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육체를 (잃어)버린 시대의 사랑에 대한 영화랄까. 영화 속의 풍경은 현실같으면서도 묘하게 비틀려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OS를 개인비서삼아 말로써 기능을 조작하고 명령을 내리고, OS와의 연애가 쿨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인공지능을 가진 OS는 한꺼번에 팔천명의 사람과 대화하고 그 중 육백명의 사람에게 사랑을 말한다. 섹스는 스마트폰 너머 누군가와의 스마트한 폰섹으로 대체되거나 인공지능을 가진 OS에 이끌린 자위로 대체되는 형편이다. 거리에 나서보아도 사람들은 전부 OS와 이야기하느라 허공에 대고 침튀겨 말하거나 손짓을 해대며 지나쳐 갈 뿐이다. 서툴고 상처받은 사람과 사람이 기껏 만나봐야 잠시 셈을 따지곤 도망칠 뿐이고.

가히 묵시록적인 풍경이지만, 지금의 모습과 멀지 않아 보인다. 스마트폰...이라는 창구로 연결된 OS와 인간들의 링크는 이미 탯줄만큼이나 단단해졌고, 사람들은 더이상 거리에서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다. 육체를 빌어 이어졌던 관계는 이제 육체로 인한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다른 방식으로 재조합되기 위해 분해되는 중이다. 이미 카톡 너머, 페북 너머 당신들이 실재하는지 여부는 확인할 필요도 없을 만큼, 육체는 불필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육체적 애정행위로서의 섹스 역시 (남자의 표현을 빌자면) 신혼시절에나 열심히 할 뿐인, 누구와 아무래도 좋은 욕망의 배설행위 정도로 격하되어버렸다. 앞으로는 구글글래스니 뭐니로 제공되는 새로운 자극만 충분하다면 굳이 육체를 통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로맨스를 표방하는 건,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OS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메타포 그 자체일 수 있어서일 거다. 사람과 사랑에 서툰 이들에 대한, 사랑을 소유의 문제로 쉬이 치환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고 사랑이 서로를 어떻게 격려하며 키워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사랑과 그로 인한 혼란의 감정을 처음 맛보고, 사랑하는 이의 피부와 육체를 감촉하며, 실수와 실망 속에서도 상대와 스스로를 함께 한걸음 성숙시켜낼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이끄는 상대. 그런 상대라면 그게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OS가 되었건 피와 땀이 흐르는 '미도리'가 되었건 사람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거다.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연기는 정말, 외모에 휘둘리지 않고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단 걸 깨닫게 해줬다.
++감독의 전작 '존말코비치되기'에서 보였던 기괴하고도 발랄하던 아이디어와 풍성한 메시지를 읽어내도록 했던 복잡한 이야기능력은 더욱 심오해진 것 같다.

 

 

 

멋진 신세계 - 10점
올더스 헉슬리 지음, 정승섭 옮김, 바나나몽스 그림/혜원출판사

 

흔히들 말하듯 유토피아의 반대가 디스토피아, 그런 간단한 말로 축약될 때 뭉개지는 것들이 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의 이지가 확장되면서 예견하는 밝고 풍요한 미래, 그 자신만만한 예측과 전망이

 

유토피아의 밑그림이 되는 거야 당연하다지만 실은 그대로 디스토피아의 깔개가 되기도 하는 거다.

 

 

"삶의 요소가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생활의 학문이라는 수단에 의해서뿐이다...

진정 혁명적인 혁명은 외적인 세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육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천국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술을 마셨습니다.

영혼이라는 것과 불멸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르핀과 코카인을 복용했습니다."

 

"감정은 욕망과 그 욕망의 달성 사이에 있는 시간 속에 숨어있다."

 

 

이런 얕지 않은 성찰과 반성을 기반으로, 인간의 물질적/정서적 필요를 최대한 신속정확하게 충족시키고

 

부정적인 감정과 불편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건 사실 대부분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공유하는 야심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가용한 모든 자원과 기술, 사회제도까지 송두리째 기울여지는.

