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서 만난 이번 겨울 마지막 눈. 청초호 너머 보이는 눈덮인 설악산 자락이 웅장하다. 희끗희끗한 색감하며.

어딘가로부터 달려와 네바퀴 자국을 뚜렷이 남긴 채 어딘가에 멈춰 선 승용차 한 대, 그리고 들고 나는 바퀴가

어찌나 많았는지 마구 붓질된 듯한 주차장 입구.

차바퀴들이 굴러간 까만 궤적은 그대로 행인의 길이 되었다. 더이상 아이가 아닌 사람들은 눈을 피해 걷는다.

띄엄띄엄 놓인 건물들 사이엔 그대로 맨 땅거죽이 드러나있다. 까만 까마귀들을 품었다가 훠이 날려보내는 하얀 눈밭.

하얀 눈을 뒤집어쓴 주택 몇채가 추위를 견디려는 듯 다닥다닥 붙어서 온기를 나누고 있기도 하고.


빨갛고 파란 지붕 위를 남김없이 덮었을 하얀 눈이 조금씩 미끄러져 내리는 3월 초의 속초. 곧, 봄이다.




이게 뭘까. 직경이 지름 1미터쯤 되는 거대한 기둥 6개가 뻗어나가고 삼사층짜리의 자그마한 건물같은.

이런 비슷한 용도모를 건물이 원시인들이 살던 약 오천년 전에 세워졌었다면 거의 중세시대 성이라거나

요새의 초고층건물에 비견될 만한 거 아닐까. 에도시대부터 유명했다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기다리는

일본 아오모리현에 있는 산나이마루야마(三內 丸山) 유적군에 있는 대표적 유적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이런 가죽옷을 입고 원목 몽둥이를 휘두르는 원시인 500여명이 일본 본섬의 북동쪽끝에서

대략 오천년 전부터 천삼백년쯤 살았다는 대규모의 집터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곳인 거다. 약 2천여 점의

유적이 대량 출토되었다는 이곳은 사실 야구장을 건설하기로 되었던 부지였는데, 1994년 아오모리현 지사가

유적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보전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덕분에, 원래 계획대로라면 철제 펜스가 높다랗게 세워진 채 삥 둘려있어야 할 이곳 야구장 건설부지는

일본의 국가사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기다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은 셈이다.

우선 마을 유적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박물관 건물 밖으로 나와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지나니 왠 샛노란

민들레 꽃밭이 먼저 나타난다. 그럴 리 없겠지만 오천년 전에도 여기 살던 사람들이 같은 꽃밭을

보고, 밟았던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일었다.

그렇지만 오천년 전의 기후나 지형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다. 당장 그때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2-3센티 높았는지라 바로 이 마을 코앞까지 바다가 들이찼을 거라고, 퇴직하기 전까지 학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이셨다는 '산나이마루야마 응원대'라는 자원봉사자 할아버지가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음식으로 삼았던 생선이나 해산물등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고도 한다.


사실 이 나무 구조물이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런 형체가 확실한지에 대해서도 뚜렷이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한다. 자원봉사자 할아버지가 여기가 '번지점프대'였는지도 모른다고 농하셨듯이.

그래도 여러 정황상 여섯 개의 대형 기둥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 저런 형태의 구조물이

설치된 채 아마도 망루의 기능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모든 유적 복원물에는 합당한 추정과 근거가 있는 법. 이 '망루' 추정 유적에는 뚜렷한 근거가 있었다.

토목, 건축, 고고학자들이 망라된 발굴조사 중에 무려 2미터 깊이, 2미터 직경의 구멍이 이렇게 뽕뽕

규칙적으로 박혀있는 걸 발견했다는데 그 중 일부 구멍에 지하수에 잠긴 밤나무 기둥조각이 온전히

남아있었다는 거다.


이곳이 그 복원된 '망루' 옆에 있던 실제 건물터. 이렇게 깊고 큰 구멍에 걸맞는 두껍고 튼튼한 기둥이

여섯개나 박힌 건물이라면, 글쎄 아무리 원시시대였다고 해도 꽤나 그럴듯한 건물이 지어지지 않았을까.

지금 복원해 놓은 건 가장 보수적이고 냉정한 상상력을 동원해 지어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상은 다른 마을 유적들을 둘러보면서 더욱 퍼져나갔다. 길이가 30미터가 넘는 커다란 집터의

우람한 덩치라거나 뒤로 이어지는 많은 주거지들의 흔적들을 보자니 여긴 정말 꽤나 커다란 마을을

이루고 있었겠구나, 그만큼 일손(노동력)도 많고 집짓고 망루짓는데 동원할 나무니 끈이니 자원도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무려 500여명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마을이니만큼.

