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 최진실, 노무현, 정몽헌, 최진영..활자화된 이름들의 죽음 이외에도 도처에서 학생이,

회사원이, 주부가, 아이가 죽음을 선택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선택에 대해

원망하고 훈계한다. 더러는 비웃음이 섞인 훈계일지도 모른다. 니가 힘들다는 그 삶, 난 잘 살고 있는데..하며.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 사람에 한번쯤 생각해본 사람까지 합한다 해도, 어쨌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그들은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의 이름으로 자살의 경박함과 무책임함을 비난하고, 사회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살을 단죄하는 판이라 그렇다. 이미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살려두기 위한 '반면교사'나 '예외'가 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같다.)

(참고 :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


"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생명 법칙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또 일견 그럴 듯 하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하고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채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역할과 기대가 그(녀)에게 감겨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변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아픔/손실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란다. 잠시의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나약함의 소산이라고도 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과 같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증좌라며 심리적/생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곁들여진다. 게다가 여전히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등의 종교적인 믿음이 단단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자살학의 진단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인생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당사자만이 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힘들다는 사람들을 끌어와 앉혀서는, 니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뭐가 되겠니, 하며 니가 맡아야 할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압박이다. 단적으로 최진영의 죽음이 그랬다.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조카는 어떡할 거냐, 엄마는 어떡할 거냐, 누나 볼 낯이 있겠냐, 따위 오지랖 넓은

한가한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본인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과정 끝에

죽음을 선택한 건지 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의 노력은 없었다. '우울증'이란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그(자살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메리가 굳이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쓸 만큼, 자살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래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으로 스러지고 만다는 깨달음을 거쳐야 가능한 거다.

자살하고 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고,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회성/기능성'에 기반한 사회의 협박 이외에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는 강렬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의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최고로 가치있는 자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고자 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자연본능과 사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다.

나는 자연적인 죽음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온갖 생산활동-애낳고 밥벌이하는-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부한다.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생명체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보전의 대원칙까지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하건대 더이상의 삶은 부질없는 생명의 연장일 뿐 죽음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지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그것은, 아메리가 말하듯, 삶을 던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지키겠다는 모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적인 판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개개인마다 다를 거다. 다르지만

또 같을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한다. 에셰크(Lechec), 치욕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죽음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더이상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더이상 없는 중증 환자, 삶의 전부라

여겼던 사랑의 실패자, 심지어는 대입시험에 실패한 사람, 남들 눈에 어이없고 하찮아 보일 문제라 해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다. 삶의 결정적 순간은 본인만이 안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그러나) 지성의 논리로 볼 때 자유죽음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자유죽음을 택한 결단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인간성'과 '존엄성'에 기댄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생과 '에셰크'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죽음으로 직접 끝낸 인생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자살할 권리'는

복권되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행하기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스스로의 자유를 체감하고 밀도높은

삶을 살았다고 본인이 느낀다면 본인 이외 다른 누가 그 삶에 대해 주제넘은 훈계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아메리는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욕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목하려고 한다. 꾸역꾸역 생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겠다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삶의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지켜낼 자유를 극한으로 수행하고자, 맹목적으로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하이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퀸,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융통성없고 고집스러운, 순진하다 못해 꽉 막힌 쑥맥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에셰크'에 공감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계와

비웃음, 그리고 권해지는 자연적인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인 거다. 우리 사회의 드높은 자살율엔 이유가 있다.







#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삐져나오면 '요새 삶이 힘드냐', '우울하냐'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그럴 때만 입에 올려야 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을지 살지의 문제가 김밥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의 문제만큼 유쾌하거나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꼭 우울하거나 피폐해졌을 때만 떠올려야

하는 건 아닌 거다. (그렇다고 요새 내가 삶이 힘들지 않다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건 아니..ㄹ 거다.)


진지한 것과 우울한 건 다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병들고 패배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봄이라고, 볕이 따시다고,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 죽음을 터부시할 이유가 하필이면 손꼽을 수 없을만큼 쌓여있는 이 때라도, 살아갈 자유가

있다면 동시에 죽을 자유도 있는 거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죽음 - 10점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김남시 해제/산책자


* 알라딘 4월 마지막주 이주의 TTB에 선정되었습니다.



