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은 위기감 없이, 표를 얻기 위해 '오른쪽'으로 가겠다며 김칫국부터 마시며 자리 나눠먹기 중이고,

 

통합진보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구호를 내버린 채 대중정당이 되겠다고 나섰다가 자멸 중이고,

 

새누리당과 박근혜와 이명박은 꽃놀이패를 쥐고 즐기는 참이고.

 

 

그 와중에 홍세화 당대표가 '전태일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태일의 집'을 전국에 짓자는 제안을 해왔다.

 

문득, 총선에서의 패배를 예감했던 4월의 어느날 이래 멎어있던 심장이 뛰었다. 두근. 전태일당이라니.

 

5월 총선 이후 그가 침통하고 분루를 삼키던 사진이 숙제처럼 컴퓨터에 저장만 되어있다가, 이제야 올린다.

 

 

 

 

우리는 기어이 되돌아가야 한다

 

-왜 다시 전태일을 호명해야 하는가-

 

 

 

 

나는 왜 쓰는가? ― 4년 전의 글을 다시 꺼내 읽으며

 

 

일주일 전쯤, 20대의 한 청년 당원이 들려준 이야기 하나가 이 글을 시작하려는 지금 다시 내 마음을 짓누른다. 동네 가게 주인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고 했다. “선거 때 표 찍어달라고 열심히 다니던데, 그런 정당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앞날이나 잘 챙기라”고. 짐짓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아버지뻘의 가게 주인에게 “그 당은 제가 속한 당이 아니”라며 설명하려는데 억울하고 목이 메여 눈물이 핑 돌더라는 얘기였다. 선거에 패배하여 이제는 그 이름조차 기억 속에 묻어야 하는 당을 변명해야 했던 그 청년 당원 앞에서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4년 전에 쓴 글을 다시 꺼내 읽는다. 그것은 2008년 2월 13일 민주노동당을 떠나며 남겼던 글이다. “민주노동당 당원 번호 ‘25994’는 이제 주인이 없다”로 시작하는 그 글에서 나는 “민주노동당에 민중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오직 요란한 구호의 장식품이었을 뿐, 오로지 배제 행위에 의한 권력 싸움만 남은 자아팽창자들의 권력의지의 전시장이라고 썼다. 나는 그 글의 말미에 이렇게도 썼다. 기어이 다시 참여할 것이라고...그래서 진보신당 평당원으로 3년 반을 채울 즈음, 당 대표를 지낸 이른바 명망가들이 당 대회의 결정에 아랑곳없이 떠나는 것을 보아야했다. 그리하여 한낱 서생에 자족해온 내가 그 빈자리에 올라 어울리지 않은 직책의 무게에 허덕이며 오늘에 이른 셈이다.

나는 이제 다시 쓴다. 지난 총선에서 당의 존립을 지키지 못한 패장으로서, 그러나 분노보다는 슬픔으로, 슬픔보다는 쓸쓸함으로 이 글을 쓴다. 그것은 위장전입과 당비 대납, 대리투표와 비례대표 독식 등 4년 전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몰염치와 오늘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몰염치가 한 치의 오치도 없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한 데서 온 것이 아니다. 내가 4년 전 그 글을 썼을 때, 그리고 그 글이 이른바 당을 장악한 종북 편향의 패권주의자들에게 알량한 쁘띠의 ‘유럽사대주의’의 발현으로 읽혀졌을 때, 이미 나는 그들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접었다.

 

나는 ‘진보대통합’에 대해 어떤 통합이냐고 묻는 동지들을 ‘고립주의 독자파’로 몰아붙이고 주저 없이 떠난 이들에게 묻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국민참여당을 포함한 3당 통합이 ‘노무현과 전태일의 만남’이라고 정의될 때 노무현 시대가 노동하는 인간에게 어떤 시대였는지 기억하는 노동자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배타적 지지’를 강행했던 조직노동의 대표자들에게 묻기 위해, 그리고 진보정치가 통합진보당의 독점물이 되도록 여론 몰이에 앞장선 한겨레를 포함한 이른바 진보매체들이 이제서 이 당의 비례대표경선 부정에 새삼스레 경악하며 집중포화를 퍼붓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 묻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정말 이제 비로소 알았다는 것인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가 실현되는 지점까지만 진정으로 ‘자유주의적’이 되고 ‘개혁적’이 되는 국민참여당 출신들의 반응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탈당도 불사하겠다는 민주노총은 무엇을 용인할 수 없고 또 어디까지는 용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분당은 절대 없다. (통합)진보당이 진보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이전의 진보신당 대표이자 오늘의 통합진보당 대표인 여성 정치인은 왜 4년 전엔 분당을 결단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분단의 질곡이 보수를 왜곡시켜 극우의 품에서 사익을 추구하게 했듯이, 본디 보수인 민족자주세력이 패권주의를 통해 주류 종파가 되었고 이들의 뭉뚱그려진 헤게모니 아래 이른바 진보주의자들과 노동조직까지 실리를 챙기려 했던 공모의 결과물이 통합진보당의 실체 아니었던가. 막무가내로 패권을 휘두른 이른바 당권파들이 차라리 단순한 편이라면, 그들이 그토록 막무가내가 될 때까지 침묵하고 방관하고 용인하다가 마침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서는 사람들은 복잡한 편이다. 이제서 당권파들을 제물 삼아 몰아세우며 스스로 정의의 편에 서있음을 입증하고자 목소리를 높이는 지식인들...왜 그 예민한 지성의 분개는 사태의 본질이 감추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 늘 퇴각하는 권력에 대해서만 가혹하게 작동할까? 차라리 몰랐다면 진솔한 자기고백이 필요할 뿐, 대중의 분노 뒤에 숨어 자신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려는 욕구는 자제했을 터이다.

 

아마도 4년 전과 오늘이 다른 게 있다면 한 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명분을 필요로 했던 자유주의자들까지 끌어들여 키우고자 했던 파이(권력)의 크기가 커졌다는 점이다. 짐작컨대, 13개의 숫자로 불어난 권력이 지나치게 한편에 치우쳐 작금의 갈등이 촉발되었다면, 그 권력을 다시 어떻게 배분하는가에 대한 합의에 따라 갈등이 봉합될 것이라 전망할 수 있겠다.

 

롤랑 바르트가 그랬던가? ‘좌파(여기서는 문맥상 ’진보‘라 하는 게 맞겠다)의 신화’는 그것이 실제의 혁명과는 무관해지는 순간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그런데 권력정치로 변질된 진보가 여전히 혁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권력의지를 그 속에 감추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진리’라 ‘법칙’이라 ‘섭리’라 ‘운명’이라 왜곡하기 시작하는 이 순간은 동시에 이 신화의 수명이 파국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과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역사마저 비틀어버린 불행한 동거의 파국은 예상보다 빠르게 왔어도, 권력정치의 레일에서 열차가 이탈해 완전히 전복되기 전까지 그들의 현란한 정치공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다시 부르기 위하여

 

사람들의 뇌리에서 차츰 잊혀져갈 진보신당을 옹호하기 위해 목 메이던 청년 당원의 눈동자 속에 어른거리던 열정 때문에 차마 못했던 말을 이제는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한국에서 진보는 죽었다. 진보라는 말에 담겨 있던 아름다운 인간의 가치들은 그 가치들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한 권력에만 관심을 갖는 자들에 의해, 진보정치를 현실적 실리와 명분이라는 ‘떡’을 양손에 쥐고자 했던 자들과 더불어 사망선고를 받았다. 진보신당 또한 죽었다. 권력정치와 다른 길을 걷고자 했던 우리의 안간힘 역시 참담히 패배했다. 진보정치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던 성장주의와 결별하고자 했으나 새로운 진보의 가치를 제대로 일구어내지 못한 우리들 역시 사망선고를 받았다.

 

젊은 벗이여, 이제는 서둘러 낡고 병든 진보(정치)의 신화를 우리 자신의 손으로 땅속에 묻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들 자신에게도 권력정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면 그것도 함께. 이 진보의 장례식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땅 속에 내려간 진보의 죽음이 지금과는 다른 인간다운 가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정치의 씨앗으로 되살아나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오늘의 참담과 추악과 왜곡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이 쓸쓸한 봄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읽는다. 오웰 스스로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책’이라 했던 이 빼어난 르포르타주는 자신이 직접 참여했던 스페인 내전의 정치드라마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을 증언한 고발서의 의미를 갖는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스페인 인민의 열망 편에 서려고 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소련-스페인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연합세력들에 의해 어떻게 배제되고 억압당하고 끝내는 죽음을 당했는지를 증언하는 책이다. 이 책보다 먼저 발표된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는 에세이에서 소비에트를 등에 업은 스페인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연합의 정치적 논리는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너무 따질 것이 아니라 함께 파시즘에 맞서 싸울 때”라는 것이었다. 그 논리 아래 인민 민주주의 지향은 부르주와 민주주의에 의해 차단되었다. 스페인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식견이 너무 ‘오른쪽’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왼쪽’이어서” 처형당했다.

