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술에 잔뜩 취해서 조금은 울었던 다음날.

머릿속이 잔뜩 복잡하던 전날과는 달리, 머리를 떼어서 흐르는 찬물에 좀 담궈놓았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

오로지 그 생각 하나밖에는 남아있지 않던 날.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가사만 계속해서 되뇌이다 못해 장문의 네톤 대화명으로 적어두었던,

영혼이 절룩거리다 못해 절뚝거렸던 날.


그러고 보면, 다짜고짜 '절룩'이라고 써보냈더니 자기가 미안하다던 친구도 참.

이 캡쳐가 들어있던 폴더명도 참. "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

알집에서 새폴더를 만들고 만들고 만들면 까마귀가 나오고 지빠귀가 나오고 해오라기가 나오다간

급기야 새, 새새, 새새새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2010년 4월의 어느날.







홍대 상상극장에서 있었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스탠딩공연.

그를 처음 알았던 건 '서울대를 나온 오입쟁이', '매일 낮 점심시간 둘이 만나 쿵덕쿵 그짓거리' 따위

가사가 난무하는 "스끼다시 내인생"을 통해서였다. 마치 예전에 "짬뽕"이란 노래로 황신혜밴드를 알아갔던

것처럼 그렇게 좋아라~* 모드가 발동한 건 불과 몇 달 전.
 

그의 발랄하면서 믿음직한 목소리, 속시원하고 유쾌한 가사, 그런 것들에 꽂혀있던 차에 공연에 가서는

더욱 멋진 노래들을 만나게 되었다. '달빛요정'을 자처하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된 것은 덤.


그의 노래는 일관된 어둠과 패배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걸 굳이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루저'마인드랄까.

뭘 어째야 될지,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어 응어리지고 있는 분노, 좌절감, 박탈감, 그렇지만 즐겁게 살겠다는

흔들림없는 의지까지. 사람들의 패배감과 좌절을 모두 내려놓고 가도록 한다는 게 무려 '달빛요정'님의 펑크

음악론이니 딱히 새삼스런 루저 타령도 아니지만, 그의 노래가 갈수록 보다 직접적으로 세상에 외치는 듯 하단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특히 최근의 '전투형 달빛요정' 앨범은 거의 대중적 민중가요랄까, 하여간 그렇다.


딱히 그의 공연이 미친 듯이 방방뛰고 말달리는 식의 공연은 아닌지라 체력을 조금은 보전할 수 있었지만, 그가

부르는 노래들의 가사와 멜로디에 온전히 몰입했던 세시간은 온몸을 녹진녹진 타격하고 말았다.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가사의 새 맛들도 음미하고. 여전히 귓가를 울리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들 몇 개 들으면서

다시 받아적어보고 짧막하게 끄적대기.



'절룩거리네'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 보석보다 빛나던 아름다웠던 그대

이제 난 그때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사람이 되었다네 절룩거리네

하나도 안 힘들어 그저 가슴아플 뿐인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깨달은 지 오래야 이게 내 팔자라는 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허구헌날 사랑타령 나이값도 못하는 게 골방속에 처박혀 뚱땅땅 빠바빠빠

나도 내가 누구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놈이란 걸 잘 알아 절룩거리네

하나도 안 힘들어 그저 가슴아플 뿐인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지루한 옛사랑도 구역질나는 세상도 나의 노래도 나의 영혼도 나의 모든 게 다 절룩거리네


발모가지 분지르고 월드컵 코리아 손모가지 잘라내고 박찬호 이십승

세상도 나를 원치 않아 세상이 왜 날 원하겠어 미친 게 아니라면

절룩거리네 절룩거리네 절룩거리네 절룩거리네


: 요새 회사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무한반복으로 듣고 있는 노래. 절룩절룩.


'나는 개 너는 쥐'

내가 멍멍대면 너는 찍찍대고 나는 개 너는 쥐

왜 날 빨갱이로 만들어 왜 날 혁명가로 만들어

니가 아녀도 나는 개

왜 날 광장으로 내몰아 왜 널 상대하게 만들어

니가 아녀도 나는 개 너는 쥐

나의 혁명은 시작됐어 너의 삽질은 끝날 거야

그날이 와도 나는 개 나는 개


: 그날이 와도 나는 개, 개차반 인생을 굳이 건드리는 너는 쥐.


