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鄕愁. 아련한 느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가슴먹먹한 상실감이 뒤범벅된 느낌의 단어다.

다소 멍한 눈빛으로 흐르는 물을 부질없이 갈퀴질하는 듯한 그런 이미지랄까.

정지용의 번듯한 생가가 마치 민속촌의 그것처럼 초현실적으로 시골 한복판에 박혀있는 그 곳, 곱게 입혀진

이엉지붕 아래로 낡고 헤진 슬레이트 지붕이 보였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지 않아 깨끗하고 주름지지 않은 채

박제된 '유물'과 수십년동안 사람손타고 때묻은 채 헐벗은 60년대식 슬레이트 건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간다는 그 실개천 옆으로는 허름한 시멘트담벼락,

그리고 드문드문 녹이 슬은 다홍빛 철문이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에 연해있다.

이렇게 이쁜 간판들을 찾아 사방으로 선불맞은 멧돼지마냥 뛰어다니다가도,

어느새 이런 건물 앞에 서게 된다. 어쩌면 어떤 세대들에겐 이런 건물들이 이상화된 단정한 초가지붕보다 더욱

생생한 '향수'를 자극하는 모티브가 될지 모르겠다. 정지용이 살던 시기에도 저렇게 깔끔하고 아름답도록 잘

꾸며진 초가지붕을 얹고 있었을까 싶은 의구심도 한 몫 했는지 자꾸 이런 슬레이트 지붕들에 눈이 간다.

나중에 저런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도 깨끗하게 잘 정돈된 채 '박물화'되어 있을까.

그나마 아슬하게 서있는 전면과는 달리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의 뒷면.

그리고 80년대 향토예비군 훈련공고 내용을 적어두었을 양철판 하나가 잔뜩 녹슨 채 내걸려 있었다. 어쩌면

여긴 이미 '추억의 그 시절' 쯤 될 만한 운치를 구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본 것도 같고.

하얗게 식은 연탄재가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곳, 살짝만 걷어차도 떨어져나갈 듯한 문짝이 바람결에 철컹이는 곳.

이렇게 연탄을 잔뜩 쟁여두고 겨울을 보내던 풍경은 사실 내 어릴적만 해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향수'랄 것 떠올릴 만큼 나이를 먹지도, 상실감을 느낄 만한 풍경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초가지붕보단

저 연탄무데기에서 '향수'에 가까운 걸 느끼고 말았다.

구멍 퐁퐁 뚫린 벽돌담 위의 도둑고양이. 보통 어렸을 적엔 저런 벽돌담 위에 시멘트를 얹어선 깨진 유리병조각을

촘촘히 박아두곤 했었더랬는데.

허름한 창고, 곰표 밀가루도 취급하고 설탕도 취급한다는 곳의 시꺼먼 내부는 뭔가가 숨어있는 듯. 어렸을 적엔

학교 지하실 창고니, 저런 버려진 건물이니 어둑어둑한 곳들에 손전등 들고 친구들이랑 많이 싸돌아다녔었다.

녹슨 철문 뒤, 할머니댁같기도 하고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문과 그런 오톨도톨 시멘트 장식의 기둥.

괜시리 신발주머니를 질질질 벽에 대고 문대고 다니던 그 시절.

그러고 보니 정지용 생가에서 마주쳤던 부엌의 분위기는 얼마전 '신식 슬레이트' 지붕 얹힌 양옥으로 바뀌기

전까지 넓고 시원한 툇마루를 지키던 작은 할아버지 댁과 꼭 닮았다. 물론 좀더 퀘퀘하고, 닦이지도 않는

그을음이 온통 끼어있었지만.

정지용의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의 그 곳은, 사실 여느 머릿속 이상향들처럼 현실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그 머릿속 그림을 아무리 재현하려 노력해봐야 백인백색, 저마다 다른

그림을 그려내지 않을까. '향수'가 homesick이라기보다 nostalgia에 가까운 이유다.




#1.