 

너무 먼 역사이야기인가? 한 가지만 덧붙이자.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 오웰의 책은 소비에트와 연결된 자신의 이해를 실리적으로 계산하는 영국의 좌파 지식인들과 언론들, 심지어 출판사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 한 세기 전의 상황이 2012년 한국과 너무 닮아 나는 현기증을 느낀다.

 

이렇게 ‘배신당한 혁명’으로 프랑코 독재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파시스트들에게 쫓겨 스페인의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나는 1980년대 파리에서의 망명시절 국제엠네스티 프랑스 지부에서 일하던 스페인 출신 2세 한 여성을 알고 지냈다. 스페인에서 쫓겨 온 그녀의 부모세대들은 그 무렵 이미 힘없는 노인이 되어 있었고 하나 둘씩 남의 땅에서 눈을 감았다. 동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백발의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래, 우리 삶은 실패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나는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그들은 끝까지 권력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카탈로니아 찬가』는 고발서라기보다 제목 그대로 ‘찬가’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여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인간들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기억하기 위해 오웰은 그것을 망각 속으로 밀어낸 권력정치의 드라마를 고발했던 것이다.

 

나는 왜 쓰는가? 턱없이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이같이 불편한 글을. “대여섯 살부터 작가가 되리란 걸 알았다”는 탁월한 작가 오웰과 달리 내게 글쓰기는 언제나 고된 짐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왜 쓰는가? 우리에게도 분명 존재했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되찾고 싶어서다. 그 노래를 한 번 함께 불러보고 싶어서다.

 

오늘의 절망스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정당운동의 첫걸음이 지금과는 다른 인간의 미래를 앞당기려는 희망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언제부터 우리는 길을 잃게 되었을까?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언제 눈앞에 어른거리는 권력에 대한 현실적 욕망으로 뒤바뀌고 진보정치가 권력정치의 주술에 갇히게 되었을까?

 

올해로 귀국한 지 꼭 10년이다. 진보정당 당원으로 살아온 시간과도 고스란히 겹쳐지는 이 10년 동안 내가 가장 빈번히 들었던 것은 “세상을 바꾸려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유로 세상을 바꾸기도 전에 사람들이 어떻게 먼저 바뀌는지를 줄곧 지켜봐왔다. 그리고 진보정치와 조직노동이 스스로를 ‘민중권력’이라 강변하던 그 시간은 권력과 자본에 의해서는 물론이고 그들에게조차 외면당하고 배제된 노동자들의 숫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넘어선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나는 왜 쓰는가?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되려고 인간의 고통과 시간을 건너뛰어 자유주의-진보주의 연합을 이룩한 저들의 허위와 몰락을 증언하기 위해 쓴다. 그리하여 정작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기 위해.

 

 

 

돌아가야 한다, 기어이 되돌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머물러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는 아직 이 노래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알지 못한다. 이 구절을 외는 것만으로 인간의 숭고함 속으로 성큼 다가가는 것 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중졸도 안 되는, 기껏해야 지상에서 누린 지위가 봉제공장 재단사 보조밖에 안 되는 스물셋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겨준 노래...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가 쓴 「베를린에서 전태일을 보았다」는 제목의 시에는 제목 외에 전태일은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시의 연이 바뀔 때마다 80페니히의 가격이 매겨진 건포도빵, 1마르크 20페니히의 출근길 맥주, 장벽이 무너진 베를린광장 앞에서 파는 5마르크의 기념품, 4마르크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는 ‘눈동자 없는 눈’을 지닌 신들의 전시실 같은 풍경들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건 다름 아닌 노동하는 인간들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까지 완벽히 삼켜버린 물신의 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사물을 넘어 살아있는 인간 모두에게 가격을 매겨놓은 물신의 세계가 펼쳐놓는 매끄러운 스크린 위에 모든 것들은 풍경으로 존재할 뿐. 전태일이 그림자로서나 어른거릴 뿐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장막을 찢지 않고선 그도, 그가 사랑으로 껴안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아픔도 볼 수 없다. 이 물신의 세계에 파열을 내지 못하는, 그저 권력정치에 포섭된 노동조직이 전태일을 실체 없는 유령으로 만드는 까닭이다. 유령이 된 전태일이 노무현을, 나아가 박정희 체제가 만들어놓은 자본과 권력, 이들과 만나지 못할 까닭도 없다.

 

지난 반 년 동안 기꺼이 나의 글의 첫 독자가 되어준 진보신당 당원 동지들, 그리고 젊은 벗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께 간곡한 제안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우리가 재창당할 당의 이름을 <전태일당>으로 하자고. 그리고 <전태일의 집> 운동으로 오늘 권력정치에 질식당한 진보좌파운동의 새로운 길 찾기를 하자고.

 

좌파정당의 이름으론 낯선가? 전태일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사유화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전태일당>과 <전태일의 집>은 ‘망자亡者와의 연대’이며 배제당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에게 다가가 부둥켜안기 위해 물신의 세계에 저항하며 싸우는 정당의 정신을 당당히 선언하는 이름이다. 이것은 통합진보당이라는 당명으로 우리를 침탈한 데 머물지 않고 등록취소가 되자마자 곧 진보당으로 바꾸겠다는 저들에게 응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약속하기 위함이다. 전태일 자신이 그랬듯이.

 

절망할 일로 가득 찼을 스물셋 봉제노동자가 “우리에게는 희망함이 너무 적다”고 탄식했을 때 그 희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돌아가기 위해’ 죽음도 무릅써야 했던, 그리하여 기어이 그가 만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태일은 버림받고 감추어진 자들을 부둥켜안으려는 사랑이고 만남의 정신이었다. 연대는 내게 넘치는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부족한 걸 떼어주는 것이다. 늘 배고픈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나눠주기 위해 버스비를 아껴 수유리에서 청계천 평화시장까지 뚜벅뚜벅 걸어가던 전태일의 발걸음을 정의하는 말이다.

 

진보신당 대표가 되어, 지금도 어색하기만한 옷을 입고 주로 했던 일은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정리해고 반대’ ‘비정규직 철폐’, 이런 구호들 속에서 나는 ‘연대’라는 말만 들으면 늘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무력감과 미안함,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란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말일까? 단지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걸 의미하는가? 그것은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것도 두 번 버림받은. 한 번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그리고 다음에는 정규직 노동조직에 의해.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인 현실에 대해, 그들의 노조가입조차 배제된 현실에 대해 침묵하면서 외치는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는 공허할 뿐이다. 정규직 노동조직 자신이 배제한 비정규직의 존재를 자본과 권력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은 염치없는 정치적 알리바이 아닌가.

 

우리가 오늘 전태일을 다시 호명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시대의 노동현실에 가로놓인 이 이중의 배제구조를 외면하고 외치는 노동정치에 대해 이제는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이 허위의 현실에 안주해온 죽은 진보를 이제 땅 속에 묻고,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어이 전태일로 되돌아가야 한다.

 

남도의 끝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 매달린 절망에 연대하기 위해 달려간 버스에 ‘희망’이란 말이 붙은 것을 나는 기적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희망함이 너무 적다는 전태일의 탄식에 대한 응답이고, 그리하여 죽은 전태일이 죽음을 무릅쓰려는 김진숙을 살려낸 기적이다. 김진숙의 기록 『소금꽃나무』는 내가 읽기에 ‘망자와의 연대’이다. 크레인 위에서 떨어져 죽어간 동료로부터 달아나지 못하고 기어이 크레인 위로 올라갔던 그녀가 희망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부활은 기적을 통하지 않고선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지금 진보의 죽음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 기적 아닌가? 이제 우리가 만들 당의 이름이 전태일, 그의 이름이면 안 되는가? 우리의 당의 정신이 온통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정신인 그의 정신이면 안 되는가? 평생 집이 없었던 그의 이름으로 집을 짓고 배제되고 쫓겨나고 상처받은 노동자들이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게 하는 일에 전력하는 일, 그게 새로운 정당운동이면 안 되는가?

 

오늘의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며 그것이 우리가 아직 여기에 남아 있는 존재이유라고 자위해선 안 된다. 우리 자신은 검게 드리운 권력 정치의 그림자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일까? 진보정당이란 몸통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던 우리들은 과연 민중의 고통을 따라 움직이고 눈물 흘릴 줄 아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설움 받는 평화시장 어린 동심을 지켜보던 그의 눈을 닮은.

 

진보신당을 변명하며 목 메이던 젊은 벗에게 송경동 시인의 시 한편 발췌해 남긴다. 이것이 내가 말한 ‘망자와의 연대’의 의미이다.

