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조팝. 조팝나무니 뭐니 이름을 들은 적은 있는 거 같지만, 그 발음에 새삼 신경이 쓰인 건

아무래도 '황금'이라는 럭셔리하고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서인거 같다. 넘 이질적이고 우습달까,

황금조팝이란 이름은. 혹시 '조팝'이 어떻게 발음나면 문제인지..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황금조팝이 파릇파릇 자라나던 이곳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광장. 비가

꾸물거리며 오는 날인데도 제법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다. 들어오지 마시요, 같이

잔디밭 출입을 엄금하는 표지가 없다는 건 맘에 들었다. 쟤들도 좀 밟혀야 잘 자라지.

근데, 사람 기억이란 게 참 별볼일없지 싶다. 이 '광장'같잖은 광장이 생기기 전에 여기가

어떤 풍경이었더라,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거다.

이게 그 해머링맨, 눈에 좀더 잘 띄도록 4.8미터 앞으로 이동하는데 수억이 들어갔다는 예술작품.

비가 내리다 멈추다 하는 와중에 문득 믿겨지지 않을 만큼 맑았던 하늘이 파랗게 찍혔다.

고궁박물관 옆 돌담길, 효자동으로 빠지는 길은 날이 맑으나 흐리나, 걷기 참 좋은 길이다.

앞선 아저씨 둘이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꽃을 한 송이 가슴에 단 채 신호등을 기다리는 풍경.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늘어지게 몸을 뉘인 채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파랑 고양이가 한 마리.

어찌나 새침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지, 조금 자세가 표정과는 달리 방만한 걸 제하고 나면

딱 맘에 들도록 고양이스러운 표정이다.


이런 그림, 군대 있을 때 참 많이 봤었다. 사다리타기. 이리저리 종횡하는 저 선들을 따라

희비가 엇갈리던 녀석들과, 어찌됐건 모은 돈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뿌듯했던 기억과.

이리저리 내키는대로 가닿던 발걸음이 종각 앞 신호등에서 잠시 멈췄다. 뇌우, 폭우가 예상됐지만

생각보다 잠잠했던 부처님 오신 날의 저녁. 잠시 비가 그친 틈, 눈치만 보던 태양이 하산할 준비를

마치고 남은 빛을 세상에 마구잡이로 탈탈 털던 타이밍.

촘촘하게 높은 건물이 몰아서 있는 이쪽 동네에 이런 호젓한 골목길이 있었다니 조금 놀랐다.

미술관 가는 길이나 뭐 그런, 정돈된 길이 아니라 그냥 말그대로 골목길. 어느새 투둑투둑 돋기

시작한 빗방울 덕에 펼쳐든 우산이 살짝 찍혀나온 사진이라 더 맘에 들었다.




카오산로드에서 동쪽으로 걷기로 맘먹은 날이었다. 점점이 몰려있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지나치며
 
무작정 걷다가, 문득 어디선가 징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여러개의

징을 산발적으로 두드려대는 댕댕대댕댕 소리. 저건 뭔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왠 자그만

동산이 있고 꽃과 나무가 우거졌으며 태국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점점 커지는 징소리는 이제

머리 위에서, 커다란 말풍선에 담긴 채 하늘에서 징징 진동하며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집 위의 야트막한 동산에 오르듯 계단을 따라 사람들을 따라 조금 올랐다. 옆으로는 꽃과 나무,

반대편으로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건지 인공적으로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중턱쯤에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수많은 종들. 잡아당기는 손들.

길 양쪽으로 온통 종들이었다. 울림통 안에서 웅얼웅얼대며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징 치듯

댕, 하고 짧게 끊기는 쇳소리였지만, 사람들이 순례하듯 지나며 일일이 하나씩 울려주고 있던

덕분에 끊기지 않고 대앵대앵- 울려퍼지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징도 하나. 어찌나 많이 부딪혀댔는지 나무가 온통 뭉그러져버린 데다가

받아주는 징의 볼록한 부분도 한참을 움푹하게 꺼져들어갔다. 뭐, 그럴 만도 한 게 나 역시도

수십개의 종들을 울리며 올라왔지만 그 손맛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징의 웅웅거리는

울림과 찌릿찌릿한 손맛이라니.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않음 좀더 두들겨보고 싶어지는.