 

 

"정말로 능률적인 전체주의 국가라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정치적 우두머리인 간부들과 그들 아래의 많은 관리층이

노예생활을 사랑하기 때문에 억압할 필요가 없는 노예를 통제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헉슬리가 묘사한 건 그런 야심을 거대한 뿌리로 삼은 커다란 나무가 키워낸 어느 굵은 가지의 한 극한이다.

 

사회적 역할과 운명이 결정된 인공 수정과 공동 양육, 자유로운 성생활, 더이상의 철학과 상상이 용인되지 않는

 

'완전한' 사회제도, 정교한 톱니바퀴와 같이 인간이 결핍을 느끼기도 전에 제공되는 물질들, 그리고 신경안정제까지.

 

 

아니, 그 '멋진 신세계'에서 완벽하게 충족되는 건 '인간' 일반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는, 마치 서서히 끓어오르는 물에 빠진 개구리와 같이 인간은 특정 사회제도와 분위기에 함몰된 채 휩쓸려가기

 

쉽다는 함의도 포함한다. 미래상을 늘어놓기만 하던 소설이 생명력을 얻는 건 버려졌던 땅의 '야만인'이 나타나면서부터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이라 여기는 것들 하나하나에 당혹감을 느끼고, 어느 순간 굉장한 거부감을

 

토해내게 된다. 그는 셰익스피어 문학에 표현된 '옛 시대' 인간들의 정서와 상식에 기대어, 어느 극단적인 정점에 올라선 채

 

더이상 과거와 같은 인간이 살 수 없게 된 세계가 얼마나 기형적이고 추한 얼굴을 갖고 있는지 보는 눈을 가진 자다.

 

 

결국 그는 사람들로부터 구경거리가 되어 조롱받고 희화화되다가, 끝내 자살하고 만다. 그 '눈'을 감아버린 셈이다.

 

그의 죽음이란 현재 인류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라거나 역사발전의 이상향 같은 게 끝내 도달하게 될 미래가 얼마나

 

황량하고 비인간적일지에 대한 감각을 극적으로 폭발시키는 장면이 아닐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끝내 못버텨낼 그런 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더 짚어보고 싶은 부분이 생긴다.

 

 

어쩌면 그 '원시인'은 단지 일종의 '타임-슬립'으로 인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건 아닐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그는 그 '멋진 신세계'에 적응이 실패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원시의 자연에 살다가 문득 발견된 사람의 아이들이

 

사회 적응에 실패해서 자살하거나 다시 자연으로 도망가는 사례가 없지 않은 것처럼, 그도 자신이 준거로 삼은 시대-

 

그것도 고작 세익스피어의 책 속에 그려진 시대-로 '퇴행'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보다 중요한 건, 책에 그려진 그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 진심으로 정말 그렇게 비극적이고 비인간적인지 하는 문제다.

 

"문제의식은 옳았다, 그러나 해결방식이 너무 극단적이었다?" 따위의 어정쩡한 봉합 말고, 인간의 생래적 한계를

 

극복하고 신체적, 사회적 모순을 해소하려는 그 가상한 문제의식과 상황판단을 공유했을 때 어떤 다른 그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원시인과 함께 했던 둘셋의 지식인들이 가진 먹물 고유의 불만은 그렇다치고, 책의 마지막장까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닌가.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들에서 더욱 가슴 서늘하게 느끼게 되는 부분은 사실 소설 외부에 있다. 사실 지금 도래한

 

매순간이 외부에서 온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디스토피아일지도 모른다. 상식과 비상식이 어지러이 경합하는 와중에

 

무엇인가는 쉼없이 탈각되고 생성된다. 일일이 감응할 수 없는 보통사람에게는, 대체로 행복한 시대다. 소설 속 그들처럼.

 

 

우리는 어떤 비인간과 어떤 황량한 풍경을 껴안고 살고 있는 것일까. 알량한 행복감에 젖은 채 놓치고 있는 건 뭘까.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 최진실, 노무현, 정몽헌, 최진영..활자화된 이름들의 죽음 이외에도 도처에서 학생이,

회사원이, 주부가, 아이가 죽음을 선택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선택에 대해

원망하고 훈계한다. 더러는 비웃음이 섞인 훈계일지도 모른다. 니가 힘들다는 그 삶, 난 잘 살고 있는데..하며.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 사람에 한번쯤 생각해본 사람까지 합한다 해도, 어쨌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그들은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의 이름으로 자살의 경박함과 무책임함을 비난하고, 사회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살을 단죄하는 판이라 그렇다. 이미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살려두기 위한 '반면교사'나 '예외'가 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같다.)