고냥이님의 블로그에서 "당신과 나와의 거리는 얼마입니까?"라는 질문을 접했다. 그러게, 요새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와의 거리는 과연 얼마일까. 상대로부터 지켜질 때 심리적인 안정을 느낀다는 최소한의 거리, 사회적 거리라던가,

그 거리를 뚫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다들 너무나도 예의가 발라서인지, 아님 알게 모르게 내가 극상의 반탄강기

기술을 시전하고 있던지 간에, 표면만 살짝살짝 건드려보거나 톡톡 두들겨보는, 그 짧고 얕은 진동으로 상대의 안부를

묻는 그런 상태가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다.

뚜, 뚜우, 뚜우, 뚜, 잘 살고 있습니까. 뚜뚜, 뚜우, 뚜뚜뚜, 예(방긋). 요딴거.


내일 알제리로 출장을 떠나, 금요일에나 돌아올 예정이다. 알제리가 어디 붙어있냐 하면, 북아프리카, 프랑스의 아랫쪽,

지중해와 접한 아프리카국가. 왼쪽엔 모로코, 오른쪽엔 리비아, 리비아 오른쪽엔 이집트...


내가 알제리에 있건, 한국에 있건, 한밤중 이렇게 인터넷을 부유하건, 그 거리는 중요치 않다. 마치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가 스스로 걸었던 걸음을 세거나 계단수를 세거나 하는 것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듯, 문제는 거리 자체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의 거리에 관심이 없다는 그 사실이다.  내가 어디 붙어있냐 하면, 서울 역삼동 우리집 책상앞

의자 위, 모니터 위 점멸하는 커서 상단 주먹하나 위쯤, 알제리로 향한 비행기가 마침 뉴칼레도니아 상공을 지나..

뭐 그런 거, 질문하지 않는데 굳이 답할 수 없는 거다. 관심없다는데 말할 필요 없는 거다.


그래서, 알제리던 어디던, 내가 사람들과 느끼는 거리감이란 항상 그만큼. 어쩌면 일종의 초기값. 디폴트값.

알제리와 한국. 출장도 가기 전인데, 오늘하루 벌써 열두번쯤은 그 디폴트 거리값을 느끼고 말았다.


#2.

내일부터 알제리에 출장, 4박5일..이라지만 좁디좁은 비행기 이코노미석에서 관짝체험하는 시간을 제하면 고작 2박 3일

체류 예정이다. 노무현이 뿌려놓은 한국-알제리 경제협력 태스크 포스 합동회의. 아마 꼼짝없이 호텔 안에만 잡혀서

지낼 거 같지만, 그래도 뭔가 또 바득바득 사진도 찍고 감상도 불러일으켜볼 생각이다.


가기 전에 이집트 여행기를 완료하고 싶었고, 책 나눔도 한번 더 하고 싶었는데 막판까지 너무 정신없이 굴러갔다.

DHL로 미리 부쳤던 두 박스 중 하나가 중간에 실종되는가 하면, 인원 확정이 막판까지 되지 않아 숙소와 차량 문제가

엉망이었고-여전히 엉망이고-,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관료들의 일처리까지. 쉐라톤 알제 호텔의 수영장이 멋지다길래

혹시 몰라 수영복은 챙겨가는데, 역시 그럴 일은 없을 거다.


#3.

문제를 못 풀겠으면 잔뜩 다시 헝클어버리고 시작한다. 변수를 추가하고, 상황을 마음가는대로 꼬아버리고. (종종

그런 거친 소울이 발현되는 방식은 지극히 자기파괴적이고 시니컬하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점점 산으로.

시간 제약은 있고, 문제는 난해하고, 차라리 '친구야 미안해'라고 쓴 보드를 머리위로 번쩍 들어올리는 게 깔끔한 걸까.
 
아니면 화이트보드를 물고 차고 던지면서 스튜디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강짜를 부려야 할까.

어디 한번 어디까지 치닫나,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보자는 심보는, 묘한 쾌감과 중독적인 마력을 동반한다.


차라리 출장을 떠나서 다행이다. 요새 정약용이 이야기했던 '폐족'이라는 단어가 회자되는 모양이더만, 지금 내겐

스스로를 '폐(閉)'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문제를 잊고 머리를 식혀야 한다니, 강제적인 쿨링시스템의

가동이랄 만한 출장이 내일이다. 내일 아침 9시비행기. 밤새 부유하다가, 비행기 안에서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생각이다.