그 이후로도 길은 계속 가늘게 이어지며 동산 위로 이끌었다. 종 역시도 계속 이어졌고, 가만 보니

종들의 듬직한 등짝에는 이 곳의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있었다. 푸 카오 텅, Golden Mountain.

높이 80미터로 정상에 황금색 탑이 세워져 있어 수많은 태국 불자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나. 계단수는

무려 320개를 헤아리는데, 사원은 전체적으로 우주의 중심이라는 메루산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그런 건조한 사실들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건 이런 쓰레기통. 쓰레기를 버리란 건 알겠는데

저 해골바가지 그림은 뭔가 싶었다. 태국어를 알았다면 해골바가지 밑의 간단해보이는 몇글자쯤

해독해 냈을 텐데 싶기도 하고.

드디어 도착한 산..이라기보단 야트막한 언덕의 정상. 사원이 하나 세워져있고 깃발이

나부꼈다. 황금빛 칠이 번쩍거리는 건물벽은 방콕 시내가 반사될 듯 반짝거렸다. 원래

여기를 지을 당시에는 방콕 시내를 벗어나 평화로운 교외의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여기까지 도시가 우물우물 삼켜버려 예전의 정취와는 판이해졌다.

여기에 모셔진 부처님들 중 일부는 인도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한다. 나름 1960년대까지 방콕을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던 사원인만치 그만큼 보물들이 많이 모셔진 걸까.


그런데 이건, 네모난 금박들이 펄럭펄럭 나부끼는 헐벗은 불상들. 선풍기가 돌고 건물 안 공기가

휘몰아 돌면서 불상에 붙어있던 금박들이 파닥파닥 날뛰고 있었다. 더러는 위태롭게 나부끼다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또 더러는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위나 옷위로 내려앉기도 하고.

거의 다 벗겨진 채 누워있는 와불, 아마 저렇게 금박을 한겹한겹 입히는 것도 부처님께 공덕을

쌓는 일일텐데 뭔가 입혀드리는 날짜가 정해져있나보다. 그리고 문득 돋는 세속적인 생각 하나,

저 금박들이 진짜 금일까. 24K는 아닐 테고 18K나 14K쯤? 꽃가루처럼 날아다니는 금박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건물 중앙에 모셔진 황금빛 번쩍거리는 불상 하나가 포인트였다. 동서남북 사면으로

뚫려있는 한 가운데에 모셔진 불상은, 황금 금박이 촘촘하게 붙어있어 바늘꽂을 곳 하나 찾기 힘든

그런 번쩍번쩍한 느낌이면서도 또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 앞에 털썩 앉아 간절히

기도하는 분의 뒷모습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내부에 워낙 사람이 꽉꽉 들어차 있었지만, 밖을 향한 창문이 온통 활짝 열려 있어서 딱히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밖을 향해 활짝 열린 창문들, 밖으로 고개를 빼문 아이들, 그리고 멀리까지 내려

보이는 방콕의 전경.

뒤에서 아이들의 눈을 따라 휘적휘적 둘러보았다. 태국 국기와 황금산 깃발이 나부끼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낮고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뒷켠으로 뾰족뾰족 서 있는 사원들. 그리고

멀찍이 이 언덕보다 높이 솟은 고층건물들이 보였다. 그 아이들의 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옥상으로 올라가니 거대한 금탑이 있었다. 하늘로 향할수록 긴장감넘치게 뾰족해지는 저

삼엄한 탑의 모양은, 거꾸로 지상의 소원과 염원들을 모두 흡입하겠다는 듯 굉장히 크고

넓은 밑둥아리를 갖고 있었다. 그 앞에 가지런히 무르을 모아꿇고 손을 맞붙인 사람들의

엄숙한 표정이나 조심스런 몸가짐들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 와중에도, 큰 금탑 주위의 사면에 하나씩 버티고 선 커다란 징은 계속 대앵, 대앵. 어떤

콧수염 아저씨가 채를 잡길래 카메라를 들어 'May I'했더니 방긋 포즈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진중한 한 방, 사방으로 부들부들 퍼져나가는 울림이 언덕 아래로 낙하했다.

