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저녁도 먹을 겸 공연도 들을 겸 찾아간 이태원의 올댓재즈. 딱히 연주자 누구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갈 때마다 충분히 즐길 만큼의 선곡과 연주 실력을 보여주는 밴드들을 만나게 된다.

 

연주를 감상하며 음료를 홀짝거리다 문득 눈길이 닿은 곳에 무수히 내려앉은 별빛들.

 

유리창에 새겨진 드럼 세트 위로 반짝이는 별빛에 마음마저 일렁일렁.

 

 

 

 

 

* 사실 이 사진들을 굳이 '19금'으로 분류하기도 애매하고(노출의 측면에서나 연출 의도의 측면에서나),

 

사진을 찍을 당시에도 주위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였을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아무렇지 않게 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단 '19금'이란 표지를 넣긴 하였지만 사실 이건 '전체관람가'에 해당한다고 보임.

 

 

ALER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란 어쩌구로 태클거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뒤로 돌아나가길 권유함.

 

 

 

문득 보였다. 타임스퀘어 티켓오피스에서 뮤지컬 티켓을 구매하려고 줄을 서 있는 와중에 문득 울긋불긋한 색채가 요란한

 

사람이 하나 보였고, 그 뒤를 좇아 카메라를 들이대는 전문가스러운 사람이 몇 보였으며, 그 외곽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고

 

슬며시 사진을 찍으려드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옷인지, 어디가 맨몸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온몸을 두텁게 칠해버렸다. 제법 더운 날씨여서

 

땀이 흘러 바디페인팅이 지워질 법도 한데, 온몸에 덩쿨처럼 엮인 파란색 띠는 선명하기만 하다.

 

 

타임스퀘어를 유쾌하게 맨발로 거닐며, 가로등을 휘감고 포즈를 취하는가 하면, 함께 동행하는 포토그래퍼들과 뭔가를

 

의논하며 장소를 물색하고 있는 듯 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카메라폰을 겨누고 있었고.

 

 

그리고 문득, 타임스퀘어의 경찰서 앞으로 가서 경찰차를 상대로 포즈를 취하기 시작한 그녀. 아프로 스타일의 헤어도

 

멋지지만 웃을 때 활짝 드러나는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현란한 바디 페인팅과 뚜렷이 대비를 이룬다. 

 

 

 

타임스퀘어를 지키고 있는지 혹은 그들의 공권력으로 점유하고 있는지도 모를 NYPD와 마침 거꾸로 성조기를 휘날리며

 

지나가는 레미콘 차, 그 사이에서 저런 도발적이고 과감한 색감의 육체를 과시하는 아티스트의 자유로움이란.

 

정복에 배지까지 차고 있는 뉴욕 경찰들은 정작 신호등 저 건너에서 이 상황을 손놓고 보고만 있다. 사실 딱히 손쓸 일도 아니다.

 

 

그녀의 촬영도 끝나간다 싶어서 자리를 뜨고 다른 곳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조금 흐른 후, 그녀가 바디페인팅을 새롭게

 

다시 단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림은 좀더 복잡해졌고 색깔도 좀더 다양해졌다.

 

 온갖 색깔의 물감이 담겨있는 반찬통같은 물감통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간이 테이블 위에는 그 만큼이나 많은

 

코카콜라 캔들이 보였다.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이 마신 걸까 아니면 그림판이 된 사람이 마신 걸까.

 

 

그림판이 되어준 그녀의 아프로 헤어만큼이나 북실거리는 털을 가진 그의 손이 거침없이 그녀의 몸 곳곳에 새로이

 

선을 긋고 점을 찍고 색을 채워넣고 있었다. 그리는 사람이나 그려지는 사람이나 자못 열중한 분위기.

 

 

 

 

 

 

영화는 어떤 기술적 진보에 대한 '아티스트'의 반감과 편견이 끝내 녹아내리고 새롭게 진보한 '그릇'에 어울리는 형태의

 

'아트'를 다시 재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소리가 지워진 영화세트장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표정과 몸짓으로 연기하던 그가

 

먼 길을 돌아 다시금 모두들 소리를 죽인 영화세트장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그가 발굴하고 영감을 건넸던 젊은

 

여배우와 경쾌하게 탭댄스를 추는 장면에서 구둣발을 어찌나 감각적으로 타닥탁탁 거리던지. 타닥탁탁.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구둣발이 내는 소리를 살려내면서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더욱 넓혀내는데 일조한 셈이다.

