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처음 문 연 날 가보고는 두번째로 찾아간 까페. 방송대 옆에 있는 고색창연한 낡은 건물 '예술가의 집' 안에

있는 슬로우가든이다.

천장이 높아 소리가 웅얼웅얼 울리거나 답답하지 않고, 은은한 조명이 샹들리에 크리스탈에 마구 반사되어 한결

부드럽고 화려해졌고, 그리고 테이블 간격이 널찍널찍해서 다른 사람에 방해받지 않고.

브런치세트가 오후 세시까지. 와플세트랑 토스트세트가 있던가. 하나씩 시켰는데 샐러드 드레싱도 맛있고 양도 솔찮던.

프렌치토스트는 포실포실하니 촉촉했고, 벨기안와플은 보들보들하니 부드러웠고. 탱글탱글한 소세지를 뱀처럼

빈틈없이 휘감고 있던 도톰하고 쫀득거리던 베이컨까지.

연극을 보고 나서 돌아가는 길, '예술가의 집'로부터 새어나오는 노랑색 불빛.

알고 보니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슬로우가든' 지점이 존재하는 체인이라고 하는데, 최근에는 삼청동에도

체인점을 냈나보다. 체인점이 번지는 속도도 슬로우슬로우.





대학로 학전그린소극장, "빨래"를 보았다. '빨래는 뮤지컬입니다'라는 카피가 앞세웠듯, 대학로하면 대개 연극만

오른다 생각하기 쉽지만 '빨래'는 뮤지컬이다. 이렇게 즐겁게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공연 중에는 물론 사진을 찍거나 휴대폰을 꺼내들 수 없다. 공연 시작전, 가실 줄 모르는 맹렬한 꽃샘추위에

일찍 도착한 공연장 안의 무대를 이리저리 구경하며 사진을 살짝. 교회와 청담보살, 맥반석오징어와 국제전화카드.

뮤지컬 제목에 어울리게 무대 뒷편은 온통 조그맣게 나부끼는 빨래들이 차지했고, 앞줄에도 저렇게 속옷들과

작은 옷가지들이 빨랫줄에 널렸다. 대학로의 여느 공연장들이 그렇듯 바로 무대 코앞까지 치고 나온 객석.


무대를 곰곰이 살피다보면 자그마한 곳 하나, 눈길이 채 닿지 않을 곳 하나까지 디테일하게 신경쓴 흔적을 찾게 된다.

예컨대 이런 거. '미러 유~' 무대의 한 구석에 있는, 허리를 굽히고서야 들고 날 것 같은 조그마한 슈퍼 문짝에 쓰인

글자, 이걸 적어넣은 사람은 아마도 무대에 자기나 눈밝은 사람 몇몇이나 발견할 비밀을 새기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인터미션 10분을 포함한 총 공연시간 150분, 어떤 사람은 예기치 않게 눈물을 펑펑 흘렸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생각보다는 슬프지 않았다고도 하지만, 150분의 시간이 꽤나 밀도있게 휙 지나버린 건 확실하다. 여주인공 나영 역을

맡았던 조헌정, 남주인공 솔롱고 역을 맡았던 정문성이 한판 뮤지컬을 마치고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넙죽, 인사를 마치고 일어선 나영이의 머리가 온통 하늘로 치솟았다. 강원도 처자가 서울에 올라와 오년동안 숱한

어려움과 신산스러움을 견뎌내며, 아니 어쩔 수 없으니 그저 배겨내며 잘도 참았다. 그녀의 노래 중 가장 맘에 꽂혔던

가사는,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라던 부분.

그리고 1막이 끝나기 직전에 나왔던 노래, '비오는 날이면'에 맞추어서 펼쳐졌던 군무. 고작 한사람 어깨까지만

가릴 수 있을 우산을 쓴 채 사방을 뛰어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후드티만 올려쓴 채 멍하니 서있는 몽골청년 솔롱고.

우산 하나에 의지한 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외롭고 연약해보였지만 한가운데 동그마니 멈춰선 그의

모습은 그자체로 어찌나 저릿저릿하던지. 누군가가 바쁘고 힘든 걸음을 멈춰 그에게 우산 한곁을 내주기를, 그래서

그와 함께 외로움을 덜어버릴 수 있기를 바라게 될 만큼.

조헌정-정문성의 인사. 두 사람 아주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셔. 그러고 보니 검색중에 알게 된 사실.

내가 좋아하는 홍지킬, 홍광호도 '빨래'의 솔롱고 역을 이전에 맡았었다는. 그의 노래는 어땠을까 다시 궁금해서 검색질.


