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오프라야강 서안, 카오산로드에서 북서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선박박물관',

태국 왕실이 기념일이나 행사 때마다 짜오프라야강에 띄우는 화려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이토록 한적할 수가.


입장료는 100바트, 300바트에 대략 10달러, 만이천원이라 치면 100바트는 대략 3000원선.

안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지만 따로 100바트를 추가로 내면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고 했다.

걍 둘러보지 뭐, 하고 입장료만 내고 들어갔다가 헉, 아니다 싶어서 냉큼 100바트 더 내고 촬영을

허가받았다는 표시의 얄포름한 종이 한장을 목에 걸었다. 바람에 펄럭펄럭 나부끼던 촬영증.

이런 금빛찬란한 화려한 뱃머리가 나란히 모여 있던 거다. 첫눈에도 정교한 조각과 세련된 마감,

금빛이 번쩍거리면서도 결코 싸지 않은 느낌의 배색과 품격이 느껴졌다.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 무려 1981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의식용으로 쓰이는

이 배의 뱃머리엔 옆구리에 손을 짚은 신장이 당당히 저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랫춤엔 조그맣게 숨어있는 포신. 이런 배를 넓고 도도한 짜오프라야 강심에서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된 뱃머리, 저 눈길을 올려다본다면.


이것들은 더 멋졌다. 동남아에서 신격화되는 뱀의 신 '나가'를 형상화한 듯한 일곱 머리를 가진

뱀의 흉흉하고 위압적인 모습도 그렇고, 날개처럼 두 팔을 펄럭이며 날아오를 듯한 분위기의

날렵한 신장도 그렇고. 특히 저 빨간 혀와 새하얀 이빨을 가진 일곱머리 금빛 뱀은 태국 왕실을

배경으로 유유하게 짜오프라야 강을 점령한 화려한 배들이 담긴 풍경 엽서에서 자주 봤었다.

이 녀석은 정말, 이 배를 타고 수많은 선단으로 구성된 전투용 배들의 앞머리에 섰다면, 적선들이

딱 마주쳤을 때 바싹 쫄았을 거 같다. 화염이 불타오르는 듯한 저 사납고 들끓는 듯한 갈기들,

그리고 단숨에 숨통을 물어뜯어낼 듯한 강력한 턱과 이빨, 그리고 새빨간 혀가 날름거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아가리까지. 뱃전에 설치된 포신이 차라리 귀여워 보일 지경.


옆으로 넘어가며 배를 하나하나 둘러보는 데도 은근히 동선이 길다. 배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싶었는데, 앞에서 보았을 땐 얄포름하다 싶어서 그랬지만 정작 배의 길이가 꽤나 긴 거다.

전체적으로 가늘고 긴 형태의 배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탈 수 있을지는 모르곘지만, 그런

날씬한 형태를 갖추고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이런 위엄을 갖출 수 있다니 그것도 놀랍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여덟 척의 배중에서 가장 아름답던 배, 초록색 눈과 은빛 어금니가

온통 보석으로 꾸며진 것 같다. 학처럼 우아하게 뻗어올려진 미끈한 목에도 비늘같은 무늬가

꼼꼼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슬몃 쳐들어올려진 고개도 당당한 분위기를 더한다. 용이 또아리를

틀고 땅에 내려앉은 채 하늘을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리고 배의 뒷꼬리, 미끈하게 쭉 빠진 느낌도 그럴 듯 하지만 배의 앞섶과 마찬가지 문양으로

통일성을 갖춘 모양새는 왕실의 선박으로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번쩍 들린 앞머리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실용적인지 감각적인 측면인지 모르겠지만, 하늘로 은근히 슬금슬금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번쩍 치켜올려지는 휘영청한 곡선의 아름다움까지.

배 가운데, 금빛 휘황한 좌대가 설치되어 있다. 물론 왕과 왕비, 왕자나 공주를 위한 자리일 테고.

