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왕 #연상호 #부산행 #창 #영화스타그램 그림체는 낯설고 동작은 엉성하다. 움푹 패인 눈매와 불쑥 솟은 광대를 강조한 인물들은 만화의 미덕인 '뽀샤시'의 덕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보고 몇번이나 전율이 돋고 말았다.

학원폭력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보다는 어떤 사회적인 관계에서던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에 대한 집요하고 사정없는 묘사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약자라고, 피해자라고 선하거나 순할 것만 같은가. 그네들의 어둠은 오히려 가해자들의 일방적인 것보다 더욱 깊고 독하지 않을까.

표출되지 못한 분노와 폭력성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것들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다면, 그래. 이렇게 어둡고 음침하고 일그러진 세상에 사람들일 수 밖에 없는 거다.

p.s.그러고 보니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었다. 아..이 사람 뭐지.



날것의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쉼없이 쏟아져나오는 육두문자와 걸레 물고

내뱉는 온갖 말들조차 세련되었다거나 세련되어서 어색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김기덕의 영화들에서 나왔던

막말들보다도 더욱 강하고, 진짜같았다. 리얼했다. 여기서 '리얼했다'는 말은 흔히 조폭 코미디나 깡패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관용어구'같은 욕들과 억양이 아니라, 정말 진짜로 '마음을 담아' 욕을 하고 있어 보였단 의미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경찰을 폭행하고, 거침없이 욕을 달고 살며, 아버지를 밟아 짓이기고, 길가는 여자에 침을

뱉으며, 여자에 주먹질도 서슴치 않는 사채 해결사. 그런 사람이 주인공이다. 대화와 소재와 주제, 스토리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막장인데 대체 '세련되다'는 느낌은 어디서 왔을까. 세련된 거라 함은 보통 디테일까지

은근하지만 꼼꼼하게 안배되어 있으며, 어거지스럽거나 촌스러운 부분을 최대한 배격한 것을 이르는 것 같다.


아마 그런 부분 아니었을까. 남대문시장에 여자와 아이와 함께 놀러나갔던 남자, 그전까지 항상 쉼없이 담배를

뻐끔대던 남자의 입에 물린 담배가 불이 붙지 않은 채 빙빙 돌고 있던 어느 스쳐간 장면. 또, 아이와 여자가

금세 친해지고 살짝 겉도는 느낌을 받은 남자가 어색하게 주머니에 쑤셔넣은 손을 아이가 슬그머니 끌어당겨

잡아주는 장면. 여자가 남자의 이복 누이의 집에서 서둘러 일어나려는 남자에게 "갈테면 혼자 가"라는 식으로

당돌하게 말하면서도 문 앞을 가로막은 채 주저앉아 양파니 파를 다듬는 장면. 그리고..남자가 손목을 그은

아버지를 들쳐업고 뛰면서 내뱉는 헉헉 끊어지는 단어들, 중간중간 미처 뱉어지지 못한 채 삼켜진 단어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장면. 남자가 입안가득 피를 머금고 꾸륵꾸륵대며 던지는 몇마디 짐승소리 같은 그것들.

너무나 함축적인데, 그러면서도 또 너무나 생생하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 역시 굉장히 좋았다. 양익준의 눈빛은
 
특히나.


세련되다는 느낌은 무엇보다 선정적이고 표피적으로 동원해낸 막장스러움이 아니라 그냥 진정한 막장을

보여준 데서 나온 것 같다. 왜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듯이, 극단으로 밀고 간 막장은 오히려 극단의 세련됨과

통하는지도 모른다. 어정쩡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우물쭈물하는 게 아니라, 거침없이, 끝까지 보여주면서

꾸미지 않는다. 어쩌면 그랬기에 더욱 이야기에 흡인력이 생기고 '진심'이 담겨 버린 게다. 이 영화, 어정쩡한
 
자세로 보면 왠지 한 대 호되게 두들겨 맞을 만큼의 서늘함과 기백을 품고 있다. 실제로 양익준은 이 영화를

자신의 지난 시절을 해소해내기 위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거나 굉장히 날것이면서도 굉장히 세련된 이 영화는, 결국은 사람을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어버렸다. 아니,

그보다는 '굉장히 우울함'이라는 연못에 빠졌다가 흠뻑 젖어서 기어나온 느낌이랄까. 써늘하고, 소름이 돋고,

너무 먹먹해서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가 끝났다는 것만으로 왠지 따뜻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심마저

들게 만드는 영화다. 이 영화의 단점이랄까, 나무랄데없이 행복해보이는 풍경과 최악의 상황을 맞바로 붙여

놓는 거침없는 모양새와 비쥬얼과 사운드를 필요에 따라 드문드문 생략한 채 어느 하나에 집중시켜 버리는

영리한 머리씀씀이. 그런 것들이 일종의 뒤집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망가지고, 이렇게

형편없어져도 괜찮구나. 그래도 어엿하게 살아갈 수 있구나, 하고. 그건 분명 단점이라면 단점이고, 또 분명

장점이라면 장점인 게다.


내가 너무 쉽게 예상해 버렸지만, 예상치 못하게 이뻤던 장면 하나.

(한참 골몰하던 남자,) "야 한연희, 두년희, 세년희, 네년희 이 썅년아, 이 미친년아." "아씨 이 미친놈 진짜."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골목에서 남자가 여자에 침을 뱉고 주먹을 날렸을 때만 해도, 남자가

그녀 앞에서 이렇게 나름의 농담을 던지려고 애쓸 줄은, 그래서 귀여운 모습을 보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문장을 보는 것으론 느낄 수 없는 맛, 그리고 둘 사이의 내밀한 교류를 모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맛. 저런

대사들이 난무하는 사이에서도 그들의 눈빛만 좇을 수 있다면, 비위가 약해도 한번쯤 꼭 시도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꽤나 컸던 영화, 기대 이상이었다. 김기덕의 은퇴 후, 이런 감독이 나타난 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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