 

 

“경기대에서 「조국은 하나다」/ 육성시낭송 듣고도 울지 않고/ (……)/ 불 꺼진 취조실마냥 어둡던 망월동/ 그의 하관을 보면서도 이 악물었는데// 그를 묻고 돌아온 서울/ 심야버스 타고 마포대교를 건너다/ 다리 난간에 덜덜거리는 허리 받치고/ 헤머드릴로 아스팔트 까며 야간일 하는/ 늙은 노동자들을 본 순간/ 이 악물며 울고 말았다/ 그가 간 것보다 그가 사랑했던 한 사내가/ 저물어가는 것이 서러웠다”

―송경동의 시, 「김남주를 묻던 날」

 

 

 

 

 

* 지금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며 생각난 예전 홍세화 대표님의 글


 

 

[세상 읽기] 김진숙과 김세균 / 한정숙
정년을 1년 앞둔 김세균 교수가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김진숙씨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한겨레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정년을 1년 앞둔 김세균 교수가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김진숙씨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각보다 자그마했다. 호리호리해서 가냘프기까지 해 보였다. ‘85호 크레인의 여인’ 김진숙씨가 진분홍빛 스카프를 역삼각형으로 두르고 대학생들을 위한 강연 단상에 섰을 때 내가 받은 첫인상이었다. 전투적으로 활짝 웃는 사진이 주곤 했던 강인하고 억세 보이는 이미지는 실제 모습과 다른 것 같았다. 푸른 스웨터 색깔 때문에, 그녀를 수국꽃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 대중운동가에게는 최적의 자산일 맑고 힘찬 그녀의 목소리는 그런 생각들을 날려버리기에 족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멋있는 목소리로, 그렇게 감동적으로, 그렇게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강연을 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김진숙씨는 쉼 없이 흔들리는, 지상 35m 높이의 크레인 조종실에서 보낸 계절과 나날에 대해 말했다. 땅에 내려왔을 때는 멀미를 했고 토했고 계속 땅에 부딪혔고 위장이 아파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요컨대 그녀는 일상생활을 모두 잊고 잃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살아 내려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까마득한 높이로 발길을 디뎠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촉구하기 위해 크레인에 오르기 전에 그녀는 신변정리를 마쳤다. 그 높고 어지러운 곳에 올라 309일을 보내면서 그녀는 생사를 넘어서 있었으리라.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결코 죽음을 허투루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그저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아득하게만 보였으리라. 그런 그녀에게 용기와 희망을 되돌려준 것이 희망버스였다. 그녀는 희망버스에서 ‘눈이 맞은’ 뒤 크레인을 다시 찾아와 그 아래서 사랑의 언약을 맺은 청춘남녀 이야기를 했다. 내려다보는 그녀에게도 펄떡이는 삶의 의지가 전해졌으리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희망버스 덕에 그녀는 살아서 크레인 아래로 내려왔고, 해고노동자들도 복직할 수 있었다.

 

김진숙씨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이 겪고 있는 형극의 아픔에 대해서도 말했다. 듣는 사람들은 자연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위해서도 희망버스가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고. 쌍용차 사태가 덧내고 있는 깊은 사회적 상처와, 그래도 파국을 면하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귀결된 한진중공업 사태를 비교한다면 자본과 권력은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기여한 희망버스에 진작에 훈장이라도 주며 치하했어야 하리라.

 

김세균 교수는 정치학자다. 형님인 고 김진균 교수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진보적 사회과학 학술운동을 이끌어왔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20년 이상 재직하였고, 이제 정년을 1년 앞두고 있다. 그러한 그가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희망버스에 올라 김진숙씨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1차 희망버스를 타고 영도에 갔을 때 한진중공업 구내로 들어가 크레인에 접근했던 사람 중 하나다. 검찰이 무단침입죄로 기소했고 법원에서는 벌금 200만원을 부과했다. 교과부가 이를 빌미로 그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는 것이다.

 

서울대 법인화법이 통과된 뒤에도, 정년을 눈앞에 둔 김 교수는 신분 전환을 하지 않고 교육공무원으로 남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법인화법이 통과되자마자 교과부가 상급기관임을 내세워 스스로 교수 징계권을 행사하려고 한다니, 국립대 법인화가 진보적 교수들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추진된 것이라는 일부의 추측이 현실이 되고 있다. 원로교수를 이런 식으로 모욕하는 것은 야만이고 비열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35m 높이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희망버스를 탄 사람, 그들이 지닌 깊은 인간애를 이해할 영혼이 징계 추진자들에게는 없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올해의 인물로 안철수니 박원순이니, 김어준이니 하는 많은 이름들이 거명되지만 내겐 단연 그녀다. 김진숙.

영도조선소 75호 크레인, 소금꽃나무,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회, 그리고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도되었던 연대의 방식까지. 그녀는 2011년의 열쇳말들을 응축시킨 하나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미 그녀의 동료와 동지가 죽어갔던 그 크레인 위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벌이며 끝내 살아 내려온 그녀가

희망버스라는 형태로 연대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관심을 갖고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고 해서

잠시 읽어보다가 울컥하고 말았다. 희망버스라는 방식, 그리고 나꼼수 등 기타의 방식에 대한 유보적이고 회의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버스가 가진 가장 큰 힘은 각자 다른 깃발을 들고도 한 버스에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연말이라고 모든 걸 용서하고 내년엔 만사가 형통하고 잘 될 듯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냉정한 자세로 올 한해가 남긴 문제들을 되짚어보고 계속 이어가야 할 싸움들을 떠올려 보는 게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기사 내용)


희망버스가 오지 않았다면 난…
이름모를 그대들, 고맙습니다

한국사회 올해의 인물
김진숙

목숨 하나 살려야 한다는 그 애절함들이 만든 기적 누가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한겨레
» 김진숙씨가 지난 21일 저녁 부산구치소 앞에서 열린 송경동 시인 등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목도리를 다시 매고 있다. 크레인 농성 중 트위터로 친구가 된 ‘영도희야’씨가 김진숙씨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다. 부산/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는 ‘올해의 인물’로 309일간 고공 크레인 농성을 통해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연대의 소중함을 일깨운 김진숙씨를 선정했다. 그를 만나러 부산에 갔던 ‘희망버스’는 올해 한국 사회가 길어올린 가장 값진 성과물 중 하나다. 김진숙씨가 309일의 크레인농성을 되돌아보고 희망버스 탑승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글을 보내왔다. 국내 분야별 ‘올해의 인물’은 10면에서 만날 수 있다.


영도 바람은 유명하다. 일명 똥바람. 크레인은 24시간 흔들렸고, 바람이 심한 날은 토하기를 여러번.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난 어느날, 거짓말처럼 바람멀미가 멈췄다.


걱정하고 응원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눈물 속에 크레인을 내려와선 땅멀미에 시달렸다. 흔들리는 땅, 갑자기 커진 사람들. 멀찍이만 보이던 사물과 차들이 눈앞에서 번잡을 떠는 어지러움. 이번엔 땅 위에서 토했다. 땅멀미가 웬만큼 가라앉자 방향감각이 문제가 됐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법도, 계산하는 법도 새로 익혀야 했다. 그러면서 비로소 309일이 만만한 시간들이 아니었음을 깨달아 가고 있다.


힘든 날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 날은 크레인 위에 심은 상추, 치커리, 딸기, 방울토마토. 파르르 떠는 그 어린 것들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니들도 힘들지?”


추워서 힘들지 않으냐고, 이 더위를 쇳덩이 위에서 어떻게 견디냐고 사람들은 걱정하고 또 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건 사람으로부터 왔다. 끊임없는 강제침탈의 시도들, 한진 자본은 85크레인만 끌어낼 수 있으면 정리해고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자고 나면 불거지던 공권력 투입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구체화되더니 특공대가 84호 크레인을 면밀히 정찰하고 가는 걸로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런 움직임들이 트위터를 통해 알려지고, <알자지라>를 시작으로 외신들의 보도가 이어졌다.


‘공’권력으로는 더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동원된 게 ‘사’권력이었다. 6월27일. 공권력의 힘을 빌려 조합원들을 쫓아내고 크레인을 완벽히 접수한 용역들. 그날부터는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크레인을 둘러싼 용역들은 시도 때도 없이 크레인으로 뛰어올라왔고, 그게 여의치 않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리기 위해 크레인을 바닷가 쪽으로 끌고 가려는 작전이 매일매일 새롭게 펼쳐졌다. 크레인의 전기는 물론 주변의 전기까지 다 끊어진 깜깜절벽. 몸을 던지겠다는 의사를 행동으로 표현하는 걸로 저들의 시도를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그만 끝내고 싶은 유혹들.



그때마다 천사가 파견한 듯한 사람들이 왔다. 서울에서, 인천에서, 수원에서, 대전에서, 광주에서, 전주에서, 목포에서, 청주에서, 충주에서, 마산에서, 울산에서, 진해에서, 제주에서, 독일에서, 영국에서, 핀란드에서, 일본에서, 홍콩에서…. 그 먼 곳에서 달려와 온종일, 혹은 며칠씩 크레인만 바라보던 사람들,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크레인을 바라보며 밤을 새우던 사람들, 매일 저녁 백배서원을 올리던 사람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이 잉태한 웃음은 희망버스라는 기적을 낳았다. 희망버스가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희망버스가 한번으로 그쳤다면 2003년의 상황은 반복되었을 것이다.