신 앞에 꽃을 바치고, 돈을 바치고, 종을 바치고, 그리고 빨간 천에 소원을 적고. 탑을 감싼

천에 직접 만든 색색의 리본을 달아주기도 하고. 기도를 바치는 존재가 신이라면 굳이 저렇게

써놓거나 박아넣지 않아도 다 알지 않을까. 아닌가, 신은 눈이 하나라서, 그 시선이 내게 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노력하는 게 더 빠를 거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좀더 큰 목소리로

좀더 튀고 마음에 들만한 걸로 신을 꼬드기는 것도 나름 합리적인지도 모르겠다.

선박박물관에서 봤던 그 굉장한 용 머리가 여기에선 몸통까지 제대로 묘사된 채 종을 물고 있었다.

이거..용이 아니라 새였던가, 대체 뭐지 싶을 만큼 상상력이 발휘된 동물. 그 밑으로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소원들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용머리가 사람들의 소원들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금세라도 하늘로 날아오르려는건가, 그런 분위기를 노린 건가 싶기도 하고.

이쁘게 만들어진 화환들이 탑 여기저기에 걸렸고, 하얀티에 청바지를 입은 긴머리 아가씨의

뒷모습이 참 이뻤다. 발바닥이 하얗게 질리도록 미동도 않고 곱게 두손 모은 채 뭘 그리도

기도하고 있는 걸까 싶기도 하고. 내 마음까지 절로 숙연해지고 뭔가 간절해지는 느낌.

다시 돌아가는 길, 사람들은 마치 손잡이라도 되는 듯 종을 하나씩 잡고서 댕댕거리며 내려왔다.

뭔가 조금은 더 조신하고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내려오던 길에야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다. 아, 이렇게 생긴 거였구나. 푸 카오 텅, 혹은

GOLDEN MOUNTAIN. 황금산. 저렇게 빙빙 도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렸고, 걸으면서 쉽없이

징이나 종을 울려댔던 거로구나 싶었다. 어김없이 걸려있는 꽃 한다발까지.



황금산 정상에서 탑돌이를 하던 분들, 그 와중에 징을 울리며 풍경을 뒤흔들던 그 묘하고도

묵직한 분위기. 소리가 좀더 생생하게 잡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실제 음량에 많이 못 미쳐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방콕에서 인물 사진을 찍을 때는 간단히 물었다. 'May I?' 하며 카메라를 슬쩍 들어올리면

애나 어른이나 다들 알아듣고선 방긋 웃어주거나, 별 흔들림없이 시크하게 멈춰주거나.

그렇게 찍은 사진들. 황금산 위에 올랐을 때 올망졸망 머리를 맞대고 방콕 시내를 내려다보던

가뭇가뭇한 아이들이 귀여웠다.

황금산 주변동네를 진동시키던 징소리, 종소리를 만들어내던 저 팔뚝들. 여자친구와 함께

무언가를 빌러 온 아저씨 하나가 나의 '메이 아이?(카메라 들썩)' 앞에서 흔쾌히 포즈를

취했다. 사진 이후의 다시, 대애앵- 귓바퀴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굵은 떨림.

황금산 위의 황금탑, 사람들의 기원을 모으는 안테나처럼 위로 뾰족하게 곧추선 그 탑을 향해

무언가를 조용하게 빌고 있던 태국의 아가씨. 꺾인 발바닥이 하얘지도록 미동도 없이 탑을 향했다.