가장 큰 건물에 먼저 들어갔다. 길이가 32미터, 폭이 10미터에 이르는 이 커다란 건물은 무려 19개나

되는 밤나무기둥으로 지탱되고 있었다는데, 용도에 대해서는 공동작업소라거나 마을 집회소, 혹은

겨울철을 나는 공동가옥이었을 거란 여러 설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설명들을 듣는 사이에

계속 코를 찌르던 연기 냄새가 거슬려 뭔가 물었더니, 건물을 구성하는 나무들을 튼튼하게 오래

보전하기 위해 원시인들이 처리했던 훈증 작업을 재연한 결과라고. 아닌게 아니라 나무들이 다 탔더라.

여기는 마을의 남쪽에 위치해있던 흙을 버리던 장소. 대량의 토기와 석기, 토우와 장신구들이 흙과 함께

버려지고 버려져서는 약 천년동안 언덕처럼 불룩 솟아올랐다고 한다. 말하자면 '난지도' 같은 곳이었을라나.

깨진 장신구, 못쓰게 된 토기 등을 생활쓰레기랑 함께 모아서 버리던 곳이랄까. 그런 곳이 수천년이 지나니

유물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유적의 보고가 되어버렸다.

이 곳에 당장 복원되어 있는 집터들도 꽤나 많다고 느꼈는데 이게 전부가 아니란다. 바닥에 땅을 파서

만든 집터도 있고 기둥을 세워 땅 위에 세운 집터도 있다는데 도합 600기 가까운 주거터가 발견되었지만

복원한 건 그 중에서 불과 20여기 남짓이라고. 땅에 대한 소유권이 없던 시절이었을 테니, 그들은 그저

원하는 장소에 스스로의 힘으로 나무 뼈대를 세우고 움막같은 집을 지었으면 땡이었을 거다. 그럼 굳이

여러 채 갖겠다고 과잉하게 노력해서 집을 지어놓지도 않았을 거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집을

짓겠다고 난리치지도 않았겠지. 뭐 단순비교하긴 그렇지만, 오천년 후 지금은 그때보다 행복할까.

이게 땅바닥을 파서 만든 주거터. 슬쩍 들어갔더니 암사동 선사유적지에 복원되어 있는 움집처럼 별 거 없다.

뭐 원시인들이 '일본땅' '한국땅' 출신이란 자각을 갖고 있지도 않았을 거고, 뭔가 고유하거나 특징적인

문화적 차이점을 주거 형태에 구현하기에는 아직 집 한채 짓기도 급급한 수준이었을 테니깐. 중앙에는

화로가 하나, 이때는 아직 쌀을 재배하기도 전이라 주식으로 도토리, 그리고 연어니 오징어니 생선과

해산물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운 주거터. 하나 재미있는 건, 이곳에 살던 원시인들이 먹었을 음식의

흔적 중에서 생선 머리뼈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토막내서 머리는 바다에 버리고 몸통만 먹었을 거다, 혹은 머리에 붙은 아가미가 공기에 닿아 쉽게

부패하면서 머리뼈까지 삭혔을 거다, 혹은 머리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썼을 거다, 라는 정도가 있다고

할아버지가 설명을 해주었다. 글쎄, 어차피 씌어지기 전의 역사, '선사(先史)'시대니까 상상하기 나름,

머리뼈는 몸에 좋다며, 아님 머리가 똑똑해진다며 다 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외에도 마을에는 어른들의 무덤, 아이들의 토기 무덤이라거나 북쪽에 조성된 쓰레기장들이 복원되어

있었는데, 오천년 전의 마을이라기엔 정말 생생하게 한 마을 풍경을 망라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대규모 마을 유적에서 발굴된 다량의 토기, 석기, 목제품이나 골각제품들은 2002년에 개관된 박물관에

전시해두고 있다고 하니 이젠 뙤약볕을 피해 박물관 내부를 관람할 차례. 그 전에 화장실을 가려고

표지를 찾았더니, 저렇게 귀여운 남/녀 화장실 사인이라니.

