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어떻게괴물이되어가는가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신자유주의인격의탄생

왜 이렇게 '또라이'가 많아진 걸까. 터무니없이 공격적이거나 패배적이고, 온갖 심리장애 증상들은 날로 늘어만 간다고 정신분석학자인 저자는 진단한다. 직장이나 학교의 왕따 문제는 글로벌해진지 오래고, 묻지마범죄에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범죄 등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전반적인 사회 풍조,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상식'화된 신념들이 문제인 건 아닐까. 그것들이 사회 안의 인간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윤리체계를 설정해준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건 아닐까. 저자가 책의 절반을 할애해 꽤나 설득력있게 그 연관성을 논하고 있듯이.

그 기반에서 신자유주의라는 포괄적인 이데올로기를 호명하며 저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건 경제 능력주의와 교육 능력주의의 결합이다. 호봉이나 직급이 아닌 능력에 따른 평가를 강조하는 시스템이 초기엔 효율적인 듯 보이나, 이내 숫자로 환산가능한 지표와 결과에만 매몰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 체제의 중기 이후를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시스템 효율화를 위한 능력주의는 기존의 노동윤리와 공동체윤리를 해체하고, 아무것도 그자리를 대체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깨어진 지점에서 남는 건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일 뿐인(Homo homini lupus est) 계약 이전의 정글상태. 그게 현재 사람들이 병든 이유이며, 신자유주의가 주조하는 인간형이라는 결론이다.

길게 써봤지만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진다. 책이 그렇다. 사회가 정체성과 윤리 체계를 형성한다는 부분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은 꽤나 매혹적인데, 이를 신자유주의에 대입하는 과정에서 헛점들이랄까 말해지지 않은 부분들이 보이기 때문일 거다.

우선 신자유주의가 최악인 시스템이란 것에 대한 분석이나 합의가 부재하다. 모든 사회는 나름의 지배사조와 그로부터 주형된 정체성과 윤리체계가 있을 텐데, 신자유주의 하에서 유독 정체성과 윤리체계가 파괴되었다는 진단이 과해보이는 거다. 그래서 또라이가 양산된 현상이 현대 사회에 고유하거나 유별나다는 것에 대해 납득시키지 못했다.

둘째로는, 서유럽에 기반한 분석이 과연 기타 지역, 한국에도 유효한지에 대한 의문이다. 예컨대 한국의 전통적인 노동윤리와 공동체윤리는 서유럽의 그것과 같았던가. 능력주의의 부작용은 공통될 수 있으나 그것이 타파한 과거의 온정주의적 평가는 한국과 서유럽이 같았을까. 등등.

마지막으로, 서유럽의 실업률이 높은 것에 대한 원인을 능력주의와 성공에 대한 환상으로 인한 미스매치로 치부하는 것, 젊은 세대에 대한 능력주의식 교육의 산물로 치부하는 것은 올바른 분석일까.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교육(과 자기계발열풍)에 미친 영향에 한정하여 이야기를 집중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젊은이는 자신을 미니 기업으로 보아야 하며, 경제적 의미 차원에서 지식과 능력이 처음이자 마지막 심급이다."같이 잘 정제된, 까기 좋은 언명을 모처럼 잘 골라놓았는데 말이다.



불안증폭사회 - 8점
김태형 지음/위즈덤하우스
IMF 이후 전면화된 경쟁 속에서 기존의 공동체나 조직이 약화되거나 심지어 붕괴되었다,

그 결과 생존에 대한 공포는 불안으로 만성화된 채 사회 구성원 모두를 미치거나 죽도록

몰아가고 있다는 게 요지다. 출산율은 꼴찌, 자살율과 자살을 유발하는 우울증 유발율은

1위라는 적나라한 지표 앞에서, '지금 한국인들은 멸종하고 있다'는 저자의 단호한 주장을

뿌리치기란 사실상 어렵다. 구성원들이 새로이 충원되기는 커녕 있던 사람들도 그저

이민이든 자살이든 탈출하려 애쓰는 공동체가 바로 한국이란 거다.


