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희망은 있다!"

[손문상의 그림세상] 2011, 김진숙 그리고 희망 연대 (프레시안)

 


그래도 희망은 있다. 란 말이 참 절실하게 다가오는 순간.

세상이고 사람이고 다 염증이 나서 나몰라라 하고 눈감고 살테다 맘을 먹었다가도.

그래도.



▲ 김진숙 지도위원이 내려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 트위터 @ez2dj81 (프레시안에서 재인용)


김진숙 위원, 드디어 땅을 밟다!(1보)
크레인에 올라간 지 309일 만…경찰, 건강 진단 뒤 업무 방해 등의 혐의 조사
2011-11-10 15:36 부산CBS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해 영도조선소 내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벌여온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농성을 풀었다.

지난 1월 6일 크레인에 올라간 지 309일 만으로, 309일간 고공 농성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례 없는 기록이다.

김 씨는 오늘 노사의 잠정 합의안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무투표로 가결되자, 그동안 농성을 벌인 영도조선소 3도크 옆 높이 35m의 85호 크레인에 내려와 땅을 밟았다.

한편 경찰은 김 지도위원을 부산의 한 병원에서 건강 진단을 받도록 조치한 뒤 업무 방해 등의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한진중 사태, 309일 만에 종결…땅 밟은 김진숙 "고맙습니다" (프레시안)

“높은데 오니 전망이 좋다” 309일 그녀 웃음만은 여전 (한겨레)


                        ▲ 한겨레 표 재인용


드디어 내려오셨구나...안철수니 뭐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쪽으로 희망의 '촛불'이 몰린 사이, 여론이 잠깐 타올랐다가

주춤해진 사이, 그래도 그 짧고 허망한 열기를 딛고서 드디어 김진숙님이 내려오셨다고 한다. 309일만이다.


모쪼록 건강 검진 결과에 아무런 심각한 문제가 없기를. 그리고 이후 당신의 투쟁이 헛되지 않도록 한진중공업의

중재안이 제대로 실행되기를. 무엇보다, 당신이 앞서 싸우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에서 상식이 통용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큰 짐을 지고 여기까지 혼자 오셨다...당신의 진정성, 당신의 고민을 부디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나눠받기를.



(언론이 외면하는) 김진숙을 향한 '2차 희망버스' 참가기.

"합동 장례식의 참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프레시안, 8/18)

18일 열리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한진중공업 청문회를 앞두고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220일 넘게 고공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편지글을 보내왔다. 김 지도위원이 자필로 작성해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보낸 편지글을 전문 공개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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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째 전기가 끊어진 깜깜절벽 크레인위에서 랜턴 불빛에 의지해 이 글을 씁니다.

일요일날 자정이 다된 시간, 8차선 도로 건너편 인도에는 30여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오늘밤도 모기에 뜯기며 노숙을 하겠지요. 저들 중에는 이 크레인 중간 지점에 올라와 있는 해고 노동자의 아이들과 부인들도 있습니다.

이 염천더위에 가마솥처럼 달궈진 크레인위에서 가족들의 생존을 지키겠다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비가 오면 물위에서 밤을 지새우는 가장을 지켜보는 마음이 어떨까요.

저분들 중에는 서울에서 오셔서 주말을 길에서 보낸 분도 계시고 세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대전에서 오셔서 노숙을 하는 분도 계십니다. 제가 모르는 분들입니다. 사람이 있다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오신 분들입니다.

저분들을 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하는 분들이 저분들만큼의 애틋함이 있었다면 저분들만큼의 측은지심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정리해고가 막무가내로 자행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노동과 세계(이명익)


희망버스가 처음 오던 날이 제가 크레인에 오른 지 157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어떤 언론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야당 국회의원 서너분이 다녀가신 정도였습니다. 고립된 채 절망했고 그때마다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희망버스가 3차까지 이어지자 비로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게 됐고 마침내 국회청문회까지 열리게 됐습니다.

사회의 무관심 속에 쌍용차에선 정리해고 이후 15명이 죽었고, 한진중공업에서도 2003년 두 사람이 생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3년도에도 650명의 대규모 구조정이 있었고 거기 반발한 노조가 2년을 싸웠습니다. 당시 김주익 지회장이 이 85호 크레인에 129일을 매달려 있었습니다. 회사는 물론 언론도, 정치권도 그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냉대속에 129일 만에 밥을 매달아 올렸던 밧줄에 목을 맸습니다. 지회장의 시신은 2주가 넘도록 이 크레인을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사측의 어떤 조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5일 만에 곽재규라는 노동자가 또다시 목숨을 끊고 나서야 합의가 이루어졌고 한사람의 시신은 크레인에서 내려오고 또 한사람의 시신은 도크바닥에서 끌어 올리는 기가 막힌 합동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스물 한 살 청춘시절에 같은 공장에서 만나 거의 매일 얼굴 보며 같은 꿈을 꿨던 사람들입니다. 여름이면 온몸에 땀띠가 돋고 땀으로 안전화가 질퍽거리는 고단한 노동을 하면서도 그 사람들이 있어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질풍노도 같은 시절을 옛말삼아 얘기하며 좀 달라진 세상에서 같이 늙어갈 수 있을거라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두 사람을 한꺼번에 땅에 묻고 돌아온 날 밤, 보일러는 올리기 위해 무심코 스위치에 손을 대다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묻은 손으로 저만 살겠다고 보일러를 켜는가. 차가운 땅바닥에 20년지기 두 사람들 묻고 저만 따뜻하게 살겠다고 보일러를 켜는 나도 인간인가. 그 후로 8년 동안 단 한번도 보일러를 켜지 못했고 크레인에 올라오기 전날 밤 처음으로 따뜻한 방에서 잤습니다.

2010년, 회사는 다시 432명의 정리해고를 통보했고 조합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구조조정 중단에 노사합의 했습니다. 그리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400명의 정리해고를 다시 통보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정규직들은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하청노동자들은 찍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이 공장에서 3000명 가까이 일자릴 잃었습니다.

왜 막대한 흑자가 난 기업에서 그 흑자를 만들어낸 노동자들만 고통 받아야 하는지 꼭 밝혀주십시오. 경영진들은 경영실패의 책임은커녕 주식배당금에 현금배당에 연봉까지 인상시킨 기업에서 왜 노동자들만 거듭되는 정리해고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반드시 밝혀주십시오.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의하더라도 조합원들의 노조사무실 출입이 허용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역들을 동원해 출입을 막는 회사에 대해서도 밝혀주십시오. 쌍용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저항하여 외쳤던 구호가 '해고는 살인이다'였습니다. 그 비극이 한진에서 되풀이 되지 않도록, 2003년 합동 장례식을 치렀던 그 참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는 일하고 싶다."