일본에서 까마귀가 길조로 여겨져서 많은 걸까, 아니면 워낙 많아서 길조로 여겨지게 된 걸까. 마치

닭과 달걀의 선후를 따지듯 골치아프고 애매모호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생각도 없지만, 이곳

산나이마루야마 마을 유적에도 까마귀가 참 많았다. 그러고 보면 일본 소설에서 까마귀는 길조이면서

동시에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메신저 역할도 하고, 아니면 죽은 사람의 영혼 그 자체라고 표현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왠지 오천년 된 유적지에서 만난 까마귀라 더욱 상서롭달까.

박물관, 정확히는 조몬지유칸(時遊館) 내부에 미니어쳐로 전시되어 있는 산나이마루야마 마을의 유적.

실제 마을에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꼬물거리는 모습이 모형으로나마 시각화되니까 훨씬 그럴 듯 하다.

마을을 둘러싼 숲, 그리고 그 너머의 바다는 이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까. 외적이 쳐들어올 수도, 예기치 못한 짐승들의 습격이 있을 수도, 혹은 대규모의

자연재해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만치 저렇게 불쑥 튀어나온 '망루'의 쓰임이 더욱 실감나기도 하고.

'망루' 유적의 커다란 구덩이 밑에서 보존되어 있던 1미터짜리 두꺼운 밤나무 기둥의 잔해 진품.

무려 오천년쯤이나 땅 속에서 썩지도 않고 이렇게 버텨왔다는 게 대단하다. 역시 진짜를 보니까

모조품을 보는 것과는 또 느낌이 다른 듯.

마을 유적에서 발굴되었다는 수많은 토기 조각들을 일일이 짜맞춰서 복원한 토기들. 토기를 어떻게

제작하는지를 마네킹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 푸른 초원 위에 복원된 십여기의 움막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를 보여주는 모형.

무엇보다 흥미롭던 건 십자가 형태로 정형화되다시피 빚어지는 사람 모양의 토기, 토우였다.

아무래도 다산을 상징하고 싶었는지 불룩 튀어나온 두 가슴과 둔덕이 세 뿔을 이루고 있는

십자가 형태의 사람 흙인형은 얼핏 보면 노릇노릇 잘 구워진 쿠키같기도 하고, 초기 기독교시대의

십자가 원형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오천년 전 선사시대를 살던 사람들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을 좀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각 토우들에

그려진 문양들은 이렇게 숫자를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했다는 것. 그냥 거의 동물에 가깝거나 두뇌 활동은

미미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고쳐 생각하면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생존력도 강하고 적응력도 강하고,

심지어 저런 것을 보면 두뇌 수준도 훨씬 우수했던 건 아닐까. 막말로 요새 사람을 그들이 맞닥뜨렸을

환경에 떨궈놓는다고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은 거다.

그리고 토기에서도 이런 인물 문양이 발견되기도 했단다. 사람의 형체가 뚜렷하게 나타나서 얼굴과 손,

그리고 발의 모양이 쉽게 구별되긴 하는데, 손에 든 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태 토기에 그려진

문양들은 대개 빗살무늬니 아라베스크 무늬니 하는 간단하고 기하학적인 것들 아니었던가. 아님 아예

아무것도 그려넣지 않은 민무늬거나. 꽤나 이례적인 토기 문양 같아서, 일본어는 모르지만 제법 중요하게

생각하고 비중있게 전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 진짜, 이런 캐릭터 맘에 든다.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의 마스코트 캐릭터라는 '산마루', 십자가형

토우에 호피가죽옷을 입히고 똥글똥글한 눈을 가진 귀여운 캐릭터로 마스코트를 삼다니. 게다가

박물관 입구에 도토리로 만들어둔 저 귀여운 녀석들은 어떻고.


* 교통편.





*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 '겟어바웃' 필진의 일원으로 다녀왔습니다.
Get About - 당신의 여행이야기


기치조지역에서 지브리 스튜디오, 산책로를 지나 미타카역으로. 미타카역 근처에 '에도도쿄건축공원'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건 가이드북에서 '기치조지/나카노' 지역으로 묶인 곳에 지브리 스튜디오랑 같이 묶여있어서 지레

그렇게 오해했던 거지만, 사실은 꽤나 멀다. JR 추오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데 대략 삼십분.

미타카역에서 JR 추오선을 타고 '무사시고가네이(武藏小金井)'역에 내려 버스를 잡아타야 한다.

