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끼가 한 남자에게, 한 남자와 여자에게 빨간 점을 찍는다. 그 전까지는 그야말로 '갑남을녀',

익명의 바다를 떠다니던 남자와 여자에게 이름이 붙었다. '덴고'와 '아오마메'.


그의 소설은, 그의 소설 중 내가 좋아하는 류의 소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나, 주인공은 특정 분야에서 나름대로 특출하달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지만 의지와 욕구가

부재하다. 맘만 먹으면 그래도 꽤나 해낼 수 있는데, 그 마음 먹기가 힘들다. 딱히 무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사실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상태. 둘, 주인공은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나

세계 그 자체에 대한 회의나 비현실감을 끈질기게 품고 있다.

"여기는 여기가 아닌 세계구나"류의 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 내내 반복되는

질문, 우리가 지금 같은 시공간에 있는 걸까. 셋. 도무지 주인공의 문제가 해결되는 법이란 없다.

기껏해야 원점, 이거나 여기가 내가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수 있는 딱딱한 바닥면이구나, 정도의

확인에서 그친다.


그건 왠지 내 이야기다. 얼마전 하루끼와 관련한 잡지 인터뷰에서도 말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어필하는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적나라하게 지금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맨날 보여주면

짜증나서 죽어 버릴지도 모를 볼품없고 엉성한 상태지만 그래도 가끔은 거울을 들여다보듯 날

비추어 볼 수 있는. 그의 이야기에서 공통된 부분들, 딱히 신나게 달리지도 않고 드라마틱하고

거창한 결말도 없으며 주인공은 늘 사변적이고 주춤거리는-때로 아주 답답하고 짜증나는-캐릭터에

딱히 꿈이나 야망이랄 것도 없고 사실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누추하고 김빠지며

'참 사느라 애쓴다' 싶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소설을 보는 이유는, 그게 지금 내 삶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가 바닥이구나, 싶어서다. 그건 내가 살아감에 대한 일종의

데카르트식 '방법적 회의'를 가능케 하는 최후의 지반일 수도 있겠다.


항상 그렇듯 건조한 인생을 쌓아나가다 어느 순간 문제가 불거진다. 두 개의 달이 떠있음을 퍼뜩

깨닫게 되듯 일상에 그어진 작은 균열을 발견하고 나면 쭉쭉 균열이 사방으로 번지는 건 금방이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밋밋하고 조용했던 인생을 복기하다 보면, 정작 본인의 문제랄까,

본인의 결락이 심각함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외부의 문제는 최초의 자극, 계기일 뿐

이내 시선은 내부로 향하게 되는 거다. 그 내부엔 자신의 가치, 자신의 사랑, 자신의 치부가 오롯이

숨겨져 있다. 모든 문제를 자기화하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내밀한 것으로 되돌이하고

마는 강력한 산화력이 발휘되지만, 그건 이기적이라거나 탈정치라거나 혹은 관념적, 사변적이라는

표현과 맞춤하지는 않다. 자신을 먼저 찾아내고 알아내려는 노력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A에서 A'로 바뀐 자신은 드디어 뭔가를 의욕하기 시작한다. 범속한 일상에서

무기력하고 무의지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주인공이지만, 조금은 '의지'라는 것을 품게 된다. 그건

아마도 수많은 상실을 거친 후, 내적으로는 거의 세계대전에 가까울 만큼 혁명적이고 치열했을

전투를 거친 결과이겠지만, 정작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루끼가 찍어 놓은

빨간점을 지우고 일상에 풀어주면 다시 이전처럼 이름없고 얼굴없는 대중 속으로 빨려들어갈 거다.
 

그의 이야기가 하나의 커다란 원을 돌아서 원점으로 돌아온다 싶은 게 그래서다. 결말이 이상하다

싶다는 소감들도 그래서 아닐까 싶다. 1984나, 1Q84나 다르지 않다. 내면에선 폭풍우가 일고 숱한

상실과 모험을 겪었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건 거의 없다. 여전히 세계는 해가 뜨고 달이 뜨고, 신은,

'리틀 피플'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천둥치며 으르렁대는가 하면 사람들의 일상 역시 똑같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도 바뀌는 건 없는 거다. 건방지지만, 그게 세상이다, 라는 정도의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어쩌면 고마쓰니, 교쿄니, 아유미니, 교쿄의 남편이니 하는 등장인물들, 소설속 그리고 현실속 모든

동시대인들 역시 제각기의 모험 중이었을 거다. 상실감을 품고 뭔가를 계속해서 흘리듯 잃어버리면서,

허랑하게 뱉어지는 메마른 말들을 주고 받는 그들이었다. '리틀 피플'의 위협은, 주변의 소중하고

취약한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은 꼭 덴고나 아오마메에게만 전달된 것은 아니었을

거다. '리플 피플'이란 일종의 비료랄까, 원래 내면에 있던 씨앗을 이상성장시킬 뿐이다.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조금 일찍 상실시킬 뿐이다. 그렇게 제각기의 전투와 모험을 마치고, 두권짜리

장편소설 분량의 이야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복귀했겠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루끼가 빨간 점을 찍고 들어올리기 전까지는.