어딘가의 재래시장, 순대를 튀긴 것처럼 곱창 안에 밥풀이 잔뜩 채워진 채 기름으로 튀겨진

간식을 팔던 해맑은 꼬맹이 숙녀들. 하나만 달라는 내게 계속 두개를 디밀어주어 당황시키던.

두리안에도 제철이 있는줄은 몰랐다. 지금은 남국에도 두리안은 제철이 아니라더니, 과일시장은

온통 파인애플과 수박뿐. 조그마한 밴 위로 바늘꼽을 틈도 없이 차곡차곡 쟁여진 파인애플을

내리던 이들의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었다.

그리고 적재가 끝난 다음인지 파란색 바구니들을 탑처럼 쌓아둔 채 고단한 몸을 뉘인 아저씨.


다른 시장, 또다른 고단함. 고개를 한껏 젖힌 채 불편한 자세지만 잠시라도 쉬어 가실 수 있다면.

짜오프라야 강으로 스미는 방콕의 거미줄같은 운하들, 사람들은 마을버스를 타듯 수상보트를

타고 방콕 깊숙히 들어갔다. 그리고 좁은 운하만큼이나 가늘고 긴 배를 타고 온통 물보라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통에 저런 파란 방수포를 끌어올린 채, 검표원만 배 밖에 남겼었다.

지저분한 방콕의 운하 좌우변의 허름한 수상 가옥들을 쾌속 보트로 휙휙 지나치며 문득 눈에

꽂혔던, Joy is UP이란 저 높은 건물. 선착장에 내리니 문득 풍경이 바뀌었다. 여기는 모던 방콕.

그리고 제법 대도시스러운 복장의 사람들.

그리고 어느 재즈바, 클래식기타를 쥐뜯으며 분위기를 잡던, 그리고 그만큼의 공력을 갖췄던

태국의 아티스트가 있었다. 구불구불한 장발을 커튼처럼 늘어뜨린 채 그가 만들어내던 멜로디들.

그런가 하면 태국의 소수부족, 아마도 북쪽 치앙마이 인근에서 온 듯한 분들이 나무 개구리를

막대기로 긁으며 개구리 소리를 내기도 하고, 원색의 고깔모자처럼 생긴 전통모자를 쓴 채

여행자들에게 팔고 있었다. 대부분은 저렇게 단호한 거절, 그래도 개구리 소리는 그치지 않고.



정말 귀엽게 생긴 백인 꼬맹이들이 짜오프라야 강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유람선 앞선창에

딱 버티고 서서는 아주 신났다. 찢어질 듯 맹렬하게 펄럭이는 태국 깃발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어찌나 재미있어하던지. 녀석의 윗도리도 질세라 나부끼고 있었다.

카오산로드 바로 옆에는 커다란 복권 상설도매시장이 위치해 있었다. 방콕 구석구석을 넘어

태국의 곳곳으로 퍼지는 복권을 대량으로 구매하기 위한 사람들, 그리고 팔기 위한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잔뜩 쌓아둔 채 몇십장 단위로 끊어서 스테이플러로 묶어두는 어른들의

부산함 속에서 혼자 가판을 지키는 아이의 눈빛이 심퉁스럽다. 놀고 싶은 거겠지.

라오스에서 왔다는 Kai, 이 게이 아저씨는 내 선글라스를 굉장히 부러워했다. 아침부터 쌀국수에

맥주를 먹는 내 앞에 앉아 계속 재잘재잘, 며칠 안 되는 사이 세번이나 가서 밥도 먹고 그와 얘기도

나누는 '단골'이 되어버렸다. 남자친구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문득 시샘이 샘솟듯 하더라는.

왕실선박박물관에서 온몸을 구부린 채 배 안쪽을 수선하고 있던 아저씨. '메이아이(카메라)?'의

물음에 슬쩍 흘려주던 수줍은 미소가 참 좋았는데.