해고된 조합원들이 공장안에 있을 때 누군가 크레인 밑에 써놓고 간 구호입니다. 우리 조합원들 일하게 해주십시오. 9개월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거리를 헤매는 우리 조합원들 가정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환노위 국회 의원님들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광복절 66주년 85호크레인
222일차 새벽을 맞으며 김진숙 올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2차 희망버스를 다녀와서 느꼈던 것 중 하나. 자칫, 과거의 촛불집회가 그랬듯 '광장에서의 카타르시스'로

끝나는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이벤트로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모인 사람들은 희망버스를

타며 '봉사활동', 혹은 벼랑 끝의 목숨인 김진숙을 구하러 가는 '구조활동'으로 생각한 걸까, 아니면 정말

자기 스스로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가는 건지. 그 '희망버스'가 그런 생각들을 표출, 발전시킬 수 있을지도.


촛불집회를 꺾었던 건, 막아선 경찰 앞에서 '폭력/비폭력'을 운위하며 스스로 동력과 가능성을 소모해버린

대중의 두려움, 그리고 어느 정도 기존 편견에 기댄 '시위꾼'들에 대한 염증에 따른 정당/시민단체 등 운동

지도세력에 대한 불인정. 그 두가지 아니었을까. 희망버스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던 것 같다. 185대에 자발적으로 타고온 사람들이니만치 나름의 의견, 입장은 있을 테고 존중하지만 .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이야기가, 그저 듣기 쉽고 편한 이야기만 하다 끝내자는 이야기와 같지는 않다.

지금껏 진보진영의 세력들이 대중과 유리되어왔다는 비판이, 그들이 갖고 있는 견해와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 같지는 않다. '시민'의 자발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지도부'의 존재와 모순되는 것은 분명

아닌데, 누구 하나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는다.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을지 모른다.


지도부가 없고 모두가 주체라는 말은, 뒤집으면 정제된 정체성이 없다는 말과 같다. 백인백색의 주장만이

난무할 뿐 요구사항과 승리조건을 정돈해서 내밀지도 못하는 모래알같은 군중이란 말과도 같다는 말이다.

차벽이 막았을 때 돌파할지 말지의 문제는, 스스로의 법을 무시하며 초법적으로 군림하려 드는 국가권력에

저항할지 말지의 문제였다. 폭력/비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저항의 문제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불편하고, 어렵고,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문은 터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여기 왜 모였습니까. 어떤 점이 당신을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앞으로 이끌었습니까. 무엇이 달성되면 돌아가겠습니까. 장애인과 동성애자와 두리반,

유성기업, 콜트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저항'이, '분노'가 향한 끝은 어디입니까.

그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비슷한 생각을 써낸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



*                                                               *                                                            *

연대의 희망버스, '촛불판 명박산성' 넘을까(미디어오늘)


희망버스와 '광우병 촛불집회', 불평등·불공정의 '차벽' 넘어 희망 홀씨 주목

[0호] 2011년 07월 12일 (화) 허완 기자 nina@mediatoday.co.kr

전국 각지에서 194대의 버스에 나눠 탄 7천여 명의 사람들이 부산에 모여 ‘정리해고 분쇄’와 ‘구조조정 중단’을 함께 외쳤다. 9일 부산에 집결한 ‘2차 희망의 버스’는 700여 명이 동참했던 ‘1차 희망의 버스’를 넘어 그렇게 뜨거운 연대의 불길을 지피며 하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187일째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들은 ‘3차 희망의 버스’를 다시 출발시키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3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만만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는 “기성 노동운동과 정당, 시민운동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보완하고 대체해 주고 있다”고 말했고,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조직된 노동자들이 함께 정리해고를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풀어나간다는 의미가 희망버스에 있다”고 밝혔다. 박유기 금속노조 위원장도 “이제 노동운동도 과거 수동적이거나 선전선동, 상투적인 조직으로는 안 된다”며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주축이 됐던 이번 행사의 의미를 높게 평가했다.

▲ '2차 희망의 버스' 서울지역 출발 지점이었던 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한 참가자가 '슈퍼크레인' 티셔츠를 팔고 있다. ⓒ허완 기자

한겨레는 11일자 사설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와 나눔, 희망버스>에서 “이들의 마음은 이제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해고자를 넘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함께 해결해가는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평했다. 경향신문도 같은 날 사설 <촘스키, 강경진압, 그리고 ‘희망의 연대’>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이들이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불쌍하다고 동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문제’로 여기고 해고노동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2차 희망의 버스’가 주목할 만한 ‘새로운 현상’이자 ‘대안 운동’의 하나로 떠올랐지만, 현장에 있던 참가자들 사이의 ‘온도차’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9일 저녁 거센 빗줄기를 뚫고 부산역에서 출발해 약 4㎞를 걸어 영도조선소를 향해 가던 시위대의 눈앞에 육중한 경찰 ‘차벽’이 나타나자, 참가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 부산역에서 시작된 행진을 마치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와 불과 700여 미터 떨어진 봉래 로터리에 도착한 '2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공권력의 성채'였다. ⓒ허완 기자

차벽 맨 앞에 자리를 잡은 몇몇 단체와 시민들은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평화행진 하겠다는 데 이게 뭐하는 거냐”, “카메라 끄라고(채증을 중단하라는 뜻) 이XX들아!”, “폭력 경찰 물러가라” 등의 구호와 욕설이 난무했다. 참가자들은 차벽에 ‘정리해고 박살내자’, ‘강제진압 중단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붙였다. 깃대로 차벽 위에 있던 전경들을 공격하거나, 주먹으로 차벽을 거칠게 두드리며 거세게 항의하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일부 참가자는 물병을 던지거나 거리에서 통째로 뜯어온 안전펜스를 타고 올라가 차벽 위에 설치된 채증용 카메라의 선을 뽑기도 했다. 이들은 양 옆 인도를 막고 있던 경찰들과 쉬지 않고 몸싸움을 벌이며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차벽에서 멀리 떨어져 행렬 뒤 편에 자리 잡고 있던 참가자들에게서는 한결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예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앉아 맥주와 준비해온 음식 등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참가자들도 많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원생 이 모(26)씨는 “왜 저렇게까지 해서 (저지선을) 뚫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가볍게 몸을 흔드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그 사이 방송차에서는 “방송차가 뒤로 이동하니 앞자리로 이동해서 빈자리를 채워달라”거나 “젊은 남성분들은 앞쪽으로 나와 저지선을 함께 뚫자”는 방송이 이따금씩 흘러 나왔다.