* 스포일러 없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만..


어느 예술작품이나 그렇지만 특히 SF나 환타지류의 작품들은 특히나, 현실에 대한 은유와 시사점이 더욱

눈에 밟히게 마련이다. 맨 땅에 헤딩하듯 백지에서 뻗어나온 상상력이 아니라 감독,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소구할 수 있는 특정한 현실을 울룩불룩 비틀고 치환했기 때문에 그럴 거다. 이미 이 외계인'떼'가 등장하고

거대한 우주선이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떠있는 굉장한 스케일의 SF영화 역시, 빈부격차, 철거민, 성적 소수자에

이주노동자, 심지어 '호모 사케르'(이미 서평을 올린 적 있다.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라는
 
개념까지 동원해서 해석되고 있다.



워낙 다 맞는 지적들이다. 영화 중 드러나는 외계인과 인간의 대치 상황, 역관계를 고려하면 외계인은 구조적

빈민, 철거민, (지탄받는) 동성애자라거나 이주노동자, 그렇게 이 사회에서 밀려나고 배제당한 사회적 약자의

뚜렷한 상징이 분명하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받고 도외시되는 2등 국민인 거다. 피가 튀고

살점이 씹히고 하는 화면도 걸쭉하니 살벌하지만, 그보다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용병에게 사냥당하는 그들의 처지가 더욱 살벌하게 와닿는 이유다.
 

새삼 말을 보탤 필요도 없이 다양한 해석들이 설득력있게 나왔지 싶다. 하나만 딴죽을 걸자면, 외계인의 처지는

현실세계의 '2등 국민', '호모 사케르'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비록 지도층이 지구 착륙시 대부분 사망해버려

무질서한 군집을 형성한 채 지구인으로부터 천대받고 살지만, 그들이 가진 과학기술은 인류보다 월등한 것이
 
분명하고 정신문명 역시 최소한 낮지는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그들은 원래 (지구인에 비해)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20년동안 멈춰있던 우주선 덕분에 사람들의 두려움과 일종의 경외감 역시 화석처럼 딱딱해져 버린

건지, 다행히도(?) 지구인들은 그들의 약자에 대한 잔혹함을 외계인들에게 여지없이 발휘한다. 덕분에 영화는

3년 후를 기약하는 장면으로 거침없이 내닫을 수 있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외계인들을 돕는 주인공 남자,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키를 쥔 쪽은 외계인임을

깨닫게 된다. 남자는 끊임없이 비열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계산적으로 행동해 왔지만, 그 계산과 복잡한 속셈은

모두 '인간>외계인'이라는 부등호 위에 버티고 서있었던 건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외계인이

수송선을 숨겨두었다는 걸 알게 된 즈음일 게다. 과거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엑스칼리버'같은 그것.) 그는

이제 외계인이 자신의 명운을 쥐고 있음을, 또 자신과 다른 외계인들의 복수를 해줄 것임을, 그럴 수 있는

힘과 의지와 '선의'를 갖고 있음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을 향해 입을 벌렸던 부등호가 등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궁금해지는 건 그거다. 3년 후, 외계인들이 돌아왔을 때 남자는 인간으로 남기를 고집할까. 선택권이

그에게 남아있기는 할까. 우연찮게도 3년 후, 영화가 개봉한 해를 기준으로 하면 2012년인데, 또다시 2012년의

대재앙을 예고하는 영화인건 아닐까 싶다. 그가 되찾고 싶었던 과거는 사실 그의 아내, 그녀의 사랑 그자체다.

어쩌면, 변신이 완료된 그의 절절한 소원을 뿌리치지 않을 만큼 '인류애, 휴머니즘'을 가진 듯한 외계인들의

배려 덕분에 인류 마지막 아담과 이브가 되어 새로운 별로 이주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이제 인류, 라기보다는

'인류였던' 남녀 한쌍이 되어.


