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보좌관을 하는 과선배랑 모처럼 만나서 진하게 술을 마시던 날.

보궐선거라거나, 북한 핵 문제, 남북관계라거나 동아시아 정세. 북한 내 정책결정자를 개인으로

볼지 그룹으로 볼지라거나, 대북정책의 근간이 되는 북한의 자멸 여부에 대해서라거나, 한-미,

한-EU FTA에 대해서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라거나, 진보정당들이 원내외에서

어떤지라거나. 근대국가니 현실주의니 따위, 오랜만에 듣는 국제정치학의 jargon들이 우르르.


뭐, 대학다니며 늘 나누던 이야기들이었다. 근대니 탈근대니, 국제정치가 어떻고 세계 정세가

어떻고. 국내 정세가 어떻고 어떤 정치인은 어떻고, 파급 효과는 어떨 거 같고. 개별 이슈에

종횡하는 표피적인 것들이 아니라, 구조와 동학에 대해 집중하는 이야기들. 국가 차원이나

세계 차원에서 정치와 정세를 논하는, 말하자면 정말 '고담준론',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일 수

있지만 학문쪽으로 계속 나갔다면 굉장히 진지하고 중요했을 이야기들.


누구는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이 정부의 외교라인 씽크탱크로 들어간 교수진이 어떻고,

우리과 교수 누구는 한국의 대표선수로 외국 정계, 학계에서 인정받았고, 누구는 D.C로, 뉴욕으로

유학을 가서 아카데미아로 빠졌다거나 따위의 이야기들, 그리고 선배도 외교분야 보좌를 하다보니

공부를 더해야겠다며 유학준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마음이 서늘해졌었다.


학교 다닐 때는 그냥 나도 서른 즈음 되면 그렇게 공부하고 있지 않을까, 무작정 생각했었다.

나름 '이데올로그'가 되겠다며 정치학이던 IR이던, 사회학이던 뭔가 잡고서 책상물림하며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국가 이외의 다른 행위자들이 등장하는

국제관계를 볼 수 있는 국제정치이론을 만들겠다느니. 그런 식의 '고담준론'을 교환하며 머릿속에

세계를 집어넣고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왠지 그런 이야기들이 내 일상과는 맞지 않게

붕붕 뜬 이야기 같기도 하고, 왠지 마음이 서늘해졌었다.


사실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열의도 그다지 많진 않은 거 같다. 못 가본 길에 대한 호기심이나

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던 공부란 건 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공부였던 거다.

뭔가 대단한 논리나 통찰을 제공해서 바뀔 세상인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아카데미아로 빠진

삶에서 내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올곧은 선비의 이미지보다는 왠지 낙향해 초야에 묻혀사는

폐포파립의 한량 이미지에서 더 매력을 느끼는 거 같기도 하고.








자정 쯤에는 한미 FTA가 타결될지 알 수 있을 거라는데, 글쎄요, 시한 안에 협상을 타결짓고 세부적인 조항은

이삼일 동안 더 논의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고, 민변이나 국회의원들의 반발도 가세한 반대 시위는 촛불의

장관을 이루기도 했고. 협상 체결 후 일방적인 파기의 가능성은 아마도 한국에서 더 크지 않을까요. 워낙 국내적

합의가 미진한 상태에서, 꾸준히 여론을 무시한 채 달려간 합의라서요.ㅋ

저는 FTA 내용 자체보다도, 협상을 진척시키면서 전혀 국내 정치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 한국의 외교적

마인드랄까..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은..현실주의적으로 보았을 땐 다소 암담한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지금 조금씩 국제 레짐이

형성되고 있으니 그에 기반하면 한국도 이기는 게임을 할 수 있다..라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현실적인 기반이 제공하는 객관적 범위 내에서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구요, 국제 레짐은

강대국이 이른바 단기적인 이익을 양보하는 수준 정도에 (아직은) 불과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앞으로도

국제관계를 규율하는 레짐이 그 범위를 계속 넓히리라거나 발전해 나갈 거라는 전망도 너무 낙관적이라고

생각하구요.