그들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덴고'와 '아오메마'가 1984년에서 어느 순간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1Q84년으로 흘러들었듯, 일상의 어느 순간 어디서 그런 갈림길, 혹은

스위치를 건드릴지 모른다. 기지개를 연달아 네번 켜본다거나, 왼쪽신발과 오른쪽신발을 바꿔

신어본다거나. 굳이 그런 거 아니어도 호, 흡, 호, 흡 대신 호, 호, 흡, 흡 하는 정도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 사소한 스위치 하나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불가역한, 돌이킬 수 없는 세상으로

옮겨지는지 모른다.


그건 사실상 매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시공간에 떨어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좀처럼

그 무게감때문에 직시하고 싶지 않은 깨달음과도 같다. 매순간 돌이킬 수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함께 쓸어내버린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 자체가 내 현재, 내 소중한 살점들이 흘러가 버린다는 거니까 사실은 같은

말이다. (불가역한) 시간, 과 상실, 이란 단어. 그리고 '리틀 피플'의 협박이란, 사실 언제가

'상실'에 있어 맞춤한 때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갈협박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작용한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상실할 때였는지도 모른다.


1984년과 1Q84년이 결국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소설의 시작점과 마침점이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깨달은 후에도 별다를 바 없이 계속 똑같이 살아가게

되는 이유, 그 모든 이유는 아마도 시간 = 상실, 삶 = 상실, 실용적이지는 않은 깨달음 때문

아닐까 싶다. 딱히 그걸 알았다고 해서 어째야 할지 대책이 안 서는, 그저 거기서부터 다시

뭐든간에 쌓아올려볼 수 밖에 없는 '방법적 회의'의 밑장.



* 리뷰랄까, 내가 쓴 건 지독히도 재미없는데 소설은 사실 꽤나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하루끼가

이리저리 뒤척여가며 보여주는 그의 '밑장'은 여기서 보던 저기서 보던 똑같다. 그의 문제의식이나

글쓰기의 주제가 더이상 커지거나 발전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미 그가 다루는 주제는 인간이

나고 자라면서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외로움, 상실감이라는 거대한 것, 그걸 이야기하는 그의

내공은 절정을 친 지 오래고 지금은 이리저리 변주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물론 이야기는

세련되고 풍성해졌으며 더욱 '열렸지만', 핵심은 '상실의 시대'에서 이미 다 쓰여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1Q84 1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Q84 2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Q84 3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6점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눈길을 붙잡았다. 이럴 때는 원어로 된 제목을

봐야 한다. 번역본은 더러는 시류에 영합하려고, 혹은 편집자의 과욕으로 영 이상한 제목을 달고

나올 때가 많으니 말이다. 이 책 역시, 조금 제목이 과했다. 원제는 'the Rhetoric of Reaction'.


레토릭이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학적 표현을 말한다. 뭐랄까, 논리의 형태를

갖추기는 했지만, 결국 논쟁에서 이기겠다는 최종 목적에 충실하기 위한 말하기 전략이랄까.

상대의 논설이 가진 논리적 어그러짐을 공격하는 건 기본이고 상대의 주장이 놓친 이면을

가능한 확장하거나 변형하여 '꼬투리'를 잡아내는 것, 그런 게 수사학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 6점
쇼펜하우어 지음, 김재혁 옮김/고려대학교출판부

어렸을 때 봤던 책 중에 이런 책이 있었다. 쇼펜하우어가 지었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상대의 논리는 최대한 일반화해서 허점을 키우고 자신의 논리는 최대한 구체화해서 허점을

줄이라거나, 상대가 아니라 청중을 설득하라거나, 의미없는 말들을 쏟아내라거나 따위의 야비한,

그렇지만 굉장히 실용적인 방법들이 무려 38가지나 소개되었던 책이다. 그는 이걸 활용하라는게

아니라 이런 식의 수사를 동원하는 상대를 대비하라는 의미로 지었다지만, 실제로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억누른 후에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문제는 그거다. 실제로 레토릭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 권위에의 호소,

잘못된 인과, 대중에의 호소, 성급한 일반화 따위의 이야기들은 책 속에만 우스꽝스런 사례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신문사설에도, 정치인들의 입에도, 늘 오르내린다는 점이다.

실제 사실이 무엇인지, 무엇이 옳은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레토릭을 잘 쓰는지가 더러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건 비극이다.


그런 레토릭은 상대보다는 청중을 장악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민주주의 시대의

레토릭
은 더욱 위험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정치학자 마셜이 제기한 민주주의 3단계론의 각

계단에서 사회의 보수진영이 어떤 레토릭으로 시민권, 정치권, 경제사회권으로 확장되어가는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았는지를 구체적이고 대표적인 사례와 논설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 레토릭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고 한다.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실제로 나머지의 레토릭들은 이 세 가지의 변형이거나 부산물이라는 게 저자의 관찰이다.


