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 10점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부키


수많은, 그렇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뿐인, 자기계발서 나부랭이들.

왜 이렇게 자기계발서니, 에세이니, 심리서적 따위가 많아진 걸까. 어느 순간 '멘토'를 자처한 사람들의 도덕교과서는

어떻고. 서점에 가서 자기계발서류의 도서가 빼곡한 공간에 가거나, 그런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굳이 섭렵하고 있다며

자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 어쩔 수 없는 답답함과 일종의 혐오감이 스물거리곤 한다는 걸 솔직히 고백한다.


"암은 내게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멋진 일이었다." - 고환암 생존자인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

"부정적인 인간들은 역겹다! 그들은 당신과 나처럼 긍정적인 사람들의 기운을 빨아먹는다. 그들은 훌륭한 회사, 팀, 관계의 에너지와 생명을 빨아먹는다...그런 사람들을 피하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 해도 당신을 고갈시키는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버려라. 당신은 그런 사람들 없이 더 잘 살 수 있다."

(* 보라색 구절들은 책에서 인용. 딱히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됨)


누군가 누군가에게 작정하고 가르치는 말투로 내리는 '교시'는 대개 뻔하다. 긍정적 사고, 긍정적 태도가 성공을 부른다!

긍정적인 생각은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끌어당깁니다, 라고 말하는 책들 말이다. '좋은 생각'류의

야릇한 '군대 정훈도서'같은 책이나 '시크릿'같은 책들은 제목만 바뀌고 저자만 바뀐 채 같은 메시지를 반복한다.


'긍정의 배신'이 보여주는 긍정적 사고의 허위성.

'긍정의 배신'은 이런 쓰레기들을 수십수백권 읽는 것보다 나은 하나의 성찰을 던진다.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메시지는 눈앞에 닥친 엄연한 위기와 곤란함을 오로지 자신의 마음의 문제로만 치환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자신 이외엔

오로지 '자신의 성장, 발전,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외부세계일 뿐이라는 자폐적이고 허위적인 태도를 낳고, 위기에 처한다.

(당연하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없이 무조건 답은 마음가짐의 문제, 한가지라고 하니까.)


"긍정적 사고에서 말하는 우주에 다른 사람들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것을, 예를 들어 똑같은 목걸이를 원한다면 어쩔 것인가? 아니면 선거나 축구 경기에서 우리와는 반대 결과를 희망한다면? '시크릿'에는 디즈니월드에 놀러갔다가 기구를 타기 위해 너무 오래 기다리는 바람에 실망한 콜린이라는 열 살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년은 '시크릿' 영화를 보고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다른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콜린이 '시크릿'에서 얻은 힘 탓에 뒤로 밀려나 기다리게 된 아이들은? 원하는 대로 여자에게 끌어당겨진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 역시 그녀와의 만남을 원했을까? 아니면 그녀의 환상 속에서 인질이 되어버린 것일까?"

"긍정적 사고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은 당신의 보살핌을 받거나 당신에게 달갑잖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당신을 보살펴 주고, 칭찬하고, 긍정해 주기 위한 존재다...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차단하고, 그 결과 심각한 감정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진정한 드라마로부터 물러선다는 것은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 깊은 무력감이 놓여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왜 뉴스를 나 몰라라 하는가?...아무리 태도를 개조해도 '민간인 사상자 수가 늘고 있습니다.'라거나 '기근이 확산되어..'로 시작하는 뉴스 헤드라인을 좋은 소식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부정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뉴스를 보지 말라는 것, 그러니까 환경을 바꾸라는 얘기는 우리가 희망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진짜 세상'이 저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이런 무서운 가능성에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찬성과 지지, 좋은 뉴스, 미소 짓는 사람들로만 조심스럽게 구성해둔 자신의 세계로 후퇴하는 것 뿐이다."



마음만 잘 먹으면 자신의 마음도 몸도, 심지어 온 세계가 자신에게 복종할 거라는 엉성한 환타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구라'일 뿐이다. 그 구라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신의 세계를 만들어낸 중세의 종교적 사고겠지만, 지금

'긍정적 사고'를 설파하는 저간의 흐름들은 이미 종교적 도그마를 넘어선 수준에서 사람들의 뇌를 딱딱하게 만들고 있다.