윈셋 이론이나, 국제레짐 이론에서 말하는 협상이란 건 다소 자연과학의 실험실과 같은 조건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경제학에서 말하는 'Ceteris Paribus'와 같은 거지요.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이라는

전제 조건이요. 여타 국제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어 있고 지금의 협상에 아무런(혹은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가정이겠죠. 문제는, 미국같은 강대국은 판 자체를 새롭게 다시 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냉전 해체 후 단극 질서의 안정성을 의심받던 상황에서 돌발적인, 또한 예견되었던 9.11 테러를 빌미로, 미국은

성공적으로 자국이 확보한 가장 큰 자산의 효용을 갱신해냈습니다. 새로운 집단으로부터의 테러 위협에

대항하겠다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의제화하고 '악의 축'국가를 상정하면서 잠시 의문시되었던 무력의

중요성을 복권시킨 것 아닐까요. NMD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고, 신속기동군을 축으로 한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GPR)도 그렇구요. 세계적 차원의 반미반전 여론이 일고 있고, 미국 내에서도 반발이 거센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이 탈냉전의 세계에 새로운 적을 규정짓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은데요. 상존하는 위험성,

불안정성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미국의 헤게모니와 권력자원을 공고히 하는데 공헌했죠.

요는, 국제 레짐이나 협상이론에서 말하는 공정한 체스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강대국이 보아 넘기리라

생각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새로운 의제를 던지면서 판 자체를 흔들어 자국에 유리한

국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실제로 모든 국가들의 생존전략 아닌가요.


물론,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단기적인 손해를 감수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말 자체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체로

단기적인 손해는 소프트한 영역의 레짐에서 일어나는 반면, 보다 장기적인, 근본적인 이익은 전지구적 차원의

병력 배치를 관철한다거나, 에너지 자원의 확보,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군사정치적 헤게모니의 유지, 혹은

(헤게모니란 단어가 거슬리신다면) 국력의 현상유지 아닐까요. 이러한 장/단기적 이익을 구분할 때, 대략 하드/

소프트 폴리틱스의
영역과 중첩되는 것 같거든요. 물론 경제적 분야의 경우처럼 그 자체의 장/단기적 이익이

상충하는 경우도 있겠지만요. 그렇다면 여전히 현실주의적 가정이 살아있는 것 아닐지요. 어느분이 예로 드신 게

이라크전에 대한 미국내 역풍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문제되는 장/단기적 이익이 뭔지 잘 이해가 안 되네요.^^;;

미국내 역풍은 결국 미국의 헤게모니와 권력자원(소프트&하드)를 허비시킨 것에 대한 전술적 차원의 반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현실주의의 시각을 차용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여지가 상당히 좁고 답답해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그치만

그건, 마치 우리 나라의 영토적 사이즈가 작기 때문에 강대국이 되기 힘든 본래적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시장규모, (경제활동)인구, 인재발생 가능성, 자원 등 여러 측면에서

출발선이 다른 걸 인정하듯, '우리'에게 주어진 권력 자원이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희소한 것이 사실이죠. 머..

그런 '비장한' 현실인식 위에서 전략을 짜는 것이 꼭 '패배주의'와 동일시되어야 한단 법은 없는 것 같은데요.

거기에 역사적인 피해의식과 조바심, 그리고 '우리'를 국가 자신으로 사고하는 다소 국가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열패감을 조장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사실 외교과 학생들이 너무 국가중심적인 사고만 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해봅니다. 흔히 수업시간에

'우리'라는 단어로 지칭되는 건, 단일자로서의 국가, '대한민국'이죠. 국가에 몰입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주의적

사고의 가장 큰 폐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라고 흔히 지칭되는 측면에서 망각되기 쉬운 건

국내정치적 문제구요. 국제정치와 국내정치간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우리'라고 묶여서

호칭되는 국가의 이익을 좀 깨어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전부다 대한민국의 대표인양 말하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국내정치의 동학과 연계해서 그야말로 '비국가 행위자'의 입지를 강화하고 그에 대한 이론적 성과를

내놓는 것. 그것이 현실주의의 암울한 전망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지요. 한국이라는 공간 내에 하나의

액터만이 아니라, 여러 개의 액터가 존재할 수 있고, 이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영역을

넘나들며 작용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지금 FTA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온갖 오류들은, 결국 국가적인 차원의 경쟁력과 수익을

제고하겠다고 채근하는 과정에서 국내 정치적 요소는 도외시하고 활용하거나 고려할 생각도 안 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외교정책 담당자들이 너무 국가중심적으로만 사고해왔기 때문은 아닐지요.

외교가 국가의 총수익만 키워놓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던 시기는 지났다고 보는데요.


그래서 사실, 윤영관 선생님이 저한테 그 질문을 하셨다면, 제 답은 아마도..당신이 돈많은 사람이면 한국이 더

편하니 눌러 붙어있고, 돈없고 빽없는 사회적 약자라면 어딜가나 똑같으니 남아라..정도일까요.^^ㆀ

(사실 이민가고 싶음 가는 거지 모. 지가 가겠다는데 왜 말리겠어.ㅋ)


from '국제정치경제' 수업 커뮤니티게시판.