1월6일 새벽, 크레인에 오르던 순간, 이미 삶과 죽음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강제침탈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내가 크레인에서 몸을 던지겠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저들은 바로 3, 4도크에 그물을 쳤다. ‘사람 목숨 하나쯤이야’ 할수록 그 목숨 하나를 살려야 한다는 애절함들. 그 애절함으로 만들어낸 희망버스. 희망버스의 모습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1차 750명이 2차에선 1만명이 되리라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사람의 얼굴을 겨냥해 뿌려대던 최루액, 색소 섞은 물대포, 그리고 무차별적인 연행과 폭력. 저들도 두려웠던 것이다.


무참할수록 시간의 흐름은 더디다. 그 길었던 밤과 새벽들, 어둠이 주던 공포, 누우면 몸을 펼 수도 없었던 춥고 작은 공간, 아홉 걸음이면 허공에 닿던 좁고 위태로운 난간. 그 좁은 곳에서 일어난 일상치곤 너무나 다양했던 시간들. 매일매일 시시각각이 달랐던 309일. 아무 기약이 없었던 크레인에서 기다림을 가르쳐준 희망버스. 쇳덩어리 위에서도 푸른 잎을 키워낸 바람과 햇살들.


내가 반평생을 싸웠듯 앞으로도 싸움은 이어질 것이다. 해고자들은 복직을 기다리고 있고, 저들은 민주노조를 무력화시킬 복수노조를 꿈꾼다. 재능, 쌍용자동차, 전북고속, 강정 등 희망을 기다리는 곳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희망버스를 탔던 우리 스스로 놀랐듯이 우린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희망버스가 가진 가장 큰 힘은 각자 다른 깃발을 들고도 한 버스에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송경동, 정진우가 출감하는 날, 맘껏 소리지르며 승리를 기뻐하자. 그리고 또다른 승리를 위해 희망을 싣고 달려보자.

 

 

2011년 12월22일 김진숙





"그래도 희망은 있다!"

[손문상의 그림세상] 2011, 김진숙 그리고 희망 연대 (프레시안)

 


그래도 희망은 있다. 란 말이 참 절실하게 다가오는 순간.

세상이고 사람이고 다 염증이 나서 나몰라라 하고 눈감고 살테다 맘을 먹었다가도.

그래도.



"합동 장례식의 참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프레시안, 8/18)

18일 열리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한진중공업 청문회를 앞두고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220일 넘게 고공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편지글을 보내왔다. 김 지도위원이 자필로 작성해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보낸 편지글을 전문 공개한다. 편집자.

*                                                            *                                                        *

두 달째 전기가 끊어진 깜깜절벽 크레인위에서 랜턴 불빛에 의지해 이 글을 씁니다.

일요일날 자정이 다된 시간, 8차선 도로 건너편 인도에는 30여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오늘밤도 모기에 뜯기며 노숙을 하겠지요. 저들 중에는 이 크레인 중간 지점에 올라와 있는 해고 노동자의 아이들과 부인들도 있습니다.

이 염천더위에 가마솥처럼 달궈진 크레인위에서 가족들의 생존을 지키겠다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비가 오면 물위에서 밤을 지새우는 가장을 지켜보는 마음이 어떨까요.

저분들 중에는 서울에서 오셔서 주말을 길에서 보낸 분도 계시고 세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대전에서 오셔서 노숙을 하는 분도 계십니다. 제가 모르는 분들입니다. 사람이 있다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오신 분들입니다.

저분들을 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하는 분들이 저분들만큼의 애틋함이 있었다면 저분들만큼의 측은지심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정리해고가 막무가내로 자행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노동과 세계(이명익)


희망버스가 처음 오던 날이 제가 크레인에 오른 지 157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어떤 언론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야당 국회의원 서너분이 다녀가신 정도였습니다. 고립된 채 절망했고 그때마다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희망버스가 3차까지 이어지자 비로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게 됐고 마침내 국회청문회까지 열리게 됐습니다.

사회의 무관심 속에 쌍용차에선 정리해고 이후 15명이 죽었고, 한진중공업에서도 2003년 두 사람이 생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3년도에도 650명의 대규모 구조정이 있었고 거기 반발한 노조가 2년을 싸웠습니다. 당시 김주익 지회장이 이 85호 크레인에 129일을 매달려 있었습니다. 회사는 물론 언론도, 정치권도 그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냉대속에 129일 만에 밥을 매달아 올렸던 밧줄에 목을 맸습니다. 지회장의 시신은 2주가 넘도록 이 크레인을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사측의 어떤 조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5일 만에 곽재규라는 노동자가 또다시 목숨을 끊고 나서야 합의가 이루어졌고 한사람의 시신은 크레인에서 내려오고 또 한사람의 시신은 도크바닥에서 끌어 올리는 기가 막힌 합동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스물 한 살 청춘시절에 같은 공장에서 만나 거의 매일 얼굴 보며 같은 꿈을 꿨던 사람들입니다. 여름이면 온몸에 땀띠가 돋고 땀으로 안전화가 질퍽거리는 고단한 노동을 하면서도 그 사람들이 있어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질풍노도 같은 시절을 옛말삼아 얘기하며 좀 달라진 세상에서 같이 늙어갈 수 있을거라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두 사람을 한꺼번에 땅에 묻고 돌아온 날 밤, 보일러는 올리기 위해 무심코 스위치에 손을 대다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묻은 손으로 저만 살겠다고 보일러를 켜는가. 차가운 땅바닥에 20년지기 두 사람들 묻고 저만 따뜻하게 살겠다고 보일러를 켜는 나도 인간인가. 그 후로 8년 동안 단 한번도 보일러를 켜지 못했고 크레인에 올라오기 전날 밤 처음으로 따뜻한 방에서 잤습니다.

2010년, 회사는 다시 432명의 정리해고를 통보했고 조합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구조조정 중단에 노사합의 했습니다. 그리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400명의 정리해고를 다시 통보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정규직들은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하청노동자들은 찍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이 공장에서 3000명 가까이 일자릴 잃었습니다.

왜 막대한 흑자가 난 기업에서 그 흑자를 만들어낸 노동자들만 고통 받아야 하는지 꼭 밝혀주십시오. 경영진들은 경영실패의 책임은커녕 주식배당금에 현금배당에 연봉까지 인상시킨 기업에서 왜 노동자들만 거듭되는 정리해고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반드시 밝혀주십시오.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의하더라도 조합원들의 노조사무실 출입이 허용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역들을 동원해 출입을 막는 회사에 대해서도 밝혀주십시오. 쌍용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저항하여 외쳤던 구호가 '해고는 살인이다'였습니다. 그 비극이 한진에서 되풀이 되지 않도록, 2003년 합동 장례식을 치렀던 그 참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는 일하고 싶다."

해고된 조합원들이 공장안에 있을 때 누군가 크레인 밑에 써놓고 간 구호입니다. 우리 조합원들 일하게 해주십시오. 9개월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거리를 헤매는 우리 조합원들 가정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환노위 국회 의원님들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광복절 66주년 85호크레인
222일차 새벽을 맞으며 김진숙 올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2차 희망버스를 다녀와서 느꼈던 것 중 하나. 자칫, 과거의 촛불집회가 그랬듯 '광장에서의 카타르시스'로

끝나는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이벤트로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모인 사람들은 희망버스를

타며 '봉사활동', 혹은 벼랑 끝의 목숨인 김진숙을 구하러 가는 '구조활동'으로 생각한 걸까, 아니면 정말

자기 스스로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가는 건지. 그 '희망버스'가 그런 생각들을 표출, 발전시킬 수 있을지도.


촛불집회를 꺾었던 건, 막아선 경찰 앞에서 '폭력/비폭력'을 운위하며 스스로 동력과 가능성을 소모해버린

대중의 두려움, 그리고 어느 정도 기존 편견에 기댄 '시위꾼'들에 대한 염증에 따른 정당/시민단체 등 운동

지도세력에 대한 불인정. 그 두가지 아니었을까. 희망버스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던 것 같다. 185대에 자발적으로 타고온 사람들이니만치 나름의 의견, 입장은 있을 테고 존중하지만 .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이야기가, 그저 듣기 쉽고 편한 이야기만 하다 끝내자는 이야기와 같지는 않다.

지금껏 진보진영의 세력들이 대중과 유리되어왔다는 비판이, 그들이 갖고 있는 견해와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 같지는 않다. '시민'의 자발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지도부'의 존재와 모순되는 것은 분명

아닌데, 누구 하나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는다.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을지 모른다.


지도부가 없고 모두가 주체라는 말은, 뒤집으면 정제된 정체성이 없다는 말과 같다. 백인백색의 주장만이

난무할 뿐 요구사항과 승리조건을 정돈해서 내밀지도 못하는 모래알같은 군중이란 말과도 같다는 말이다.

차벽이 막았을 때 돌파할지 말지의 문제는, 스스로의 법을 무시하며 초법적으로 군림하려 드는 국가권력에

저항할지 말지의 문제였다. 폭력/비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저항의 문제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불편하고, 어렵고,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문은 터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여기 왜 모였습니까. 어떤 점이 당신을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앞으로 이끌었습니까. 무엇이 달성되면 돌아가겠습니까. 장애인과 동성애자와 두리반,

유성기업, 콜트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저항'이, '분노'가 향한 끝은 어디입니까.