이 책의 덕목은, 여태 개인의 문제나 '마음수양'의 문제로 미뤄두었던 인간 심리와 병리적

상태가 상당부분 사회의 책임
이라는 부분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여기서

함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일정한 공약수를 가진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면, 사회구조로

인한 스트레스와 발병요인을 한번 의심해보고 분석해보는 게 맞지 않을까. 연예인들의

자살이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직업적 스트레스나 불규칙한 생활 때문은 아닌지,

또 우리의 '마시고 죽자'는 음주 문화가 감춘 건 몸을 함부로 하며 죽어도 좋다는 자살충동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공정을 기하자면 두어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이 책에서 그저 '경쟁심화'

정도의 대중적 의미로만 새겨지는) '신자유주의'의 전세계적 영향 하에서 한국이 유독

적나라하고 심대하게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하고, 이전부터 경쟁을

기반으로 유지발전되던 사회와 '신자유주의' 하의 한국사회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은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하며, 무엇보다 개인의 불안과 공포, 심리적인 병리상태가 대개

사회적 차원에서 비롯한다는 그 통찰이 가진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왜 하필 한국만 이렇게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까.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이미

구미 제국들을 집어삼키고 도도하게 세계화된 흐름 아닌가. 저자는 경쟁이 심화되는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내쳐졌을 때 당면하게 되는 생존 위협의 정도가 다르다 말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한국의 복지수준, 사회적 안전망의 정비 수준은 비교하기가 민망한

수준인 거다. 그러니 회사에서 짤리면 '내새끼들 어쩌나'하다가 온가족 목숨을 쥐고

사라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 밖에 저자는 한국의 유난한 공동체주의를 지적하며 '중산층'이란 가상공동체에서

튕겨나오는 것, '사회적 생명'을 박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력하다고 분석한다.

인간은 단지 배만 부르면 되는 돼지가 아니니까,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존중받는

일원이려는 욕구가 더 크니까. 특히나 개인주의의 뿌리가 얕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로

수천년 지탱해온 문화가 있으니까 한국은 더 심하지 않을까. 말이 된다. 그 '중산층'의

허울, 중산층만큼은 인정받겠단 욕구가 극성스런 명품열풍을 만들었다는 것 역시.


그러면 왜 하필 지금인가. 사실 '경쟁' 그자체는 신자유주의만의 문제도 아니고

자본주의 자체, 혹은 인류 문화 전체에 투영되어 있는 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IMF 이후로 한국인들 삶의 기반 자체가 크게 흔들리고 위태하게 되었고, 이후

시스템의 변화와 함께 삶의 목적, 가치관 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데 동의하지만

그것은 '경쟁'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IMF로 인한 패러다임의 변화 문제에 가깝다.

패러다임의 변화로 인해 경쟁이 심화된 거고, 그로 인해 사회병리가 심해진 거니깐.


저자에 대해 약간 아쉬운 부분이 이 곳인데, 무엇을 지칭하는지 그 내용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신자유주의'라는 모호한 단어 대신 차라리 'IMF 이후'라는 구체적인 시기를

적시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을 하고 그 정체를 밝히려는

글이 아니니까, 그런 식의 뭉뚱그린 단어는 피하는 게 나았지 싶다. 사실상 저자가 말하는

'신자유주의'를 'IMF 이후'라는 말로 바꿔도 전혀 문제가 없는 거다. 그래서 IMF 전후의

사회적 차원의 심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강했다면 훨씬 정밀하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저자도 책의 대부분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지만,

만성화된 불안과 그로 인한 정신적 병리현상들이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란 사실은 굉장히 커다란 실천적 압박을 수반한다. 혹은, 에라 모르겠다, 는

식의 무기력함을 초래한다. 너무 막막한 거다. 내가 지금 우울한 게 내 마음에 뭔가 문제가

있거나 내 성격에 뭔가 문제가 있다기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잘못 굴러가고 있고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서라 믿기도 힘들고, 그러고 나서 어쩔지도 모르겠다는 거다.