사실 어느 순간 '외계인'이라는 단어가 혼란스러워진지 오래다. 그들은 외계에서 왔지만 지구에 거주 중이다.

그들과 우리, 가 칼로 자르듯 더이상 산뜻하게 갈라지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외계인'이란 존재를 철통처럼

포박한 채 물 위의 기름처럼 분리시키고 있던 그 온갖 제재와 표식들은, 그 부적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무작정 밀쳐버리고 떠밀기만 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대책없이 소멸될 예정이다. 단, 외계인이 힘을 회복했을 때.



#0. 들어가기 전.

이 책은 형식상 두 파트로 나뉜다. '대중의 흐름', 그리고 '지식의 운명'. '운동의 선언'이란 파트가 덧붙어 있기는
 
하고,
특히 마지막의 '코뮨주의 선언'은 앞선 '대중의 흐름' 파트의 행간을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는 힌트들이

가득
담겨 있지만, 일단은 선언들을 제하고 앞의 두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 담긴 것들이 너무 많다. 1부에서는 아감벤이 말했던 '배제함으로써 포섭하는 생명정치'에 대한 이야기

(이미 나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해 포스팅한 바 있다.[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부터

시작해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가속화된 국민의 추방, 촛불시위의 전말에 대해 내가 본 중 가장 깊이있고

냉정하게 내려진 해석, 폭력의 문제와 혁명의 문제 등이 줄줄이 다루어진다. 물론 그것들은 연속해 있지만, 동시에

하나하나 녹록치 않은 어려운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만큼 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갈 여지도 풍부한 소재들이란

뜻이다. 거기에 더해 2부에서는 지식인의 현재적 의미, 대중지성과 그에 대척하는 테크노크라트의 문제, 그리고

현장인문학이란 문제의식의 제기, 앎과 삶의 관계가 말해진다. 고병권 그가 생각하는 선언이란 "말한대로 살아야

하고, 살아온 대로 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충실한 살아있는 무엇인가이며, 그의 이 책 역시 그 자체로 "이명박

정부, 정부로부터의 탈주"를 선언하는 선언문 같아 문득 이 책을 읽는 자세를 가다듬기도 했다.


어떻게 리뷰(혹은 이 책의 얼개를 뜯어 내 사고와 뭉쳐내어선 다시 풀어낸 글)를 쓸까 고심하다가, 나름 중요하다

생각하는 세 가지 지점을 잡기로 했다. 우선 국민들을 추방시키고 있는 정부(특히 벌써 망각되고 있는 용산참사와

관련해서), 두번째로는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사제들의 개입과 승리선언의 평가, 마지막으로는 '선언'이라는 단어로

고병권 그가 담고자 하는 실천적 의미가 무엇일지. 한없이 길어지겠다 싶어서 두번으로 나누어 올릴까 생각중이다.



#1. 국민을 추방하는 (이명박) 정부.


정확히 말하자면 노무현과 이명박 정부, 그리고 그 앞선 시대의 정부들에 대한 환상을 던져버리라 한다.

사실 이미 사람들은 모두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환상이 부질없음을 알고 있으며, 질릴 대로 질려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누가 되건 똑같은데 왜 괜히 핏대 세우나." "지들끼리 해먹지."

              ▲ ⓒ연합뉴스

이명박이 지금 벌어지는 만악의 근원일까. 이명박 등장 이후 부쩍 늘어난 노무현에 대한 향수,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되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 무엇보다 마치 이명박 정부 혹은 이명박 개인이 이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인 양 치부되는 경향이 없지 않은 사회 분위기를 본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급기야 경찰국가,

민주주의독재국가로 치닫고 있는 이명박 자신이 자초한 면이 매우 크지만, 또한 노무현의 말만 앞섰던 번지르르한

립서비스가 남긴 잔상들 탓도 있을 게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의 재개발 정책, FTA 추진을 비롯한 시장개방 정책, 감세 정책, 무한경쟁식 교육 정책,

