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지나가고, 남은 건 좌절과 냉소뿐이었다.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출발하여 정치에 대한 냉소로 끝난 싸움.

 

그건, 이른바 '시대정신'이라 거창하게 호명되는 일반대중의 정서가 어느결엔가 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것이기도 하다.

 

 

불신과 냉소의 악순환.



촛불의 실패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고, 우선 촛불이 실패했는지에 대한 평가부터 다르겠지만 내겐 그렇다.

 

촛불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고, 아무 것도 저지시키지 못했으며, 촛불을 든 스스로조차 거의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안으로 더욱 옹송그린 채 냉소만 머금게 만들었으니 철저하게 패배한 싸움.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정치에 대한 거부, 부정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질서유지선 안에서 '상식' 수준에 머문 채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하나'였다..고 말하지만 그 누구도, 어떤 의제도, 그들을 대변하거나 응집시키지 못했다.

 

광우병 걸리기 싫다는 정서만 공유했을 뿐,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지,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진전되지 못한 건 그래서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심화시키는 과정, 그 소란스러움과 긴장감이 바로 정치의 본령일진대 그걸 거부했다.

 

(논쟁이라 부르기도 어설픈 '비폭력 논쟁' 나부랭이가 고작이었고, 유모차 부대는 '해맑은 아이들의 눈에 맨날

 

싸움박질만 하는 정치인들은 부끄럽지 않나요' 따위의 신화적 정치에의 감성에 감응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안철수.

 

 

변화를 원하지만 정확히 뭘 원하는지 모르는, 게다가 정치를 혐오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이 켜든 또다른 촛불이나 다름없지 싶다.

 

현상타파의 눈먼 의지(혹자는 그 눈멀었음을 상식이라 포장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정치(과정)에 대한 불신과 정치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마도 2012년 대선후보 안철수라는 아바타에 투영된 '시대정신' 아닐까.

 

 

대선에 뛰어든 이후 현재까지 그가 보여준 짧막한 말들과 모호한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건,

 

대개 그런 식의 '정치에 대한 부정/거부', 정치에 대한 혐오에 그 뿌리를 기대고 있는 '앙상한 상식' 뿐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식으로라면, 그가 만의 하나 대선에 승리한다고 치더라도 별반 기대할 것은 없어 보인다.

 

가치판단과 입장이 없는 '상식'에 기대어 공공의 장에서 발언하고 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는 데다가,

 

어떤 정책을 어떠한 철학으로 펼쳐낼지에 대한 공백상태에선 또다시 대중의 열광은 냉소와 불신만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촛불을 거치며 크게 소진해 버린 변화와 혁신의 욕망, 그 에너지가 다시 방향을 잘못 찾고 소진되어 버리는 건 아닐지 우려스럽다.

 

암울하게도, 지난 촛불의 낯부끄러운 패배와 뒤따른 냉소의 시기..수년간의 절망은 곧 재연될 거 같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경우에도,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야당 누군가가 대통령이 되는 경우에도, 준비 안된 안철수가 되는 경우에도)

 

 

안철수를 보면 촛불이 떠오르는 이유다.

 

 

 

 

 

* 참고삼아 읽어둘 만한 글 하나.(글 내용과 크게 관련은 없지만)

 

 

촛불시위 2년, 내가 쓰는 ‘촛불 반성문’ (시사평론가 유창선, 2010. 5월)

 

 

 

설득 (반양장) - 10점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문학동네

"사랑과 결혼, 그 풀리지 않는 함수관계에 대한 사려깊은 답안, 읽고 나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ytzsche.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으로 필명을 떨친 그녀가 죽기 일년 전에 남긴 유작이자 또다른 명작이라 감히 칭하고 싶다.

사랑이란 감정이 어떻게 맥놀이하는지를 보여주는 건 이미 숱한 작가들이 숱한 작품에서 묘사하려 애썼던 것이지만,

제인 오스틴이다. 그녀의 문장은 비단처럼 매끄럽고 섬세하며, 그 와중에 날카롭고 예민한 성찰까지 녹아들어 있는 거다.

게다가 이미 이전에 놓쳐버렸다,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다시 어떻게 안에서부터 불붙기 시작하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꺽이고 젖혀지는지, 그리고 다시 만개하는지를 이토록 흡인력있게 묘사해내다니.


결혼이란 문제는 흔히 사랑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 양 이야기하는 게 현명함을 가장하기 쉽다. 자못 어리숙하다느니,

세상물정 모른다느니, 결혼은 또다른 현실이라느니 따위의 야박한 '설득자'들 앞에서, 사랑과 결혼,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는

식으로 편히 갈라놓고 이야기하는 건 제인 오스틴이 목도했던 근대 초기의 세태와 작금의 세태가 과히 다르지 않은가 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프레임도 그런 식이다. 감정에 몰입하기보다는, 결혼을 디딤돌로 얻을 수 있는

물적 조건-적나라하게 말하자, 그때나 지금이나 재력과 '신분'을 업그레이드할 기회인 거다-에 집중하라!