가이드북('클로즈업 도쿄')의 설명을 그대로 따오자면,

"JR 추오선 무사시고가네이武藏小金井 역 하차. 북쪽 출구 北口의 개찰구를 나와 오른쪽으로 10m쯤 가면 육교가 있다. 육교를 건너면 바로 밑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2/3번 정류장에서 세이부西武 버스를 타고 5번째 정거장인 고가네이코엔니시구치小金井公園西口에서 내린다(170엔, 5분). 버스 진행 방향 뒤쪽의 횡단보도를 건너 고가네이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에도도쿄건축공원의 표지판이 보인다. 도보 7분"

무슨 보물찾기 하는 기분으로 지령을 따랐다.

무사시고가네이武藏小金井 역에서 버스정류장은 쉽게 찾았다. 버스정류장에서 하야오가 그려 공원에 선사했다는

그 애벌레 캐릭터가 굼실대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번째, 고가네이코엔니시구치小金井公園西口 역도 보였다.

글자로 써진 걸 읽으면 머릿속이 온통 굼실굼실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일단 믿고 따라나서니 생각보다 쉽다.

그렇지만 역시 멋도 모르고 그냥 찾아나서긴 쉽지 않겠다, 생각보다 여기까지 찾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후쿠오카에서도 그랬지만, 일본의 교통 체계는 참 정확하다. 몇시 몇분에 정류장에 도착할지를 저렇게

명기해 두다니. 손님과의 약속이기도 하고, 본인과의 약속이기도 하렸다. 일상 생활을 하면서 뭔가 예측가능한

스케줄을 원한다면 저런 명확한 시간표가 있음 정말 좋을 듯. 정말 일분의 오차도 없이 도착한 버스.

다섯 정거장이라 그냥 서 있었다. 하차벨에 적힌 꼬불꼬불한 히라가나를 눈을 붙잡았다. 올해 초에 그래도

일본어 공부 좀 해본다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수업도 듣고 그랬는데, 히라가나 외우려다 포기해버렸댔다.

쓰는 건 참 이쁘긴 한데, 글자에 무슨 규칙도 없고 무조건 외우고 봐야 하다니 원. 그 법칙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외운 후에 일본어 문법을 따르면 될 텐데, 그 법칙 자체를 수용하질 못하겠다. 넘 자의적이란 느낌.

하기야 한국어도 마찬가지지만, 어려서 생각없을 때 일단 틀을 받아들이고 말았으니. 외국어 못 해먹겠다. 쳇.

굳이 가이드북의 설명을 한단어 한단어 유심히 살필 필요도 없었다. 다섯 번째 정류장에서 내리니 사방에서

화살표가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애벌레녀석도 사방에서 슬금슬금.

가는 길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들 때 여기로 자주

산책을 왔다더만, 여기까지 걸어온 걸까 싶다. 한적하고 조용한 게 산책하기 좋긴 하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지브리 스튜디오에서부터는 넘 멀다.

고가네이코엔小金井公園은 에도시대부터 벚꽃으로 유명하던 곳이라 한다. 울창한 나무들이 뜨거운 도쿄의

햇살을 온몸으로 가려주며 시원한 바람의 냉기를 보존하고 있었다. 에도도쿄전축공원은 이 고가네이코엔의

안에 있는 또다른 공원. 공원 속의 공원인 셈이다.

에도도쿄건축공원의 입구. 입장료가 없는 고가네이코엔小金井公園 내의 테마공원인 셈이니 빈틈없이 둘러쳐진

울타리 윤곽선이 두드러졌다.

공원의 내부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그 배경이 모여있는 에도도쿄건축공원.

건축공원을 돌아보고 나와서 기념품 샵에서 발견한 사진들. 왼쪽의 저 사람은 하야오, 맞는 거 같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얼굴없는 요괴, 가오나시'다. 이거 그림이나 합성이 아니라 실제로 찍은 거 같은데, 대단하다.

이렇게 무슨 코스프레하듯 가오나시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면, 지브리 스튜디오나 여기 에도도교건축공원이나

모두 무료통과는 물론이고 꽤나 환대받지 않았을까. 일본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를 온몸에 받았을지도. 나도 담엔.

하야오가 선사한 에도도쿄건축공원의 마스코트인 애벌레 녀석도 기념품 인형으로 이렇게 팔고 있었고,

그 밖에, 이런 귀여운 고양이 인형들도 왜인지 팔고 있었다. 건축공원하고는 그다지 상관없는 듯 한데.

캐릭터를 이렇게 치밀하게 이용하는 그 아이디어가 넘 좋은 거다. 모처럼 하야오가 만들어준 캐릭터를 그냥

썩히는 게 아니라, 기념품샵 봉투에도 넣고, 그 봉투를 봉하는 테이프에도 넣고. 감탄해 버렸다.