알면서 속아주는 '구라'의 효용(?)

물론 '구라' 나름의 효용은 있을 수 있다. 애초 이 책, '긍정의 배신'을 쓴 작가가 겪었듯 암이라거나 실직같은, 당장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난 안 될 거야, 라는 패배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보다는 조금이라도 밝은 면을 보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의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태도를

강요하는 병원의, 사회의, 사람들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건 절대로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에 형을 면제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매달린, 죽어가는 사람의 낙관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실제로 암을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자기들 용어로 '이점 발견'이라고 하는, 암에 긍정적인 감정을 키우는 방식으로 기울었다."

"그 도그마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감정과 병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유방암 환자들에게 뭔가 할 일을 부여한다. 치료 효과가 나타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환자는 자기 기분을 관찰하면서 세포 차원의 전투를 돕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한다...동시에 그런 도그마는 암 연구 및 치료 산업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외과 의사나 종양학 의사 이외에 행동과학자, 치료사, 동기 유발 카운슬러, 훈계를 늘어놓는 자기계발서 저자들도 참여할 길이 열렸다."

"유방암을 선물로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자리에서 밀려나 빈곤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실업자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기회'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는다...긍정적이 되면 구직 기간에 기분을 더 좋게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더 빠르고 행복하게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들일지 모른다. 다들 알고 있지만 애써 눈돌려 밝게 보려고 하는 와중에 굳이 찬물을 끼얹는 건 무슨 놀부 심보냐고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력으로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일들에 대응하고 버텨내기 위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도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도전에 잘 대응하면 '더 큰 성취, 발전, 성숙' 따위가 수반될 거라는 믿음. 다만, 그 이면이 문제라 그렇다.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기 위해 억압되는 감정과 정당한 분노는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음에도 끝내 실패하는 경우에는 어떡해야 하는가. 나아가서는, 개인적 차원의 긍정적인 사고 말고도

예컨대 발암물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거나 정리해고 실시요건을 강화하는 식의 구조적 해결책이 옳은 경우도 있지 않을까.


다시 묻는다. 가난, 실업, 비만은 개인의 마음의 문제인가.

그렇게 낙관론과 긍정적 사고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왔다. 병을 이겨내고 취직을 하고자 긍정적인 마음, 밝은 생각만을 줄곧 가지려 노력하고, 가난을 이겨내고자 '치즈는

누가 옮겼는지' 주저앉아 따져볼 겨를도 없이 치즈를 찾아 바삐 헤매게 된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이제 그건 중요치 않다.


"암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은 감정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끔찍한 비용을 강요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긍정적 사고는 분노와 공포라는 실체적 감정을 부정하고 쾌활함의 분칠 아래 묻어 두도록 요구한다. 불평을 듣느니 가짜 쾌활함을 상대하는 것이 나은 만큼 의료 종사자나 환자의 친구들에게는 몹시 편리하다."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제는 성공을 이끄는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고용주나 긍정적 사고를 믿는 동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의미심장한 실패로 이어진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권위자들은 부정적인 사람들을 떨쳐 버리라고 강조하면서 또 하나의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항상 미소를 띠고, 쾌활하게 행동하고, 흐름을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배척될 각오를 하라."

"긍정적 사고가 실패해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암이 퍼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럴 때 환자가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했다고, 애초에 암이 생긴 것도 부정적인 태도 탓이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는 '이미 피폐해진 환자에게 추가적인 부담이 된다'고 한다."

"작가로 변신한 한 생존자는 유방암이라는 선물을 계시적인 힘의 발현으로 해석했다. 그녀는 '암이 준 선물'이라는 책에서 '암은 진정한 삶으로 가는 차표다. 암은 진정한 뜻에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으로 가는 여권이다.'라고 썼다...이 모든 긍정적 사고는 유방암을 통과의례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렇게 불만과 분노, 현실에 대한 성찰같은 걸 도외시한 결과는 자신의 내부에서, 외부에서, 그야말로 사방에서 드러났다.