카파도키아를 떠나 지중해와 '나무 위의 집'-허클베리 핀이 살았을 법한-이 기다리는 올림포스로 향했다.

지중해의 유명한 휴양도시라는 안탈랴(Antalya)에서 머물 생각이었으나, 올림포스에 있다는 나무위의 집과

오렌지밭이 궁금했다. 카파도키아에서 올림푸스까지는 11시간, 버스비만 무려 25,000bin. 밤새도록 달리는

버스에서 친구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이스탄불까지 오는 비행기 안에서 비야누님과 그랬듯.

그리고 이어폰을 나눠낀 채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니 새벽 6시. 안탈랴에서 잠시 버벅대다가 올림포스행 차로

갈아타고 드디어 오렌지 펜션으로.

오렌지 펜션의 나무위의 집. 첫인상은 머..신기하고 색다르기도 하고 그런데, 좀 거리를 두고 보면 가건물같기도

하다. 통나무집 짓고 쓰고 남은 자재로 얼기설기 지은 게 아닌가 하고. 중간층의 더블룸을 잡고 나서는 올림포스

유적과 해변 쪽으로 나가보았다. 해변 들어갈 때 입장료를 받는다고 들었고, 실제로 옆에선 입장티켓을 끊던데...

난 걍 들어갈 수 있었다. 절대 꼼수를 쓰거나 비비적대며 사람들 틈에 묻어 들어간 건 아니다.

지중해. 정말 파란 바다와 물밑 자갈들의 반짝거림. 잠시 갈등하다 이내 팬티만 남기고 바다로 입수.

어찌나 좋던지.

걍 암 생각없이 멍하니 파도만 바라보다 바닷가에 누워 낮잠을 즐겼다.

노느라 정작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던 건...최소한 지중해의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건 아쉽기 짝이 없다는..

점심 때 수박하고 빵을 양껏 먹었는지라 별로 배는 안 고팠고, 맛난 요구르트를 후식삼아 한끼를 해결하고는

친구와 맥주 한병씩. 지치도록 바닷가를 거닐며 이야기하고 '가건물'로 돌아왔다. 아침, 점심, 저녁...빵에

고등어를 집어넣거나, 양고기를 넣거나, 혹은 치킨을 넣거나 하는 식으로 그렇게 삼시세끼를 해치웠더랬다.

머 먹는 거라면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튼튼한 위와 비위좋은 미감을 감사할 뿐. 터키의 수도물과

이집트의 수도물 역시 내 위장을 비틀어대지는 못했으니.ㅋ


다음날 눈뜨자마자 샤워를 하고, 역시나 전통적인 터키의 아침. 걍 과일과 빵. 늘 그렇듯 맛있게 먹고 설탕 듬뿍한

애플티를 석잔. 오전에 좀더 거닐다가 안탈랴로 다시 빽.


지중해의 풍토란 건 그전에 보았던 이스탄불이나 카파도키아랑은 영 다른, 그런 햇빛과 분위기가 있었다.

휴양도시라서 그런지 유로화가 많이 쓰이고, 물어물어 찾은 Lase Pension에 4$짜리 돔베드를 잡고 바로 나서선

골목골목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목걸이, 팔찌, 귀걸이 같은 온갖 장신구에, 장식품에, 특이한 문양의 헤나며

타투까지 아이쇼핑하기 너무도 좋았던 그 뒷골목들. 생오렌지를 갈아만든 주스도 사마시며 올림푸스와 비슷하게

휴양하는 기분으로 다니는 게 조금 처지는 건 아닌지 싶기도 했지만, 카라알리올루 공원서 본 퍼어런 바다색과 그

율동감을 넋놓고 바라보면서...그냥 맘을 놓아버렸다.


코에 피어싱을 고민하는 친구를 부추기기도 하고, 오렌지주스맛을 못 잊어 다시 大자로 사먹으며 케밥먹고, 저녁

해가 어슴푸레해진 안탈랴의 구시가를 거닐었다. 밤바다를 바라보며 철푸덕 자리잡았던 카리알리공원 명당자리서

돈계산을 한번 해보곤, 딱 액수가 맞음을 핑계로 쐈던 Efes Dark 두어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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