(참고 :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


"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생명 법칙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또 일견 그럴 듯 하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하고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채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역할과 기대가 그(녀)에게 감겨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변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아픔/손실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란다. 잠시의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나약함의 소산이라고도 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과 같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증좌라며 심리적/생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곁들여진다. 게다가 여전히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등의 종교적인 믿음이 단단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자살학의 진단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인생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당사자만이 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힘들다는 사람들을 끌어와 앉혀서는, 니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뭐가 되겠니, 하며 니가 맡아야 할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압박이다. 단적으로 최진영의 죽음이 그랬다.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조카는 어떡할 거냐, 엄마는 어떡할 거냐, 누나 볼 낯이 있겠냐, 따위 오지랖 넓은

한가한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본인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과정 끝에

죽음을 선택한 건지 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의 노력은 없었다. '우울증'이란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그(자살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메리가 굳이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쓸 만큼, 자살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래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으로 스러지고 만다는 깨달음을 거쳐야 가능한 거다.

자살하고 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고,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회성/기능성'에 기반한 사회의 협박 이외에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는 강렬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의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최고로 가치있는 자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고자 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자연본능과 사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다.

나는 자연적인 죽음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온갖 생산활동-애낳고 밥벌이하는-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부한다.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생명체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보전의 대원칙까지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하건대 더이상의 삶은 부질없는 생명의 연장일 뿐 죽음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지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그것은, 아메리가 말하듯, 삶을 던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지키겠다는 모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적인 판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개개인마다 다를 거다. 다르지만

또 같을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한다. 에셰크(Lechec), 치욕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죽음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더이상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더이상 없는 중증 환자, 삶의 전부라

여겼던 사랑의 실패자, 심지어는 대입시험에 실패한 사람, 남들 눈에 어이없고 하찮아 보일 문제라 해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다. 삶의 결정적 순간은 본인만이 안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그러나) 지성의 논리로 볼 때 자유죽음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자유죽음을 택한 결단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인간성'과 '존엄성'에 기댄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생과 '에셰크'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죽음으로 직접 끝낸 인생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자살할 권리'는

복권되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행하기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스스로의 자유를 체감하고 밀도높은

삶을 살았다고 본인이 느낀다면 본인 이외 다른 누가 그 삶에 대해 주제넘은 훈계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아메리는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욕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목하려고 한다. 꾸역꾸역 생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겠다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삶의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지켜낼 자유를 극한으로 수행하고자, 맹목적으로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하이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퀸,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융통성없고 고집스러운, 순진하다 못해 꽉 막힌 쑥맥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에셰크'에 공감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계와

비웃음, 그리고 권해지는 자연적인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인 거다. 우리 사회의 드높은 자살율엔 이유가 있다.







#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삐져나오면 '요새 삶이 힘드냐', '우울하냐'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그럴 때만 입에 올려야 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을지 살지의 문제가 김밥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의 문제만큼 유쾌하거나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꼭 우울하거나 피폐해졌을 때만 떠올려야

하는 건 아닌 거다. (그렇다고 요새 내가 삶이 힘들지 않다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건 아니..ㄹ 거다.)


진지한 것과 우울한 건 다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병들고 패배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봄이라고, 볕이 따시다고,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 죽음을 터부시할 이유가 하필이면 손꼽을 수 없을만큼 쌓여있는 이 때라도, 살아갈 자유가

있다면 동시에 죽을 자유도 있는 거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죽음 - 10점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김남시 해제/산책자


* 알라딘 4월 마지막주 이주의 TTB에 선정되었습니다.



75년 폴 포트가 집권하여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견될 만큼의 극단적이고 광적인 정책을 펴면서, 외국어를

알거나 책을 보는 사람, 가르칠 능력이 되는 사람 등 지식분자스러운 사람들은 전부 수용소에 갇히고 외국과

내통했다거나 민심을 교란시킨다는 혐의로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런 광기가 이어진 게 약 4년.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 혹은 열등감, 부자에 대한 억울함과 불공정한 제도에 대한 멸시, 구조와 개인에 대한

감정과 이성적 판단이 뒤엉켰고, 그에 더해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경험이나 트라우마 따위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다. 그렇게 잔뜩 난마처럼 뒤얽힌 맥락에서 모두의 모두에 대한 증오만 남지 않았을까.