▲ 일부 참가자들이 인도를 가로막고 있던 경찰을 뚫고 진입을 시도하면서 거친 몸싸움이 이어졌다. ⓒ허완 기자

경찰이 경고방송 끝에 물대포와 최루액, 색소포 등을 쏘아대자, 차벽 앞에서는 점점 더 거센 ‘분노의 몸짓’이 이어졌다. 한 쪽에서는 ‘폭력은 안 된다’며 이를 저지하는 참가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팽팽한 긴장 속에 긴박하게 대치 상황이 이어지던 새벽 두 시경, 일부 참가자들이 ‘희망의 계단’을 쌓기 시작했다.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손길이 뒤에서 앞으로 벽돌과 소금포대 등을 연신 날라댔다. 경찰의 차벽을 넘어 85호 크레인으로 가자는 이들의 열망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계단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강경 진압’으로 반응했다. 경찰의 진압 작전은 순식간에 시위대를 50여 미터 뒤로 멀찌감치 밀어냈다. 결국 차벽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 형성된 ‘전선’은 다음날 정리 집회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 채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새벽에 발생한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연행된 50명의 석방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혼선도 빚어졌다. 주최측은 10일 아침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연행자가 석방되기 전에는 희망 버스 단 한 대도 서울로 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일부 참가자들은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참석자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대안은 있는 거냐”고 되물었다. 일부에서는 짐을 챙겨 농성장을 이탈하는 장면도 적지 않게 목격됐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자체 행사’를 갖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주최측과 참가단체 대표단이 회의를 거듭하면서 오전 한 때 프로그램 진행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도 두세 번 연출됐다. 무엇보다 한 번 ‘밀려난’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갈 힘은 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맨 앞줄에 서있던 한 참가자는 “이럴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 시민들은 행진을 가로막은 차벽에 다양한 구호를 담은 손팻말을 붙이며 항의 의사를 표시했다. ⓒ허완 기자
▲ 대치가 이어지면서 일부 참가자들이 물병을 던지는 등 강하게 저항하자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액, 최루액을 섞은 색소포 등을 뿌리기 시작했다. 차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 물대포가 참가자들을 조준하고 있다. ⓒ허완 기자

“판을 크게 키워놓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판을 이끌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책임 있게 판단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

소리 공연과 랩, 마임 등 흥겨운 ‘연대 공연’이 이어지던 10일 오전, 현장에서 만난 한 노동운동단체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으로 한진중공업 사태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라면서도, “지금처럼 느슨한 연대로는 경찰의 저지선도 뚫을 수 없고, ‘판’을 앞으로 이끌어 나갈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같은 상위 단체가 대규모 투쟁을 조직할 여력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만 기대기에는 (투쟁의) 한계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송경동 시인은 11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밥을 먹으러 가는 데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기 마련”이라면서 “그럼에도 ‘밥을 먹으러 가자’는 데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 시인은 “기존의 운동들이 많이 관성화되어 있고 진정성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운동 중심’을 넘어서 보편적인 ‘사람의 문제’에 기반을 두어 공개적으로 (희망의 버스를) 제안하고 연대해나가는 운동이 힘을 갖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어 송 시인은 다양한 목소리가 한 데 어울리면서 발생할 수 있는 전술적 의견 차이에 대해서는 “각자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투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큰 결정들은 현장에서 의견을 종합해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희망의 버스’ 내부에 이견이나 분란이 있다고 보는 것이나 운동조직과 일반시민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관점도 잘못된 것”이라는 게 송 시인의 생각이다.

▲ 경찰의 진압은 신속하게, '효과적으로' 시위대를 저지선에서 멀찌감치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민은 부상을 당했고, 50여 명이 연행됐다. ⓒ허완 기자

한편, ‘희망의 버스’에서 2008년 여름의 거리를 장식한 ‘광우병 촛불집회’를 연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반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가 집회를 주도했다는 점과 ‘느슨한 연대’가 지속됐다는 점 등 당시의 촛불집회와 ‘희망의 버스’가 여러모로 닮았다는 지적이다. 2008년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는 송선주(22) 씨는 물대포와 최루액 등이 등장한 경찰의 강제 진압, 결국 ‘차벽’을 넘어서지 못한 ‘2차 희망의 버스’의 고민 등 “현재 상황이 2008년에 ‘명박산성’을 앞에 두고 시위대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 협상에 반대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던 촛불집회는 당시에도 ‘새로운 운동’, ‘대안적 운동’ 등으로 불리며 뜨거운 여론의 관심과 호응 속에 거리를 물들였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광장에 나왔고, 자유롭게 떠들었다.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했고, 즉석에서 토론이 오고가기도 했다. “웹 2.0 세대가 시위를 ‘놀이’로 만들어 즐기기 시작했다”, “대중지성, 집단지성이 세상을 바꾼다”는 등의 찬사도 이어졌다.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동시에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권력을 향해 냉소와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그 뜨겁고 맹렬했던 기세만큼이나 급작스럽게 사그라들었다.

▲ 경찰의 차벽 앞에서 피켓을 들어보이는 '2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의 모습. ⓒ허완 기자

2008년 촛불집회 직후 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 공동 저자로 참여했던 백승욱 중앙대학교(사회학) 교수는 당시에 썼던 <경계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라는 글에서 “(집회가) 축제로 끝난다는 것은 이 집회에 참여하는 대중들이 이미 머물러 있던 경계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지키면서 불만만 표출하는 차원에 머문다는 의미”라면서 “촛불집회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이 집회가 ‘축제’가 되어 ‘카타르시스로’ 끝나는 일”이라고 썼다. 백 교수는 이어진 글에서 “2008년 촛불집회가 부딪힌 가장 큰 한계점은 광장의 저항이 자신의 생산·재생산 공간(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확산되고 이전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촛불집회가 “참가자들 사이에 놓인 경계들(비정규직과 정규직, 이주노동자와 현지인, 남성과 여성, 고학력 노동자와 저학력 노동자 등)을 넘어 구체적인 연대로 나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희망의 버스’의 미래를 좌우할 고민이자 과제로 남아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희망의 버스’를 제안한 송 시인도 “(한진중공업 사태가) 이 곳 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과 이 일이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보다 긴밀하고 보편적으로 퍼져야 한다”며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산 등 그간 진행되어 왔던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의식”을 언급했다. 이는 ‘한 번 왔다가 가는’ 투쟁의 현장에서의 삶과 일상 생활에서의 삶이 서로 변화를 주고받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엇갈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인 셈이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참가자들이 단순한 ‘동정’이나 ‘안타까운 마음’, ‘막연한 분노’를 넘어서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희망 버스'가 당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장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도 숙제다. 한진중공업노조가 사실상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희망버스'는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큰 힘이 되고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어떤 결말로 나아갈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차 희망의 버스'가 안고 갈 희망만큼이나 그 등불이 되고 있는 김진숙지도위원에 대한 부채감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한 곳은 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이었다. 이곳에서는 부당한 임금체계를 개선하고, 특수고용직으로 규정된 학습지 교사를 정규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투쟁이 무려 12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작년 겨울 파업을 벌였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30여 명은 ‘희망 자전거’를 타고, 2년 전 직장을 잃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1일 평택을 출발해 도보로 ‘희망의 버스’ 대열에 합류했다. 사측의 직장폐쇄에 맞서 일괄복귀를 요구하며 두 달 넘게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 100여 명도 달려왔다.