'치킨런'

오래 전 널 바래다주던 길 어쩌다 난 이 길을 달리게 된걸까

이러다 널 만나게될까봐 난 두려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배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더군

난 부끄러워 키작고 배나온 닭 배달 아저씨

영원히 난 잊혀질 꺼야 아무도 날 몰라봤으면 해

난 버티지 못했어 모두 다 미안해 내게도 너에게도..


내 인생의 영토는 여기까지 주공 일단지 그대의 치킨런

세상은 내게 감사하라네 그래 알았어 그냥 찌그러져 있을께


어제 나는 기타를 팔았어 처음 샀던 기타를 아빠가 부실 때도

슬펐지만 울지는 않았어 어제처럼

내일부턴 저금을 해야지 그래도 난 한때는 세상을 노래하던 가수였는걸

언제가는 다시 기타를 사야지 욕망은 파멸을 불러와

여기에 좋은 증거가 있어 날 박제해도 좋아 교훈이 될꺼야 이래선 안된다는..


내 인생의 영토는 여기까지 주공 일단지 그대의 치킨런

세상은 내게 감사하라네 그래 알았어 그냥 찌그러져 있을께

: 그의 노래 중 특히나 달콤하고 씁쓸한 것 하나. 지독히 현실적이지만 아름답다.


'피가 모자라'

친구들이 걱정하네 그러다 잡혀간다고

무서운 세상이라고 몸조심해야한다고

뒤끝이 장난이 아냐 째째하고 오만하지

천박한 너의 웃음은 우리들 탐욕의 대가


알아서 꺼져주면 안 되겠니 정녕 이렇게 피를 봐야겠니

모자라 피가 모자라 하지만 그 피가 내 것은 아니길

난 비겁해 너와 똑같아 숨어서 이렇게 노래만 부르네

난 비겁해


더워서 나가기 싫어 오래 서 있기도 싫어

하지만 책임져야지 추악한 욕망의 대가


그만큼 해 먹었으면 안되겠니 정녕 이렇게 피를 봐야겠니

모자라 피가 모자라 하지만 그 피가 내 것은 아니길

난 비겁해 너와 똑같아 숨어서 이렇게 노래만 부르네

난 비겁했어 어제까진 하지만 이젠 하지만 이젠

물러서지 않겠어 물러서지 않겠어 두 번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모자라 피는 모자라 하지만 그 피가 우리의 것이 아니길


: 나는 비겁해, 에서 비겁했어, 로 바뀌는 곡의 운동감이라니. 그는 감정적이지도 맹목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책임져야지 추악한 욕망의 대가..란 가사는 쉽게 쓰여지지 않을 거다.



'스끼다시 내 인생'

졸업하고 처음 나간 동창회

똑똑하던 반장 놈은 서울대를 나온 오입쟁이가 되었고

예쁘던 내 짝꿍은 돈에 팔려 대머리 아저씨랑 결혼을 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나는 뭐 잘났나

스끼다시 내 인생 스포츠 신문 같은 나의 노래

마을 버스처럼 달려라 스끼다시 내 인생


이사가서 처음 나간 반상회

영희 엄마 순희 엄마 잘났다고 떠들어 대는게 지겨워

반상회비 던져주고 나오는데 좀 조용히 살라네 그것도 노래라고 하나요

하지만 나는 뭐 잘났나

스끼다시 내 인생 스포츠 신문 같은 나의 노래

마을 버스처럼 달려라 스끼다시 내 인생


취직하고 처음 갔던 야유회

맘에 두던 미쓰리를 배불뚝이 부장 추근덕거려 죽갔네

매일 낮 점심시간 둘이 만나 쿵덕쿵 그짓거리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하지만 나는 뭐 잘났나

스끼다시 내 인생 스포츠 신문 같은 나의 노래

마을 버스처럼 달려라 스끼다시 내 인생


쓰매끼리 찾아라 임성훈 등장했다 아침이다

이다도시 시끄러워 스끼다시 내 인생


언제쯤 사시미가 될 수 있을까

스끼다시 내 인생


: 유쾌한 소품같은 노래. 그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질주'의 이미지는 늘 마을버스가 차지한다.