숙소로 돌아가던 길, 카오산로드로 돌아가는 숏컷shortcut, 지름길을 자기집 안방인 양

차지하고 의자에 누워 티비를 보는 가족들이 넘 웃기고 정겨운 거다. 전등 불빛과 함께

어둑한 골목길을 비추는 티비 조명.

어느 음식점들, 골목 뒷켠에 숨어 외국인이나 여행자는 눈에 띄지 않던 그 곳은 태국의

아저씨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신문을 꾸깃하게 펼친 채 달겨붙는 파리에게 엉성하게

손을 휘저으며.

그렇지만 카오산에만 들어가면 이렇게 꿈틀거리는 문신을 과시하며 벗고 다니는 외국인들 천지.

유럽인, 미국인, 아시아인들, 온갖 국적의 인종들이 몰려들어와선 그야말로 국적불명의 문화를

만들어놓은 해방구의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이렇게 온몸 가득 타투가 새겨진 마네킹이 서 있던 카오산의 그 어느 골목, 아무래도 저런 식의

타투는 그렇게 이쁘다는 생각은 절대 안 든다.

공원의 큼지막한 그늘 아래에서, 돗자리처럼 펼쳐진 초록빛 잔디밭에 기대 누운 채 책도 읽고

낮잠도 자는 금발의 아가씨들. 저런 식의 여유를 그렸던 거다. 사진을 찍고는 나도 슬몃

풍경에 끼어들어 책도 보고, 낮잠도 자고. 또 누군가 사진을 찍었을지도.

하얗게 칠해진 길다란 벤치 위에 척하니 양반다리를 한 채 신문을 읽던 아저씨가 있었다.

밑에는 커다란 개 두마리가 녹아내린 듯 땅에 달라붙어서 나른하게 잠들어있었고. 꽤나

한가롭고 평화로워보이는 풍경이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니 개들은 도망가고 아저씨만 웃었다.

조그마한 불당에 들어갔는데 아저씨가 부처상 앞을 싸리빗자루로 쓸다가 잠시 멈추더니 한참을

통화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내게 하나도 의미를 싣지 못한 채 그저 시끄럽고 야릇한 노래처럼

울렸지만, 왠지 부처는 다 이해했다는 듯 빙긋 웃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오던 날, 짐가방을 질질 끌며 공항버스를 기다리던 때. 따끈하게 덥혀진 보도블록에

앉아 눈앞에서 내달리는 차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사방으로 꼬불거리는 글씨가

창문에 가득 적힌 시내버스 한 대가 멈췄고 사람들을 쏟아냈고 다시 삼켰다. 사람들이 몸싸움하듯

오르내리던 부산함 가운데도 흔들림없던 그녀, 무심한 눈빛으로 버스를 보내버렸다.





황금산성 주펀의 메인스트리트는 지산제(基山街), 수치루(竪崎路) 정도의 굵은 골목을 따라 달린다.

실핏줄처럼 그곳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달리는 자잘한 골목들이 주펀의 볼거리, 먹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지만 여하간, 메인스트리트를 따라 우선 돌아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

붉은 홍등이 골목 양쪽으로 끊이지 않고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이곳은, 원래는 산비탈을 따라

올라가는 금광촌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금이 고갈되고 쇠락해 가다가, '비정성시' 같은 영화로 재발견되면서

관광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붓이니 먹이니, '문방사우'를 팔던 가게.

이 문어같이 생긴 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하다가 이내 알아챘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 대가리를 잡고서는

대여섯개 꽂혀있는 다리로 폭폭폭 안마를 해주는 안마기. 들고서 몇번 토닥거려보니 제법 시원했다.

고양이를 팔던 기념품점. 고양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또 정신못차리고 한참을 넋빼고 구경했다.

특히 저 낚시질하는 고양이, 흐뭇한 미소하며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두 발(네 발이라 해야 하나..)이라니.

