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자락에서 한밤중에 내려서는, 세시간정도 내처 걸었더니 조금씩 해가 밝아왔다. 때맞춰

주위를 둘렀던 산세도 조금씩 완만해지더니 바다까지 슬슬 기어내려왔더랬다. 그리고 하조대.


바닷가에 도착해서 굉장히 추웠던 지난 밤의 고생을 되새길 겨를도 없이 그새 해가 쑤욱 오르진

않았나 걸음을 재촉하는데 문득 눈에 이상한 게 띄었다. 해변 바위들에 띠처럼 둘러져 있는

하얀색 얼룩들. 뭔가 했더니 얼음이다. 파도가 치고 바위에 부딪혀 조금씩 얼어붙은 바다,

그야말로 하얗게 얼어붙은 파도인 셈이다.

보통 철썩, 철썩 치는 파도소리도 강추위에 얼어붙은 채 저기 어딘가 벤치 위에 날카롭고

무겁게 내려앉은 느낌이다. 그래도 벤치 하나가 동그마니 놓인 풍경이 아니라, 파도소리조차

서걱대는 한겨울철 동해바다가 조금은 덜 서럽다.

조금 미적대는 사이에 해가 불쑥 떠올라 버렸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꽁꽁 얼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해돋이를 놓칠 수 없다 싶어 등대 전망대까지 카메라를 들고 뛰었다. 해뜨기 직전이

가장 춥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다시금 오랜만에 확인했고, 사방이 온통 밝아지고 난 이후에야

해가 불쑥 떠올라버린다는 것도 새삼 확인하는 순간.

그리하여 하조대의 해돋이. 시시각각 떠오르는 태양에서 뻗쳐나온 불빛이 하늘을 주홍빛으로

밝히고는,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를 두 조각으로 갈라내선 이쪽으로 뻗쳐왔다.

하늘에 구름이 좀 끼어있어야 빛이 얼룩덜룩 구름을 물고 들어가서 더욱 화려한 모습이

되었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역시 온통 깜깜하던 세상에 불쑥 들어밀어진 주홍빛 광채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푸른색 바다에 대비되는 장면은 참 멋지다.

그리고 후두둑 후두둑 날아가던 말줄임표들. 파도따라 출렁거리며 남쪽으로 날아가던 녀석들.

어느 정도 해가 둥실 떠오르고 나서, 동그랗게 윤곽이 뚜렷하던 해가 더욱 강렬해지면서 스물스물

벌건 하늘로 녹아버릴 즈음, 함께 갔던 신입직원들의 2011년 새해 소망을 담은 연들이 하늘로

날기 시작했다. 뭐, 저렇게 연 하나 띄우는 걸로 뭔가 새해 다짐을 날려보내고 의지를 북돋는 건

조금은 우습다고 생각하지만 좋게 봐줄라 했는데. 바람이 워낙 거세게 불어서 연들이 지들끼리

잔뜩 꼬이고 엉키고, 정말 저기에 그네들의 '새해 다짐'이란 걸 고이 실어보내려 했다면 대부분이

돌바닥에 떨어지거나 바다로 추락해버렸을 듯.

그래도, 그 와중에 몇몇 연은 치열한 경합과 부딪힘을 뚫고서 하늘로 솟았더랬다. 연싸움하듯

얽혔던 실들을 겨우겨우 떼어내고 한줄기 강풍을 따라 하늘로 하늘로.

이제야 조금 해돋이의 의식을 마쳤달까, 한숨 돌리며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하조대

전망대의 등대도 올려다보고, 주위에 놀러온 한줌의 여행객들도 구경하고. 이런 날씨에 여기로

해돋이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우리 말고도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붉은 기운이 돌던 하늘은 이제 엷은 청색이 돌며 바다랑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동그랗고 시뻘겋던

태양은 그 형태와 물질성을 잃어버리고, 노른자가 터지듯 하늘 구석구석으로 스며든 채 번져나가는

듯 하다. 노른자가 터지는 거 같기도 하고, 캡슐약이 터지는 거 같기도 하고.






@ 강화도 전등사.

진흙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단전에 기를 모으듯 영양분을 끌어모았을 거다.

물방개니 게아재비니 어깨로 툭툭 시비걸 때마다 꽃대궁은 파르르 떨었을 거고.


강한 듯 애절하게 탄주되는 기타 루프소리가 뭔가 못견디겠는 쾌감을 선사하듯,

그렇듯 발가락과 똥꼬가 움찔대는 쾌감 속에 뿅. 꽃봉오리가 터져나온 건 아닐까 싶다.


뿅.




@ 전주 한옥마을.


어렸을 적 자주 꾸던 꿈이었다. 팔과 다리, 가슴과 목, 얼굴에 이르기까지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나서는 벌레들이

스물스물 기어다녔었다. '미이라'란 영화를 보기도 한참 전이었지만, 만약 내가 그 꿈의 모습을 재연해낸다면

딱 그 영화에서 풍뎅이들이 팔뚝 속에서 울룩불룩 꿈틀대며 사람 몸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눈알을 파내는

모습과도 같았을 거다.


그렇다고 벌레들이 그 구멍들을 헤집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네들의 여섯개 다리가 잘그락잘그락, 정교하게

움직이며 온몸과 구멍들을 살살 간지르긴 했지만 아프지는 않았고, 내 몸에 더이상 구멍을 낼 생각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별로 적대적이지 않았고, 난 어쩜 그들의 반짝이고 반들거리는 케라틴질 껍데기를 차라리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꿈에서 내가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수십년 묵어 썩어빠진 고목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연밥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단순히 그 벌레들은 이미 누덕누덕 구멍난 상태라 더이상 내 몸에

구멍뚫기는 무리라 여겨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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