‘희망의 버스’가 활짝 열어젖힌 ‘연대의 장’은 분명 다양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지만 “광장에 모인 개인들은 과연 ‘연대’하고 있었던 것 것일까? 아니면 함께 모인 사람들과 그저 함께 있기만 했던 것일까?”(백승욱 교수)라는 질문은 이번에도 필요해 보인다. 과연 ‘희망의 버스’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더 많은 곳으로 실어 나를 수 있을까?

▲ 참가자들은 대오를 해산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꼬박 밤을 지샜다. 그 사이 새벽이 밝아왔다. 농성 대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차벽도 밤새 자리를 지켰다. ⓒ허완 기자


공지영 작가의 트윗. "대체 일만명이 한국 제2도시 도심서 밤새 시위를 하는데 한줄도 한장면도

보도되지 않는다. 이건 전두화시대 수준의 후퇴다. 기자들의 순종이 지속된다면 이는 80년 이전

혹은 역사에서 없던 암흑으로의 전무후무한 후퇴로 보인다."


정말이다. 딱히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이, 제돈을 주어가며, 소중한 휴일을 포기하며, 이백여대

가까운 버스를 타고, 봉고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모인 일이다. 그렇게 모인 만여명의

사람들이 한진중 85호 크레인 위에서 185일째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그녀를 응원하러, 죽지 말라고,

모인 참이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 라거나 비정규직 철폐! 같은 가다듬어진 주장도

넘실거렸지만,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정권과 자본과 언론이 말라죽이는 사람 하나 살리러 간 길이었다.


그게 기사꺼리가 안 된다고? 좀처럼 본 적 없는 그런 높은 수준의 연대라거나,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이 만 명이 자발적으로 모인 거라거나, 심지어 노암 촘스키가 지지발언을 보낸 그 '사건'이?

180여일째 35미터 크레인 위에서 계절 세개를 보내며 한진중공업의 불법적이고 악의적인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고 있는 그녀, 김진숙과 한진중 노동자들이 보이지도 않았으니 새삼

놀라울 것도 없지만, 언론이 잘했다면 MB가 대통령되는 따위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놀랍다.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고 눈물짓고 빵빠레 울리던 언론, G20개최로

수십조의 경제효과가 기대된다며 앵무새처럼 읊어대던 언론, MB의 말 하나 토씨 하나까지 금칠해서

홍보하느라 지면과 이미지가 넘쳐나는 언론, 4대강이니 민간인사찰이니 정권에 골치아픈 이슈가

있으면 알아서 축소보도하는 언론, 삼성과 한진 따위 대기업들의 횡포와 불법행태에 대해서는 눈감고

입다물면서, 틈만 나면 국민들을 훈계하고 교육해서 '공정사회'에 걸맞는 '국격'돋는 언론.




정말이지 "You are not 언론"이다. 방송은 전멸하다시피했고, 그나마 지면으로는 몇개 살펴볼만한

기사가 남은 게 다행일까. 얼마전 올렸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김진숙, 그들은 살아내려와야 한다. 에

이어, 7월 9일에서 10일까지 무박 2일에 걸친 2차 희망의버스 사진들과 참가기. 언론이 제대로 한다면

굳이 왜 카메라를 들고 가서 400mm 폭우 속에서 비맞으며 고생했겠나. 언론 따위, MB보다 더럽다.
 


9일 오후 1시, 시청 앞과 서울 시내 곳곳에서 2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가

출발하며 시청을 지나는데 시청앞 광장에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들, 주말에 놀러나온 길에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경찰차들이 보였다. 희망버스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뜻이 통한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버스를 대절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지라 버스회사나 색깔 따위는 제각각이었는지라 앞에 '희망버스'

몇 호차, 이렇게 싸인지를 붙이는 걸로. 이제 전국에서 모인 185대의 버스가 김진숙님에게 간다니 두근두근.


4시, 휴게소에서 쉬는 중, 저마다 계란과 떡볶이와 과자들같은 간식거리를 나누느라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지경이다. 걱정스러운 건 부산에 내리붓는다는 장대비. 엠비의 인공강우는 아닌지 의심이..어제도

비가 엄청시리 내리고도 계속 쏟아붓는다. 부산은 어떤지, 김진숙지도님은 괜찮은지, 마음이 더 부산해진다.


그와중에 부산역에서 크레인으로 가는 길목인 영도다리를 막았다느니, 한진중공업 앞에 물대포부대가

깔리고 새까맣게 닭장차와 전경들이 깔렸다느니. 나는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를 읽고 있었다. 저자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그의 책 중 한대목. "평생을 일해도 집한칸 지닐 수 없는 세상에 널 살게 할순 없지

않겠느냐..비정규직은 울고 정규직은 잔업과 성과금에 영혼을 파는, 오로지 이 두가지의 선택이 네 미래가

되게 할 순 없지 않겠느냐.(김진숙, 김주익열사 추모시)"

7시, 부산역 광장에 모이고 나니 이미 사람이 가득하다. 걱정했던 것처럼 400mm 폭우가 내리고 있는

부산이었지만 역앞 광장에서 울려퍼지는 문화제의 익숙한 마이크소리와 후끈한 분위기. 전국에서 195대,

서울에서 66대가 출발했다는 소식에 버스안에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었는데 정말 많이도 모였다.

'WELCOME TO BUSAN웰컴 투 부산'이라 적힌 촌스러운 구조물을 넘어, 역앞 광장을 그득하게

메우고도 역사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까지 꽉꽉 들이찬 사람들. 이들을 움직인 건 '김진숙', 그리고

그녀와 크레인을 함께 지키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

그녀는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서적 23선 중의 한권이기도 한 '소금꽃나무'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그들은 아직도 거북선은 이순신장군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김진숙,소금꽃나무)"


그녀와 한진중공업의 투쟁은, 위험천만한 고공농성은 단순히 감성으로, 휴머니즘과 드라마로 소모할

꺼리가 아니다. '노동'의 제몫찾기, 한줌 제한 나머지는 모두 노동자라는 자각이 중요한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희망의 버스'는 그들에 대한 구조활동이나 봉사활동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거다. 일상화된 정리해고와 자본과 공권력의 야합 앞에 위협받는 유리병같은 일상을.


비는 참 오지게도 왔다. 폭우 속에서도 노래를 찾는 사람들, 3호선 버터플라이 등의 공연에 이어

1차 희망의 버스를 만들어냈던 시인 송경동을 비롯한 시인들의 시낭송이 있었다. '크레인 위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간'이었던가, 제목부터 의미심장했던 결코 짧지 않던 시는 순간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진정성과 '불순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행진 시작. 촛불집회 때 보였던 우비가 다시 보인다.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던 촛불소녀.