1) 역효과론 :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2) 무용론 : 그래봐야 기존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3) 위험론 :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풍부하게 인용하는 당대의 보수 석학들은 근대의 개인을

처음으로 세워낸 프랑스혁명과 인권선언, 1인1표의 보통선거권에 기반한 정치적 민주주의, 그리고

복지국가라는 단어로 축약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줄곧 거부하거나 부정해왔던 거다. 실제로

그 간단한 레토릭이 대중을 움직이고 여론을 만들어내어 민주주의의 확장을 막아왔다.


세 가지 레토릭에 기반해서 사실을 호도하고, 대중에 호소하고, 이성보다 감정에 의지하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공히 나타나는 일이라지만, 특히 지금 우리나라에는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지 싶다.

민주주의, 혹은 복지국가라는 큰 아젠다를 둘러싸고 벌이는 보수-진보간의 갈등은 무상급식이니

무상의료니 따위의 이슈를 두고 팩트의 해석에서부터 홍보에 이르기까지 바로 책에서 보였던

여러 역사적 논쟁과 국면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을 하면 오히려 서민가정이 피해를 입는다거나, 무상급식을 한다고 서민가정에 좀더

수혜가 가지도 않을 거라거나, 심지어 무상급식으로 우리나라 재정이 파탄나고 모두가 위태롭게

될 거라는 식의 논변. 게다가 시대착오적인 사대강 삽질과 언론규제 따위의 이슈에 대해서도

약간씩의 변형이나 강약은 있겠지만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현실이 겹쳐보이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제기될 법한 당연한 질문 하나. 보수파만 레토릭을 활용했을까. 진보파도 같은

논변을 통해 보수를 굴복시키고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역사적으로 진보파가

대중을 장악하기 위한 논쟁에서 다소간 열세에 있었으며, '진지성'이 너무 강해 '풍자'에는 약했다는

정도로 넘어가려는 듯 하다. 조금 보태자면,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지키려는 입장보다 뭔가 바꾸고

변혁하려는 입장이 아무래도 취약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 레토릭을 안다고 해서, 레토릭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처럼 논쟁에서 휘말리지

말라는 실용적인 목적이라기엔 저자는 좀더 본격적이었다. 저자는 이미 '두 개의 똑같은 불합리'라고

지적된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레토릭간의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대립에서 벗어나서 이른바

'민주주의 친화적'인 영역을 찾아 생산적인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자는 의도란다. 그렇지만 그도 이미

지적한 것처럼 레토릭은 레토릭일 뿐, 실제로 상황은 보수와 진보의 레토릭 사이에서 움직여 왔다.

레토릭을 벗어나 '민주주의 친화적'인 영역을 찾으려면 단순히 레토릭을 아는 것 말고 다른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P.S.

아마도 그건 청중들의 수준이 그걸 감별해내고 기각할 수 있을 정도로 고양된 이후에나 가능할 거

같다. 몇 마디의 논설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단어로 인기를 얻고 감정을 흔드는 정치야말로

요새 유행하는 말을 빌자면 '포퓰리즘'인 거다. 레토릭에 휘둘리는 '포퓰리즘' 정치를 벗어나려면

우선 피아식별을 하고 줄기차게 싸워야 하지 않을까.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 상황에 좀더 구체적으로 적용시키자면, '어린애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냐'느니, '말꼬투리

잡는데 연연한다'느니 따위의 정치 일반에 대한 막무가내식 손가락질과 비난을 피해야 한다.

모두에 대한 비난은 결국 그 누구에 대한 비난도 아닐 뿐더러, 정치적 허무주의만 조장하고

마는 거니까. 그렇게 수고로움과 괴로움을 감내하는 게, 레토릭에 휘둘리지 않는 첫걸음이지 않을지.





가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우연찮게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발견하는 것.

딸꾹질을 세번 하고 발을 두번 구른다거나, 왼발을 잡아올리고 오른발 깽깽이로 세바퀴를

뱅글거리며 돈다거나, 혹은 오전 11시 11분에 빼빼로를 물고 거울을 본다거나.


뭐 비슷한 상상은 세상에 쌔고 쌘 게 사실. 학교마다 서려있는 괴담에서 열두시 정각에

어떤 거울을 두명이서 바라본다거나, 칼을 물고 밤 열두시에 접시물을 바라보면 뭐가 나타난다는

식의 이야기들, 심지어 해리포터에서 나오듯 8 1/2역 쯤에서 열리는 호그와트행 급행열차까지.


문득 카메라를 쥐었고, 지하철이 오길 기다리는 줄 맨 앞에 섰으며, 구두코가 반들반들

안전문 유리창에 비치는 순간. 건너편 세상에서 마주본 구두코가 문득 제 혼자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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