저자는 앞으로 가는 것도 한걸음부터, 뒤로 가는 것도 한걸음부터라며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여러 제안들을 제시한다. 결국 사회가 건전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어야 사람들의

마음병도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거니까, 사회를 바꾸는 여러 제안들이다. 사실은

난 잘 모르겠다. 저자가 문장 곳곳에 느낌표를 한두개씩 박아두는 것도 좀 눈에 거슬리고,

그가 내놓은 제안들이 딱히 참신하다거나 와닿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믿음직한 문장은

하나 건졌으니 다행이랄까.


"우울증은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우울해지는 것이 되려 정상성의 표징인 셈이다.

우울함을 자각하는 건 아직 세상에 맞춰지지 않았다는 깨어있음인 셈이니, 일단은 그걸로

스스로를 경계하는 지표로 삼기로 한다.






<가벼운 버전>

시사IN 독자위원회 리뷰를 마치면 늘 가곤 하던 서대문역 근처의 허름한 맥주집, 그곳에 불쑥 이해찬 전 총리가

찾아왔다. 어제 있었던 시사IN강좌 "거꾸로, 희망이다 - 시즌 2" 첫 강좌를 마치고 나서 들른 모양이다.

한쪽 테이블에서 이야기에 여념이 없던 우리들은 술렁대다가, 다이어리를 펼쳐들고 쪼르르 달려가 싸인을 받았다.

우선 나부터. "이름이 어떻게 되요?" "윤성의입니다." "성의?" "넵, 성의있게 살라고 할 때 그 성의요."

"예끼~ 자기 이름갖고 장난치면 쓰나" 하며 허허허 웃었다. 그새 꽤나 늙고 수척해 보이던 양반이 웃으니 보기 좋았다.

(사실 이 전총리의 웃음 코드란, 그 연세의 분들이 그렇듯 조금 이해가 안 갈 수 있다. 어쨌던 웃었으니 됐다.)
 

사인을 전부 받고 나서 자리에 돌아와 각자 뭐라고 써줬는지 멘트를 확인했다. 내가 "진실은 승리합니다!"라는 멘트를
 
받은 후론 전부 "꿈은 이루어집니다!"라는 멘트. 한마디했다. "무슨 월드컵이냐." 실은 머릿속으로도 잠깐 든 생각,

별★이라도 하나 그려주지 그러셨어요.




<약간 무거운 버전>

얼마전 친한 대학 선배들과 신촌에서 술을 마셨다. 단대학생회장을 했거나 나름 학생회에 발담그고, 아니 그보다 

적절한 표현으로는 '사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선배들, 대학생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그래서

신촌바닥에서도 스스럼없이 둥글게 서선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었겠지만. 그 자리에서 꽤나 오랜만에 이론적이랄까,

'근본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대학교 때에는 늘 하던 이야기지만 사회 나오니 다른 사람들과는 나누기 힘든, 나눌

염도 내기 힘든 그런 이야기, 근본 모순이라느니, 주체라느니. 그리고 여느때처럼 노정된 약간의 관점차들.


좀 낯설었고, 좀 벙벙했다. 어느샌가 그런 이야기, 뭔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달까. 물론 나름의 비전과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이 이론틀과 세계관의 역할이라지만, 굳이 거시적인

그림의 디테일한 차이점을 미리부터 따지거나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눈앞에 당면한 갈림길이나 급박하게

결정을 요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3KM 전방에 갈림길" 표지판을 보고 준비해도 될 텐데, 지금은 3KM는 커녕 300KM,

혹은 300광년 정도 떨어져 있지 싶어서다. 내 '호흡'이 바뀐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해찬에게 사인을 요청한 사실은 조금 우스운 일이었고 겸연쩍은 일이기도 했다. 그건 노무현과 김대중의

서거를 지켜보며 착잡해하는 스스로에게 쭉 느껴왔던 감정이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시절 그들의

정책과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사회 재편에 반대하며 거리를 뛰어다녔는데, 그때만 해도 능구렁이 김대중, 가증스런

노무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시사IN 말마따나 "지난 20여년간 두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이해찬

전총리를 보니 왠지 아는 척 하고, 응원하고 싶어졌더랬다.(“민주 세력 ‘새 단결’이 김 전 대통령의 유언”)

비록 그게 인지상정이거나 고양된 감정의 발로였다손 치더라도.