정말 올해 맞을 비는 전부 맞은 거 같다. 촛불소녀의 촛불이 우의 속에서 흔들림없듯, 사람들은

장마철 폭우가 우박처럼 아프게 내리붓는 와중에도 흔들림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김진숙 그녀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그녀의 일과 한진중공업의 일이 전해지고 난 후 가장 가벼운 마음이었는지도.

행진은 부산역 광장에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까지의 코스가 예정되어 있지만,

경찰들이 조선소 앞에 까맣게 진을 치고 있다느니, 영도다리를 봉쇄했다느니 불길한 소문들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래도 교통 안내판에는 '부산역->영동한진'까지 행진이 예정되어 있다고

나와있어서, 어쩜 김진숙지도님을 볼 수 있겠구나, 조금은 안심되던 때.

내가 겪은 부산 시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편에 서서 공권력과

용역깡패들, 보도하지 않는 언론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병원 1층 로비를 개방해서 화장실도

쓰고 전화기 충전도 하도록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차 창문을 열고 왜 괜히 길막히게

부산까지 와서 난리냐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는 사람도 있었다. 뭐, 다 그런 거 아닌가. 다양한 목소리.

그런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국회'라는 그릇에 넣고, 그 안에서 전체 국민의 삶을 위한 정책을 편다는

게 초등학교 수준의 '정치'에 대한 설명이랄까. 그래서 이렇게 이름 중의 '정의'를 갖고 말장난하며

'justice21'이라느니 홈페이지 주소를 광고하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왜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노동일

한번 해본 적 없는 화이트칼라, 그 중에서도 잘 나가고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만 있는지.

그래서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는 저 플래카드가 마냥 곱게만 보이지는 않는 거다. 일단은 선거가

굉장히 중요하고, 의정활동에 대한 감시도 중요하다지만, 그거로는 뭔가 2% 이상 부족하다.

계속해서 행진 중. 몇 년만에 거리행진인지. 미처 꺼두지 않은 빨간 신호등이 반짝거리고, 차들이

씽씽 달려야 할 차선 위를 걷는 느낌은 꽤나 매혹적이다. 비가 미친 듯이 내리붓고 있지만, 평소

생각지도 못하던 공간에서 기존의 규칙과 상식을 깨뜨린다는 건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

아, 거리 행진은, 부산역 광장에서부터 한진 영도조선소까지의 행진은 신고를 마친 합법 집회.

사실 한진중공업, 김진숙이나 다른 해고노동자들의 문제는 비단 여기뿐만이 아니다. 콜트 노동자들,

유성기업 노조, 발레오공조 노조, 그리고 노조조차 갖지 못한 삼성 같은 곳에서도 무한반복되듯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들. 구조조정과 등치되는 정리해고, 허울만 좋은 법 뒤로 벼랑끝으로 밀려나는

노동자들. 그 와중에 일종의 '대표성'을 띄고 그나마의 '대중성'을 획득한 것이 한진중공업. 이번

싸움을 꼭 승리로 만들어 김진숙과 한진중공업이 웃을 수 있도록 해야 할 이유기도 할 거다.

한진중공업 노조가 사측과 독단적으로, 법적 효력도 없는 타협에 합의하고 나서는 여기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로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거리 곳곳에는

그들의 반칙과 기만을 숨기려는 플래카드들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전국에서 모인 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니 손팻말이니, 그런 것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85호 크레인 사수! 노동자민중 생존권 쟁취! 정리해고 철회! (크레인) 강제진압 반대!"

한시간쯤 걸었을까. 걱정하던 영도다리는 허무할 정도로 금방 넘어버렸다. YS를 당선시키지 못하면

모두들 영도다리에서 빠져죽자느니 어쨌다느니, 그런 어줍잖은 이야기 속에서 등장해 유명했던

영도다리가 여기였구나, 느끼기도 전에. 아마도 모두들 여기쯤 경찰이 봉쇄하지나 않았으려나,

김진숙지도님을 보지 못하고 막히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 맘이었을 거다.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걸음이 점차 느려지더니, 멈췄다. 명절날 고속도로에서

그렇듯, 꽉 막힌 도로사정은 사람을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카메라는 이제 조금씩 장대비

앞에 무릎을 꿇어가고 있었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렌즈로 앞으로 바라보니. 차벽이다.

언제부터 여기서 버티고 섰을까. 물대포차가 가운데 버티고, 양쪽으로는 차벽이, 그리고 채증용 카메라와

조명이 설치된 닭장차가 그 옆으로, 남은 부분은 완전 무장한 전의경들이 메웠다. 아니 근데, 이들이

왜 정당하고 적법한 행진을 막고 섰을까?? 불법으로 노상을 점거하고 합법 행진을 막고 있는 경찰들이다.

차벽 앞에서 당황해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럴 수 밖에 없다. 조직된 대오도 아니고, 몇몇 학교와

조직을 포함한 개인들이 제각기의 판단으로 참여한, 지도부 없는 무리인 거다. 부산역에서부터 물처럼

흘러흘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까지 흐르려던 물줄기가 까만색의 살벌한 경찰들에 가로막혔다.

그 앞에서 '같이 살자',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85호 크레인에 희망을', '다시 소금꽃을 피우고 싶다'

따위 손팻말을 든 건 해고노동자들의 가족들. 나중에 경찰들이 폭력진압하며 연행해 간 가족들도

저기에 있었다. 해고되어 크레인에 오른 노동자분의 아내와 17살짜리 딸이었다던가.


'소금꽃'이란 김진숙 그녀의 '소금꽃나무'란 책 이름에서 비롯했을 거다. 배 안에서 용접하고 페인트칠

하며 온통 땀에 절어버린 조선 노동자들의 옷위에는 늘 하얗게 소금이 맺혀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소금꽃'을 매달고도 든든한 노동자들이 바로 '소금꽃나무'라는 그녀의 표현.


건물 위는, 사진기자들이 저렇게 진을 쳤다. 이미 그들은 전선이 여기에 생기리란 것을, 경찰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리란 것을 알고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찾아 아우성쳤던 걸 거다. 뭐, 곤봉과 방패가

번쩍거리고 물대포가 최루액을 뿜는 그런 풍경을 노리는 까마귀떼나 하이에나 같단 생각도 들었지만,

여하간 저만치 진을 쳤으니 보도는 잘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지금.

폴리스라인, 되먹지 않은 글자 위에 '정리해고 박살내자', '강제진압 중단하라'는 스티커가 빨갛고

파랗게 나붙었다. 법도 무시한 네놈들의 폴리스라인 따위. 페인트로 단정하고 세련되게 칠해진

글자들 따위, 우리들의 촌스럽고 싸구려(지만 접착력은 끝내주는) 스티커로 덮어버리겠달까. 