부동산 정책, 비정규직 처우와 관련한 노동 정책 등등. 하나하나 논의의 여지가 큰 이슈들이지만,그런 것들은 사실

노무현 정부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고, 말마따나 '설거지만 하는 수준'으로 이어받았다 자인하기조차

하는 게다.  그렇다면 최소한 지난 십여 년간의 한국 사회를 꿰뚫는 연속적인 흐름은 잡아내는데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실은 고병권 그가 말했던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의 연속성을 실증적으로 책 안에서 보여주지는

않고 있지만, 중요한 건 정권 교체 따위로 역전되지 않는 하나의 도도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라 한다. IMF가 잠시 거세게 몰아치는 삭풍이라 여기며 잠시 후면 다시 잔잔한 일상이 도래할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직면했던 것은, 그칠 줄 모르고 불어제끼는 삭풍이 곧 일상으로 화해 버린 현실이었다. 구조조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구조가 되어 위기를 일년 365일 안고 살아야 하게 되었다는 인식. 그런 상시적 위기는 마치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 빼곡히 올라앉은 사람들을 가장자리에서부터 조금씩 바닷속으로 밀어내듯, '국민'이란

이름으로 지켜지는 사람들을 조금씩 줄이고 있다. 이주 노동자,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철거민, 농민, 빈민,
 
노점상인, 장애인, 공고 졸업생, '지잡대' 졸업생, 4년제 대학 졸업생, 20대 청년...계속해서 밀려나고 있는 거다.

취업시장은 얼어붙었고, 채 세워지지도 않은 사회적 안전망은 허물어졌고, '금모으기운동'은 씁쓸하고 부끄러운

기억이 되었다. 

         [손문상의 그림세상]<172>"세입자도 국민이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30165117&section=03)

그들은 이제 '국민'이 아닌 국가 내부의 난민이 된다. 더이상 이들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국민','시민'이란

단어로 불리워지지 않으며, 다만 점점 줄어가는 그 정체모를 '국민'의 이해를 위해 계속해서 양보를 강요당하게

된다. 용산참사에 대한 반응도 그렇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그들은 대한민국 내부의

테러리스트"라는 등, 철거민(세입자)는 더이상 우리와 같은 국민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병권의 지적처럼,

이러한 경계로 몰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날것의 국가권력을 두고 합법과 불법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통제받지 않는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며 게다가 일부 언론과 검찰의 사후 추인을 동원하는 

국가권력에 비해,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고 말아 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는 "추방된 국민"들이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그렇지만 얼마나 빠른 속도로 그들이 불어나고 있는 것인지.

               ▲ ⓒ프레시안

경찰국가, 혹은 민주주의 독재국가가 도래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해 더이상 세련되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데서 기인한다는 게 고병권의 지적이다. 국민된 권리로부터

추방당한 채 방치된 '2등 국민, 3등 국민'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정부의 위협 요인이며 불안 요소일 수 밖에 없다.

연인원 수백만명이 거리로 나섰던 지난 촛불정국에서, 명박산성으로 상징되는 이명박정부의 앙상한 대응태세는

권위와 시스템의 외피가 지워진 국가권력의 추하고 무능력한 쌩얼을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때 잠시나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노래부르던 사람들에게 힘이 돌아왔다고 느낄 정도로, 정부의

절대적이고 늘 신성해야 할 외관은 심히 손상되고 헐벗어 있었다.


용산참사를 두고 찧고 까부는 사람들 역시 분칠된 국가권력의 추악성, 비인간성을 노출시키고 있다.

인간으로 살아갈 기본적인 권리, 생존권을 절박하게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법질서를 우선하라고 윽박지르는

것만큼이나 추악하고 본말이 전도된 장면이 또 있을까.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채 덕지덕지 존엄함과 지고함을

두르고 있는 정부 시스템이 요란스레 작동해서 '국민 모두가 살 길', '재발 방지와 선진화의 길'의 찌라시를 뱉는

동안, 그 '국민이 주인된다는' 권력의 원천인 여섯 생명이 한줌 재로 화했던 충격적인 사건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장면. 비극적인 것은, 국민들이 계속해서 추방당해 '한발 재겨딛을 곳조차 없는' 백척간두의 위기속으로

몰리게 될수록, 이러한 추악한 권력의 맨얼굴을 대면할 일이 점점 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를 다 봤는데 우울하네..거대한 수용소에 배제된 채 포섭된 벌거벗은 직딩이야."