그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비슷한 생각을 써낸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



*                                                               *                                                            *

연대의 희망버스, '촛불판 명박산성' 넘을까(미디어오늘)


희망버스와 '광우병 촛불집회', 불평등·불공정의 '차벽' 넘어 희망 홀씨 주목

[0호] 2011년 07월 12일 (화) 허완 기자 nina@mediatoday.co.kr

전국 각지에서 194대의 버스에 나눠 탄 7천여 명의 사람들이 부산에 모여 ‘정리해고 분쇄’와 ‘구조조정 중단’을 함께 외쳤다. 9일 부산에 집결한 ‘2차 희망의 버스’는 700여 명이 동참했던 ‘1차 희망의 버스’를 넘어 그렇게 뜨거운 연대의 불길을 지피며 하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187일째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들은 ‘3차 희망의 버스’를 다시 출발시키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3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만만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는 “기성 노동운동과 정당, 시민운동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보완하고 대체해 주고 있다”고 말했고,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조직된 노동자들이 함께 정리해고를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풀어나간다는 의미가 희망버스에 있다”고 밝혔다. 박유기 금속노조 위원장도 “이제 노동운동도 과거 수동적이거나 선전선동, 상투적인 조직으로는 안 된다”며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주축이 됐던 이번 행사의 의미를 높게 평가했다.

▲ '2차 희망의 버스' 서울지역 출발 지점이었던 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한 참가자가 '슈퍼크레인' 티셔츠를 팔고 있다. ⓒ허완 기자

한겨레는 11일자 사설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와 나눔, 희망버스>에서 “이들의 마음은 이제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해고자를 넘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함께 해결해가는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평했다. 경향신문도 같은 날 사설 <촘스키, 강경진압, 그리고 ‘희망의 연대’>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이들이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불쌍하다고 동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문제’로 여기고 해고노동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2차 희망의 버스’가 주목할 만한 ‘새로운 현상’이자 ‘대안 운동’의 하나로 떠올랐지만, 현장에 있던 참가자들 사이의 ‘온도차’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9일 저녁 거센 빗줄기를 뚫고 부산역에서 출발해 약 4㎞를 걸어 영도조선소를 향해 가던 시위대의 눈앞에 육중한 경찰 ‘차벽’이 나타나자, 참가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 부산역에서 시작된 행진을 마치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와 불과 700여 미터 떨어진 봉래 로터리에 도착한 '2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공권력의 성채'였다. ⓒ허완 기자

차벽 맨 앞에 자리를 잡은 몇몇 단체와 시민들은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평화행진 하겠다는 데 이게 뭐하는 거냐”, “카메라 끄라고(채증을 중단하라는 뜻) 이XX들아!”, “폭력 경찰 물러가라” 등의 구호와 욕설이 난무했다. 참가자들은 차벽에 ‘정리해고 박살내자’, ‘강제진압 중단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붙였다. 깃대로 차벽 위에 있던 전경들을 공격하거나, 주먹으로 차벽을 거칠게 두드리며 거세게 항의하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일부 참가자는 물병을 던지거나 거리에서 통째로 뜯어온 안전펜스를 타고 올라가 차벽 위에 설치된 채증용 카메라의 선을 뽑기도 했다. 이들은 양 옆 인도를 막고 있던 경찰들과 쉬지 않고 몸싸움을 벌이며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차벽에서 멀리 떨어져 행렬 뒤 편에 자리 잡고 있던 참가자들에게서는 한결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예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앉아 맥주와 준비해온 음식 등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참가자들도 많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원생 이 모(26)씨는 “왜 저렇게까지 해서 (저지선을) 뚫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가볍게 몸을 흔드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그 사이 방송차에서는 “방송차가 뒤로 이동하니 앞자리로 이동해서 빈자리를 채워달라”거나 “젊은 남성분들은 앞쪽으로 나와 저지선을 함께 뚫자”는 방송이 이따금씩 흘러 나왔다.

▲ 일부 참가자들이 인도를 가로막고 있던 경찰을 뚫고 진입을 시도하면서 거친 몸싸움이 이어졌다. ⓒ허완 기자

경찰이 경고방송 끝에 물대포와 최루액, 색소포 등을 쏘아대자, 차벽 앞에서는 점점 더 거센 ‘분노의 몸짓’이 이어졌다. 한 쪽에서는 ‘폭력은 안 된다’며 이를 저지하는 참가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팽팽한 긴장 속에 긴박하게 대치 상황이 이어지던 새벽 두 시경, 일부 참가자들이 ‘희망의 계단’을 쌓기 시작했다.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손길이 뒤에서 앞으로 벽돌과 소금포대 등을 연신 날라댔다. 경찰의 차벽을 넘어 85호 크레인으로 가자는 이들의 열망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계단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강경 진압’으로 반응했다. 경찰의 진압 작전은 순식간에 시위대를 50여 미터 뒤로 멀찌감치 밀어냈다. 결국 차벽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 형성된 ‘전선’은 다음날 정리 집회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 채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새벽에 발생한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연행된 50명의 석방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혼선도 빚어졌다. 주최측은 10일 아침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연행자가 석방되기 전에는 희망 버스 단 한 대도 서울로 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일부 참가자들은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참석자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대안은 있는 거냐”고 되물었다. 일부에서는 짐을 챙겨 농성장을 이탈하는 장면도 적지 않게 목격됐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자체 행사’를 갖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주최측과 참가단체 대표단이 회의를 거듭하면서 오전 한 때 프로그램 진행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도 두세 번 연출됐다. 무엇보다 한 번 ‘밀려난’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갈 힘은 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맨 앞줄에 서있던 한 참가자는 “이럴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 시민들은 행진을 가로막은 차벽에 다양한 구호를 담은 손팻말을 붙이며 항의 의사를 표시했다. ⓒ허완 기자
▲ 대치가 이어지면서 일부 참가자들이 물병을 던지는 등 강하게 저항하자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액, 최루액을 섞은 색소포 등을 뿌리기 시작했다. 차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 물대포가 참가자들을 조준하고 있다. ⓒ허완 기자

“판을 크게 키워놓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판을 이끌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책임 있게 판단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

소리 공연과 랩, 마임 등 흥겨운 ‘연대 공연’이 이어지던 10일 오전, 현장에서 만난 한 노동운동단체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으로 한진중공업 사태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라면서도, “지금처럼 느슨한 연대로는 경찰의 저지선도 뚫을 수 없고, ‘판’을 앞으로 이끌어 나갈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같은 상위 단체가 대규모 투쟁을 조직할 여력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만 기대기에는 (투쟁의) 한계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송경동 시인은 11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밥을 먹으러 가는 데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기 마련”이라면서 “그럼에도 ‘밥을 먹으러 가자’는 데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 시인은 “기존의 운동들이 많이 관성화되어 있고 진정성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운동 중심’을 넘어서 보편적인 ‘사람의 문제’에 기반을 두어 공개적으로 (희망의 버스를) 제안하고 연대해나가는 운동이 힘을 갖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어 송 시인은 다양한 목소리가 한 데 어울리면서 발생할 수 있는 전술적 의견 차이에 대해서는 “각자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투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큰 결정들은 현장에서 의견을 종합해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희망의 버스’ 내부에 이견이나 분란이 있다고 보는 것이나 운동조직과 일반시민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관점도 잘못된 것”이라는 게 송 시인의 생각이다.

▲ 경찰의 진압은 신속하게, '효과적으로' 시위대를 저지선에서 멀찌감치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민은 부상을 당했고, 50여 명이 연행됐다. ⓒ허완 기자

한편, ‘희망의 버스’에서 2008년 여름의 거리를 장식한 ‘광우병 촛불집회’를 연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반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가 집회를 주도했다는 점과 ‘느슨한 연대’가 지속됐다는 점 등 당시의 촛불집회와 ‘희망의 버스’가 여러모로 닮았다는 지적이다. 2008년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는 송선주(22) 씨는 물대포와 최루액 등이 등장한 경찰의 강제 진압, 결국 ‘차벽’을 넘어서지 못한 ‘2차 희망의 버스’의 고민 등 “현재 상황이 2008년에 ‘명박산성’을 앞에 두고 시위대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 협상에 반대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던 촛불집회는 당시에도 ‘새로운 운동’, ‘대안적 운동’ 등으로 불리며 뜨거운 여론의 관심과 호응 속에 거리를 물들였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광장에 나왔고, 자유롭게 떠들었다.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했고, 즉석에서 토론이 오고가기도 했다. “웹 2.0 세대가 시위를 ‘놀이’로 만들어 즐기기 시작했다”, “대중지성, 집단지성이 세상을 바꾼다”는 등의 찬사도 이어졌다.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동시에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권력을 향해 냉소와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그 뜨겁고 맹렬했던 기세만큼이나 급작스럽게 사그라들었다.