시야를 확보하고 바람이 넉넉하도록 그랬는지 햇빛을 가릴 천장이 좌대만큼 높았다. 저렇게

높이고서도 배가 균형을 잘 잡을까 싶을 정도로.


현재도 언제든지 불려나갈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는 반짝거리는 배들 옆으로, 옆면이 휑하니 빈 채인

배도 한 척 보였고, 아예 분해해서 새롭게 만들 작정인 듯 뱃머리만 떡하니 떨어져나가있는 덩어리도

보였다. 다리 사이로 대포를 쏴대는 모양의 뱃머리, 모양이 제각기 다 다르니 한척 한척이 모두

굉장히 소중한 거 같다.

그래서겠지만, 박물관 한 쪽에는 이전에 쓰였던 배의 잔해들과 장식들을 보관해 두고 있었다.

언제든 새로운 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한척 한척 모두 독특한 자기만의 모양새와

분위기를 가지고 짜오프라야 강을 당당하게 가로질렀노라 기억해 두려는 듯. 박물관이긴 하지만

이 배들은 유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계속 저렇게 자재를 운반하고, 배 안에 들어가 사포질을 하고

뭔가 수선하고 보완하는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 박제된 기념품들이 아니라, 언제든 행사 일정에

맞추어 나설 준비가 된 살아있는 것들.

아마도 저런 일꾼들이 이렇게 소담스런 불당을 차려놓은 거 아닐까. 박물관 아닌 박물관의 기둥

한켠에 새집처럼 올려둔 불당 앞으로 빨강색 환타 두병을 열어서 빨대까지 꼽아둔 저 다정함이라니.

한쪽 벽면에는 배를 실제로 어떻게 젓는지, 그리고 수병들의 복장은 어땠는지, 그런 모습을

에둘러 짐작해볼 몇 장의 자료들이 있었고 조그마한 형태로 축소된 배도 전시되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 배들은 언제든 수로를 통해 짜오프라야 강으로 나갈 수 있도록 제각기의 도크

위에 번쩍 들려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당당히 든 채 다리가 치워지고 철문이 열려 짜오프라야강

위로 둥실, 의연하게 미끄러져가는 그림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졌다. 허름한 창고 같은 박물관

안에서 벗어나 남국의 햇살 아래 온통 번쩍거리며 그 섬세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사방으로

빛무리를 떨쳐낼 그럴 장면. 왕의 배들이 어둠속에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민중가요란 게 '감상'의 대상이 아니듯,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공식석상에서 의례화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도 왠지 그 노래의 생명과 본래 의미를 벗어나는 일이라 여겨졌지만, 그래도

꼭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만 불려야 하는 격하고 적나라한 다른 민중가요와는 다른 품위와 비감함이 있었다.


꼭 '적들의 모가지를 추수하는 낫'을 운운하거나 '복수의 빛나는 총탄', '들어라 양키야 뻐큐 갓뎀' 같은 단어를

동원하지 않고도 심장을 격동시킬 수 있구나, (물론 그런 노래도 심장을 쿡쿡 쑤시지만) 노래 하나로 80년 

광주의 참상에서부터 그 이후의 지난한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할 수 있구나, 싶었던 노래다.


그래서, 애국가 따위 부를라치면 손발이 오글오글해서 립씽크만 할지언정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언제나 살짝

울컥한 마음으로 숙연하게 부르게 되는 거다. (물론 그러면서도 역시 스스로 낯설고 어색해하지만.)


80년 광주를, 민주주의를 향한 타는 목마름이 부글거렸던 광주를, 미국에 대한 순진한 환상을 깨뜨렸던 광주를,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적인 삶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창조했던 잠시나마의 해방공간을 기억한다.

동시에 사람들의 일상을 야만스럽게 헤집었던 이땅의 지배자들을, 공수부대의 피묻은 총검과 전두환을 수괴로

하는 쿠데타세력의 잔인무도함과 비인간성을 기억한다.