오스틴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펼쳐 놓으며 그들의 결혼, 혹은 결합이 서로에게 어떤 시너지를 줄 수 있는지, 면밀히 따져묻는

당대인의 모습을 눈 앞에 보일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런 세밀화의 풍경엔, 불타오르는 사랑 앞에 모든 게 무너져내리는 듯하던

'로미오와 줄리엣' 류의 눈먼 사랑이라거나 그 반대의 팜므파탈이 나설 공간은 없다. 얼핏 보기엔 우리 옆을 스치는 여느 남녀의

범상한 연애담과 결혼담에 지나지 않을 법한 담담하고 평이한 풍경 속에, 그녀는 잃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마음이 다시 열리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 국면을 너무도 강렬하게 돋을새김해 놓는다.


하여, 사랑은 판타지일 뿐이라며 어른의 조언을 따르라는 '설득', 그에 반해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또다른 '설득', 혹은

지난 일은 어쩔 도리가 없이 지난 일일 뿐이라는 옛사랑의 '설득' 따위에서 방황하며 더러는 길을 잃고 더러는 홀로 야위어가던

앤 엘리엇은, 누군가의 설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로맨스를 찾아간다. 그건 처음부터 로맨스로 시작해 무책임한 결말을 비워두는

이야기도 아니고, 시니컬한 냉소로 시작해 황폐한 풍경만 지루하게 내뿜는 이야기도 아니다. 주위의 설득으로 이미 한차례,

로맨스를 버리고 '현실'을 좇았던 여인이 이제는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의 로맨스를 복구해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연애담 혹은 결혼담은, 둔한 눈으로 보면 얼핏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라며 무시하고 지나치기 쉬운, 삶의 어떤

결정적인 국면을 포착해내어서는 그 안에 숨어있는 내면의 폭풍과 결단의 순간들을 너무나도 특별하고 따뜻한 시각으로

어루만져 주는 거다. 그것이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감정이 격동했던 이유 아닐까 싶다. 평이한 일상에 그토록 밀도높은 생기와

현실감, 극적인 감각을 불어넣어준 오스틴 덕분에, 심장이 문득 두근거렸다. 어떤 의미로던 이 책 '설득'은 너무도 늦게 한국어로

번역된 거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밤에 잠이 안 오고 마냥 종잡을 수 없는 얄따꾸레한 생각들만 치밀어오르기로 걍 이부자리를 걷고

모처럼 책장을 디볐다. 손창섭..내가 그간 즐겨 읽던 작가이면서도 여태 이름에 주의하지 않았더랬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약간씩은 일그러지고, 그로테스크한 배경과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이질적인-

그야말로 어불성설격인-인물이 등장하곤 한다. '인간동물원'이라거나 '잉여인간', 아님 '비오는날'..


무엇보다 그의 자전적인 소설인 '신의 희작'에서 드러나는 냉소와 비정상성은 해방 전후를 기해 한국

문학계가 잡아낸 온갖 이물감과 혼란, 방황의 극치랄까, 이보다 더 극적으로, 혹은 '선정적으로' 드러낸

작가는 없는 거 같다. 그의 묘한 문체와 행간에서 배어나오는 짙은 냉소, 자포자기식의 쾌감. 그러한 말투로

읊어내는 비현실적 사건과 배경은 그 자체로 음울함을 잔뜩 독가스처럼 품고 있다.


푸닥거리하듯 그의 자멸적이고 자학적이랄만한 작품들을 쏟아내고 마지막으로는 '신의희작'에서 그 작품들에

대한 열쇠로 보여질만한 자기고백을 하면서 그는 대략 진정된 거 같다. 소위 문학을 통한 승화, 구원이랄 만한.

그담엔 더이상 쓸 게 없었을까..더이상 별다른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68년인가 일본으로 아예

귀화해버렸다고 하더군. 하긴, 그가 '신의희작'에서 연기한 인물은 갈데까지 간셈, 막장중의 막장이었다.


그 탓일까, 내 생각엔 손창섭이 그다지 평가받지 못한 게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이른바 한국인의 특성이라는
 
애이불비, 혹은 아무리 힘든 고난과 역경에도 한줄기 빛무리를 (무책임하게) 던져놓고 마는 식의 통속적이고
 
도식적인 구도가 아닌거다. 왠지 그래야할 듯한 도덕적인 압박감이나 (계몽이건 격려건) 무책임한 낙관으로

회귀하고 마는 잘 짜여진, 닫힌, 완결된, 기승전결의 작품이 아닌 거다. 이게 내 생각엔 손창섭과 김기덕, 그런 류의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공통점인거 같다는 생각이 불끈 드는데, 그저 현실의 어느 한 부분을 '따왔을 뿐'인거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걍 하나의 주제의식이나 의식적인 부르짖음을 위해 현실을 보기좋게 매무새지어 마지막에

마침표로 마치는 것이 아닌...뭐랄까, 그저 작품 앞뒤에 말줄임표로 그 연속성과 함축성을 열어놓는달까.

"..." 이런 식으로나 표현할 수 있을까.


해서, 그는 어설픈 냉소나 겉멋든 자포자기가 아니라, 갈데까지간 냉소와 그로테스크함을 보여준다. 이쯤이면 되겠지,
 
이쯤에서 반등해서 밝은곳으로 상승해야지, 하는 게 아니라 도무지 그 음울함과 비정상성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그저 맷돌에 갈리듯, 한없이 침잠할 뿐.



그러고 보니 하루끼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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