에도도쿄건축공원을 나서는데, 눈앞의 잔디밭이 온통 꺼뭇꺼뭇하다. 뭔가 했더니 모두 까마귀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왔던 마녀도 아침이 되면 까마귀로 변신해 성을 떠나고는 했다.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한번 왔던 길을 다시 가는 건 참 쉽다. 대충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어디서 길을

건너거나 방향을 꺽어야 할지도 대략의 감이 오는 거다. 그러면 주변이 보인다. 눈앞을 새하얗게 만드는 햇살에

뽀송뽀송 말라가는 사이좋은 빨래들 같은 것도.

버스 정류장.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오는 길이 제법 솔찮이 시간도 걸리고, 교통비도 적잖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지만, 도쿄까지 왔는데 교통비 몇 푼 아낀다고 여길 스킵하는 건 좀 아닌 듯. 게다가 여기저기 인증샷만

남기고 떠나는 여행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세상을 동경한다면.

에도도쿄건축공원의 맵. 서쪽존까지도 돌아볼 걸, 하는 생각이 없진 않지만 동쪽 존만으로도 넘 많은 것들을

보고 말았다. 하야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느낌을 가득 받아 올 수 있었던 공원.

가이드북 말고 공원 팜플렛에서 발견한 또다른 루트. 참고하면 좋을 거 같다.






일본 애니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작할 당시 산책하러 즐겨 찾던 에도도쿄건축공원.

도쿄 시내에서 옮겨온 27채의 20세기 전후반 건물들이 대충 동쪽 구역과 서쪽 구역으로 나뉘어 산재해 있는데,

대충 동쪽 구역은 서민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보이는 건물들이 모여 있다. 역시나,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에 주로

차용한 배경들도 동쪽 구역의 건물들.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로 변한 식당, 센의 숙소와 일터인 목욕탕, 그리고

가마지이가 목욕탕 약초물을 달이던 방, 센이 바다를 건널 때 탔던 열차까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라 하야오가 산책삼아 왔다갔다 할 수 있었다곤 하지만, 사실 부실하게

소개된 가이드북만 따라 오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여정이었던 것도 사실. 관리동에서 입장권을 끊으면서 여기까지

오로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되었던 건물들을 직접 보겠다며 꾸역꾸역 찾아온 스스로에게 감탄하고

말았다. 입장료는 400엔.

에도도쿄건축공원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는 이 애벌레는 다름아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낸 캐릭터라고

한다. 참 복받은 공원이다. 에도도쿄건축공원에 찾아올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이 미타카역에서부터 이 캐릭터가

그려진 버스 정류장을 찾아 캐릭터가 그려진 버스를 타고 캐릭터가 많이 그려진 즈음에서 내리는 것. 그렇게

도착한 '고가네이(小金井)공원' 안에 위치한 에도도쿄건축공원을 찾는 것 역시 캐릭터를 찾아나서기.

입장권을 확인한 후 실외로 다시 나서는 길, 건축공원 안내팜플렛이 세 종류로 비치되어 있었다. 영어,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조선말 버전. '에도도쿄건조물원'이란 건 한국어라기보단 조선말에 더 가까운 표현인 거 같은데.

하얀 햇살이 쏟아지는 밖으로 나섰다. 커다란 안내판 옆에서 길안내를 도와주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친근하게

다가서선 안내판 위에서 푸닥대며 돌고 있던 바람개비를 하나 선물해 주셨다.

중앙구역에는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의 생가나 관련 건물들이 복원되어 있었다. 짧고 단호하게 끊겨진 일본

전통 가옥의 처마는 볼 때마다 나름의 미감이 떠오른다. 여기 건물들은 모두 실제로 사람이 살던 건물들, 도쿄가

쉼없이 개발되고 발전해나가면서 밀려나가고 지워지기 마련인 옛 가옥들을 옮겨둔 것이라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민속촌 같은 곳에서 느껴지곤 하는 휑하고 선뜻한 기분은 덜한 거 같다.

건물 안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미리 받았던 비닐봉투에 신발을 담아 들고 가야 한다. 건물마다 자리를 잡고

마치 터줏대감같은 포스로 건물에 얽힌 이야기나 설명등을 해주시는 (듯한) 자원봉사자 할아버지들이 정다웠지만,

아쉽게도 일본어는 '와까리마셍' 정도나 읊조리는 앵무새인지라 그분들이 숨겨둔 이야기 대신 창 밖 경치만

열심히 보았다. 좋네 뭐.