▲ 경찰의 차벽 앞에서 피켓을 들어보이는 '2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의 모습. ⓒ허완 기자

2008년 촛불집회 직후 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 공동 저자로 참여했던 백승욱 중앙대학교(사회학) 교수는 당시에 썼던 <경계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라는 글에서 “(집회가) 축제로 끝난다는 것은 이 집회에 참여하는 대중들이 이미 머물러 있던 경계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지키면서 불만만 표출하는 차원에 머문다는 의미”라면서 “촛불집회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이 집회가 ‘축제’가 되어 ‘카타르시스로’ 끝나는 일”이라고 썼다. 백 교수는 이어진 글에서 “2008년 촛불집회가 부딪힌 가장 큰 한계점은 광장의 저항이 자신의 생산·재생산 공간(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확산되고 이전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촛불집회가 “참가자들 사이에 놓인 경계들(비정규직과 정규직, 이주노동자와 현지인, 남성과 여성, 고학력 노동자와 저학력 노동자 등)을 넘어 구체적인 연대로 나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희망의 버스’의 미래를 좌우할 고민이자 과제로 남아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희망의 버스’를 제안한 송 시인도 “(한진중공업 사태가) 이 곳 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과 이 일이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보다 긴밀하고 보편적으로 퍼져야 한다”며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산 등 그간 진행되어 왔던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의식”을 언급했다. 이는 ‘한 번 왔다가 가는’ 투쟁의 현장에서의 삶과 일상 생활에서의 삶이 서로 변화를 주고받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엇갈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인 셈이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참가자들이 단순한 ‘동정’이나 ‘안타까운 마음’, ‘막연한 분노’를 넘어서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희망 버스'가 당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장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도 숙제다. 한진중공업노조가 사실상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희망버스'는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큰 힘이 되고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어떤 결말로 나아갈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차 희망의 버스'가 안고 갈 희망만큼이나 그 등불이 되고 있는 김진숙지도위원에 대한 부채감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한 곳은 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이었다. 이곳에서는 부당한 임금체계를 개선하고, 특수고용직으로 규정된 학습지 교사를 정규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투쟁이 무려 12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작년 겨울 파업을 벌였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30여 명은 ‘희망 자전거’를 타고, 2년 전 직장을 잃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1일 평택을 출발해 도보로 ‘희망의 버스’ 대열에 합류했다. 사측의 직장폐쇄에 맞서 일괄복귀를 요구하며 두 달 넘게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 100여 명도 달려왔다.

‘희망의 버스’가 활짝 열어젖힌 ‘연대의 장’은 분명 다양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지만 “광장에 모인 개인들은 과연 ‘연대’하고 있었던 것 것일까? 아니면 함께 모인 사람들과 그저 함께 있기만 했던 것일까?”(백승욱 교수)라는 질문은 이번에도 필요해 보인다. 과연 ‘희망의 버스’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더 많은 곳으로 실어 나를 수 있을까?

▲ 참가자들은 대오를 해산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꼬박 밤을 지샜다. 그 사이 새벽이 밝아왔다. 농성 대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차벽도 밤새 자리를 지켰다. ⓒ허완 기자


공지영 작가의 트윗. "대체 일만명이 한국 제2도시 도심서 밤새 시위를 하는데 한줄도 한장면도

보도되지 않는다. 이건 전두화시대 수준의 후퇴다. 기자들의 순종이 지속된다면 이는 80년 이전

혹은 역사에서 없던 암흑으로의 전무후무한 후퇴로 보인다."


정말이다. 딱히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이, 제돈을 주어가며, 소중한 휴일을 포기하며, 이백여대

가까운 버스를 타고, 봉고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모인 일이다. 그렇게 모인 만여명의

사람들이 한진중 85호 크레인 위에서 185일째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그녀를 응원하러, 죽지 말라고,

모인 참이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 라거나 비정규직 철폐! 같은 가다듬어진 주장도

넘실거렸지만,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정권과 자본과 언론이 말라죽이는 사람 하나 살리러 간 길이었다.


그게 기사꺼리가 안 된다고? 좀처럼 본 적 없는 그런 높은 수준의 연대라거나,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이 만 명이 자발적으로 모인 거라거나, 심지어 노암 촘스키가 지지발언을 보낸 그 '사건'이?

180여일째 35미터 크레인 위에서 계절 세개를 보내며 한진중공업의 불법적이고 악의적인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고 있는 그녀, 김진숙과 한진중 노동자들이 보이지도 않았으니 새삼

놀라울 것도 없지만, 언론이 잘했다면 MB가 대통령되는 따위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놀랍다.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고 눈물짓고 빵빠레 울리던 언론, G20개최로

수십조의 경제효과가 기대된다며 앵무새처럼 읊어대던 언론, MB의 말 하나 토씨 하나까지 금칠해서

홍보하느라 지면과 이미지가 넘쳐나는 언론, 4대강이니 민간인사찰이니 정권에 골치아픈 이슈가

있으면 알아서 축소보도하는 언론, 삼성과 한진 따위 대기업들의 횡포와 불법행태에 대해서는 눈감고

입다물면서, 틈만 나면 국민들을 훈계하고 교육해서 '공정사회'에 걸맞는 '국격'돋는 언론.




정말이지 "You are not 언론"이다. 방송은 전멸하다시피했고, 그나마 지면으로는 몇개 살펴볼만한

기사가 남은 게 다행일까. 얼마전 올렸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김진숙, 그들은 살아내려와야 한다. 에

이어, 7월 9일에서 10일까지 무박 2일에 걸친 2차 희망의버스 사진들과 참가기. 언론이 제대로 한다면

굳이 왜 카메라를 들고 가서 400mm 폭우 속에서 비맞으며 고생했겠나. 언론 따위, MB보다 더럽다.
 


9일 오후 1시, 시청 앞과 서울 시내 곳곳에서 2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가

출발하며 시청을 지나는데 시청앞 광장에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들, 주말에 놀러나온 길에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경찰차들이 보였다. 희망버스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뜻이 통한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버스를 대절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지라 버스회사나 색깔 따위는 제각각이었는지라 앞에 '희망버스'

몇 호차, 이렇게 싸인지를 붙이는 걸로. 이제 전국에서 모인 185대의 버스가 김진숙님에게 간다니 두근두근.


4시, 휴게소에서 쉬는 중, 저마다 계란과 떡볶이와 과자들같은 간식거리를 나누느라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지경이다. 걱정스러운 건 부산에 내리붓는다는 장대비. 엠비의 인공강우는 아닌지 의심이..어제도

비가 엄청시리 내리고도 계속 쏟아붓는다. 부산은 어떤지, 김진숙지도님은 괜찮은지, 마음이 더 부산해진다.


그와중에 부산역에서 크레인으로 가는 길목인 영도다리를 막았다느니, 한진중공업 앞에 물대포부대가

깔리고 새까맣게 닭장차와 전경들이 깔렸다느니. 나는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를 읽고 있었다. 저자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그의 책 중 한대목. "평생을 일해도 집한칸 지닐 수 없는 세상에 널 살게 할순 없지

않겠느냐..비정규직은 울고 정규직은 잔업과 성과금에 영혼을 파는, 오로지 이 두가지의 선택이 네 미래가

되게 할 순 없지 않겠느냐.(김진숙, 김주익열사 추모시)"

7시, 부산역 광장에 모이고 나니 이미 사람이 가득하다. 걱정했던 것처럼 400mm 폭우가 내리고 있는

부산이었지만 역앞 광장에서 울려퍼지는 문화제의 익숙한 마이크소리와 후끈한 분위기. 전국에서 195대,

서울에서 66대가 출발했다는 소식에 버스안에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었는데 정말 많이도 모였다.

'WELCOME TO BUSAN웰컴 투 부산'이라 적힌 촌스러운 구조물을 넘어, 역앞 광장을 그득하게

메우고도 역사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까지 꽉꽉 들이찬 사람들. 이들을 움직인 건 '김진숙', 그리고

그녀와 크레인을 함께 지키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

그녀는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서적 23선 중의 한권이기도 한 '소금꽃나무'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그들은 아직도 거북선은 이순신장군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김진숙,소금꽃나무)"


그녀와 한진중공업의 투쟁은, 위험천만한 고공농성은 단순히 감성으로, 휴머니즘과 드라마로 소모할

꺼리가 아니다. '노동'의 제몫찾기, 한줌 제한 나머지는 모두 노동자라는 자각이 중요한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희망의 버스'는 그들에 대한 구조활동이나 봉사활동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거다. 일상화된 정리해고와 자본과 공권력의 야합 앞에 위협받는 유리병같은 일상을.


비는 참 오지게도 왔다. 폭우 속에서도 노래를 찾는 사람들, 3호선 버터플라이 등의 공연에 이어

1차 희망의 버스를 만들어냈던 시인 송경동을 비롯한 시인들의 시낭송이 있었다. '크레인 위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간'이었던가, 제목부터 의미심장했던 결코 짧지 않던 시는 순간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진정성과 '불순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행진 시작. 촛불집회 때 보였던 우비가 다시 보인다.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던 촛불소녀.