차들 틈새로 어렴풋이 보이는 너머 풍경. 여기서 700미터쯤만 가면 바로 김진숙과 한진중 해고자들이

농성 중인 85호 크레인이 나타난다고 했었는데. 경찰들은 아무 법적 근거없이 여길 막아서고 심지어

폭력적으로 진압하려 들면서 스스로의 정체를 노출하고 말았다. 한진중공업의 사설 경비업체 나부랭.

그런 경찰 따위. 어디에서 났는지 '폴리스 라인', '이선을 넘지마시오' 따위가 적힌 형광색의 반짝반짝

빛이 나는 차단대가 차도 한켠에 우르르 쌓여있었다. 그리고 차벽 앞에서 그걸 한두개씩 빼어서는

깔개로도 쓰고, 저렇게 무더기 위에 철퍽 앉아서 지친 다리를 쉬는 사람들. 스스로 공정하고 본연의

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찰의 권위 따위 궁둥이 밑에 깔려도 싸다.

차벽 앞에서부터 버글버글하게 모인 사람들. 끝이 보이지 않는 인파였고, 비바람에 쉼없이 나부끼는

깃발이었다. 그리고 이유없이 진로가 막힌 것에 대한 분노 한덩어리였다.

비상출동했다는 닭장차, 예외없이 골고루 '강제진압 중단하라'는 스티커가 붙었다. 사실 크레인에 대한

강제진압이 시시때때로 시도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중단 요구였는데, 2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부산에

내려와 행진중인 사람들에 대한 강제진압 역시 중단하라는 요구로 커져버렸다. 경찰이, 한진중공업이,

무엇보다 이 정권이 일을 그렇게 키우고 있었다.

차벽과 차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우선 막아놓고는, 틈새는 몸빵. 죄없는 전의경을 앞세워 길목을

틀어막은 그들이다. 그리고 길을 트라며 달려드는 시민들과 방패로 받아치는 전경들의 몸싸움이

벌어진 뒤쪽에서 잠자리떼처럼 흉물스럽게 공중으로 부양하는 것들, 뒷날의 사진채증을 위한

캠코더나 카메라 장비들인 거다. 그리고 선무방송. '지금 일부 집회참가자들이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니, 해산하지 않을 경우 강제 진압하고 전부 연행하겠다'던가. 누가 불법인가.

완강한 차벽 앞에서, 사람들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왜 여기에 왔으며, 누가 우리를 막고 있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노랗고 하얗고 파란 우의를 입고서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흐르는 빗물에도

개의치 않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부가 있었다면, 좀더 많은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 않을까 아쉽긴 하지만, 각자의 단위별로, 참여한 버스별로 진행된 이야기.

성소수자들도, 장애인들도, 두리반으로 모인 인디 음악인들도, 모인 자리였다. 이왕이면 좀더 멋지게

전체의 목소리와 요구를 담아낼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전통적인 노동문제뿐

아니라, 성소수자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장애인 문제 같은 다른 문제들도 산재해 있음을, 상식이라 믿는

수많은 것들이 사실 하나하나 누군가의 밥그릇과 생존을 위협하는 질곡이자 장애물일 수 있음을 나누는

자리였다면 더욱 멋졌을 거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철회되고, 비정규직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멋진 세상이 되겠지만,

좀더 당당하고 신나려면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거 같다.

김진숙지도님에게 전달하려던 희망의 배가, 빗물이 강이 되어 흐르는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진수식을

가졌다. 한진과 경찰, 자본과 국가가 이런 식이라면, 다음번 3차, 4차가 계속 노도처럼 밀려올 테고,

그렇게 길바닥에서 진수식을 가진 종이배가 85호 크레인 앞으로까지 항해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참여연대에서 걸어올린 현수막,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김진숙님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분들. 함께 2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오진 못했지만 그 마음은 서울과 지방 곳곳,

오프라인과 온라인 곳곳에서 넘실거린다.

밤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색소물대포를 쏴대고, 사람 얼굴을 겨냥한 최루액 물총이 난사되었으며,

방패와 곤봉 앞에 몇사람이 두드려맞고 실려가고 연행되었는가 하면, 급기야 최루액 물대포를 쏘아서

대오 전체를 고르게 적셔주는 만행까지.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있던 말던, 순식간에 사방은 무슨

가스체험실처럼 되어 눈물콧물이 낭자하고 기침소리가 가득해졌었다.

그렇게 심상정 전 진보신당의원이 연행되는 등 50명이 연행되고, 수많은 사람이 최루액과 경찰의

폭력으로 병원에 실려가거나 후송되는 밤을 버텨내고 날이 밝았다. 방송차까지 빼앗기고 나서

좀처럼 낙관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끝내 자리를 지켰다. 이 외로운 남도의 끝, 홀로

고립된 채 186일째를 버티고 있는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최루액 대량방사의 따꼼함을 담배연기와

물로 헹궈내며. 폭력경찰 물러가라! 정리해고 철회 투쟁! 의 구호가 밤새 이어졌다.

7월 10일 6시경. 경찰들은 어느새 차벽 뒤로 견찰들 전부 숨어들어간 상태. 사람들은 제각기의 자리에서

독려발언을 이어가고, 인디밴드나 음악인들은 자유발언이나 공연을 통해 사람들을 북돋고 있었다.

이 차벽 너머에는 김진숙지도님과 다른 노동자분들이 고공농성 186일째의 아침을 맞고 있었을 거다.

밤을 꼴딱 새고는 난민처럼 널부러진 이들, 머리 위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무엇이 이들을 이런 고단함으로 이끌었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생을 자발적으로 사서 하는 사람들.

폭우가 쏟아진다는 걸 알면서, 경찰과 한진이 곱게 보내줄리 없다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알았으면서,

그리고 당장의 밥벌이와 생활에 지쳐 일주일 중의 주말만을 기다렸을 거면서.

7시쯤. 기자회견. 유시민과 정동영이 함께 했다고 했지만, 아침 7시가 넘어 시작된 기자회견에 모습을

보인 건 진보신당의 노회찬 전대표, 조승수 대표와 민노당의 권영길 의원을 필두로 한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들의 참담한 얼굴표정, 그러고 보니 거리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나 백기완 선생님,

가장 앞에 서서 길을 뚫겠다 하셨던 두분은 괜찮으신 걸까.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분들이야말로

희망이다.

그렇게 기자회견이 끝나고, 밤새 있었던 우리의 몸짓과 목소리가 공중파나 다른 언론에서 거의

묻혀버리다시피 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리면서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일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비를 내어가며 자발적으로 이 먼 곳에까지 와서 한목소리로 한진중공업 사태의 해결을

촉구한다는 것. 그 평화롭고 합법적인 행진을 불법적으로 막고 폭력을 행사하며 진압하려든 것은

언론이 다룰 내용이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3차 희망의 버스를. 이라고 할 수 밖에.





