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에 오르는 길, 삼릉을 거쳐 지나는 골짜기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는 건 다소 묘한 손모양의 목잘린 좌불.

 

석조여래좌상, 삼릉어귀의 길로부터 출발해 남산에 오르는 길은 예전부터 절도 많고 불상도 많았다나.

 

무려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한데다가 금오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라 제일 즐겨찾는 등산로란다.

 

 

어느새 싱그러운 녹빛이 솔잎바늘 끝까지 충만한 소나무들. 남녘에는 봄이 왔다.

 

바위 위에 새겨진 관세음보살상. 천수관음의 자비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은 천년을 이어지고.

 

관세음보살이 굽어보는 경주 남산의 앞마당. 하늘이 좀만 더 파랗게 맑았음 좋았을 텐데 아쉽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석가삼존과 아미타삼존이 새겨져 계시다는데, 머리에 둥그렇게 보름달같은 휘광이 비치는

 

부처님 세분이 계시니 뭔가 더욱더 강력해 보인달까. 이렇게 선으로만 새겨진 부처상은 남산에선 드문 거라고 한다.

 

하얗고 검은 바위의 육중한 옆구리에 명료하지만 가느다란 선으로 한붓그리기하듯 그려놓은 부처님들을

 

눈으로 따르다 보면 중간에 살짝 선을 놓치기도 하고 어지러워지기도 하고. 구도의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 은유일 수도.ㅋ

 

그리고 석가여래좌상. 부분부분 깨어져나간 부분도 보이고 뒤의 휘광도 다시 조각붙이기를 한 거 같지만

 

엄숙하고 우아한 표정이나 진중한 앉은 자세가 여전히 당당하다.

 

 

부처님한테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요모조모 얼굴과 몸의 굴곡을 살펴보려는데, 부처님 왠지 우셨던 거 같다.

 

하긴 요새 세상이 위에서 내려다보기에 참 슬픈 일 투성이들일 테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눈물자국이 선연하다.

 

 

남산 정상까지는 안 가고 내려오는 길, 색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그다지 좁지 않은 길을 꽉 채워서

 

남산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좌우로 허리를 굽힌 채 소나무 터널을 만들어주고 있던 남산의 노송들.

 

 

그리고 남산 아랫자락에 그리 오래진 않아보이는 망월사라는 절에 잠깐 인사드리러 들어가는 길.

 

나른하고 촉촉한 봄볕이 내리쬐이는 절 앞마당에는 벤치도 늘어서 있고, 가지런히 누워 몸을 달구는 기왓장들도 쪼르르.

 

댓돌 위에는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였다.

 

 

대웅전 뒤로 푸릇푸릇한 기운이 마구 돋아나는 남산을 배경으로 크고 작게 솟아오른 불상과 불탑들.

 

 

 

 

 

강화도 외포선착장에서 카페리를 타고, 게으른 갈매기들이 부리에 물리는 새우깡만 씹는 모습을 보며 들어선 석모도.

 

눈썹바위 아래 부처조각과 소위 '기돗발'이 잘 받는 3대 관음도량으로 유명한 보문사를 오랜만에 찾았다.

 

보문사로 올라서는 제법 가파른 산길에서도 꿋꿋이 하늘과 땅 사이에 수직으로 버티고 선 나무에 하트 무늬가 새겨져있다.

 

한여름내 햇볕을 그득 받고 시퍼렇게 멍들어버린 덩굴손들이 커다란 바위를 꽁꽁 움켜쥐고 있는 듯.

 

수능이 머지 않았다. 3대 관음도량인데다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진 절이다보니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탑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선 부처들, 혹은 부처의 뒤를 이어 깨달음을 얻은 보살(보디사트바)들의 색색깔 뒤통수.

 

 

눈썹바위로 가는 길에 수백개 돌계단을 오르고, 역시 수백개의 연등 옆을 지났던 거 같다.

 

그리고 눈썹바위 전망대에서의 석모도 그리고 그 너머의 전경. 바다 위로 불쑥불쑥 솟은 송전탑들.

 

 

보문사를 등지고 내려와 허기를 달래려 복분자 막걸리 한 동이와 함께 감자전을 주문했다.

 

 

 

 

부산에 갈 때마다 들르고 싶다가도,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도 하고 번번이 서면이니 부경대 주변에서 술만 빨다

오기 일쑤여서 매번 마음만 움키고 말았던 곳, 해동 용궁사. 인터넷 공간에서 스쳤던 이미지들은 전부 이런 식,

파도가 철썩이는 바위들 위에 버티고 서서 해안가에 넓게 자리한 그럴듯한 사찰이 해동 용궁사다.