주펀에서 자주 만났던 간식거리 중 하나, 저렇게 두꺼운 깨엿같은 걸 정말 대패로 밀어서 가루를 내서는,

밀가루를 얇게 펴 만든 전병 같은 것 위에 소복히 올리고는 그 위에 아이스크림을 두덩이, 그리고 이국적 향내

가득한 고수를 적당히 썰어 올려서는 말아서 주는 거다.

왠지 '방망이깍는 노인'의 한대목이 떠오르는 할아버지의 대패질, 아 다 깍아졌고만 뭘 계속 대패질하고 있어요.

안 팔아, 이런 참을성없는 것 같으니라고. 아니 어디서 이런 간식을 사온 거에요, 꺠엿 대패질하기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서 조금 성글게 갈아도 잇새에 끼고 너무 곱게 갈아도 입술에서 녹아버리거든요. 터헛. 멋진 할아방.

아직 대낮이건만 구간구간 이렇게 터널처럼 위천장이 막힌 골목에서는 이미 홍등이 불이 들어왔다. 온갖

음식점과 찻집, 기념품점, 간식 파는 곳으로 가득한 골목,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문득 마주친 반가운 간식, 뽑기. 박카스병같은 투명한 갈색빛이 은은히 감도는 울트라맨이니 팬더니 따위의

설탕뽑기가 20NTS. 1NTS에 대략 35원이니까 35를 곱하면 700원쯤 하는 셈이다.

죄다 혀빼물고 있는 인형들이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기념품점도 있었다. 혓바닥에 뭐라 써져 있던데, 뭐

자세히 안 봤지만 그런 거겠지 싶다. 복을 빌고 장수를 빌고 행운을 비는 그런 거.

다닥다닥 붙어있던 간판들, 홍등들, 그리고 어깨를 맞부딪히며 걷는 수많은 사람들. 그나마 가게 안에서 솔솔

흘려지는 에어컨 냉기 덕에 숨통이 트였고, 문득 잊었다는 듯 불어오는 바람이 골목통을 한번씩 훑어주는 덕에

그다지 답답하진 않았다.
또다른 간식, 커다란 버섯-아마도 새송이인 듯..-을 통째로 양념장을 발라 석쇠 위에서 구워서는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라 종이컵에 담아주었다. 버섯도 꼬들꼬들 맛있었고 양념장도 짭조름하니 쳐묵쳐묵 했다는.

이렇게 중간중간 주펀 거리의 풍경을 넣어주면 왠지 함께 골목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효과가 나지 않을까

싶어 부러 사진을 배치해 놓았는데.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럴 땐 차라리 동영상이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 내게 체류비와 적당한 월급과 캠코더를 쥐어준다면 평생 여행만 다니며 '걸어서 세계일주' 요런 거

내 나름의 버전으로 꾸며볼 텐데.ㅋ

작고 귀여운 사이즈의 나무신발이 쪼로록 진열되어 있던 기념품점, 열쇠고리처럼 쓰라는 거 같은데, 그보다는

그냥 요렇게 진열하듯 전시해두는 게 훨씬 이쁘겠다.

이건 거의 떡이랑 흡사했다. 안에 소로 들어간 게 콩가루나 견과류, 요런 거라는 점도 그닥 색다를 건 없었고

다만 따끈따끈한 상태에서 들고 다니며 먹기에 딱 좋은 사이즈라서, 정말 주펀에서 돌아다닐 때는 쉼없이

입을 놀리며 걸었던 거 같다.

잘 보이진 않지만, 수치루(竪崎路)라는 이름 아래 '수기로'라고 한글로도 적혀 있다. 아마 드라마 '온에어'에서

이곳의 저녁무렵 홍등 풍경을 워낙 이쁘게 담아놓고 나서 늘어난 한국여행자들을 배려한 게 아닐까 싶다.

산등성을 따라 걷기도 하고, 비탈을 오르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주펀의 오르막을 따라 골목길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렇게 '깜찍한' 사진을 내걸고 장사하는 가게도 만나고.