일본, 도쿄에서는 까마귀를 꽤나 쉽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하라주쿠의 메이지신궁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까마귀들이 떼지어 날아다니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옛 건물들만 집결시켜 둔 것이 아니라

주변 풍광까지 고려하고 이렇게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배경까지 안배하여 보존해 둔 공원이니, 모이는 게 비단

까마귀만은 아닐 것 같기도 하다.

고풍스런 가로등이 듬직한 발톱을 한껏 드러낸 네 발로 땅거죽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것도 그 언젠가의

도쿄 거리를 밝혔던 가로등인 걸까. 저런 가로등이 비추는 거리라면, 운치가 1.2배쯤 상승할 듯.

계속해서 동쪽 구역으로 가는 중이다. 공원이 생각보다 커서 동쪽 구역만 돌아보고 나와도 다리 꽤나 아프겠다

싶은 정도의 규모랄까. 이런 하천도 품고 있으니.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는데, 문득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괴이쩍은 터널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게 한 줄기 불어왔다. 풍경이 흔들렸다.

그리고 덜컥 등장한 기차. 어이, 이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스토리 라인하고는 좀 다르다구. 노란색깔이

어울리는 건 솜털 보송한 유치원 꼬맹이들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열차도 의외로 잘 어울린다. 애니 속에서

나왔던 열차도 물론 노란색이긴 했지만, 애니 속 열차와 비스무레한 것이 이렇게 전시되어 있으니 새삼 감탄.

실제 시부야에서 긴자까지 운영되던 열차란다. 더 놀랬다. 하루 이용자가 130여만명에 달했다는 이 전차는

19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근 반세기동안 운행되었다가 퇴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바로 이리로 온 걸까.

차내로 들어와보니 깔끔하게 잘 유지되고 있는 게, 금세라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손잡이를 잡은 채 빼곡하게

꼽혀 있어도 하나도 안 이상할 듯. 센과 가오나시가 저기쯤 앉았었다.

그리고 커다란 목욕탕 건물을 앞에 두고 좌우로 벌려진 주점, 꽃집, 문구점, 음식점, 상가 등등. 동쪽 구역의

중심가인 셈이다. 드문드문 보수 중인 건물들도 보인다.

옛 건물들을 모아두고, 이렇게 식물들을 기르고 사람의 손을 거치며 다시금 생명을 얻는다. 사람으로부터 유리된

채 건물들이 박물관 속 유물처럼 차갑게 굳어버리거나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괴물같은 것으로 변해버리는

경우에 비하자면 정말 멋진 공간.

치히로의 부모가 음식에 홀려 돼지처럼 먹다가 진짜로 돼지가 되어버린 그 음식점의 모델이 되었다는 건물.

딱 보니 알겠다. 저 의자에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앉아서는 양손으로 한껏 음식을 그러쥐고 그야말로 우걱우걱

먹어대다간, 주변을 돌아보던 치히로가 돌아왔을 때에는 부모님은 간데없고 살찐 돼지 두마리가 허부적대고

있었던 곳이다.

활짝 펼쳐진 메뉴판 옆에 도꾸리도 하나 나와있고, 주홍색 알전구 조명도 들어와 있는 게 금방이라도

주방 안쪽에서 누군가 '이럇사이' 하며 반겨 나올 거 같다. 혹은 이 자리엔 방금까지도 치히로와 부모들이

앉아있었는지도.

일본인들의 디테일함이야 익히 알려져 있는 바지만 정말, 이 주점을 더욱 사람냄새나게 만들어주는 건 이런

자그만 조화 한 송이. 자신의 가게를 꾸미고 손님을 불러모으겠다는 식의 생각 없이 이런 치장을 엄두나 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가게 바깥에는 어제 장사한 흔적인 듯 빈 병들이 삼엄하게 꽂혀 있었다. 이래서야 원, 치히로 부모님이 아니라

나라고 해도 당장 의자에 철푸덕 앉아 음식부터 주문하고 볼 판이다.

그리고 치히로가 센으로 이름이 바뀐 채 일하게 되는 목욕탕의 모델이 되었다는 커다란 대중 목욕탕.

애니에 나오듯 그렇게 으리으리하고 커다란 건물은 아니고 조금 천장이 높은 단층 건물인데, 그 건물의

어느 부위를 어떻게 살리고 뻥튀기해내어 애니 속 모습을 가공해 낸 건지 상상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옷바구니. 목욕탕 안을 이런 기회 아니고선 또 언제 찍어보겠나 싶어, 또다시 신발을

벗고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다니는 불편을 감수하고 덥썩 안으로 들어왔다.