입구부터 범상치 않던,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는 해동 용궁사'. 글씨가 빨강색으로 적혀 있는 거라거나 중국

느낌이 나는 불상들이 으레 봐왔던 한국의 절들과는 느낌이 다른 거 같다. 그런 느낌은 갈수록 더욱 짙어졌다.

올해 삼재라는, 원숭이띠의 지신상. 열두 지신상이 쭉 늘어서 있었고 올해 삼재에 해당한다는 띠 앞에는 저렇게

삼재, 라고 표찰이 붙어있었다. 내년이 나가는 해라나, 삼재란 게 뭔지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런 거 피함 좋겠다.

귀여워서 눈길을 붙잡던 벤치들. 손오공이 날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이었다던 고사를 떠올리게 만들던 손바닥 모양의

의자하며, 고양이인지 쥐인지 호돌이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뭔가 털 복슬한 동물이 대리석 의자를 받치고 있는 벤치.


꼭대기에선 까치가 꼬리를 쫑긋거리며 균형을 잡고 있는 탑의 앞에는 자동차 타이어 모양을 본딴 이름표가 붙었다.

'교통안전 기원탑'. 잘됐다 싶어, 오토바이 타고 다닐 때 사고나거나 다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얼른 향에 불을 쟁이고

꼽고는 몇번 절을 했다. 딱히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경계하는 효과는 있지 않을까.


해동 제일의 관음성지, 라는 간판이 걸린 화려한 정문을 지나야 비로소 해동 용궁사에 한발 들어선 셈이다. 아직까지는

절 경내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맛보기쯤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황금빛 몸뚱이로 또아리를 틀고 있는 용의 얼굴이 조금

못생겼다 싶기도 하고, 역시 많이 보던 형태는 아닌지라 시선이 갔다.

무려 득남불. 이 부처님의 배를 어루만지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건지, 다른 부분은 거칠한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불룩 튀어나온 배만 유독 저렇게 반들반들 닳고 닳아버렸다. 효험은 있는 거려나. 조금 의심스럽지만.


바닷가로 나아가는 길, 석등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딱히 계단 난간이 없어도 빼곡하게 세워진 석등이 충분히 난간

역할을 해주고 있을 정도였달까. 어느 석등 위엔가 동그마니 솔방울이 놓여 있었다.

본전이 나타나기 전, 또 하나의 불상이 눈에 띄었다. 가슴팍에 백원짜리 오백원짜리를 붙여놓고 있는 이 부처의

이름은 '학업성취불', 이름처럼 책을 조신하게 펴들고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보고 있는 거다.

드디어 해안가로 나오니 석교가 하나, 그리고 그 석교 너머로 바다와 맞붙은 본전과 부처상들이 보였다.


돌계단을 지나면서도, 행운의 동전인지 뭔지 저 동자승이 들고 있는 바구니나 그 밑의 바구니에 동전을 던져넣으면

행운이 있을 거라는. 본전에 아직 도착하기도 전인데 조금 지쳐버렸다. 뭐 이리 빌고 돈넣고 하는데가 많은가 싶어서.

그치만 절의 위치는 참 상서롭달까, 이렇게 검푸른 바다가 코앞에서 하얗게 부서져내리는 곳,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가득한 해안가에 자리잡은 절이란 건 본 적이 없다.

본전 옆에 안치되어 있던 황금색의 토실토실한 미륵불상. 아무래도 여기는 중국의 영향을 좀 직접적으로

받았거나 그런 곳 아닐까 싶다. 부처상들도 약간씩 중국 냄새가 나는 거 같고, 뭔가 한국에서 흔히 봤던

얼굴이나 풍채, 분위기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본존불이 모셔진 본전, 바닷바람에 해어지고 아이들 손장난에 빵꾸난 문창호가 불규칙하게 또다른 문양을 만든다.


커다란 청동 조각의 용이 앞발을 허공에 움킨채 굳어있는 곳 아래에는 빼곡하게 동자승이니 부처상 같은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하나씩 사람들이 돌멩이 얹는 마음으로 올려둔 걸까.

그리고 해수관음상. 한손에 정병을 들고 다른 손으로 수인을 맺고 있는 모습이 엄숙한 기운을 자아낸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에서 맞고 있는 해수관음 발치에서 촛물을 질질 흘리며 잘도 타들어가는 촛불들.

관음상 옆에 서서 내려다본 해동 용궁사의 전경, 기와지붕이 사방에서 모아쥔 듯한 분위기 속에 바다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탑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지하로 좀 들어가서 볼 수 있는 '신비한 약수터' 위에 버티고 선,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세의 아기부처.