한미 FTA의 의의에 대해, 진행 방식에 대해, 그리고 성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수업시간에 몇번씩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책이 나왔다는 말씀에 꾹꾹 참았었습니다^^

여러 교수님들의 논문이 묶인 책이고, 미처 한미 FTA가 급물살을 타고 타결되기 전인 작년 11월에 탈고한

책이지만, 윤영관교수님이 어떠한 대답을 하셨을지는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미 FTA는 한국이 '개방형 통상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란 사실은 아마 대부분 합의를

할 것 같은데요. 다만 책에서 지적되듯 로드맵도 무시하고 국내정치적인 협상도 건너뛰고 조급하고 임의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측면이 낳는 부작용이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애초 동시다발적 FTA전략이란 과감한 전략

자체도 우선순위를 정해서 영향이 적은 소규모경제권부터 시작하기로 했던 것이니까요.


더구나 일단 FTA가 타결되고 나니까,마치 루비콘강을 건넌양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가자, 국제신용도도 그렇고

외국인투자도 그렇고 지금와서 반대해봐야 죽음뿐이다"라는 식으로 몰고 가는 여론이 우려스럽습니다.

한칠레 FTA도 국내 비준까지는 1년반이나 걸렸는데, 그보다 더욱 파장이 큰 한미 FTA는 한국측, 미국측 모두

비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장애물과 난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재협상의 가능성도 조금씩

높아지는 것 같구요. 만약 최종적인 비준에 실패했을 때 한국에 미칠 역풍을 한국정부, 언론 등이 스스로 키우는

건 아닐까요. 초점을 맞춰야 할 건 장기적으로 개방형 통상국가가 되기 위한 비전이지, 졸속처리된 한미 FTA

자체의 가부결이 아닌 것 같은데요.

협상이 좌초한다고 해서 한국 경제가 당장 나락으로 구를 것처럼, 혹은 타결된다고 해서 당장 (깃발들고 말달리며
 
태평양을 건너) 미국시장을 호령할 것처럼 겁주고 어르는 것은, 전혀 한국 내부의 이익조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한미 FTA에 목매달고 있다고 광고해서 스스로의 협상역량을 부식시키는 일 같습니다. 저는 차라리 지금의

한미 FTA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우리의 로드맵에 따라 '개방형 통상국가'를 추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때엔 다른 한미 FTA를 협상할 수 있겠지요, 한국 내 여론을 수렴하고

피해상황도 좀더 분석된 후에요.


또하나, 흔히 자유무역의 장애물을 말할 때 반대 이익집단이 보다 집중화, 조직화되기 쉬워서 자유무역이

좌초되기 쉽다고 말하는데, 과연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반적인 설명이 그대로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정당이나

합법적 채널이 모두 막힌 상황에서, 그야말로 집회, 시위, 폭력행위같은 강압적 채널만이 허용된 한국의 자유무역

피해집단(농민, 중소기업, 노동자 등)은 이미 그 자체로 여론과 정책집단에 대한 영향력을 일정정도 상실하고

시작하는 것 아닐지요. 찬성집단이 정당과 합법적 채널을 장악하고 유려하게 여론몰이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반대집단이 찬성집단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판단은 다소 피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책에서

지적된 대로 한칠레FTA 비준을 세차례나 연기시킨 역량이 있긴 했지만, 이미 판세나 여론은 찬성을 대세로 한

상황이었다고 보는데요. 한미 FTA 역시, 일부 반대 이익집단이 강력했다기보다는 교수들이나 사회단체들이

나서는 등 총론 차원에서 우려가 컸기 때문에 사회적 반발이 컸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이 '21세기 한국의 정치경제모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사회의 권력 분산이 시급하다는

진단에 비추었을 때 협상과정에서 끊임없이 노출되는 파열음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앞선 채널의 편재에

대한 얘기는, 여전히 권력이 대기업과 자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세계화와 개방을

이야기하면서 외려 대기업들은 반독점이나 공정 거래에 대한 국내적 규율을 약화시키기를 요구하고 있구요.

세계화의 진척이 도리어 한국의 권력 분포를 집중시킨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세계화 자체가 그러한 권력의

집중과 비민주화를 유인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나아간 질문으로는, 한국이 IMF라는 위기를 기회삼아 구조 조정과 권력 분산에 성공했다고 보시는지요??



아..전 왜 요새 언론 모냥새 보면서 계속 OECD가입했을 때의 장밋빛 일색이던 그 모냥새가 생각나죠?-.ㅡ^



from '국제정치경제' 수업 커뮤니티게시판.


세계정치 6 - 6점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엮음/인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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