남탕은 됐고, 여탕으로 직행. 보통 일본의 목욕탕은 오른쪽이 남탕, 왼쪽이 여탕이라는데 여긴 뒤바뀌어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여하간 여기는 바뀌어있다는 것. 글쎄, 장난기 심한 주인남자가 여자남자가 습관에 이끌려

덜컥 문열었다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 아닐까. 혹은 응큼하고 연기잘하는 남자손님들을 좀더

불러모으려는 고도의 상술일 수도. "어익후 깜짝이야, 남탕인 줄 알았네요. 반갑습니다. 차라도 한잔?" 정도.

여탕 내부에 걸려 있는 그림들. 이런 그림들, 실제 여기가 목욕탕으로 쓰이던 때에도 걸려있었을까. 요새 시대에도

여탕엔 이런 그림이 걸려있나. 아무리 어릴 적 기억을 되짚어도 내가 가본 여탕엔 이런 야시시한 그림은 없었던

거 같은데. (아쉽게도.)

나무판을 이어붙이고, 쇠로 된 테두리를 감아 만든 고풍스런 물바가지. 얼룩이 여기저기 서려 있는 게 정말

쓰이던 걸까 싶은 상상을 계속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조그맣지만 야무지게 딴딴하게 생긴 나무의자도.

남탕엔 저울이 없던데, 여탕에만 있었다. 그것도 개씩이나. 슬쩍 올라갔다가, 얼추 비슷한 수치로 홱 당겨지는

바늘에 놀라 얼른 내려와 버렸다. 아..살 빼야되는데. 회사생활 2년차까지만 나름 선방했는데 올해가 문제.

목욕탕 뒤뜰..이라 해야 하나. 그리 넓진 않은 툇마루 밖으로 석등이며 이끼서린 돌덩이며 요리조리 꺽인 나무들,

보기 좋은 정원이지만 조금 이상하달까. 목욕하고 여기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갈 기세의 정원이다. 정말 그때의

목욕탕이 저랬다면, 현대인이 과거의 인간들보다 행복하다는 건 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한개 추가.

보드랍고 가벼운, 낭창한 이파리를 풍성하게 드리운 버드나무에 바람이 불었다. 목욕탕 우측의 건물은

구두방이라던가, 그냥 분위기로 족했다. 하나하나 굳이 문열어서 확인할 곳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그때의

인기척을 듣고 바람소리를 감각하며 거닐어 보는 곳. 하야오가 이 곳을 즐겨 산책한 이유를 알 거 같다.

이 건물도, 그렇게 풍족한 마음으로 살살 거닐던 차에 우연찮게 발견했다. 자칫 놓쳤으면 사실 아쉬웠을 거 같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마지이 영감이 기다란 여덟개의 팔로 약초를 다듬던 그 공간. 치히로가 일을

시켜달라며 무작정 찾아들어갔던 그 공간. 애니메이션 속의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지만, 애니와는 다르게

여긴 문방구점이었다는 사소한 사실 하나만 다르다.

한쪽 벽면에 뺴곡한 서랍은 대략 300여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붓, 벼루, 먹 등의 문방구들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스란히 담겨 있을지, 꽤나 궁금했지만 차마 함부로 손댈 수가 없어 궁금증을 꾹 눌러 참았다.

아귀가 딱딱 맞는 조그마한 서랍들이 300여개나 된다니, 더구나 백 년 가까이 사람손에 길들어 반질하게 윤도

나고 은은한 나무색이 더욱 살아난 그 느낌이 너무 매혹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천장부터 바닥까지 채워진

서랍들이 실재하는 걸 두고 손이 마음대로 쭉쭉 늘어나는 가마지이 영감을 상상해 내다니, 역시 하야오.

다른 구역들, 화장품 가게도 있고, 음식점도 있고. 그리고 왠지 바람에 휘청휘청댈 것만 같은 얄포름한 외피에

쌓인 건물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그럴 듯한 풍치.