평범한 고등학교였던 곳이 보안본부이자 수용소로 전환되면서 약 2만명의 사람들이 끌려들어가서는 단 6명만

살아나왔다는 대표적으로 무시무시한 수용소, 프놈펜 시내의 뚜얼 슬랭 수용소다.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꺽어

도착한 건물은 웬지 스산한 느낌, 아침나절의 선선한 공기조차 위축시키는 느낌은 뭘까. 검정개도 웬지, 지옥문을

지킨다는 머리 셋 달린 개처럼 흉맹스러 보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거겠지만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없다. 맘편히 아침부터 관광할 만한 장소는 아니니까.

매미니 뭐니 곤충들의 소리라도 있어야 할 법 한데 온통 조용한, 어딘가 추모공원이나 국립묘지에 온 듯한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가 고여 있었다. 나무에 그어진 칼자국 하나도 범상해 보이질 않았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안에 들어서서 돌아본 바깥의 풍경. 여기가 수용소였을 때도 밖의 건물들은 저렇게 바싹

세워져 있진 않았겠지. 사방에서 총을 든 병사들이 초소에 올라 감시하고 있었을 테고, 서치라이트가 문득

깜빡했다는 듯 한바퀴씩 빙글빙글 돌았을 거고.

기괴한 웃음이다, 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 올려 웃고 있는 느낌, 눈은 전혀 안 웃고 있는 걸. 아마

이 피비린내나는, 셀수없이 많은 생명이 집중적으로 죽어간 공간에 붙을 표지라는 걸 알았다면, 아무리 웃는

표정을 지으려 해도, 그리려 해도 저렇게 딱딱하고 경직된 표정밖에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웃지 말라는 표지와 더불어 붙어 있는 규정들, 방문자에게 요청되는 규정인가 하고 읽다가 혼란스러워졌다.

아, 이 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었다...뭐 하나 제정신박힌 규정이 없지만 특히 6번. 하아...

고문하다 소리지르면 안된다라니, 개꼽창들이 죽도록 갈구겠다고 단단히 작정하고 꼬투리잡겠다는 얘기.

1층에 있던 누군가의 침대, 매트리스나 담요조각 하나 없이 앙상한 철망만 남겨놓고 있으니, 게다가 이런 공간에

있으니 상상이 뻗어나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고문기구로 쓰였을까, 팔다리를 묶고 때렸을까, 설마

이게 침대길이보다 신체가 길면 잘라버린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아니겠지..하며.

뚜얼 슬랭 박물관은 총 4개의 동으로 되어서, 고문실, 살해하기 전에 찍어둔 '영정사진', 고문도구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고 한다. 여기는 아마도 수용자들의 생활동쯤 되었나보다. 혹은 고문실이었거나, 고문실도 겸했거나.

낡아빠진 창문틀, 아무런 칠도 안 된 채 나무 그대로의 헐벗은 색깔과 질감을 드러낸 것들, 그리고 저 뜬금없는

농구골대 같은 건, 고문시설. 저기에 사람을 매달아 커다란 물독에 머리를 박아놨다고 한다. 날것의 폭력이다.

상상해보면 정말, 무지막지한 야만이다. 시키는 사람이나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나, 짐승처럼 저기에

매달린 채 허우적대며 목숨을 구걸했을 사람이나.

아마도 행정적인 필요에 의해서였을 거다. 살해하기 전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두는 건. 겁에 질린

그들의 표정이 보여주듯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존재가 지구상에서 소멸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6월 광주항쟁을 다룬 책들에서 저런 사진들은 처음 접했었다. 겁에 질렸던 표정이었겠지만, 경직되면서 표정은

빳빳하게 굳었고 더이상 생전의 이름으로 신체부위를 하나하나 식별하는 게 무의미하다.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단정히 눕혀져 있는 가죽가방같은 존재들. 사람 한 명 죽인다며 달려오는 살인마에겐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욕하고 삿대질이라도 하겠지만, 이 엄청난 대규모 도살 앞에선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발굴현장에서 발견된 듯한 쇠사슬, 수용자들을 둘둘 엮어서 끌고 다니기 편하도록 쓰이던 장치가 아닐까 싶다.