긍정적인 사고, 밝은 사고의 마법을 믿는 사람들의 눈빛은 대개 광신도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턱없이 순진한 기대와 희망을

부지런히 배반하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더욱 코너로 몰린다. 무조건 믿고 위로받을 것이 절실해질 만큼. 비합리의 세계다.


외부적으로는 당장의 현실적인 경고와 신호들을 무시한 채 긍정적 사고만 따르다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세계금융위기가

책에서는 큰 예시로 꼽혔다. 나더러 예를 하나 꼽으라면, MB 정부의 숱한 정책적 실패 중 하나를 꼽겠다. 4대강 사업은 어떨까.

회의적인 목소리, 불평과 비판 여론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의 낙관론 속에서 미친 듯 내달렸던 4대강은 파국을 맞고 있다.


인민의 아편, '긍정敎' 혹은 '정신승리법'을 권하는 사회.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않거나 못한 채 무조건 긍정하자는 절대적 메시지는 당연히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위험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처음에 말했듯 갈수록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쓰레기같은 책들을 볼 때

느낀 답답함과 혐오감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정신승리법'을 점점 더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했다.


왜 그렇게 된 걸까. 왜 서점엔 갈수록 자기계발서니 동기유발 코치서적이니 따위가 기승을 부리는 걸까. 사람들이 '긍정적'이

되려 한다고 해서, 꼭 합리적인 의심이나 성찰, 회의적인 태도 따위를 버리기로 작정했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류의

책들이 잘 팔려나간다는 건 하나의 징후다. 거대한 무기력감, 절박함, 패배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반증 같은 것.


이 책이 아쉬운 건 그 지점이다. '긍정'의 힘을 전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예견하지 못한 경제위기나 삶의 위기가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 반대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 시기는 아닐지, 그렇게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난관에 봉착해 하릴없이 '정신승리법' 따위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거라면. 그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답은 있긴 할까.


"물질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태도를 바로잡고, 감정의 반응을 수정하고, 자신의 마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자기를 향상시키는 다른 방법, 예컨대 교육을 통해 어려운 신기술을 습득한다거나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사회 변혁에 나서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까? 하지만 긍정적 사고에서는 모든 도전이 내면적인 것이며 의지를 통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2. 탈주를 잠재운 약빨.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번지고 뭔가 '주권'이라는 게 한줌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강부자 정부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있다고 살풋 실감날라던 때가 있었다. 6월 10일. 백만 가까이의 인파가 어게인, 87년 6월을 외치며 모였었고 이후

6월말까지, 아무 대책도 수습책도 없이 손놓고 있는 정부를 거침없이 압박해 가는 모양새라고 생각했다. (그치만

이런 끈덕진 무대책과 무반응이란 건 이 정부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것 같다. 요새 강호순 사건으로 용산

참사를 덮으려는 심각한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는 온갖 심증과 물증에도 일절 언급을 피하는 청와대'꼬라지하고는.')


어느순간 기류가 바뀌었다. 고병권은 그게 6월말 7월초, "80년대식 강경진압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경찰 고위직의

말대로 거침없는 폭력이 행사되고 난 후, 각계 종교계인사들이 대거 나서서 '비폭력' 행진을 하면서부터라고 본다.

압도적이고 적나라한 국가 폭력 앞에서 잠시 멈칫했던 시민들의 분노가 채 어떤 모양새를 갖추고 어떻게 분출될지

결정될 그 중요한 시점에 종교인들이 촛불시위대의 지도부 역할을 자임하면서 급속도로 그 분노와 '폭력성'이

사그라들어 버렸다는 거다.