누군가의 트윗을 보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오랜동안 눈으로만 좇던 그녀, 김진숙의 트윗을 퍼나르고 여기도 당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있으니 울지 말라며, 죽지 말라며 하루종일 몸만 회사에 두고 있던 어제였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과 한진중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과 용역깡패들의 침탈이 시작되던 순간, 이 사람은 '그런' 강의를 듣고 있어 마음 둘 곳을

모르겠다지만, 난 '그런'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지원하는데 일조하는 곳에 몸담고 있다니.


그녀가 내 타임라인에서 언제부터 날짜를 하루하루 세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진중공업, 유성기업 같은 파업현장이나 명동성당 앞, 포이동 판자촌같은 재개발(예정)

지역들의 이야기들로 온통 무거워지기만 하던 공간, 그녀에게 조금더 일찍 내 목소리를

전하지 못한 게 안타깝다. 그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나의 침묵이 행여나

부정적이거나 힘빠지는, 그렇게 전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노조'의 이름으로 평노조원들의 인생과 신조를 둘둘 말아서 투항해버린 노조

집행부..비겁하단 말로 부족하다. 비열한 배신행위, 그야말로 등에 칼 꼽는 이적행위를

한 거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핏대세워 분노하기엔 스스로 떳떳치 못하단 생각이

들어서..지금이라도 한진중공업 파업사태의 배경을 알만한 글 하나 펌..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진숙 그녀는 살아 내려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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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울고 카메라도 울고 나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정희준의 '어퍼컷'] 조남호 회장님, 이건 살인입니다!


지난 1월부터 한국방송(KBS) 부산방송총국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 '시사인 부산'의 진행을 하고 있다.

지난 수요일도 여느 때처럼 '시사인 부산' 진행을 위해 남천동 KBS로 갔다. 그날 방송의 주제가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의 농성장과 이곳을 방문한 희망 버스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탐사 보도 프로그램의 특성상 열 받는 이야기, 억울한 이야기, 기가 찬 이야기, 귀신 곡할 이야기를 많이 다뤄봤기에 솔직히 그날도 분장실에 들른 후 무덤덤하게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이 프로그램은 피디와 작가들이 사전에 7~12분짜리 비디오 세 개를 준비하면 내가 그 사이사이를 연결하며 진행하는 30분짜리 프로그램이다. 최근엔 진행이 꽤 익숙해졌다. 미리 집에서 대본을 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판단하고 오기 때문에 내가 맡은 부분이 끝나면 스튜디오 안의 모니터를 통해 이어지는 비디오를 보곤 했다. 그런데 이날은 조금 달랐다.

내리는 비 때문인지, 피디와 카메라맨이 오늘은 더 잘하려 해서인지 어딘가 어수선했다. 나도 몇 번을 버벅거렸다. 왠지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그날 유난히 실수를 많이 했다. 끝나고 나서 담당 피디가 "교수님이 자꾸 틀리니까 나도 틀리잖아요!" 하며 투정이다. 왜 그랬을까.

자꾸 눈물이 나올라 그러잖아 XX…

첫 비디오는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들은 농성을 시작한 2010년 12월부터 집에 들어가지 못한 관계로 식구들과의 유일한 통로는 휴대 전화다. 가족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이곳 농성자들은 영상 통화를 많이 한다. 한 농성 노동자가 아내와 통화를 하다가 아들을 바꿔보라 한다. 큰아들이다.

"오늘따라 니 와이리 잘 생겼노."

참으로 싱겁고도 썰렁한 그 말에 작은 화면 속 아들은 덤덤해 보인다. 이어 아버지는 동생 잘 챙겨주라는 말도 한다. 그런데 아들은 대답이 없다. 나 혼자 속으로 '요즘 애들 참 버릇없어, 대답을 안 해' 하며 내 아들을 떠올리는 순간 내 귓전을 때리는 아버지의 한 마디.

"또 운다 이놈 자슥."

이어서 집에 있는 둘째 아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분신과도 같다는 둘째는 최근 가족의 그림을 그리는데 아버지를 그리지 않았단다. 아이 엄마는 둘째가 요즘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울까봐 아버지의 전화를 안 받는다고 자기도 울먹이며 말한다. 엄마가 인터뷰를 하는 사이 결국 둘째는 머리를 양 무릎에 파묻고 울기 시작한다. 양팔로 마구 눈물을 훔치면서.

또 다른 농성자는 딸 이야기를 한다. 배가 아픈데도 말을 않고 있다가 결국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큰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면서도 아빠 걱정을 했다고 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면 될 것이지, 이 곰 같은 노무 새끼가 계속 참았던 모양이에요. 병원 가면서도 하는 말이…. 지가 뭐할라꼬 병원비 걱정을 하냔 말이야."

비디오를 보고 있는데 문제를 직감했다. 내 마음 속에 이미 눈물이 한바가지 고여 버린 것이다. 눈 크게 뜨고 껌벅이며 참는데, 이걸 계속 보다간 다음 순서 진행을 못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안 보기로 했다. 그래서 대본을 보려는데 소리는 계속 들리는 게다. 눈이 다시 모니터로 간다. 결국 스튜디오 구석으로 가서 대본을 들고 소리 내서 읽기 시작했다.

어수선하게 두 번째 진행을 마치고 다음 비디오가 나올 때 나는 마침 작가와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는 이 비디오를 만드느라 아마도 수십 번은 봤을 것이다. 그런 그가 모니터를 보며 한 마디 한다.

"아~ 눈물 난다."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면 다 울어요!"

그가 방송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해준다.

해고된 남편들이 해고와 함께 농성에 들어가면서 월급이 끊기자 아내들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우선 애들 학원을 그만 두게 해야 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사원 임대 아파트 단지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논다.) 그리고 뭐라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 있는 여성들이라 흔한 식당일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점이다. 그래도 아이들 먹여 살리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처음엔 스티로폼 만드는 새벽 공장에 나갔단다. 아이들을 재우고 한밤중 11시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하는 일당 5만 원짜리였단다. 그래서 손에 쥐는 게 한 달 70여만 원. 그런데 이게 곧 일이 끊겨 다른 일을 알아보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집에서 냉장고 냉각기 부품 조립하는 것. 이건 얼마? 개당 15원. 새벽까지 하루 1000개 정도 만들어봐야 일당 1만5000원이다. 한 달이면 30~40만 원.

