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까, 이렇게 여행 가방에 탑을 쌓아올리듯 옷가지들을 소복하니 쌓아두곤 뚜껑도 안 닫고 떠나버린 사람은.

헤이리에 차를 대고 나서 룰루랄라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저 이쁘장한 분홍빛 클래식한 여행가방을 발견했다.


쏴아~ 하고 불어오는 바람소리도, 그 바람에 괜시리 마음흔들다 나부끼는 낙엽들의 춤사위도, 그리고 문득

서늘해진 가슴도, 점점이 하얀 빛이 새어드는 파랑 하늘도,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가을이다.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차로 돌아오니 가방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왠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맛좀 보라지, 하는 표정으로 다짜고짜 여행가방을 싸짊어지고 여행을 떠나는 '불평분자' 아닐까 상상을 잠시.

머릿속에서 탁, 여행가방이 단호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현실은...여행이 아니라 출장을 준비하고 있다능.)


@ 헤이리.
다합에서 밥을 먹을 때 찾아왔던 새끼고양이가 있었다. 반가워서 버터바른 빵이나 딸기잼바른 크레페조각같은 걸

던져주다 보니 다음 식사 시간에도 알아서 찾아왔댔다. 스스럼없이 옆에서 세수도 하고 눕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는
 
모습을 보니까 전번에 제대로 쓰다듬어줬구나, 하는 확신이랄까.ㅋ 내 허벅지가 만든 그늘에서 편히 웅크리고

쉬고 있는 고양이를 보며, 내 가슴 속에 올려놨던 고양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나도 누구 한사람 대략

품어줄 만큼은 큰 거 같다고. 그래도 이제 내 호흡에 버거워 주위 사람들 못 챙기거나 신경못쓰는, 소중한 사람을

못 품어주는 일은 없을 거라는 나름의 자신감이 생긴 거 같다.

카이로-시와-알렉산드리아-아스완-룩소-다합-카이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여행, 카이로를 향해 10시간 버스를 달렸다. 자리가 저번보다 훨씬 편했는지라 문제없이 내내

잘 수 있었다. 어제 중간에 한 잠 자주지도 않고 바다에서 쉼없이 놀았던 게 생각보다 많이 피곤했던 듯. 사실

밤새 달리는 동안 버스는 몇 차례나 멈춰서곤 했었다. 참 이놈의 동네 차도 널럴하게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며 이왕

멈춰선 김에 해뜨는 거나 보자고 생각했다. 첨에는 아무 이유없이 바다일 거라 믿었던 길 양쪽, 어둠이 양껏

웅크리고 있던 그곳이 실은 먼지 뽀얀 황무지란 사실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 군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미 앞에 멈춰섰던 차를 샅샅이 뒤지고 우리차로 온 참이었다. 모든 짐을 다 꺼내놓고서 하나하나 풀어

헤치며, 가방검사를 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생쇼인가, 하고 있는데 결국 내 차례가 다가왔다. 아무리 이집트가

관광객을 보호하고 관광산업을 지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을 온동네에 풀어놓은 경찰국가라고 해도 왠 소지품검사?

어쩌면 다합에서 다른 곳으로 마약이나 다른 물건들이 밀반입될까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길 한구석에 몰아세워진 채 가방을 줄세워 차례로 열고 있는 모습이란 좀 씁쓸하다. 다른 외국인

여행자들도 다들 툴툴대며 불만가득한 표정이면서도 여권 보여주고 짐 풀어주고.


내 차례는 금방 지나갔다.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여권만 보고 가버렸다. 하긴 혼자서 40명분 가방을 일일이

뒤지는 게 얼마나 짜증났겠어. 조금 후에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난 다시 편하게 잠들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은 더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어느 순간부터 문득 눈에 띄지 않아서 발을

쭉 뻗었다. 그가 잡히지 않기를 기원했다.




불과 한 시간전..그니까 어제 꼬박 밤을 새다시피 불면증과 환상에 시달리다가 오늘 오전엔 경기고에 가서 자격증

시험'지'를 보고 와선 내처 퍼질러자다가 개콘보고 웃다가 고양이 인형 하나를 부숴먹고(책장에서 뛰어내린 고양이,
 
왜 그랬니.
).


또다시 불면증의 조짐이 온다. 마침 고양이 녀석 때문에 카메라를 꺼내든 김에, 언젠가부터 한번 해보고 싶었던,

내 방 풍경 스케치.