#1.

누군가 문득 내게 이어폰을 뭐 끼고 다니냐고 물었다. 요새 줄창 귀를 틀어막고 다니는 모습을 보인 탓이리라.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뭔가 이런저런 브랜드를 운운하며 아는 척을 한다. 실은 나도 갱장한 음질을 과시하는

뱅앤올룹슨(BANG&OLUFSEN)의 이어폰을 때때로 끼곤 하는데 브랜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한마디도

못하고 집에 돌아와선 브랜드네임부터 확인하고 몇번씩 입안에서 굴려본다. 뱅앤올룹슨뱅앤올룹슨. 이 이어폰에는

가죽 케이스도 있다구.


#2.

누군가 얼마전 내게 추천해줄 만한 음악을 물었다. 아직 장기하를 모르길래 그의 노래, 특히 '아무것도 없잖어',

'별일없이 산다', '나를 받아주오'를 추천해주었다. 그리고 언니네이발관의 '아름다운 것들'을 비롯한 앨범 전곡과

브로콜리너마저의 '보편적인노래'와 '앵콜요청금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스끼다시내인생'은 가사가 너무

시니컬하니 조심하고..까지 줄줄줄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출퇴근할 때는 부러 클래식을 듣고 있다.

마음이 너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재즈를 요새 피하는 이유기도 하다.


#3.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어언 반년이 넘었다. 목요일 점심시간마다 밥을 마다하고 연습실로 달려가는 내

뒷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말한다. 참..애쓴다.(고작 그런 식으로 뭔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한다며

자기연민에 빠진 것은 아니다.) 금속이 번쩍대는 악기지만, 엄연히 목관악기에 속하는 색소폰. 입술의 미묘한

움직임과 모양에 따라, 그리고 숨의 결과 세기에 따라, 혀의 위치와 움직임과 강도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는 사실은

여전히 경이롭다. 이토록 민감한 악기라니. 그치만 '사람'이라 불리는 백인백색의 생명체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색소폰은 익숙해지는 중이라 (건방지게도) 말할 수 있어도, '사람'은 모르겠다.


#4.

저녁에 먹었던 갈비찜을 국물까지 싹 먹었으니, 짜게 먹었다. 영화를 보고는 타는 목을 부여잡고 냉큼 집으로

돌아와 맥주부터 한 캔했다. 그러고 나니 와인이 땡겨서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나니, 지금은 또 위스키를 한 잔.

어제 만난 친구한테는, 요새는 혼자 밤에 술 안 먹는다고, 주위에 그런 이야길 하면 알콜중독초기 아니냐 하더라고

말했었다. 아하하하. 뭐랄까...따사로운 게 아니라 뜨끈하고 찐득한 '봄볕'에 맞았더니, 뫼르소처럼 왠지 어디에다

총이라도 쏘고 싶은 느낌이다. 무언가 안에서부터 바짝바짝 말라붙어가고 있다.


#5.

머리를 짧게 깍은 게 저번주 일요일. 빈말이던 아니던, 몇번이나 고등학생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건 문제다,

라고 생각했다. 왜 티비에 나오는 결혼적령기쯤 도달한, 혹은 사회생활에 접어든 사람들은 전부 어른스러운 표정에

어른스러운 외모에 어른스러운 말투를 하지 않던가 말이다. 때로 외관상 '성숙'해보이는-정장을 입지 않은 모습을

상상키 힘들고, 유치하거나 허술한 모습 따위 잘도 숨겼을-남성과 여성에게 이질감이랄까 거리감을 느끼고, 또

그렇다고 대학생같은 스타일과 아마추어같은 분위기에도 딱히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난 어쩌면 피터팬

신드롬을 심각하게 앓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부분이 심각하게 지체되어 있는 것 같다. 알콜분해효소도

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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