그렇게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회사는 사원 아파트에서 나가라고 통보했단다. 그래서 34가구가 쫓겨날 판이다. 이들은 냉장고 부품 조립을 모여서 한다. 그러나 사실은 무서워서 모이는 것이다. 퇴거나 가압류 통보하러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게 무서워 이들은 모여서 작업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쫓겨나면 이들에겐 다른 방법이 없다. 갑자기 부모에게 쫓아가 손을 벌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최근 부산의 전셋값이 오르는 바람에 내쫓기면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과의 인터뷰가 이제까지의 어떤 인터뷰보다 힘들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면 다 운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 방송은 눈물 없이 보기 힘들다. 아버지를 보고 아들이 울고, 전화 끊고 아버지가 울고, 아들 이야기 하며 엄마가 울고, 그 엄마를 보며 아들이 또 울고, 엄마들이 부품 조립하다 인터뷰 하며 울고, 한 엄마가 우니까 옆의 엄마들이 다 울고, 그들과 인터뷰한 작가는 집에 가서 울고, 진행자는 다음날 다시보기 보며 울고.

사실 그날 스튜디오 풍경도 평소와는 달랐다. 비디오가 나가는 동안 카메라맨들을 포함한 7~8명의 스태프가 모두 모니터 앞에 모였다. 이제까지 이들 스태프는 비디오가 나가는 10여 분 동안 이를 보는 이도 있었지만 전화나 잡담을 하며 각자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은 모두들 골똘히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 한진중공업의 정리 해고에 맞서 6개월 넘게 총파업을 벌이던 노동조합은 6월 27일 결국 파업을 철회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업무 복귀를 거부한 약 30여 명의 조합원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있는 타워 크레인 중간에서 장기 농성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법원이 퇴거 명령 강제 집행을 실시하면서 약 300여 명의 용역 직원이 업무 복귀를 거부하는 노동자를 강제 퇴거했다. ⓒ노동과세계

한마디로 '악덕 기업주'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의 가정은 붕괴하고 있다. 이게 바로 가족의 생이별이고 가족의 해체다. 다른 말로는 날벼락이다.

정리 해고된 170명 노동자들의 가족은 남편 없는 생활, 아버지 없는 생활을 반년 가까이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울증에 걸린 아내들이 늘기 시작했고 이미 이혼을 한 부부들이 있는데 점점 늘어갈 조짐이란다. 지금 이들은 벼랑 끝에 내몰린 정도가 아니다. 추락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들은 졸지에 이런 막다른 처지에 내몰리게 됐는가.

요즘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한진중공업이 자리한 영도구를 지역구로 가진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국회의장을 지낸 그 지역 정치인인 내가 면담이나 통화 요청을 해도 거부하기를 벌써 십수 번인데 노동자들에게는 오죽 했겠는가"라며 그의 국회 청문회 출석 거부는 "국회를 무시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라며 조 회장을 비판했다.

주변의 말을 종합해 보면 조남호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주 독한 기업인인 듯하다. "사람 몇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않을 사람이에요"라는 말도 들었다. 지난 몇 년간 회사가 보인 회사의 행적도 양식을 가진 회사라 보기 힘들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영도 조선소 죽이기'에 나선 것이 아닌가 싶다. 이쯤 되면 '악덕 기업주' 아닐까.

회사는 정리 해고의 이유로 '긴박한 경영난'을 핑계 대지만 한진중공업은 지난 10년간 4277억 원의 흑자를 본 회사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수익성도 좋았다. 2010년 조선 부문 영업 이익률은 13.7%였다. 이번 정리 해고 직후 한진중공업은 174억 원의 주식 배당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긴박한 경영난이라니. 노동자들 정리 해고 시키면서 돈 잔치 하는 걸 보면 이들은 참으로 앞뒤도 없고 낯짝도 없는 인간들이다.

한진중공업은 수주 물량이 없어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4월 한 해운 조선 전문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조선 산업은 조선 수주량에서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고 한다. 특히 한진중공업 연결재무제표를 보면, 2010년 말 기준으로 수주 잔액이 5조500억 원. 2010년 중에도 1조7000억 원 수주 계약을 달성했다. 그런데 수주 물량이 없다니.

문제는 이 물량이 모두 한진중공업의 자회사인 필리핀 수빅 조선소에 배치됐다는 것이다. 2006년 이후 수빅 조선소는 67척을 수주했는데 영도 조선소엔 2008년 이후 한 척의 수주도 없는 것이다. 회사 측이 한마디로 필리핀의 조선소로 '몰빵'한 거다. 회사가 영도 조선소를 죽이기 위해, 결국 노동자들 해고의 근거를 마련키 위해 영도에 수주 물량을 배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도 조선소의 문제는 수주 물량이 없는 것 아니라 수주 물량 배분의 문제이다.

노동자 해고는 '가족 살인'

사실 이 수빅 조선소 때문에 2007년 노사는 '해외 공장 관련 특별 단체 교섭'에 합의했다. 당시 사측은 해외 공장을 운영해도 노동자들의 정년을 보장하고 "특히 해외 공장 운영으로 인해 국내 공장 조합원의 고용 불안이 발생치 않도록 한다"는 조항까지 넣어 노조와 합의했다.

그럼에도 한진중공업은 2009년 12월 조선업 불황을 이유로 400여 명(희망 퇴직 349명 포함)을 감원했다. 2010년 2월 정리 해고 중단을 노동조합과 합의했지만 그해 연말 이를 또 깨고 노동자들을 내쫓은 것이다.

1931년 설립된 한진중공업은 74년 역사의 향토기업이다. 그 재벌은 영도 조선소에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됐고 그 재벌 일가를 부자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영도 조선소의 노동자들이다. 그럼에도 그 재벌은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준 수많은 노동자를 무더기로 해고해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또 그 가정을 파괴하는 만행을 부끄러움도 없이 저지르고 있다. 그 뻔뻔스러움과 파렴치함 때문에 나는 그런 이들을 재벌이라기보다는 악덕 기업주라 부른다.

노동자들은 재벌만큼 부자가 될 생각도 없고 재벌의 재산을 뺏을 생각도 없다. 그냥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꿈이고 행복이다.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했고, 방송에 나왔듯 아이들도 아빠의 회사 한진중공업을 (지금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돈독 오른 악덕 기업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이들 노동자와 그 가족의 행복을,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아 무참히 짓밟는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해고 노동자 가족을 취재한 작가는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그 가족에겐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렇다. 채 2년도 되지 않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가족 15명이 생을 달리했다. 한진중공업은 이미 6개월이 지났다.

증오하라!

요즘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돌베개 펴냄)는 책이 유행이라는 이야길 들었다. 백번 동감하면서도 지금 우리 한국사회의 현실에는 뭔가 2퍼센트 부족하다. '분노하라'에는 그 방향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대상이 누락된 듯하다. 정확히, 다시 조준하자.

"증오하라!"

우리 사회는 그들을 증오할 권리가 있다. 상생과 공존을 거부하고 수많은 노동자의 고통을 딛고 자신의 배만 불리려는 그들을 증오할 권리가 있단 말이다. 그리고 이는 일방적 권리가 아니다. 그들에겐 자격이 있다. 그들이 우리의 증오를 받을 자격은 차고도 넘친다.

/정희준 동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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