자전거 달구지가 삐걱, 소리내며 막 멈춰선 듯한 가게 앞. 어디까지가 진열되고 연출된 소품이고 어디까지가

정말 이 공간을 꾸려나가는데 쓸모있는 일상의 것인지가 도무지 불분명하다. 그냥, 2010년의 일본과 1900년

어느 어간쯔음의 일본이 마구 뒤섞인 채 새로운 느낌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커다란 월계관 사케병이 둥글게 둥글게 모여서 있는 술집. 하얗게 탈색된 채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허물어져

내리는 라벨이 시간의 엄연한 흐름과 사람의 쉼없는 손짓을 가늠케 해준다.

이 곳에서 다시 만난 저울들, 신기하게 생긴 저울들이 두개 세개씩 놓여 있는데, 예전엔 술집에서 술을 저울에

담아 팔았던 걸까. 주전자를 들고 가면 주전자에 담아서 그램수로 팔았나..사케를 무슨 막걸리마냥 그렇게

팔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꽃가게도 있고, 비록 조화지만 햇볕을 담뿍 받아 싱싱한 생화에 못잖은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걸로 보아 이동네는

당장이라도 몇 가구 이사와서 생활하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술에, 음식에, 목욕탕에, 그런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에 더해 꽃과 화장품까지 커버되는 동네면 뭐.

돌아 나서는 길, 금칠이 화려한 사당같은 건물이 하나 있었고, 그럴듯한 건물, 그렇지만 용처를 잘 가늠할 수

없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서쪽 구역을 좀더 돌아보았어도 꽤나 재미있었을 거 같은데, 이미 오전부터 지브리

스튜디오를 잔뜩 걸었는데다가 동쪽 구역만 돌아보아도 솔찮이 시간이 소모되어 어느새 해가 살짝 기울고

있어서. 슬슬 빠져나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에도도쿄건축공원, 그 안을 돌아다니며 계속 한 손에 들고 바람맞히던 바람개비, 주위에 커다란 건물도 없고

거침없이 휘감기던 바람을 떨쳐내고 가까운 나무에 접붙이기 해버렸다. 나중에 이 나무에서 바람개비가

잔뜩 돋아나진 않을까, 아님 물과 양분을 쭉쭉 빨아먹고 이 바람개비가 거대하게 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과 함께.





2008년의 연극열전2, 그 중 호응이 가장 좋았다는 '웃음의 대학'이 코엑스에서-대학로에서도-앵콜공연중이다.

극본은 메이드 인 저팬,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중인 일본에서 희극을 공연장에 올리려는 작가와 검열관, 둘이

부딪기고 엉기고 웃고 웃다가 화내고 비장해지는 그런 스토리. 검열관 역엔 정웅인, 작가 역엔 김도현였던 날.
 

사실 연극을 볼 때는 영화보다도 좀더 엄정한 마음가짐이 되곤 한다. 조금만 스토리가 늘어져도, 억지스럽거나

무리수를 쓴다 싶을 경우는 좀더 많이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기대치가 높아지는

거다. 얼마전에 대학로에서 봤던 '도둑놈 다이어리'같은 경우는 전반적으로 꽤나 재미있었지만 좀 뻔하고 저렴한

교훈이 사족처럼 붙었다 싶은 부분이 있었다. 거기서 봤던 몸 좋은 배우 유건, '검사프린세스'란 드라마에 

나오길래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차라리 첨부터 끝까지 그냥 웃겼으면 더 좋았을 텐데.


웃음의 대학 역시 마냥 웃기지만은 않는다. 거의 한시간 사십분이 넘는 러닝타임을 내내 웃음으로 채운단

건 사실 말도 안 되니까, 남는 문제는 그 '웃기지 않는 부분'이 얼마나 설득력있게, 흡인력있게 어필할 수

있는지일 거다. 웃음을 지워내려는 검열관,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싸우는 희극작가, 까마귀가 문득 집에

들어왔다며 화내듯 툴툴대는 검열관이 어느순간 집나간 까마귀를 그리워하듯, 그렇게 희극작가와 그의 대본은

검열관을 바꿔놓았다.


"나라를 위해 죽겠단 이야기는 하지도 마."


'천황폐하만세'라는 문구를 세번씩 넣으라던 검열관, 전쟁통에 사랑 얘기따위 치우고 국가를 위해 목숨바치는

이야기를 쓰라던 검열관, 심지어는 웃을 수 있는 포인트를 모두 삭제한 희극을 써내라던 검열관의 입에서

저런 대사가 나오는 순간.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전혀 부자연스럽지도 오글거리지도 상투적이지도 않았던 탄탄한 스토리, 그리고 생각보다 자그마했던 그

공간을 꽉 채웠던 배우 두명의 호흡과 존재감. 멋진 공연이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