 

 

어쩌면 영화는, 2011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인 이 영화는, 영화에 꼭 '소리'가 필요한지에 대해 새삼스레 확인해 보고,

 

영화 속 세계에 당연하게 포함된다고 생각했던 '소리'를 어떻게 해야 인상적으로, 인습적이지 않게 재발견할 수 있을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소리의 힘을 빌지 않고 표정과 몸짓과 최소한의 대사 텍스트로

 

스토리를 진행해 가다가 문득, 남자를 괴롭히거나 희롱하다가 결국엔 화해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릴 때마다 사운드가

 

지닌 나름의 강력한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는 거다. (그보다 무성영화의 섬세한 아름다움에 더욱 감탄했지만.)

 

 

영화에선 크게 두개의 갈등이 노정되고 있는 듯 하다. 새로운 기술적 발전과 그 결과물에 대한 시선의 문제에 더해,

 

'세단 지나간다니 똥차 빼주자'는 세대간의 문제랄까. 기술 혁신과 그로 인한 변화의 가능성이란 건, 반기는 사람에겐

 

세상이 확 바뀌고 나아지리라는 열광을, 시큰둥한 사람에겐 조잡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생겼다는 기피감과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사진기술이 개발되거나 영화가 발명되거나, 영화에 소리가 들어가거나 혹은 3D기술이

 

생기거나, 아니면 스마트폰이 생기거나 따위에 대한 찬반. 그건 대체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경계와 겹치곤 한다.

 

 

그렇지만 그건 '아티스트'에서 보여주듯, 어쩌면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에서부터 웅변하듯, 그러한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요소'에 비기면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인 거다. 기술 발전이 어떠한 방향으로 얼마나 혁신적인 가능성을

 

확장시킬지라도, 혹은 그것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식의 디그레이드가 될 여지가 크다 할지라도, 그걸 활용하고

 

가능성을 구현하고 제 몸에 맞는 옷으로 적응시키는 건 결국 인간. 그런 작업에 요하는 창의성과 창조성을 감안한다면

 

일종의 예술이라 해도 무방할 테니 결국 쉼없는 기술혁신기에 처한 인간은 모두 아티스트인지 모른다. 마치 그가

 

그녀와 함께 유성영화 속에서 구둣발을 타닥탁탁 하며, 목소리 대신 새로운 사운드를 들려주듯이.

 

 

그러거나 저러거나, 오랜만에 보는 무성영화-최근에 봤던 무성영화는 어느 따뜻한 나라로 떠나던 외국의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찰리채플린의 클래식이었다-는 역시나 물기를 함뿍 머금은 듯 부드럽고 촉촉한 화면의 느낌이라거나, 동작 하나

 

표정 하나 사려깊게 배치된 섬세한 세공이라거나, 그리고 무엇보다 자칫 자극적이고 번다하기 쉬운 소리의 쓰임없이도

 

보는 사람을 흡인하고 이야기의 끝까지 함께 달려가게 만드는 그 힘 같은 것들에 다시금 매혹되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2011년에 만들어진 새삼스러운 무성영화, '아티스트'를 찾아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노래하는 음유시인' 루시드폴의 작품들. 작년 '고등어'와 '평범한 사람'으로 홀딱 빠지고 나선 걷잡을 수 없이

맘 속에 자리잡은 그의 나즈막하지만 깊은 곳까지 와닿는 음색, 서정적이지만 떨림 가득한 가사. 그의 노래랄까,

읊조림이랄까, 속삭임을 듣고 있으면 달콤쌉쌀한 99% 다크초콜렛를 녹여먹는 느낌같기도 하고.


수줍게 관객에 인사하던 루시드폴, 두시간반동안 깨알같은 농담으로 행여나 졸릴까 관객까지 배려하던 그.

그렇지만 가끔은 걸터앉은 의자에서 바닥에 닿지 않은 두발을 까닥거리며 음률에 빠져들기도 하던, 천상 아티스트.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리꽂히던 2011년의 끝자락에서 포근한 백허그로 감싸안아주는 듯 하던 마법의 밤.