책상 위. 절대 촬영을 의식하고 정리한 건 아니라는..왼쪽에 다소곳이 핸폰에 눌려있는 것들은 내일 출근할 때 가방에

쓸어담아 갈 것들. 2층 창밖으로 커다랗고 다소 둔탁한 연둣빛 잎사귀를 가진 꽃나무가 보이는데 밤이라 깜깜할 뿐.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면, 책장. 작년에 세조각내어 읽었던 넬슨 만델라의 'long walk to freedom'도 보이고,

그 위엔 어느샌가 골동품이 되어 팔 수 있기만을 기다리는 테입과 씨디류가 빼곡히 꽂혀있다. 가운데 책장에는

중학교때부터 읽었던 한국문학, 세계문학전집이 있어서, 언제고 내킬 때면 헤세의 '지와 사랑'이나 손창섭의

'잉여인간'같은 작품을 훌쩍 읽곤 한다.(난 '지와 사랑'의 골드문트를 동경한다.) 티스토리에서 받은 달력과, 대학때

전공교재들. 아, 그리고 내 등의 왼쪽날개 오른쪽날개를 사이좋게 받쳐주는 의자와 다리부러진 고양이녀석도 보인다.

다시 고개를 좀더 오른쪽으로. 방문옆엔 옷장이 있고, 그 옆엔 코너장이 있다. 이사오면서 책장을 하나 버렸기에

이런 식으로밖에 책이 안 들어간다. 그래도 몇번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 이런 멋진 수납방식을 생각해 냈다고

어찌나 스스로 뿌듯하고 대견해했는지. 이사를 할 때마다 늘 책들을 어떻게 카테고리화해야할 지 고심고심하지만,

늘 결과물은 신통찮다. 철학/정치학/국제정치학/심리학/문학/역사..정도로 나누고 싶었는데, 역시나 실패.

다시 고개를 오른쪽으로..아니, 책상에 앉아있는 상태라 치면 걍 왼쪽으로 살짝 90도랄까. 심플하게 걸린 둥근 시계와,

'선인장 크래커'라는 책을 쓴 봄로야의 그림 두점이 걸려있다. 프리다 칼로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글과 그림은 상처투성이.

눈을 약간 아래로 떨구니 내 가방이 있다. 작년에 백화점에서 저 가방을 보자마자 흥분해선 지르고 말았다.

다소 캐주얼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요샌 손잡이가 따로 없이 메고 다녀야 한다는 게 좀 거슬리긴 하지만,

다른 가방이 있어도 오로지 요것만 들고 다닌지 어언 1년. 빳빳한 기운이라곤 전혀 없어서 추우욱..이런

느낌으로 널부러져 있는 것도 맘에 든다. 예전의 타레팬더같아.

책상위 4살짜리 쪼꼬렛 핸드폰에 눌린 것들은 내일 시사인 독자위원회를 대비해 들고갈 그간의 잡지들, 그리고

'책날개달기'([책날개달기] 그 두번째-"메이저리그 경영학", "엄마를 부탁해"(얘는 어버이날 맞이로다가) & "화폐전쟁")

에 선정된 Adios님께 부칠
'엄마를 부탁해'. 그리고 스타벅스에서 받은 다이어리.


저 너머 세워진 DVD 두장은 '미인도'와 '앤티크-서양골동품과자점',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아직 DVD는 하나도

못 봤고 보고 싶은 영화들은 잔뜩 쌓이고 있으며 불안 역시 절반정도밖에 못 읽었는데 보고 싶은 책들은 또 생겨난다.


그리고, 모니터 안에서 점멸하는 커서. 두근, 두근.





01년 미국갈 때 샀던 여행가방..무슨 숫자이던가 세자리로 암호를 걸어놓았는데, 그새 잊어버렸다.

동생 졸업여행갈 때도 공항 가는 길에 전화해감서 삽질을 해놓고는, 여행 간다니까 이제야 다시 번호를 챙겨보려

다이얼을 하나씩 돌려서 확인해 보는 단순작업을 했다. 총 세자리. 000부터, 999. 대략 13분 20초정도.


상식적으로 그 1000개의 번호 중에 하나의 정답이 있어야 하는 건데, 없다. 아마 그 이유는 둘 중 하나.

1000번의 무료하고 멍청한 삽질 중 멍해져버린 내 감각이 그 순간을 놓쳐버렸거나, 혹은 애초 1000개의 번호 중

답을 찾도록 되어 있는 시스템 자체의 오류..곧 가방 자물쇠의 고장.


분명 그중에 숫자 하나는 맞을 꺼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내 우매한 선입견을 비웃는 前백승독서실 3층 27번座

핑크곰돌이 자물쇠. 아마..비밀번호는 8991같은 네자리 숫자거나, 아님 '내려쳐뽀사뿌라'정도 아닐까 싶다.


어쨌든, 2006년 8월 태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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