- 힘내라 쉽지않지 뭐..

"얘는 근대국가서 숨쉬는 생명 자체가 trapped된 거라고 말하는데 어째야 할지는 모르겠단 거 같네.."

- 그게 사실이래도 나가죽을순 없잖냐ㅎ

"짐 이런 책 읽어 모에 쓰나 싶기도 하고ㅋㅋ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고"

- ㅋ적당히 생각하고 살기도 쉽지 않은데 대단하네

"하도 멍청한데 요새 더 멍청해져서ㅋ 지극히 자족적이고 개인적인 이유랄까."


어제 퇴근하고 오는 길에 드디어 '호모 사케르'를 다 보았다. 저번달 말부터 읽기 시작하면서 주로 출퇴근 길에

짬짬이 읽다가, 휴가 기간 끼고 전철 안에서 자고 하다 보니 근 삼 주넘게 걸린 듯 하다.

뭐랄까,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다 보니 막막하기도 하고, 아직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치받아서 친한 선배와 문자를 주고 받았다. 고작 한 번, 그것도 띄엄띄엄 끊겨가며 읽었지만 이 책은 뭘

말하고 있는 걸까..그리고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뭘까 정리되길 바라며.


가장 눈에 띄는 건 배제는 곧 포섭이라는 일견 역설적인 아감벤의 지적이다. 구조로부터 배제됨으로써 곧

그 구조 자체에 포섭된다는 이야기는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매우 통찰력있는 지적이다.

고국의 정치 현실로부터 떠밀려난 망명자, 혹은 비적떼나 해적과 같은 경계지의 범죄자가 누구보다

그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다는 사실, 아감벤이 지적한 대로 나치 하의 독일에서 금별 유대인과 검은별

집시 등이 있어 시민권과 생명을 박탈당함으로써 곧 그 구조 자체에 '배제자'로서 포섭되는 걸 보면 그렇다.

아, '예외'라는 라틴어의 어원상의 의미 자체가 '외부에 포함되다'라는 지적도 의미심장하다.


근대국가와 그 주권자는 누군가를 배제시킴으로써 포섭하고, 포섭함으로써 배제한다. 그러한 끊임없는

경계-지음은 사회의 존속에, 국가가 의도하는 시스템의 존속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자유주의적 정체든

사회주의적 정체든 '인민(people)'이란 단어가 갖는 수많은 균열선의 흔적이 그 강력한 증거 중 하나라고 하며,
 
그 점에서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의 정치적 상상력이 갖는 한계를 시사한다.


정치라는 것 자체가 희소한 자원인 권력을 불균등하게 나누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러한 경계(그게 계층이던

계급이던 혹은 다른 무언가던간에..) 자체는 유사 이래 지속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나치와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보여주었던, 혹은 푸코가 이미 지적했던 '경찰국가, 혹은 근대 행정의

탄생' 이래 인간의 몸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심화되는 현상이다. 아감벤은 아렌트와 푸코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도 인간의 생명 자체가 정치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대 국가 혹은 주권 권력이 인간의

생명을 직접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지난 수천년동안 인간은 생명을 지닌 동물이면서 덤으로 정치적 삶을

누릴 능력까지 갖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근대의 인간은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로 바뀌었다.("~"는 푸코, "앎에의 의지" 중)


아감벤이 주목하는 건 나치 하의 수용소가 근거하고 있는 법적, 철학적 기반이다. 흔히 사람들은-그리고 아마

유대계 네트워크의 강력한 활동에 의해 추동된 사람들은-나치 하 유대인들이 겪었던 수용소 생활이라거나

비인간적으로 다뤄졌던 온갖 사례들에 분노하며, 그 '비정상성'과 '비인간성'에 탄식한다. 그렇지만 그에 따르면

나치 하에서 이루어진 수용소, 생체실험 등은 비단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막론하고 생명 자체가 정치의 담보물이 되는 근대국가, 주권권력에 있다는 거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책들은 꽤나 나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감벤은 그런

차원에서 한 걸음 더 근본적으로 들어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배제가 곧 포섭이라면, 이른바 푸코-그리고 아감벤-의 '생명정치'는 곧 '죽음의 정치'와 같다.