사람들은 그 위에 머리부터 물을 부어 씻기기도 하고 발치에 있는 다른 동자승 인형들도 같이 씻기기도 하고.

천수관음 대불상에서 내려오는 길, 어짊을 닦는 문이라는 뜻의 수인문 앞으로 출입금지 글자가 요란하다.

아까 기와지붕들로 둘러쌓였던, 가운데 있던 탑 주변에 있었는데 가까이 가고서야 눈에 띄인 건 황금돼지 두마리.

얼마나 큰지 어른이 양팔 가득 안아도 반정도밖에 안 잡힐 듯한 돼지 콧구멍에 동전이 수북하다.

등용문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야트막한 아치문. 사람들이 고개를 조심하지 않으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힐만큼 낮다.

본전 아래에 있던 기념품점이랄까, 염주나 기와시주 같은 걸 담당하는 곳인데 재미있는 걸 두개 발견했다.

바람방지, 여자떼는부. 이런 게 과연 효과가 있으려나 싶기도 하고, 얼마나 절실하고도 보편적인 문제면 저런

부적이 레디메이드로 만들어져 팔리나 싶기도 하고.

부처님 오신 날이라거나 특별한 때 동물을 사서 풀어주는, 방생하는 곳. 쑤욱 들어온 바닷가 너머로 용궁사가 보인다.

방생하는 곳 옆에 있던 또다른 부처님. 이곳저곳에 모셔진 부처님들은 저마다 능력이 하나씩 출중하시어, 어느분은

병을 낫게 하고 어느 분은 재산운을 틔워주고 어느분은 공부를 잘하게 해주고 어느분은 만능이시고..좀 심하지 싶다.

물론 한국의 절들이 대개 삼신각이니 산신각이니 무속신앙의 신들이나 토속 종교의 신들까지 함께 모셔지는 그런

공간이었던 건 맞지만, 이곳처럼 이렇게 분업체계가 잘 갖춰져 복전을 요구하는 부처님들이 곳곳에 모셔진 절은

정말 처음 본 거 같다. 용궁사의 위치라거나 풍경 등은 정말 다시 오고 싶을 만큼 이쁘고 인상적이었는데, 다른 의미로

이곳저곳에 모셔진 부처님들 역시 기억에 오래 남을 거 같다. 남자아이를 원해? 교통안전? 학업성취? 무병장수?

뭐든 돈넣고 빌기만 하면 이뤄진다는 '매매'가 이뤄지는 건 아니었음 좋겠다.

집착하지 말라는 법구경의 이런 구절을 바위에 파놓은 게, 당신이 지갑에 담아온 모든 지폐들을 이런저런 보시함에 전부

털어넣고 가라는 종용의 의미를 담은 건 아니길 바라며.





강화도 외포리 외포선착장에서 카페리를 타고 십분. 그렇게 도착하는 석모도는 생각보다 꽤나 큰 섬인데다가 나름

'산'이라 이름붙은 야트막한 야산들도 불쑥불쑥 솟아 있는 거다. 그 중 하나, 200여미터의 높이로 솟아 있는 봉긋한

낙가산에 기댄 보문사란 절을 찾았다.

석모도는 서울이랑 가까우면서도 배를 타고 나간다는 느낌 덕인지 예전부터 몇 차례 놀러왔던 곳이다. 대학생 때는

훌쩍 섭을 째고는 혼자 놀러 와보기도 했었고, 언젠가의 연말 굉장히 춥던 날에 오기도 했었고. 보문사는 그렇게

벌써 두번째, 그때나 지금이나 하늘로 곧추솟은 이 소나무들이 보문사의 첫인상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간당간당 넘어갈라는 시기, 축축해진 낙엽이 길을 온통 덮었고, 그 사이로 탑처럼 솟아있는 건

사람들이 보문사에 내려놓고 가는 소원 한토막들. 비가 올 거라던 일기예보는 틀렸지만 공기는 꽤나 촉촉했다.

보문사는 양양의 낙산사와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이라고 한다. 무려 신라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 천오백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매번 올 때마다

무언가를 간절히 간구하는 불자들의 행렬이 결코 적지 않았었던 거 같다. 당장 이번에 찾았을 때만 해도 수능시험이

끝나고 좋은 대학에 가게 해달라는 어머니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보문사를 특히 유명하게 만든 건 저 위로 보이는 마애관음좌상과 앞쪽의 석실 덕분이다. 마애관음좌상을 보려면

근 500여개의 계단을 올라 저 위로 올라야 하니 일단은 차치하고, 석실부터 꼼꼼히 살펴보기로 했다.