물론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폭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역사를 움직이는(진전이건 후퇴건)

중요한 동력인 건 틀림없는 데다가, 민주화의 대표적 상징이 되어버린 87년 6월 항쟁이나 80년 광주항쟁 등을 봐도

스스로를 합법화하는 폭력인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폭력은 이번 촛불집회 때의 양상 따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렬'했던 것이 사실이다.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빚어졌고, 그때도 언론들은 법질서

확립 운운하며 떠들었던 터다. 형식적인 민주화가 쟁취되었고 어쨌든 '우리가 뽑아놓은 대통령'이니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글쎄.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교인'들이란 사람들은, 그 습성상 사람들을 자신들이 구제하고 계도하고 이끌어야 할 '어린양'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마치 그들이 사람들의 아픔을 직접 어루만지고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짊어질 몫이라며

앞장서서 떠맡고자 한다. 아름다운 마음이고, 감동적인 자세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지상의 법'이다. 그들이

가진 숭고한 인류애, 희생정신,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허물을 보려는 자세,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자세..그런 것들은 말이 통하고 눈높이가 맞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내용이다. 누가 잘못했고 어떤 현실적 해법을

구해야 할지,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서 조금이나마 그 왜곡을 풀어내야 하는데, 종교인들은 (거칠게 말하건대)

'모두가 죄인'이고 '폭력=죄'란 구도를 순식간에 형성해 버렸다. 노신이 얘기했던 것처럼 물에 빠진 개는 건져

올려봐야 다시 버릇 못버리고 물겠다고 컹컹댈 게 뻔하니, 우선 죽기 전까지 때렷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을 텐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촛불정국이 (단기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못 남기고 만 상황을 보며 마치 1919년 삼일절 독립만세

운동의 귀추가 오버랩되는 감이 있었다. 훌륭하고 고매한 정신세계를 가진 33인의 '민족대표'란 사람들은 휘황한

문구와 이상적이고 또 그만큼 종교적인 의미와 맞닿는 독립선언서를 쓰고는 채 제대로 낭독조차 안하고서 감옥에

걸어들어간다. 그들의 독립선언서에서 보이는 건 국외의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써내린 또다른 독립선언서에서

풍기는 피 냄새와 일전불사의 자세가 아니라, 어쩌면 조선인민 내부 회람용이 아닌가 싶을 만큼 자족적이고, 또

타협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비폭력'을 내세우며 상처입고 버려진 국민들을 종교인들이 끌어안는

순간, 정부를 향했던 촛불들은 어느새 둥그렇게 안을 보고 모여선 캠프파이어가 되어 버렸다.


잘은 모르겠다. 고병권은 간디와 루터킹목사의 '비폭력'투쟁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최초 촛불들이 공권력과 '빠이와 꽃병'으로 맞대응하기보다 공권력의 구획과 질서를 희롱하면서 겁먹지

않던 그 때의 분위기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어쩌면 한층 적나라하고 짐승스러웠던 7월초의 분위기를

넘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쿨하게 그렇게 갈 수 있었다면..비록 자연스레 격한 감정과 액션들이 간헐적으로 분출될

지라도..지레 겁먹고 수위를 통제하려던 것 같았던 데다가 전혀 지엽적이라 느껴지던 폭력/비폭력 논쟁으로

힘을 소진하진 않았을 거 같다.


종교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힘은 여전히 꽤나 크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맑스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양면적인 면을 가리키는 표현 아닌가. 잘만 쓰면

효능 좋은 약이지만 잘못 쓰면 사람 병신만드는 게 아편인 게다. 신, 그리고 종교는 어디까지나 지상의 인간들이

보다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지 않더라도, 종교적인

위로와 정신적인 고양감만으로는 당장 내 살과 뼈를 발라내겠다고 덤벼드는 아귀들을 막아낼 수 없다는 건

불문가지다.


선종하신 김수환추기경님의 덕성과 고매한 인격을 의심할 바야 없지만, 그 분이 때로 보였던 보수적이거나

양비론적이고 애매한 입장들이 갖는 효과들은 따로 떼어 생각해 보아야 할 거라 생각한다. 그게 어쩌면 종교인에

짐지워진 하나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지 모른다. 하기야, 신의 말씀이라는 성경, 성서, 코란 등등 조차도

정치적으로 읽힐 수 밖에 없고, 또 그렇게 읽혀왔다는 걸 상기한다면, 그 분 역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앞선 글 : [추방과 탈주(고병권, 그린비)] (이명박) 정부로부터의 '탈주' 선언(1/2)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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