새끼 고양이들을 풀어두고 간식을 팔고 있는 집도 있었고,

또다시 고양이 인형과 장식품과 그림들이 가득한 샵도 만나고.

아직 해가 지려면 몇 시간 기다려야 했다. 주펀 만큼이나 오래된 듯 낡고 헤진 꼬질꼬질한 홍등과 방금 갓 달아둔

신품의 홍등이 얼기설기 매달려 있었지만, 그 홍등들의 행렬이 만들어내는 묘한 흥취와 분위기가 색다른 곳.





바푸온 사원에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나타나는 피미니아까스, 그리고 옛 궁전터. 건장한 금발남자 세네명이 우르르

몰려다니길래 슬쩍 끼어들어 말을 섞어봤다. 엑, 회사를 삼개월동안 쉬며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무지하게 부럽긴

했는데, 사진은 참...이상하게 찍어준다.  

피미니아까스란, 궁전 내부에 있는 사원이다. 궁전은 이미 다 헤집어져서 주춧돌만 남았다는 이야기에 가보지 않고,

그 바로 앞에 있는 사원인 이 곳만 올라갔다 내려오기로 했다. 저 어마어마한 경사도. 인간이 아닌 신이 걷는 길이라

하여 일부러 저렇게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앞에 버티고 선 사자상의 각목같은 다리가 아쉽다.

여기도 노골적으로 각목같은 사각기둥 모냥의 네 받침대 위에 둥둥 떠있는 조각상. 복원을 어정쩡하게 시멘트로

눈속임하듯 발라놓느니 차라리 저렇게 노골적으로 "여긴 파손된 부위입니다"라고 알려주는 게 솔직하지 싶다.

사원 벽면 돌 틈새에, 그리고 벽돌 한장한장에 숭숭한 구멍 틈새를 놓치지 않고 무수하게 싹을 틔운 초록생물들.

왠지 '토토로'에서 우산든 토토로가 씨앗들을 틔우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귀엽고 작은 잎새들이지만, 사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마 금세 전부 솎아내질 거다.

신이 걷던 길을 인간이 오르려니, 쉽지 않다. 피라밋 오르는 것도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로 만끽되다가 사람

몇명 떨어져 죽고는 금지되었다고 하던데, 여기 경사는 피라밋보다 더 높은 거 같다. 보통 사원 네 면에 모두

이런 계단이 있는데, 약간씩 경사가 다르다. 허물어지고 이지러진 탓도 있겠지만, 잘 돌아보면 특정 방향

계단이 일부러 좀더 완만하게 만들어진 곳도 있다.

이 곳의 서쪽 계단을 통해서만 3층의 성소까지 갈 수 있다. 경사가 약 40도에 이른다는 이 계단 아래에도 여지없이

'곰팡이처럼' 피어난 녹색의 여리여리한 이파리들. 이 계단 말고 돌계단을 직접 밟고 가다 보면 가끔은 덜컹덜컹

움직이는 계단석이 있었다. 순간 움찔하게 되는 상황.

3층 성소에 해당하는 지역. 예전에는 원래 ‘황금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3층 꼭대기.

원나라 때던가, 중국 사신이 이곳에 거주하며 남긴 글에 따르면 여기가 온통 황금으로 치장된 그곳이라지만,

지금은 네발짐승처럼 팔다리를 온통 몸무게 지탱에 쓰는 여행자들만이 굳이 올라가 보는 곳.

낑낑 올라가서 내려다 본 피미아니까스의 연못. 여기는 왕과 왕비가 동침하기 전에 스르륵 옷가지를 풀어헤치고

몸을 씻던 곳이 아닐까, 아니면 얼핏 어디선가 본 것처럼 후궁들이 몸을 씻었던 곳인지도. 힌두교의 사제들은

정절을 어케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 곳에서 딱 이런 시선으로 마치 나뭇꾼이 선녀 목욕 훔쳐보듯 밤마다

벌건 눈으로 두리번거렸을지도 모른다.