보문사 석실,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석굴사원의 하나라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정말 석굴암 말고 또 석굴을 파고 조성된

사원을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이 안에는 전부 스물두분의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는데 제법 넓찍한 석실 내부에서 스님이

두드리는 목탁소리가 둥그렇고 무지근한 파장을 그리며 울려퍼졌다. 천장에는 온통 연등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는데

왠지 생일파티때 헬륨가스를 잔뜩 불어넣은 풍선들을 천장에 빼곡하도록 불어올린 그런 분위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 보문사 석실(안내판 참조) :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회정대사가 처음 건립하고 조선 순조 12년(1812)에 다시 고쳐지은 석굴사원이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불상들을 모셔 놓은 감실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보살과 나한상을 모셨다. 이들 석불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어떤 어부가

고기잡이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꿈에서 본대로 모셨더니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보문사 석실 앞에 세워져있던 잘 생긴 향나무. 나무둥치가 바로 선 게 아니라 뭔가 구불텅하게 두어번 휜 것이

마치 용틀임하는 모양을 닮은 거 같기도 하다. 향나무의 생김이 범상치 않아 그런지 향나무를 둘러안고 있는

대리석들 위에도 꼬마스님들이나 부처님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으셨다.


보문사의 본당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해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삼성각이,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마애관음좌상으로 가는

길이 있다. 몰랐는데 한국에 관음성지로 지정되었다는 서른세곳의 성지 중에서 첫번째로 손꼽힌 곳이 바로 이곳,

보문사라는 표지가 붙어있었다. 그냥 서울에서 가까운 바람쐬기 좋은 곳,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석실도 살펴보고

보문사 구석구석 살펴보다보니 생각이 바뀐다. 등잔밑이 어둡다, 는 속담이 자꾸 생각나고 있었다.

그렇게 이전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보문사의 성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던 중 쐐기를 박은 건 바로 이 와불상.

커다란 와불이 법당 하나의 끝에서 끝까지 머리에서 발까지 쭉 몸을 뉘이시곤 누워 계셨다. 조성된지 얼마 되지 않은건지

또렷한 단청무늬와 사려깊은 조명들이 부처님의 얼굴에 떨어졌고, 앞에는 공양된 쌀과 향과 초들이 놓여있었다.

해가 스멀스멀 기우는가 싶더니, 어느순간 확 어두워져 버렸다. 마애관음좌상을 보러 올라갔다가 황급히 내려와보니

그새 보문사의 풍경이 확 바뀌어 있었다. 기와들을 가지런히 쌓아올려 만들어둔 야트막한 담장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와

생선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퍼런 물이 짙어져가다가 까무룩 시커멓게 변해버리는 하늘 아래 기와지붕은 나름의

음영을 드러내며 운치를 더했다.

저녁 예불 시간이 되었는지 스님 두분이 큰북을 두들기러 나오셨다. 삽시간에 어두워져버린 풍경들을 뒤로 한채

촛농처럼 아래로만 흘러내리는 불빛 몇 개가 스님의 민머리 위에서 잠시 반짝거리다가 흘러내렸다.

이제 슬슬 가볼 참이었다. 석모도를 뜨는 배는 매시 정시와 30분, 그렇게 30분 간격으로 있다 했으니 지금 움직이면

딱 맞춰서 돌아갈 수 있을 듯 했다. 보문사에 오를 때는 경사가 워낙 급한 오르막이라 힘들었는데, 내려오면서는

차라리 오르막길이 낫다 싶었다. 자꾸 발걸음에 가속이 붙는 게 누가 뒤에서 밀치는 거 같기도 하고, 하여 그저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데에만 집중했다. 한걸음한걸음, 보문사의 관음보살을 뵙고 돌아오는 길은 그렇게 한걸음씩

새기면서 돌아올 길이었다.

석모도 들어올 때도 엄청나게 차들이 많아서 자못 당황했었는데, 사방이 이렇게 꺼뭇꺼뭇해진 시간이 되니 그렇게

들어온 차들이 전부 나가겠다고 꼬리에 꼬리를 문 게 그 붉고 노란 불빛들도 볼 만하다. 평일엔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배라고 했지만, 승객들이 늘어나는 공휴일이나 무슨 날에는 그냥 몇 대의 배가 쉼없이 움직이는 거 같다. 들어올 때도

생각보다 금방 차들의 행렬이 줄어들더니 나갈 때도 생각보다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참 가까운 곳,

가까운 곳에 이렇게 영험하고 오랜 사찰이 있는 줄도 모르고 먼 곳만 보았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 인천관광공사에서 컨텐츠 제작에 필요한 지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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