정말 올해 맞을 비는 전부 맞은 거 같다. 촛불소녀의 촛불이 우의 속에서 흔들림없듯, 사람들은

장마철 폭우가 우박처럼 아프게 내리붓는 와중에도 흔들림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김진숙 그녀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그녀의 일과 한진중공업의 일이 전해지고 난 후 가장 가벼운 마음이었는지도.

행진은 부산역 광장에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까지의 코스가 예정되어 있지만,

경찰들이 조선소 앞에 까맣게 진을 치고 있다느니, 영도다리를 봉쇄했다느니 불길한 소문들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래도 교통 안내판에는 '부산역->영동한진'까지 행진이 예정되어 있다고

나와있어서, 어쩜 김진숙지도님을 볼 수 있겠구나, 조금은 안심되던 때.

내가 겪은 부산 시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편에 서서 공권력과

용역깡패들, 보도하지 않는 언론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병원 1층 로비를 개방해서 화장실도

쓰고 전화기 충전도 하도록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차 창문을 열고 왜 괜히 길막히게

부산까지 와서 난리냐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는 사람도 있었다. 뭐, 다 그런 거 아닌가. 다양한 목소리.

그런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국회'라는 그릇에 넣고, 그 안에서 전체 국민의 삶을 위한 정책을 편다는

게 초등학교 수준의 '정치'에 대한 설명이랄까. 그래서 이렇게 이름 중의 '정의'를 갖고 말장난하며

'justice21'이라느니 홈페이지 주소를 광고하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왜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노동일

한번 해본 적 없는 화이트칼라, 그 중에서도 잘 나가고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만 있는지.

그래서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는 저 플래카드가 마냥 곱게만 보이지는 않는 거다. 일단은 선거가

굉장히 중요하고, 의정활동에 대한 감시도 중요하다지만, 그거로는 뭔가 2% 이상 부족하다.

계속해서 행진 중. 몇 년만에 거리행진인지. 미처 꺼두지 않은 빨간 신호등이 반짝거리고, 차들이

씽씽 달려야 할 차선 위를 걷는 느낌은 꽤나 매혹적이다. 비가 미친 듯이 내리붓고 있지만, 평소

생각지도 못하던 공간에서 기존의 규칙과 상식을 깨뜨린다는 건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

아, 거리 행진은, 부산역 광장에서부터 한진 영도조선소까지의 행진은 신고를 마친 합법 집회.

사실 한진중공업, 김진숙이나 다른 해고노동자들의 문제는 비단 여기뿐만이 아니다. 콜트 노동자들,

유성기업 노조, 발레오공조 노조, 그리고 노조조차 갖지 못한 삼성 같은 곳에서도 무한반복되듯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들. 구조조정과 등치되는 정리해고, 허울만 좋은 법 뒤로 벼랑끝으로 밀려나는

노동자들. 그 와중에 일종의 '대표성'을 띄고 그나마의 '대중성'을 획득한 것이 한진중공업. 이번

싸움을 꼭 승리로 만들어 김진숙과 한진중공업이 웃을 수 있도록 해야 할 이유기도 할 거다.

한진중공업 노조가 사측과 독단적으로, 법적 효력도 없는 타협에 합의하고 나서는 여기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로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거리 곳곳에는

그들의 반칙과 기만을 숨기려는 플래카드들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전국에서 모인 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니 손팻말이니, 그런 것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85호 크레인 사수! 노동자민중 생존권 쟁취! 정리해고 철회! (크레인) 강제진압 반대!"

한시간쯤 걸었을까. 걱정하던 영도다리는 허무할 정도로 금방 넘어버렸다. YS를 당선시키지 못하면

모두들 영도다리에서 빠져죽자느니 어쨌다느니, 그런 어줍잖은 이야기 속에서 등장해 유명했던

영도다리가 여기였구나, 느끼기도 전에. 아마도 모두들 여기쯤 경찰이 봉쇄하지나 않았으려나,

김진숙지도님을 보지 못하고 막히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 맘이었을 거다.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걸음이 점차 느려지더니, 멈췄다. 명절날 고속도로에서

그렇듯, 꽉 막힌 도로사정은 사람을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카메라는 이제 조금씩 장대비

앞에 무릎을 꿇어가고 있었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렌즈로 앞으로 바라보니. 차벽이다.

언제부터 여기서 버티고 섰을까. 물대포차가 가운데 버티고, 양쪽으로는 차벽이, 그리고 채증용 카메라와

조명이 설치된 닭장차가 그 옆으로, 남은 부분은 완전 무장한 전의경들이 메웠다. 아니 근데, 이들이

왜 정당하고 적법한 행진을 막고 섰을까?? 불법으로 노상을 점거하고 합법 행진을 막고 있는 경찰들이다.

차벽 앞에서 당황해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럴 수 밖에 없다. 조직된 대오도 아니고, 몇몇 학교와

조직을 포함한 개인들이 제각기의 판단으로 참여한, 지도부 없는 무리인 거다. 부산역에서부터 물처럼

흘러흘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까지 흐르려던 물줄기가 까만색의 살벌한 경찰들에 가로막혔다.

그 앞에서 '같이 살자',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85호 크레인에 희망을', '다시 소금꽃을 피우고 싶다'

따위 손팻말을 든 건 해고노동자들의 가족들. 나중에 경찰들이 폭력진압하며 연행해 간 가족들도

저기에 있었다. 해고되어 크레인에 오른 노동자분의 아내와 17살짜리 딸이었다던가.


'소금꽃'이란 김진숙 그녀의 '소금꽃나무'란 책 이름에서 비롯했을 거다. 배 안에서 용접하고 페인트칠

하며 온통 땀에 절어버린 조선 노동자들의 옷위에는 늘 하얗게 소금이 맺혀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소금꽃'을 매달고도 든든한 노동자들이 바로 '소금꽃나무'라는 그녀의 표현.


건물 위는, 사진기자들이 저렇게 진을 쳤다. 이미 그들은 전선이 여기에 생기리란 것을, 경찰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리란 것을 알고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찾아 아우성쳤던 걸 거다. 뭐, 곤봉과 방패가

번쩍거리고 물대포가 최루액을 뿜는 그런 풍경을 노리는 까마귀떼나 하이에나 같단 생각도 들었지만,

여하간 저만치 진을 쳤으니 보도는 잘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지금.

폴리스라인, 되먹지 않은 글자 위에 '정리해고 박살내자', '강제진압 중단하라'는 스티커가 빨갛고

파랗게 나붙었다. 법도 무시한 네놈들의 폴리스라인 따위. 페인트로 단정하고 세련되게 칠해진

글자들 따위, 우리들의 촌스럽고 싸구려(지만 접착력은 끝내주는) 스티커로 덮어버리겠달까. 

차들 틈새로 어렴풋이 보이는 너머 풍경. 여기서 700미터쯤만 가면 바로 김진숙과 한진중 해고자들이

농성 중인 85호 크레인이 나타난다고 했었는데. 경찰들은 아무 법적 근거없이 여길 막아서고 심지어

폭력적으로 진압하려 들면서 스스로의 정체를 노출하고 말았다. 한진중공업의 사설 경비업체 나부랭.

그런 경찰 따위. 어디에서 났는지 '폴리스 라인', '이선을 넘지마시오' 따위가 적힌 형광색의 반짝반짝

빛이 나는 차단대가 차도 한켠에 우르르 쌓여있었다. 그리고 차벽 앞에서 그걸 한두개씩 빼어서는

깔개로도 쓰고, 저렇게 무더기 위에 철퍽 앉아서 지친 다리를 쉬는 사람들. 스스로 공정하고 본연의

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찰의 권위 따위 궁둥이 밑에 깔려도 싸다.

차벽 앞에서부터 버글버글하게 모인 사람들. 끝이 보이지 않는 인파였고, 비바람에 쉼없이 나부끼는

깃발이었다. 그리고 이유없이 진로가 막힌 것에 대한 분노 한덩어리였다.

비상출동했다는 닭장차, 예외없이 골고루 '강제진압 중단하라'는 스티커가 붙었다. 사실 크레인에 대한

강제진압이 시시때때로 시도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중단 요구였는데, 2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부산에

내려와 행진중인 사람들에 대한 강제진압 역시 중단하라는 요구로 커져버렸다. 경찰이, 한진중공업이,

무엇보다 이 정권이 일을 그렇게 키우고 있었다.

차벽과 차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우선 막아놓고는, 틈새는 몸빵. 죄없는 전의경을 앞세워 길목을

틀어막은 그들이다. 그리고 길을 트라며 달려드는 시민들과 방패로 받아치는 전경들의 몸싸움이

벌어진 뒤쪽에서 잠자리떼처럼 흉물스럽게 공중으로 부양하는 것들, 뒷날의 사진채증을 위한

캠코더나 카메라 장비들인 거다. 그리고 선무방송. '지금 일부 집회참가자들이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니, 해산하지 않을 경우 강제 진압하고 전부 연행하겠다'던가. 누가 불법인가.