그가 이루겠다는 '꿈', 그가 생각하고 지키려는 '진실'이 뭔지는 사실 김대중과 노무현, 그들의 한계에서 대충

각을 잡아볼 수 있다. 그만큼 이루고 나서, 한계단 올라서고 나서 그 이후에 펼쳐질 문제와 입장차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게 생산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이게 무슨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되살리려는 건 아니다.

이해찬은 나름의 일관된 입장과 궤적을 밟고서, 나도 나름의 입장과 짧으나마 궤적 위에 서서 사고하고 이야기하고

발전시키는 것. 그렇게 각자의 길을 따로 또 같이 가는 게 맞는 거 같다.





#0. 들어가기 전.

이 책은 형식상 두 파트로 나뉜다. '대중의 흐름', 그리고 '지식의 운명'. '운동의 선언'이란 파트가 덧붙어 있기는
 
하고,
특히 마지막의 '코뮨주의 선언'은 앞선 '대중의 흐름' 파트의 행간을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는 힌트들이

가득
담겨 있지만, 일단은 선언들을 제하고 앞의 두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 담긴 것들이 너무 많다. 1부에서는 아감벤이 말했던 '배제함으로써 포섭하는 생명정치'에 대한 이야기

(이미 나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해 포스팅한 바 있다.[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부터

시작해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가속화된 국민의 추방, 촛불시위의 전말에 대해 내가 본 중 가장 깊이있고

냉정하게 내려진 해석, 폭력의 문제와 혁명의 문제 등이 줄줄이 다루어진다. 물론 그것들은 연속해 있지만, 동시에

하나하나 녹록치 않은 어려운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만큼 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갈 여지도 풍부한 소재들이란

뜻이다. 거기에 더해 2부에서는 지식인의 현재적 의미, 대중지성과 그에 대척하는 테크노크라트의 문제, 그리고

현장인문학이란 문제의식의 제기, 앎과 삶의 관계가 말해진다. 고병권 그가 생각하는 선언이란 "말한대로 살아야

하고, 살아온 대로 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충실한 살아있는 무엇인가이며, 그의 이 책 역시 그 자체로 "이명박

정부, 정부로부터의 탈주"를 선언하는 선언문 같아 문득 이 책을 읽는 자세를 가다듬기도 했다.


어떻게 리뷰(혹은 이 책의 얼개를 뜯어 내 사고와 뭉쳐내어선 다시 풀어낸 글)를 쓸까 고심하다가, 나름 중요하다

생각하는 세 가지 지점을 잡기로 했다. 우선 국민들을 추방시키고 있는 정부(특히 벌써 망각되고 있는 용산참사와

관련해서), 두번째로는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사제들의 개입과 승리선언의 평가, 마지막으로는 '선언'이라는 단어로

고병권 그가 담고자 하는 실천적 의미가 무엇일지. 한없이 길어지겠다 싶어서 두번으로 나누어 올릴까 생각중이다.



#1. 국민을 추방하는 (이명박) 정부.


정확히 말하자면 노무현과 이명박 정부, 그리고 그 앞선 시대의 정부들에 대한 환상을 던져버리라 한다.

사실 이미 사람들은 모두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환상이 부질없음을 알고 있으며, 질릴 대로 질려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누가 되건 똑같은데 왜 괜히 핏대 세우나." "지들끼리 해먹지."

              ▲ ⓒ연합뉴스

이명박이 지금 벌어지는 만악의 근원일까. 이명박 등장 이후 부쩍 늘어난 노무현에 대한 향수,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되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 무엇보다 마치 이명박 정부 혹은 이명박 개인이 이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인 양 치부되는 경향이 없지 않은 사회 분위기를 본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급기야 경찰국가,

민주주의독재국가로 치닫고 있는 이명박 자신이 자초한 면이 매우 크지만, 또한 노무현의 말만 앞섰던 번지르르한

립서비스가 남긴 잔상들 탓도 있을 게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의 재개발 정책, FTA 추진을 비롯한 시장개방 정책, 감세 정책, 무한경쟁식 교육 정책,

부동산 정책, 비정규직 처우와 관련한 노동 정책 등등. 하나하나 논의의 여지가 큰 이슈들이지만,그런 것들은 사실

노무현 정부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고, 말마따나 '설거지만 하는 수준'으로 이어받았다 자인하기조차