홍광호가 부른 '참 예뻐요'. 참 예쁘게 부르는구나. "참 예뻐요~ 내맘 가져간 사람~"

관객들에게 인사하던 마지막 장면. 비누방울이 퐁퐁 날리며 '빨래'의 이미지를 극대화하는가 싶더니 모두가 활짝

웃으며 우리를 다시 현실로 돌려보내 버렸다. 이곳은 아직,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야 하는" 그런 세상. 그렇다 해도 잠시나마 그들의 응축된 잘 짜인 이야기에 빠져들며

눈물 한방울이라도 흘리고 마음을 빨고 털고 널어두는 느낌을 가졌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싶다.





영화가 끝났다. 혜화는 절룩거리며 뒤에서 걷고 있는 전 남자친구 한수를 한참이나 백미러로

응시하다가, 기어를 쥔 손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었던 참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기어를 'R'에 맞추고 차를 뒤로 움직였다. 클로즈업된 그녀의 얼굴,

그야말로 수만가지 감정이 실린 수만가지 표정이 드러나있었다.


그건 그녀가 살풍경한 철거촌에서 낑낑거리는 강아지를 챙겨올 때의 표정이기도 했고, 배신한

남자친구를 오년만에 조우했을 때의 표정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아이라 믿던 아이를 바라볼 때의

표정, 자신 때문에 잔뜩 쪼그라든 엄마를 볼 때의 표정, 그리고 내심 따르던 동물병원 원장의

결혼소식을 들었을 때의 표정이기도 했다.


그치만 그녀의 눈빛에 '단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하고, 겁나고, 화나고, 막막하고, 스스로도

자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그런 떨림이 가득했었다. 단순히 남자친구를 다시 받아줄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갈 건지, 그녀의 주위사람들과 세상은 계속

그녀를 몰아세우며 답을 요구했고, 더이상 멈춰선 채 답하길 주저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움직였다.


뭐였을까. 그 장면을 위해 영화는 달려온 거였을 거다.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는 혜화의 그

표정에 다다르고, 그걸 공감할 수 있도록 달려왔다. 자신을 배신했다가 불쑥 나타난 남자친구

앞에서, 죽었다 생각했던 아기가 살아있다는 소식 앞에서, 그밖에 자잘한 삶의 장애물과 고난에

주춤거리며 멈춰섰던 혜화가 다시 움직이는 순간. 영화의 제목처럼 '혜화, 동(動)'하기 위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혜화의 저 착잡한 눈빛과 입술모양, 눈물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그녀는 말했었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거잖아.' 유약하기만 한 남자 앞에서

이토록 당당했던 그녀라면 어쩌면 기어는 'D', 앞으로 움직였여야 했던 거 아닐까. 아니면

그녀는 또다시, 자신이 짊어질 짐의 크기를 하나 더 키운 걸까.


그리고 크레딧이 올라가며 달콤하고도 씁쓸하게 울리는 노래,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

'안 돼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이 노래가 굉장히 양면적인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전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단 것, 그렇지만 그게

앵콜같은 반복이 아니라 리셋, 새로운 이야기라면 혹시 모르겠다는 것. 갸냘픈 희망고문.


그렇지만 이 영화에선 그 이상의 의미가 담긴 건 아닐까.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라, '앵콜'이던

뭐던, 주문하고 요청하는 세상에 대한 노래로 읽을 수는 없을까. 그녀가 황량한 삶 속에도 버려진

강아지들을 계속 품어내듯, 누군가 타인의 (앵콜) 요청과 무게에 짓눌리지 말고 스스로의 노래를

스스로의 의지로 계속 부를 수 있도록. 그에게 돌아가서 손을 내밀 테지만 그건 더이상 '앵콜'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 잡아주고 나서 계속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이제 다시 움직이는 그녀에 대한, 그녀의 삶에 대한 응원가인지도 모르겠다. 앵콜요청금지.



앵콜요청금지. (브로콜리 너마저)


안 되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있다 해도

더이상 날 비참하게 하지 말아요

잡는 척이라면은 여기까지만

제발 내 마음 설레이게

자꾸만 바라보게 하지 말아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냥 스쳐지나갈 미련인걸 알아요

아무리 사랑한다 말했어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때 그밤이 부른다고 다시 오나요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순 없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이런 말하는 그런 내가 잔인한가요


제발 내 마음 설레이게

자꾸만 바라보게 하지 말아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냥 스쳐지나갈 미련인 걸 알아요

아무리 사랑한다 말했어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때 그 밤이 부른다고 다시 오나요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순 없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이런 말하는 그런 내가 잔인한가요

아무래도 네가 아님 안 되겠어

이런 말하는 자신이 비참한가요

그럼 나는 어땠을까요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순 없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이런 말하는 그런 내가 잔인한가요


안되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있다 해도

더 이상 날 비참하게 하지 말아요

잡는 척이라면은

여기까지가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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