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도 되고 카메라도 된다는 '컨버전스', 혹은 엠피쓰리도 되고 USB도 된다는 '양수겸장'의 아이디어 상품은

종종 성공적이지 못하다. 어느 한 쪽의 기능이나마 제대로 살아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 다른 한 쪽의 기능이

물귀신처럼 우월한 쪽의 기능을 물고 늘어져 두 가지 기능 모두 어정쩡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읽기에 따라 연애소설이 될 수도, 미스터리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강조하는 건,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는

쉽게 와닿기는 힘들 듯 하다. 우선 미스터리를 구성하기 위해 치밀히 고안된 복선들과 상징들이 일본 '내수용'의

것들이어서 내 눈에는 별로 걸리지 않았다. 다만 A면, B면이라 이름붙은 두 챕터가 알고 보면 동시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기록이라는 흐릿한 의심은 뒤로 가면서 더욱 짙어졌었고,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나름 성공적으로 그간의 긴장을 날려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참신하고 재치있는 구성의 묘미가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연애소설의 측면에서는. 글쎄. 얼핏 생각하면 그 소설에서 제일 눈에 띄는 아포리즘은 이건가 싶다.

인간에겐, 이 세상에는 절대란 건 없다고. 그걸 알게 되면 비로소 어른이라고 해도 좋다고.

이 사람이라면 평생 사랑할 수 있겠다는 느낌, 헤어진 뒤에도 그 이상으로 좋아하게 될 상대는 앞으로 평생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런 건 모두 어린 시절의 무지한 신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절대'란 게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연애가 바로 일종의 통과의례, 이니시에이션(Initiation) 러브라고.


그런 거구나, 하면서 제길, 하면서 끄덕끄덕 하려다가 왠지 반감이 인다. 내가 품은, 그녀가 품은 애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당사자들도 알지 못하고 확신도 없는 게 '어른들의 사랑'이라고? 사람을 사랑하면서 믿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지금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얄팍하고 찰나같은 진실이란 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고작 그정도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절대'라느니, '(성숙한) 어른의 사랑'이라느니 상대적으로 (미성숙한) '아이의 사랑'이라느니.

자존심을 다칠까 마음을 다 못주는 연약함, 상대로부터 거부당한다는 걸 견딜 수 없는 두려움, 그런 걸 왠지 다

컸다는 느낌을 강변하는 '어른의 사랑'이란 단어로 뭉개버리려는 건 아니고?


섹스 파트너를 감수하면서까지 그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그녀, '역시 그렇게 되는구나..'라는 그녀의 한 마디.

그녀는 마치 열혈 기독교도처럼, 자신이 이미 알아버렸다고 생각한 그 황량하고 불가역한 '진실'이 남자에게도

유효할 것이라 이야기했지만..막상 그녀로 인해 황량해져버린 그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상처나 공허함을 타인에게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얼마나 기다려야 다시 예전처럼 신선하고

건강한 핑크빛 하트로 회복되냐고 묻는다면, 그건 모르겠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게 계속해서 상처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면...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처투성이 마음으로 사랑을 다시 해야 한다면, 그게 '어른의 사랑'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인지도 모른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 6점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북스피어
얼마전 티스토리의 공지란에서 서평단 모집 안내문을 얼핏 보았다.

3개월 동안, 격주로 한 권이상 무료로 배송해 준다니 뭐 나쁘지 않다 싶었다. 어떤 책을 보내줄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는 무협지나 삼류만화, 하물며 딱지없는 영화에도 뭔가 남는 게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니까. 그게 비록 보고싶은

대로 보고 읽고 싶은대로 읽은 거라 해도 어쨌든.


네 개로 나뉜 카테고리 중 "문학 및 만화"와 "인문/역사/사회/자연과학"에만 응모를 했다. 나머지 둘, "유아/어린이

/학부모/가정/어린이 외서"와 "경제 경영/외국어/자기계발/실용" 파트는 좀체 관심이 없는데다 종종 읽는 것조차

고역인 책들이 많아서 패스.


통틀어 사백여개의 트랙백의 응모가 있었고, 각 카테고리별 열 명씩 '당첨', 선정도 아니고 '당첨'이다.

나는 "문학 및 만화" 카테고리에 용케도 당첨이 되었다.

어떤 책들이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억지로 박약한 감상을 침소봉대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그런 식으로

어쨌든 글로 감상을 남기면서 좀더 스스로 정리할 수 있을 테니 잘 됐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써내린 글을 돌아보니, 상당히 유보적이다.

리뷰어로 지명된 후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 얼마전부터 모 사이트에서 솔찮게 영화와 책들의 리뷰어로 선정되어

이것저것 쓰고는 있지만, 가끔 내가 정말 읽고 싶은 책에 할애하고 싶은 귀한 시간에 지명된 책을 의무처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게다가 왠지 그런 식의 리뷰어를 모집하는 책들 중 일부는, 그야말로 '날것의 구린

냄새'가 나는 것들도 없지 않아 보인다. 책읽는 것을 좋아하고 공짜를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

광고를 도모하는-뭐 얼마나 광고 효과가 있겠냐는 건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모습이 너무도 역력하고, 책의

퀄리티는 다소 아쉬운.(책이라도 좀 그럴 듯 해서 기꺼이 넘어가고 싶은 맘이 절로 일게 해 주던가.)


알라딘에서 무슨 책들을 줄지 모르겠다. 가벼운 책과 무거운 책이 적당히 뒤섞인, 그리고 트렌디한 책과 고전이

적당히 뒤섞인, 내 돈주고 꼭 사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서평단이라' 공짜로 받아 감사한 책들을 받았음 좋겠다.

내 돈주고는 그닥 안 사볼 책들 '마침 서평단이라' 공짜로 받아봐야 한번 보고 마는 게 사실이니. 두고두고 뒤척여

볼 만한, 때로는 밑줄 그어가며 좋은 구절 발려낼 만한 책들을 줬음 좋겠다.


여까지. 쓰고 보니 미리부터 투덜대고 있다. 뭐 정리하자면 전체적인 흐름은 알라딘-티스토리에서 '당첨'시켜줘서

감사하다는 고마움의 표시, 다만 (리뷰)쓸만한 책들, (두고두고) 볼만한 책들, 그런 것들 받았으면 좋겠다는 다소

질풍노도 사춘기스럽게 생뚱맞고 거친 소울의 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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