시멘트 건물의 묘한 냉기가 선뜻한 기분을 돋게 만들었다. 2층으로 오르던 길에 발견한 낙서들. 아, 여긴

1975년까지도 아이들이 가득하던 학교였던 거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혼란이 가득했을 곳.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이 울부짖고 절규하고 죽어가는 소리로 지옥도를 그려냈을 곳이기도 하다.

누굴까, 간수가 쓰던 책상인 거 같기도 하고. 70년대 후반에 쓰이던 책상과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니,

더구나 이런 장소에서 저렇게 보존된 걸 보면 왠지 섬뜩하다. 아마도 이런 섬뜩함, 인간이 얼마나 흉폭하고

무지하게 야만스러울 수 있는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런 장소가 필요한 거다.

그 뒷켠에 서 있던, 캄보디아가 잠시 '캄푸챠'라는 국명으로 광기어린 폴 포트 치하에서 신음하던 때 공산당

지도자들의 면면. 이들은 뭐가 좋아서 저리 활짝 웃고 있는 걸까. 사람이 가장 무서운 거다.

사실은, 그들의 교조화된 신념이 무서운 거다. 부르조아, 쁘띠부르조아, 인텔리겐챠가 조장한 자본주의와

뿌리깊은 봉건적 질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빈농과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열정이 단순화된

선악구도의 복수전으로 치달으면서 사회 전반을 퇴행시키고, 문명과 인류 지성을 퇴행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손쉽게 재단할 수는 없었을 거다. 이런 식의 맑시즘을 빙자한 근본주의 혁명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해악에 대항하는 일종의 도덕적, 이상적 혁명을 구현하려는 시도로 보였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서구의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기까지 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눈먼 광신이 빚어낸 참극은 이토록 생생할지언정, 무엇이 이들의 문제의식을

자극했고 심지어 득세하게 했는지 그런 부분은 짚어지지 않는다. 철저히 기득권에 기댔던 정치세력에 대한

반감, 기득권 세력만이 호의호식하며 풍기는 부정부패의 구린내에 대한 혐오, 그리고 양극 세계질서의 패권성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이런 참극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애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순수해지라느니, 깨끗해지라느니, 그런 도덕군자같은 소리를 하지만, 사실은 그렇다.

이들이 자라나서 제각기의 위치에서 이해관계를 겨루게 될 테고, 그 와중엔 어쩔 수 없이 갈등과 큰 소리가

빚어지게 되는 거고, 그 문제들을 얼마나 인정하고 진지하게 해결하려 노력하는지가 관건이어야지 시끄럽다고

혹은 '날것의 소란스러움/폭력'이 싫다고 그저 조용히 하라며 무질러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 싸우는 거 보고

애들보기 부끄럽지 않냐고 흔히들 말하는 건, 그래서 대개 무지의 소치다. 정치인들은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조용히 입닫고 있다가 이런 대량 학살도 벌어지고, 부정부패가 터져서 내전도 터지고 그러는 거 아닌가.

아마도 수용자들의 숙소로 쓰였던 듯한, 철조망이 한층 삼엄하던 한쪽 건물. 잔뜩 녹슨 철조망이지만 여전히

날선 이빨은 그대로다. 뚜얼슬랭 수용소는 안전하고 독성없는 '역사'의 한장면으로 전시되고 있지만, 사실

그때의 제3세계가 부딪히고 있는 국제정치적, 국내정치적 문제는 대부분 그대로다.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

미국의 피벗(pivot)으로 제한된, 게다가 무능한 외교, 계층간 부의 격차 심화, 기득권의 부정부패...

안에 들어가니 이건 수용시설이라기보다는, 사육시설이다. 좁디좁게 구획된 공간,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둠,

그리고 발이나 손에 채워졌을 철제 차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정말 불결하고 간소한 화장실까지.