뇌사, 안락사의 문제에서 보이듯 일부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기인한 생과 사의 경계 획정문제자체가 정치화되어

주권국가와 그의 법에 좌지우지되는 생명의 개념, 복지국가의 아이디어에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국민)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고 그 생명의 생산성과 건전성을 확보하겠다는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그치만 한국에선 여전히

낯설기만 한-오랜 추세, 국적을 벗어던지는 순간 인간으로서 아무런 존재증명이 불가능해지고 마는 불가사의한

난민의 지위, 나치뿐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 영국 등에서도 쉼없이 행해졌던 재소자 및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인간 모르모트). 그리고 아마 근대 이전과 달리 은밀하고 구조적으로 행해지는

사형제도 역시 그러한 생명정치, 곧 죽음의 정치가 만연한 하나의 징후가 아닐까 싶다.


그런 그림이다. 나면서부터 특정국가에 소속되어 생명을 담보잡히고, 그에 따른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는

대신 언제든 내 생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주권 권력. 만약 그걸 거부한다면 '벌거벗은 생명'이 되어 사회적

생명뿐 아니라 신체적 생명까지 보호 내지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그런 상황에서, 나치 혹은 그와

유사한 국가권력이 언제든 '생명(국민)'의 정치적 헌신과 복종을 요구하는 경우 배제된 채 포섭된 유대인, 집시

혹은 타자화된 다른 누구라도 멸절시킬 수 있다는 거다. 그 모든 건 이미 거대한 수용소처럼 짜여진 국가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 생명을 보다 공고히 지배하고 장악하려고 혈안인 주권 권력.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뭐 여러가지로 빗대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선명하게 나타났던 건 역시 최근의

쇠고기 사태에서 드러나는 것 아닐까 싶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라는 문구가 관용구화되었단

사실 자체가 국민 생명의 소유권이 어디로 넘어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 무색치 않을 정도로 심각해진 '비정규'라는 예외의 문제라거나, 황우석 사태로 불거졌던 인간배아의

존엄 문제..등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의 주권 권력은 생명을 쥐고 흔들려고 한다.


...그밖에, 내가 느끼는 감정은...그런 거였다. 예컨대 유모차 부대로 촛불시위에 나섰던 사람들이 경찰에 소환되고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 이를 찬성하는 사람,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런 논쟁의 틀을 마치 체스판

위에서 양편의 말을 내려보듯 분석하며 보다 큰, 근본적인 이야기를 던지는 게 아감벤이다. 경찰조사가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법치를 내세우고, 반대하는 사람이 법의 횡포를 말한다 쳤을 때 아감벤의 이야기는 아마도 국민의

저항권 내지는 근본적으로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성찰쯤 될 수 있단 얘기. 너무 멀다.


대학교 다닐 때와 달라진 거라면 좀더 사고가 현실적이고 땅바닥에 붙어버렸다는 사실이지 싶다. 그때라고 뭐 이런

이야기들이 딱히 구체적인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와닿았겠냐만은, 최소한 그때는 지금만큼 몸이 무겁지는 않았고

마음도 무겁지는 않았다. 책을 보면서는 어떤 부담이나 이질감없이 그 사유체계를 내맘대로 유영할 만한 여유가

있고, 가능성이란 게 있었던 거 같은데..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이

그저 한번 읽었을 뿐인 책에다가 화풀이하듯 손에 잡히는 이야기를 해라, 대안을 내놓아라, 이렇게 딴지를

걸고 있다.

호모 사케르 - 8점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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