어느 사원 근처에나 쭉 늘어서 있는 행상들. 잡다구레한 액세서리도 팔고, 시원한 물과 음료는 기본이고 코코넛을

큰칼로 손질해 즉석에서 빨대를 꽂아 코코넛주스를 팔기도 한다. 그리고 예외없이 눈크고 이쁘장한 아이들까지 완비.

사람 댓명이면 꽉 차버릴 만큼 좁은 정상에는 향꽂이랑 조그마한 함이랑 뭐 그런, 예불 드리기에 딱 좋은 일습이

구비되어 있었다. 뭐랄까, 저 사진만 보면 왠지 계룡산이니 마니산이니, 그런 곳에서 예불을 보거나 나름의 종교의식을

치르는 분들의 장비랑 그 분위기랑 비슷하다.

앙코르왓의 돌들은 전부 이런 사암석, 라테라이트라고 한다던가. 흙을 물에 개어서 벽돌을 만들면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벽돌이 된다고 했다. 부분부분 누런색이 끼어있는 걸 보고 혹시 과거의 금칠이 남아있는 건가

눈을 크게 뜨고 꼼꼼히 뜯어봤지만 아니었다는. 손톱으로 좀 긁어봤어야 했다.

내려가는 길에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올라오긴 햇는데 막상 내려가려니 그 체감하는 경사가 또 다른 게다.

밑에서 올라오려 기다리는 서양 아주머니들이 몇 분 있길래, 위에 아무 것도 없다고 얘기해줬더니 마침 잘됐다

싶은지, 냉큼 앞장섰던 의욕에 찬 아주머니 한 분 손을 이끌고 뒤로 이끄셨다.

사진이 좀 작게 찍혔는데, 저 달구지 같은 것 위에 올려져 있는 건 무슨 조각상의 몸통이다. 아마도 배꼽부위쯤.

그야말로 유적이 발로 차이고 홀대받을 정도로 넘쳐나는 공간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수퐁나무, '툼레이더'에서 그 신비로운 폐허를 만들어낸, 그밖에도 다른 앙코르왓 유적들을 잡아삼킨 주인공이다.

마치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두려울 정도로 거대하고 거침없는 이 나무는, 그래도 현지인들에게

큰 효용이 있다고 한다. 저기서 나오는 검정액체가 일종의 기름 대체물이 된다는 것. 호롱불도 밝히고, 배도 용접하고.

그러고보니 캄보디아는 여전히 전기가 귀하여 어두워지면 이곳 사람들은 바로 잠자리에 든다고 한다.

궁전터를 돌며 마주친 또다른 연못. 어렸을 적 동남아 지역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던 내용 중에는, 비가 오고 나면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기는데 그 안에서 바로 고기들이 뛰어논다던가. 그토록 풍족하고 먹기 살기 편하다는 정도의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발전이 늦었다느니, 식의 왜곡된 사실까지는 당시에도 별로 와닿진 않았지만,

비가 내리면 물고기가 뛰어노는 물웅덩이가 생긴다는 이야기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문득 무너져 내린 왕궁 담장. 나무들이 빼곡하고 잎사귀가 무성해서 시야가 많이 가리지만, 답답한 느낌보다는

뭔가 야~ 눈이 좋아지겠다, 라거나 피톤치드를 많이 흡수하겠네, 라는 식의 상쾌한 기분.

쭉쭉 뻗은 미끈한 나무들. 잘 생겼다, 라는 느낌도 있지만 워낙 크다. 머리 하나쯤 큰 서양인의 훤칠하고 우월한

골격을 보는 것 같다.

온통 녹조류가 끼어서 초록빛 스프가 고인 것처럼 되어버린 연못. 뭔가 신비한 것이 저 아래 숨어있지는 않을까,

마주한 연못 하나가 문득 몽환감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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