크메르어인지 뭔가 언어가 잔뜩 휘갈겨져 있는 한쪽 벽, 수용소로 쓰이기 전 아이들이 해둔 낙서일까 아니면

수용시설에 갇힌 누군가가 적어둔 글일까. 혹은, 비극이 벌어진 후 찾아온 누군가가 사람들을 기억하며 남긴

추도문일까.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며 그림자도 확연히 짧아졌다. 남국의 열기가 훅훅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손발도 차갑고 가슴도 냉막하다. 이 공간은 그토록 서늘했다. 서늘하고, 시큰하고.

어딘가 굉장히 폐쇄된 채 어두침침한 공간, 바깥을 내다보기엔 너무 시늉만 해둔 창문, 하얗게 번지는 햇살.

마지막 건물동에서는 78년에 폴포트 치하의 캄보디아를 최초로 둘러봤던 한 서양인의 기록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폴포트의 초대를 받고 당시의 캄보디아 이곳저곳을 둘러봤던 그는, 그 거침없는 파괴와 재건의 움직임을

다소간 경탄의 눈으로 바라봤고, 일종의 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우호적이었던.

이런 식으로 당시의 사진과 감흥을 남겼고, 오늘날의 시점-역사적 평가가 어느정도 고착된-에서 다시 평가한

아이디어들을 함께 남겨 놓아서 훨씬 의미심장했던 거 같다. 훨씬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물론 그렇다고 당시라 해서 그 비판의식이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유의해 볼 만한 점.

아마 그가 자신의 과거 사유를 반성하고 남들 앞에 이렇듯 샅샅이 끄집어내어 재평가하는 이유는, 이 메세지를

남기기 위함일 거라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돌봄, 배려를 망각한 채 진행되는 래디컬한 혁명. 누군가의 피와

목숨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의 비정함이나 과격함의 틈바구니에서 개별 인간들을 챙긴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이제 그런 폭력적인 형태의 전복은 가능치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여겨지지만. 어떤

경로든 핵심은 그거다. 사람을 생각하기.

더구나 일국 차원에서의 '변혁'이 가능한지도 문제. 자립 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는지도 참 지난한 문제거니와,

자립경제를 갖춘다고 해서 외부의 적대세력으로부터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러시아혁명 이후 외부로부터

지원받는 백군세력이 정상적인 국가 경제발전을 방해하고 상시적인 전시동원체제로 이탈하게 했듯.

꽤나 많던 전시물들을 다 돌아보고 문득 답답해져서 수용소의 철창 밖을 내다보았다. 한모금, 숨 돌릴 여유가

필요한 곳이었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층은 물론 2층, 3층에도 건물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을 틈에는 전부 꽁꽁

철조망이 둘려 있었다. 자유롭게 죽음을 택하지도 못하게 붙잡아두고, '혁명 국가'의 이름을 빌어 그들을

'인민의 적'으로 처단하겠다는 집요한 의지일 거다. 사실 이건 모든 국가에서 법을 집행하며 국민을 규율하는

방법이랑 똑같다. 다만 조금 더 날것의 형태일 뿐. 사형수의 자살을 막고 목숨을 붙여놓은 상태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도 여전히 비일비재한 거다.

그들 수용자들이 행정적인 이유로, 아마도 세상에서 '제거'되기 이전의 서류 절차를 위해 저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간 2만명, 여섯 명을 제외하곤 전부 저 의자를 거쳐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당한 거다.

참. 단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무참히도 해치웠다. 사람 한 명의 목숨이나 만 명의 목숨이나 경중을 따질 일도

부등호를 사이에 꼽을 일도 아니지만, 참 적나라하게 막장이었던...

나오기 전, 그들에 대한 위령탑이 서 있는 마당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이런 광기 어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신념과 신앙과 이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길. 사람 만 명이나 한 명이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그런 인식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민주주의, 사람을 위한 정치체제는 피를 먹고 자란다. 사실 캄보디아 뿐 아니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렇게

시뻘겋게 피에 물든 장면들 한둘 이상씩은 갖고 있는 거다. 이런 비극은 어느 한 지역, 한 시대에 국한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재연되고 되살아날 수 있는, 다만 잠복해 있을 뿐인 사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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