 

"오, 사랑" (오, 사랑, 2005)

고요하게 어둠이 찾아오는
이 가을 끝에 봄의 첫날을 꿈꾸네
만리 넘어 멀리 있는 그대가
볼 수 없어도 나는 꽃밭을 일구네

가을은 저물고 겨울은 찾아들지만
나는 봄볕을 잊지 않으니
눈발은 몰아치고 세상을 삼킬듯
이 미약한 햇빛조차 날 버려도
저 멀리 봄이 사는 곳 오, 사랑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날개가 없어도 나는 하늘을 날으네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돛대가 없어도 나는 바다를 가르네

꽃잎은 말라가고 힘찬 나무들 조차
하얗게 앙상하게 변해도
들어줘 이렇게 끈질기게 선명하게
그대 부르는 이 목소리따라
어디선가 숨쉬고 있을 나를 찾아
내가 틔운 싹을 보렴 오, 사랑

내가 틔운 싹을 보렴 오, 사랑 -


"봄눈" (레 미제라블, 2009)

자 내 얘기를 들어보렴
따뜻한 차 한잔 두고서
오늘은 참 맑은 하루지
몇 년 전의 그 날도 그랬듯이

유난히 덥던 그 여름날
유난히 춥던 그 해 가을, 겨울
계절을 견디고
이렇게 마주앉은 그대여

벚꽃은 봄눈 되어 하얗게 덮인 거리
겨우내 움을 틔우듯 돋아난 사랑

처음으로 말을 놓았던
어색했던 그날의 우리 모습
돌아보면 쑥스럽지만

손끝에 닿을 듯이 닿지 않던 그대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인데
하루에도 몇 번을 내게 물어봐도 나는 믿고 있어
떨어지지 않는, 시들지 않는, 그대라는 꽃잎

처음으로 말을 놓았던
어색했던 그날의 우리 모습
돌아보면 쑥스럽지만

손끝에 닿을 듯이 닿지 않던 그대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인데
하루에도 몇 번을 내게 물어봐도 나는 믿고 있어
떨어지지 않는, 시들지 않는, 그대라는 꽃잎

그대라는 꽃잎



"알고 있어요" (레 미제라블, 2009)

행복하게 웃어보자
오늘 너무 슬퍼보여
내말에 그저 조용히 웃던
그대의 뒷모습
하지만 웃고 있어도,
항상 울고있는 사람
한없이 고단한 그대 모습
멀리 사라지고

하루라는 짧은 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
세상에 험한 말들로 그댈
아프게 했는지
여전히 어려운
눈빛으로 나에게 얘기하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왜 그러냐고

난 말하고 있었지
뒤돌아선 그대가
그런 눈물 흘리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다 알고 있다고

나도 그대의 하루에
무거운 짐이었다면
그래서 말 할 수 없었다고,
미안해 하진 마
하루라는 짧은 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
세상에 험한 말들로 그댈
아프게 했는지
여전히 어려운
눈빛으로 나에게 얘기하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왜 그러냐고

난 말하고 있었지
뒤돌아선 그대가
그런 눈물 흘리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다 알고 있다고

넌, 여전히 어려운
눈빛으로 나에게 얘기하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왜 그러냐고
난 말하고 있었지
뒤돌아선 그대가
그런 눈물 흘리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다 알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그대 손으로" (버스, 정류장 OST (L'Abri), 2001)

바람 부는 곳으로
지친 머리를 돌리네
나는 쉴 곳이 없어
고달픈 내 두 다리 어루만져주오
그대 손으로 그대 손으로

세찬 빗줄기처럼
거센 저 물결처럼
날 휩쓸어 간대도
좁은 돛단배 속에
작은 몸을 실으리
지금 가야만 한다면
그대 품으로 그대 품으로

태양은 그 환한 빛으로
어리석은 날 가르치네
당신은 따뜻한 온기로
얼어붙은 날 데워주네
언제나 아무 말 없이
그대 손으로 그대 손으로


"그리고 눈이 내린다" (아름다운 날들, 2011)

참 좋아라 했던
이 길 위엔 아무도 없는데
밤은 정말 이렇게
나도 모르게
조용하게 흘러가고 있어

날 보듬어 주던
그 눈빛은 사라졌지만
푸르고 푸르던 기억
아직도 향기로 남아
눈짓으로 인사하는구나

외롭다는 건
기다리는 것

잊혀지는 게
아무렇지 않도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루 또 하루가 지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을까

