로 떠나버렸다.


혹시 故 노무현 전대통령 만큼이나 말실수 잦고 오해를 자주 부르는 그 사람이, '국가 이미지에 큰 타격'이라느니,
 
'국민의 성금을 모아 장례를 치르자'라느니...제발 그런 속내가 있어도 말않고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론들, 노무현 전대통령 때 중소기업 사장이 목매달아 자살했던 것을 두고 사실상 노 전대통령이 죽였느니

어쨌느니 말많았던 언론들, 이번엔 과연 누구더러 책임지라 하는지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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