완강한 차벽 앞에서, 사람들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왜 여기에 왔으며, 누가 우리를 막고 있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노랗고 하얗고 파란 우의를 입고서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흐르는 빗물에도

개의치 않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부가 있었다면, 좀더 많은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 않을까 아쉽긴 하지만, 각자의 단위별로, 참여한 버스별로 진행된 이야기.

성소수자들도, 장애인들도, 두리반으로 모인 인디 음악인들도, 모인 자리였다. 이왕이면 좀더 멋지게

전체의 목소리와 요구를 담아낼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전통적인 노동문제뿐

아니라, 성소수자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장애인 문제 같은 다른 문제들도 산재해 있음을, 상식이라 믿는

수많은 것들이 사실 하나하나 누군가의 밥그릇과 생존을 위협하는 질곡이자 장애물일 수 있음을 나누는

자리였다면 더욱 멋졌을 거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철회되고, 비정규직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멋진 세상이 되겠지만,

좀더 당당하고 신나려면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거 같다.

김진숙지도님에게 전달하려던 희망의 배가, 빗물이 강이 되어 흐르는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진수식을

가졌다. 한진과 경찰, 자본과 국가가 이런 식이라면, 다음번 3차, 4차가 계속 노도처럼 밀려올 테고,

그렇게 길바닥에서 진수식을 가진 종이배가 85호 크레인 앞으로까지 항해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참여연대에서 걸어올린 현수막,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김진숙님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분들. 함께 2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오진 못했지만 그 마음은 서울과 지방 곳곳,

오프라인과 온라인 곳곳에서 넘실거린다.

밤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색소물대포를 쏴대고, 사람 얼굴을 겨냥한 최루액 물총이 난사되었으며,

방패와 곤봉 앞에 몇사람이 두드려맞고 실려가고 연행되었는가 하면, 급기야 최루액 물대포를 쏘아서

대오 전체를 고르게 적셔주는 만행까지.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있던 말던, 순식간에 사방은 무슨

가스체험실처럼 되어 눈물콧물이 낭자하고 기침소리가 가득해졌었다.

그렇게 심상정 전 진보신당의원이 연행되는 등 50명이 연행되고, 수많은 사람이 최루액과 경찰의

폭력으로 병원에 실려가거나 후송되는 밤을 버텨내고 날이 밝았다. 방송차까지 빼앗기고 나서

좀처럼 낙관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끝내 자리를 지켰다. 이 외로운 남도의 끝, 홀로

고립된 채 186일째를 버티고 있는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최루액 대량방사의 따꼼함을 담배연기와

물로 헹궈내며. 폭력경찰 물러가라! 정리해고 철회 투쟁! 의 구호가 밤새 이어졌다.

7월 10일 6시경. 경찰들은 어느새 차벽 뒤로 견찰들 전부 숨어들어간 상태. 사람들은 제각기의 자리에서

독려발언을 이어가고, 인디밴드나 음악인들은 자유발언이나 공연을 통해 사람들을 북돋고 있었다.

이 차벽 너머에는 김진숙지도님과 다른 노동자분들이 고공농성 186일째의 아침을 맞고 있었을 거다.

밤을 꼴딱 새고는 난민처럼 널부러진 이들, 머리 위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무엇이 이들을 이런 고단함으로 이끌었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생을 자발적으로 사서 하는 사람들.

폭우가 쏟아진다는 걸 알면서, 경찰과 한진이 곱게 보내줄리 없다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알았으면서,

그리고 당장의 밥벌이와 생활에 지쳐 일주일 중의 주말만을 기다렸을 거면서.

7시쯤. 기자회견. 유시민과 정동영이 함께 했다고 했지만, 아침 7시가 넘어 시작된 기자회견에 모습을

보인 건 진보신당의 노회찬 전대표, 조승수 대표와 민노당의 권영길 의원을 필두로 한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들의 참담한 얼굴표정, 그러고 보니 거리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나 백기완 선생님,

가장 앞에 서서 길을 뚫겠다 하셨던 두분은 괜찮으신 걸까.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분들이야말로

희망이다.

그렇게 기자회견이 끝나고, 밤새 있었던 우리의 몸짓과 목소리가 공중파나 다른 언론에서 거의

묻혀버리다시피 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리면서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일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비를 내어가며 자발적으로 이 먼 곳에까지 와서 한목소리로 한진중공업 사태의 해결을

촉구한다는 것. 그 평화롭고 합법적인 행진을 불법적으로 막고 폭력을 행사하며 진압하려든 것은

언론이 다룰 내용이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3차 희망의 버스를. 이라고 할 수 밖에.





분노하라 - 10점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돌베개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 책읽기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자신의 사고 궤적을 이어나가는 행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설이나 문학류 이외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서적을 본다는 건 당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점,

고민이라거나 관심분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독서 리스트를 쭉 이어나가보면

그자체로 나름의 스토리랄까 문제의식이 뻗어나가는 그림이 잡히는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하라'라는 책이 내 손에 쥐어진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쥐고

있는 이른바 '핫한' 책들은 일단 피하려고 하는 묘한 청개구리 심리에다가-아직 '정의란 무엇인가'는

좀체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지구 반대편 레지스탕스의 목소리를 빌려 굳이 '분노하라'는 말을

전해듣지 않아도 될만큼 무시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워낙 감각적인 표지가 맘에 들었다.


삶으로 말한다, '앵디녜부(Indignezvous)!'

저자는 이제 무관심과 냉소를 넘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행동을

위한 에너지로서 분노를 말하고, 분노의 결과로 행복을 말한다. 삶의 안전망으로 기능해야할 사회보장

제도의 축소, '일반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을 앞세우'게 된 경제 시스템, 정부와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고 있는 찌라시 언론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대물림하는 교육. 분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식의 현실분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배포되는 얇은 전단에

더욱 정밀하고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에 기반한 결론, 혹은 주장도 같다. 이제 그만 속고,

그만 참고, 그만 당하자고. 분노하고 저항하자는 거다. 다만 이 책은, 그 뻔하고 당위적이며 선동적인

이야기에 담긴 무게가 다르다. 메시지의 진정성, 신뢰성이 다른 거다. 그러니 울림이 다를 수 밖에.
 

1917년에 태어난 저자는, 나치와 싸우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힌 채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출하고 다시 투쟁,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여전히

인권과 환경 등 사회문제 전반에 발언하며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아흔네살이다. 그런 '늙은이'가,

그런 '꼰대'가 좋은 게 좋다느니, 철 좀 들으라느니 따위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하라'는 거다.


90대 노인의 '격렬한 희망'에 위로받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발견한 건, 육체적인 쇠락에 지지 않고 탄탄하며 쌩쌩한 열정과 젊음을 가진

어느 존경할 만한 투사의 삶이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로 느껴지는 위로다. 나보다 앞선 그의 삶과

신념과 가치를 발견하고는, 왠지 그의 여전히 탄탄할 것 같은 등을 바라보는 안온함과 믿음직함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근 한세기동안 명멸해온 거대한 폭력과 광기를 지켜봐온 그가 희망을 말하니까.

그의 견지로 봤을 때 MB치하 3년간의 고난, 괴로움은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갈 것'이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제 한세기를 살아온 노인의 혜안으로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총대를 넘겨 받으라, 분노하라는 거다.


수많은 한국의 레지스탕스에게. 특히 김진숙에게.

이 책의 소감은 사실 책에 씌여질 종류의 것은 아닌지 모른다.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그의 분명한

메시지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국에 태어난 건 다행인지 모른다.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고 분노의 대상이나 책임의 소재를 밝히기 어려워지도록 복잡해지고 은폐되어지는

사회시스템의 진화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날것의 국가폭력, 비인간적인 자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용역깡패의 모습으로, 어용 언론의 모습으로, 유치한 고소고발로,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밥줄을 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분노하기 유리할지도.


역시, 내게 책읽기는 사유의 연장이다. 요새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그녀, 김진숙.

사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할아버지까지 찾아갈 것도 없었다. 젊어서부터 안 해본 것 없이 노동해온

오십대의 그녀가 도무지 한눈에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대항해서 크레인에

올라간지 180여일이 가까워진 참이다. 한국의 자본권력, 그리고 그를 비호하는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설탕코팅조차 없이 쓰디쓴 현실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참이다.


스테판 할아버지(저자)는, 그녀의 이런 투쟁을 안다면 노구를 이끌고 크레인 위에라도 오를 사람이다.

그리고 김진숙 그녀는, 레지스탕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신부님이나 다른 한국의

이름없는 레지스탕스들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고 육체가 노쇠해져도, 지금과 같이 그런 열정과 분노를

가지고 우리에게 든든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려면 이 팬시하고 '깔쌈한' 표지의 책은 서가에

꽂아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꽂아두어야 할 일이다.


그러면 혹시 또 아나, 우리는 백발 성성해진 김진숙이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야기하며 분노하라,

그리고 저항하라며 쓴 또다른 뜨거운 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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