많이 바뀌었고, 마치 4/19 달리기가 하나의 박제화된 기념행사로 변해가듯 5/18 역시 그렇게 한발 빗겨서

바라볼 만한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아무러해도, 추모행사에서 방아타령은 아니다.

(오마이뉴스,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


나라도 불러주마.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꾸욱 눌러쥔 주먹을 흔드는 팔뚝질 대신 엄지손가락 말아쥔 뻐큐손가락이나 실컷 날려주마. 만수무강해라ㅆㅂ



p.s. 덕분에 다시 가사를 되씹어 가만히 불러보는 노래들. 왜 '들어라 양키야'는 네이X에선 검색이 안 될까.

"잠들지 않는 남도"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녘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아~~~ 아~~~ 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남도 한라산이여


"열사가 전사에게"

꽃무더기 뿌려 놓은 동지의 길을
피 비린 전사의 못 다한 길을
내 다시 살아 온데도 그 길 가리라 

그 길가다 피눈물 고여 바다 된대도
싸우는 전사의 오늘 있는 한
피눈물 갈라 흐르는 내 길을 가리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내가 그토록 투쟁하고 싶었던 내일
복수의 빛나는 총탄으로
이제 고인 눈물을 닦아다오
마침내 올려질 승리의 깃발
힘차게 펄럭여 다오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어깨죽지에 빛나는 상처 지켜낸 파업투쟁
막걸리잔 치켜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가진자들의 더러운 이빨 금빛으로 번쩍이며
온 세상을 휘휘 감아 피눈물을 달라하네

아 동지여 (동지여) 적들은 (적들은)
무노동 무임금의 억지를 부려
아 동지여 (동지여) 적들은 (적들은)
파업의 나팔소리 멈추라 한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자본가여 먹지도 말라
무노동 무임금 노동자 탄압
총 파업으로 맞서리라


"바쳐야 한다"

사랑을 할려거든 목숨바쳐라 사랑은 그럴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은 때는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보거라 
전선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바쳐야 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바쳐라  
번쩍이는 칼창 움켜쥐고  나서라 전사여 
그날을 위해 이 한목숨 걸고 나서라

구차한 목숨으로 사랑을 못해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두려움 에 떨면은 술도 못마셔 그렇게 먹은 술에 내가 죽는다   
붉은 맹세 붉은 피로 맺어진 동지여 죽어도 온다 그날은 온다
민족의 해방 이여
번쩍이는 칼날 움켜쥐고 지켜라 전사여  
우리의 깃발 이한목숨 걸고 지켜라


"인터내셔널가"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에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들어라 양키야"

랄라라 랄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
랄라라 랄라라 랄랄라
랄라라 랄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
랄랄랄랄랄랄라

찢기운 반도 심장에서 피어오르는 진달래 칼날을 세워
여기 이렇게 굳센 가슴팍으로 그대들 앞에 섰다

순결로 씻은 조국반도 머리맡으로 침략의 불을 지른자
보라 치욕의 피로 맺은 복수로 그대들 앞에 섰다

보라 여기 이 반도를 폭압의 사슬 끊은곳
한 외침으로 명하니 이제는 이 땅을 가라

들어라 양키야 들어라 (뻐큐)
이 땅 분노의 함성을
들어라 양키야 들어라 (갓뎀)
해방통일 몸짓을

진달래 붉게 물든 반도를 피로 붉게 물들인 자여
터질듯한 심장을 품고서 그대들 앞에 섰다
수많은 꽃들 짓이기고서 끊없는 학살 일삼는 자
한많은 영혼 가슴에 품고서 그대들 앞에 섰다

보라 결연한 의지로 불타는 강철의 신념을
민족의 외침으로 명하니 이제는 이 땅을 가라
들어라 양키야 들어라 피끓는 투쟁 열기를
들어라 양키야 들어라 민족자주의 함성을
해방통일 몸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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