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 초 친구분들과 함께 등산을 가셨던 부모님, 뒷풀이 자리에서 만난 음양오행 역술가가 올해 어머니의 건강을 유의해야

하겠다고 강조했단다. 평소 크게 건강에 문제없으신 터라 별로 와닿지 않으셨던 엄마. 그 정도 연세면(꼭 그정도 연세가

아니더라도) 뭐 당연히 건강에 신경쓰이고 자잘한 문제들이 생기는 게 예사니 그 정도 이야기는 나도 하겠다며 평소처럼

시니컬했던 나.


그랬는데 이사하며 무리하셨는지 왼쪽 손목에 인대가 늘어나 한두달 동안 보호대를 차셔야 한대고, 건강검진에서는

갑자기 커다란 종양이 발견되어 급하게 입원, 수술까지 하셨다. 건강검진이 5월 중순, 추가 정밀진단이 몇차례 이어지고는
 
저번주 목요일로 수술날짜가 갑자기 잡혀버렸다. 꽤나 당황했었지만 다행히도 조직검사 결과도 양성으로 나와 문제없고,

수술 후 경과도 좋아 조만간 퇴원하실 것 같아서 안심했다. 이제 왼쪽 손목만 얼른 나으시면 올해의 사주에 나왔다던 그

'건강유의' 괘를 전부 '클리어'한 셈이기를.


#2.

궁금한 거는, 사실 몸 안에 종양이 자라는 게 2009년 1월 1일, 혹은 음력으로 새해 첫날부터 자라는 것도 아닐 텐데

과연 사주운세-혹은 음양오행에 따른 신수풀이-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걸까, 하는 점이다. 사주에서 잡아야 할 건

'병이나 사고가 생긴다'는 식으로 그 시점에서의 실제적인 건강 악화, 혹은 문제 발생에 대한 예고나 경고인 거지,
 
'건강검진에서 증상이 발견될 것'을 예견하는 건 아니잖아.


폐암이니 뭐니 등속의 질병이 발병하는 것도 그렇다. 사주가 짚는 건 '진단' 시점의 문제일 뿐 아닐까. 그렇다면

의료기술의 발달, 진단기술의 발달 속도를 가늠해가며 그걸 사주에 반영하나? 그럴리는 없고. 물론 사주로써

잡을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사건, 부상 등의 케이스도 충분히 있다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말이다.


#3.

또 궁금한 거는, 사주에서 말하는 역마살이란 거. 난 여태 두세번 장난삼아 봤을 뿐인 사주에서 항상 '역마살'이

끼었다고 나왔던 것 같은데..대체 토정 이지함선생이 활동했던 조선시대나 그 이전 거북이 등껍질에 구멍내고

구워서 쪼개진 모양에 따라 점괘를 봤다던 옛날옛적의 '역마살'이란 반경 몇 킬로를 며칠 내로 돌아야 하는 걸까.

기껏해야 말 따위나 타고 뛰었을 때의 역마살과 차가 다니고 비행기가 뜨는 요새 세상의 역마살의 어마어마한 차이란.


출근길만 해도 서울 서쪽서 동쪽 끝까지 움직이기도 하는 터다. 그렇게 따지자면 현대인은 모두 역마살. 함에도

살짝 신기한 건, 스튜어디스들의 사주는 거의 대부분 역마살이 강하다고 나온댄다. 당대의 과학기술, 교통수단을

빌어 상대적으로 많이 움직이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역마살'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머..그정도는 얼추 납득.


#4.

또 있다. 여성들 이야기다. 팔자가 사납니, 박복하니 등의 이야기는 주로 여성을 향한다. 애를 못 낳거나, 결혼을

못 하거나, 결혼을 늦게 한다거나..그럴 때 사주를 풀어주는 사람은 그런 '전근대적' 단어들을 쏟아놓는다.

요즘 세상에 애를 안 낳거나 결혼을 늦게 한다고 해서 팔자가 사나운 뇬이거나 박복한 뇬은 아닌데, 우연찮게도

사주를 풀어준다는 아저씨들은 대개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중늙은이 연배다.


애를 못 낳는 것도,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남성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게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애를 낳아야

여성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따위의 사고 역시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바뀌고 있다. 그렇지만 사주가 문제인지, 사주풀이 선생들의 문제인지, 여전히 그녀들은 불행하며 동정의 대상이다.


#5.

결혼상대에 대한 진부한 표현들도 걸린다. 나 같은 경우는, 자녀에겐 신사임당같고, 부부관계에 있어선 황진이

같은 결혼상대를 만날 거라 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면야 땡큐베리감사지만. 우야튼 요는 '이쁘다'는

표현, '좋은 결혼상대'라는 애매한 단어들이 갖는 의미가 불명확하다는 거다. 조선시대의 미인상과 현대의

미인상이 다르고, 칠거지악을 피할 그 때의 좋은 결혼상대와 지금의 결혼상대가 또 다른 거 아닌가. 막말로

종족 보존과 계급 유지/상승을 위한 당대의 결혼과 지금의 결혼에 대한 관념도 판이하다. (..쓰고 나니 왠지

헷갈리긴 한다. 요새나 그때나 별반 결혼을 보는 시각에 단절적인 차이가 있는 건 아닌 듯..)


대체 난 누구랑 결혼하게 되는 걸까..라는 고민은 혼자 하기로 하더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 인성에 대한

평가, 결혼이라는 것에 대한 의미 부여 등등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쉽게 뱉을 수 없는 말들을 그대로

'토정비결'이니 뭐니 옛사람의 입을 빌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건 아닌지.


#6.

결과적으로 사주를 빌어 말하는 건 사주를 풀어주는 사람의 인생관, 행복관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직장을 구하면 잘 살 수 있을지, 누구를 만나야 할 지...전부가 당사자 자신이 내려야 할 결정 꾸러미들.

삶을 어떻게 대할 건지, '잘산다'는 게 뭔지,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는 뭔지, 어떤 사람됨을 좋아라 하고 자신과

잘 맞다고 생각하는지 등등.


사주운세란 게 정말 삶의 참고가 되려면, 거기에 잔뜩 묻어있는 과거의 가치관, 평가, 감정들을 싹 걷어내야

할 거 같다. 아이가 없으니 즐기며 살 수 있겠네요, 라는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거기서 쯔쯔 혀를

찬다거나 동정심 가득한 눈빛으로 박복하다느니 어떻다느니 말하는 건 사실, 건방지고 무례한 일이다.



덧댐_

그리고 언젯적 '관운'인데 아직도 그런 단어를 스스럼없이 달고 사는 걸까. 공무원이 공복이 아니라 위에

군림하는 '나랏님 패거리'라고 여겨지게 만드는 단어다. '관'에 들어가야 뭔가 '행복하고 잘 살 수' 있다는

메시지는 어쩌면 그들이 '사주풀이'를 배우기 전 머릿속에 심겨진 완고하고 답답한 사고방식에서 유래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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