그래, 나는 약해졌는지 몰라
하지만 이 밤이 지나면
하늘은 밝아올 테고
거리는 분주할 테고
내 마음도 조금씩 환해질 거야

그래, 나는 약해졌는지 몰라
하지만 견디다 보면
여름은 다시 올 테고
겨울엔 눈이 올 테고
나는 다시 빛날 수 있겠지


"그대는 나즈막히" (레 미제라블, 2009)

그대는 나즈막히
당신은 언제라도 날
떠날 수 있어요
얘기하네

난 아무 말 못하고
두터운 목도리를 말 없이 벗어준 채
돌아서지만

세상에 어떤 인연은
변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서 사람들 모두 껴안고서
조심스럽게 걸어가겠지

스쳐가는 말이라도
그렇게 얘기말아요
나에게 그대는 언제나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사람
사랑하는 나에게는
모질게 얘기말아요
언젠가 마음 변할 수도 있다고
말할 필요 없어요

세상에 어떤 인연은
변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서 사람들 모두 껴안고서
조심스럽게 걸어가겠지

스쳐가는 말이라도
그렇게 얘기말아요
나에게 그대는 언제나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사람
사랑하는 나에게는
모질게 얘기말아요
언젠가 마음 변할 수도 있다고
말할 필요 없어요
필요 없어요
필요 없어요

언젠가 마음 변할 수도 있다고
말할 필요 없어요


"평범한 사람" (레 미제라블, 2009)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너무나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



"꿈꾸는 나무" (아름다운 날들, 2011)

내가 자라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난 말하지 못한 채
잎새만 펄럭이겠지

얘기해도 될까
매일 내가 꾸는 꿈
비웃지 않고서 나의 얘기 들어준다면
한번 느릿느릿 얘기해볼까

따뜻한 집,
편안한 의자,
널찍한 배,
만원 버스 손잡이,
푸른 숲,
새의 둥지,
기타와 바이올린,
엄마가 물려준
어느 아이의 인형

하지만 이 세상에서
되고 싶지 않은 게
내게 하나 있다면
누군가를 겨누며
미친 듯이
날아가는
화살

내가 꾸는 꿈

얘기해도 될까
매일 내가 꾸는 꿈
비웃지 않고서 나의 얘기 들어준다면
한번 느릿느릿 얘기해볼까


작은 책상,
동그란 거울,
뜨거운 불빛,
시원한 그늘,
식탁 위 한 쌍의 젓가락과 술잔,
눈물 닦아줄 휴지,
사랑 전해줄 편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
되고 싶지 않은 게
내게 하나 있다면
누군가를 겨누며
미친 듯이
날아가는
화살




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한 까페 가회, 저번달에 '타투이스트'의 전시가 있다해서 겸겸 다녀왔었다. 전시는

생각보다 단촐했는데, 아무래도 전시의 방점이 '타투'보다는 타투이스트의 예술 세계에 맞춰져서 그런듯.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여권에 과감하게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고, 심지어 저렇게 타투하듯이

재봉틀로 별이니 배니 종이비행기니 박아놓았던 작품.

북촌 한옥마을은 거의 처음 가봤던 거 같다. 안국역에서 내려선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자칫하면 못 보고

지나칠 뻔한 조그마한 안내판을 용케도 놓치지 않고선, 빗길을 뚫고 가회 갤러리 까페 입성.


입구에서부터 전시중인 타투이스트 전시 관련한 팜플렛과 달력, 온통 그의 '타투' 작품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북촌 한옥마을을 소개하는 A4 한장 크기의 도보자용 지도도 주었는데, 여태 모셔두고만 있다.

왜 이렇게 비가 자주 오는지 걷기엔 참 좋지 않은 날씨 탓이다.

'타투이스트',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어로 딱히 바꾸기가 애매한 단어다. 문신술사, 문신전문가, 문신예술가.

혹은...뭐가 더 있으려나. 그만큼 한국에서 '타투', 문신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워낙 부정적이고 척박하단

사실을 반증하는 거 같다. 그 와중에도 이렇게 종이 비행기를 주된 테마로 잡고 타투 아트를 계속해온

아티스트가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박수쳐줄 일이지 싶다. 자기 몸을 도화지 삼아 연습하지 않았을까.