하는 게다.  그렇다면 최소한 지난 십여 년간의 한국 사회를 꿰뚫는 연속적인 흐름은 잡아내는데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실은 고병권 그가 말했던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의 연속성을 실증적으로 책 안에서 보여주지는

않고 있지만, 중요한 건 정권 교체 따위로 역전되지 않는 하나의 도도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라 한다. IMF가 잠시 거세게 몰아치는 삭풍이라 여기며 잠시 후면 다시 잔잔한 일상이 도래할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직면했던 것은, 그칠 줄 모르고 불어제끼는 삭풍이 곧 일상으로 화해 버린 현실이었다. 구조조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구조가 되어 위기를 일년 365일 안고 살아야 하게 되었다는 인식. 그런 상시적 위기는 마치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 빼곡히 올라앉은 사람들을 가장자리에서부터 조금씩 바닷속으로 밀어내듯, '국민'이란

이름으로 지켜지는 사람들을 조금씩 줄이고 있다. 이주 노동자,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철거민, 농민, 빈민,
 
노점상인, 장애인, 공고 졸업생, '지잡대' 졸업생, 4년제 대학 졸업생, 20대 청년...계속해서 밀려나고 있는 거다.

취업시장은 얼어붙었고, 채 세워지지도 않은 사회적 안전망은 허물어졌고, '금모으기운동'은 씁쓸하고 부끄러운

기억이 되었다. 

         [손문상의 그림세상]<172>"세입자도 국민이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30165117&section=03)

그들은 이제 '국민'이 아닌 국가 내부의 난민이 된다. 더이상 이들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국민','시민'이란

단어로 불리워지지 않으며, 다만 점점 줄어가는 그 정체모를 '국민'의 이해를 위해 계속해서 양보를 강요당하게

된다. 용산참사에 대한 반응도 그렇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그들은 대한민국 내부의

테러리스트"라는 등, 철거민(세입자)는 더이상 우리와 같은 국민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병권의 지적처럼,

이러한 경계로 몰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날것의 국가권력을 두고 합법과 불법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통제받지 않는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며 게다가 일부 언론과 검찰의 사후 추인을 동원하는 

국가권력에 비해,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고 말아 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는 "추방된 국민"들이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그렇지만 얼마나 빠른 속도로 그들이 불어나고 있는 것인지.

               ▲ ⓒ프레시안

경찰국가, 혹은 민주주의 독재국가가 도래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해 더이상 세련되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데서 기인한다는 게 고병권의 지적이다. 국민된 권리로부터

추방당한 채 방치된 '2등 국민, 3등 국민'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정부의 위협 요인이며 불안 요소일 수 밖에 없다.

연인원 수백만명이 거리로 나섰던 지난 촛불정국에서, 명박산성으로 상징되는 이명박정부의 앙상한 대응태세는

권위와 시스템의 외피가 지워진 국가권력의 추하고 무능력한 쌩얼을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때 잠시나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노래부르던 사람들에게 힘이 돌아왔다고 느낄 정도로, 정부의

절대적이고 늘 신성해야 할 외관은 심히 손상되고 헐벗어 있었다.


용산참사를 두고 찧고 까부는 사람들 역시 분칠된 국가권력의 추악성, 비인간성을 노출시키고 있다.

인간으로 살아갈 기본적인 권리, 생존권을 절박하게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법질서를 우선하라고 윽박지르는

것만큼이나 추악하고 본말이 전도된 장면이 또 있을까.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채 덕지덕지 존엄함과 지고함을

두르고 있는 정부 시스템이 요란스레 작동해서 '국민 모두가 살 길', '재발 방지와 선진화의 길'의 찌라시를 뱉는

동안, 그 '국민이 주인된다는' 권력의 원천인 여섯 생명이 한줌 재로 화했던 충격적인 사건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장면. 비극적인 것은, 국민들이 계속해서 추방당해 '한발 재겨딛을 곳조차 없는' 백척간두의 위기속으로

몰리게 될수록, 이러한 추악한 권력의 맨얼굴을 대면할 일이 점점 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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