그가 갖고 있는 타투 장비들. 저 총처럼 생긴 것에 잉크통을 꼽고서 펜처럼 피부 위에다가 그림을 그리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타투가 뭐라더라, 공중위생법으로 제재받고 있다던가. 딱히 제재할 법이 없으니 저

타투 장비가 위생적이지 못하다느니 병을 옮긴다느니 따위의 조잡한 꼬투리를 잡고서 제재하고 있다는데,

한심한 일이다. 양성화해서 다양한 예술적 디자인이나 그래픽이 발전하도록 하고, 위생상의 문제가

정 그렇게 신경쓰인다면 제대로 관리하면 되지 않을까.


타투이스트 한 명의 작품만이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이 이루어진 결과물들도 전시해 놓았었다.

재봉틀을 이용해 저런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수놓고는 소녀의 여린 팔목에 뽀빠이처럼 닻 모양이라거나

조폭처럼 '一心' 이런 한자를 수놓는 센스라니.


뭐 벽면 한쪽으로 그런 그림이나 복합 재료로 꾸며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이렇게 분방하게 채색된

구두도 한 켤레 놓여있었고. 아무래도 갤러리 까페라 그런지 차 마시기도 괜찮은 분위기였지만, 찻잔을

들고 벽면을 따라 돌아다니며 이런 전시물들을 구경하기에도 괜찮았던, 편한 분위기의 천장 높은 까페.

와중에 발견한 맘에 쏙 들던 아이템 하나. 뱅 앤 올룹슨의 오디오였는데, 저 앙증맞은 빨강 세모모양

스피커가 한눈에 확 꽂혀버렸다. 게다가 조그마한 체구에서 울려나오는 사운드가 전혀 뒤지지 않고.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라도 꼭 사겠다며..일단 위시리스트에 보관.

에스프레소는 생각보다 많이 연했다. 갈수록 진한 커피를 좋아하게 되는 참이라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에스프레소 위의 크리마가 여느 까페 체인의 그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부드러웠던 듯. 저렇게 활짝 웃고있는

스푼의 애교에도 맘이 녹아내렸다.


들어갈 때 한장씩 나눠줬던 종이는, 전시 중인 타투이스트의 메인 테마인 종이비행기를 접으라며 미리

접는 선이 인쇄된 종이였다. 내친 김에 종이비행기도 접고, 배도 접고 나서는, 영수증 종이로도 조그마한

종이비행기를 마저 만들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문득 불붙어 버린 종이접기의 마력. 어렸을 때 만들었던 독수리5형제의 비행기를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 궁금해져버려서 있는 종이 없는 종이 동원해서 결국 만들고야 말았다. 저렇게 입도 쩍쩍

벌어지는 날렵한 모양의 비행기. 양쪽 옆구리에도 비행기 한대씩 합체분리할 수 있고 위에도 한대

합체해놓을 수 있는 궁극의 비행기였었다. 어렸을 때 커다랗고 두꺼운 달력 종이로 참 많이 만들었는데.

그렇게 비행기도 접고 배도 접고, 까페도 온통 둘러보고, 책도 읽고 하는 와중에도 참 줄기차게 내리던 비.

이제 한국은 4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기보다는 '우기'가 있는 아열대의 나라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북촌한옥마을을 좀더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에스프레소는 훌짝 다 마셔버린지 오래. 마치 타투처럼 굵고 선명하게 남아버린 크리마의 갈색 띠만

에스프레소 잔 안쪽에 보름달처럼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내 타투를 보고도 사람들이 '참 잘했어요'라거나 '1등급' 따위의 둥근 도장을 찍어놓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도 이쁘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조금은 더 밖으로 열려있는 이미지였음

좋았겠다 싶기도 하고, 일단 달과 별을 몸에 새겼으니 다음에는 다른 천체를 새겨서 공간을 넓혀야겠다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실 가회 갤러리까페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이 타투이스트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내 꺼만한 게 없지 싶어서 조금은 뿌듯.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최초 아이디어는, 이런 풍경과 조우하며 시작한 거 아닐까.

그가 즐겨 활용한 골드스타의 텔레비전 브라운관 속에서 뭔가 예기치 않은 걸 발견하는 순간.


그런 거랑 비슷한 거다. '중력의 법칙' 뉴턴과 사과나무를 묶어 생각하듯이

한국 최초의 아티스트 백남준과 허름하게 낡은 텔레비전이 하나의 끈으로 묶이는 거다.


상처투성이 브라운관 안에는 꽃잎을 대부분 털어버린 벚나무와 가로등이 들어차고,

그 나머지 여백은 뽀얀 햇살이 전부 메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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