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남부의 가장 아름다운 해안 중의 하나라는 샌디에고 라호야 지역, 그 보석같은 해안 중에서도 특히나

 

영롱하게 빛나는 해변, 블랙 비치(Black's Beach)다. 이곳은 특히 자연주의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으로, 누드로

 

모래밭을 활보해도 전혀 눈치보거나 어색할 일이 없다.

 

블랙 비치는 토레이 소나무 주립 비치(Torey Pines State Natural Reserve)와 맞붙어 있는 곳으로, 다만 그 황량하고

 

아름다운 해안가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제법 가파른 비탈길을 통해야 한다.

 

절벽 위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는 시야에 걸려들어오는 건, 누군가가 만들어 세워놓은 세로로 길쭉한 푸른색 액자.

 

 

 

빗물에 씻겨 거대한 등뼈가 드러난 것처럼 울룩불룩한 땅을 조심해서 밟으며 해안가로 내려가는 길.

 

 

휘영청 구부러진 해안선 따라 슬며시 내려앉은 안개낀 풍경을 보고 있으니 여기가 어딘가, 문득 망연해진다.

 

 

 

열심히 내려가는 길, 전날 내렸던 소나기 탓인지 길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이제 바닷가 도착. 도착하자마자 반기는 건 해류가 세니 수영할 때 조심하라는 경고판이다.

 

그리고 곱고 새카만 입자들을 숨기고 있는 금빛 모래사장. 파도에 쓸려서 오르내리며 환상적인 무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곳곳에서 보이는 실루엣들. 전혀 아무런 색깔도 추가되지 않은 살색의 실루엣들이 해안선을 따라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막 도착한 사람들은 한귀퉁이에서 자연스럽게 훌렁훌렁 옷을 벗고 있었고.

 

 

그들을 향해 카메라를 향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이럴 땐 그저 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과 바다를 감상할 따름.

 

 

나 역시 그들의 대열에 동참한 채 조금은 차갑지만 이내 기분이 좋아졌던 태평양 푸른 바닷물에 몸을 담궜다가

 

모래사장을 거닐기도 했다. 모두 벗어던진 채 탁 트인 바닷가에서 파도와 바람과 모래에 살부빌 수 있다는 것,

 

그런 기회를 어디서고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꼭 다시 한번 잡아챌 일이다.

 

 

 

몰랐는데 '카모메 식당'과 감독이 같다. 모타이 마사코라는 주연 배우도 세번째 여자로 등장했었다. 알아채기

전에도 왠지 두 영화가 느낌이 같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조용한 이야기일 거라고.

사실은 그런 첫인상과 감독과 배우 한 명 빼고는 많이 달랐다. 가끔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담백하거나 심지어

능청스럽다 싶도록 느그지게 빼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닮았지만, 느낌은 영 달랐다.


전통과 인습, 혹은 전통과 전설. 그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한 '가치'를 두고 벌이는 싸움을 이렇게 유쾌하게,

또 깊이있게 표현한 영화는 잘 못 봤던 거 같다. 금테둘린 채 무겁게 먼지 속에 가라앉은 '전통'의 이미지가

보기만 해도 앙증맞은 '바가지머리'로 치환되어 버린 순간, 파리의 최신유행 빠숑(fashion)과 촌티 사이를

위태하게 넘나드는 그 스타일을 경계로 꽤나 근본적인 이야기가 작은 마을 속에 꼭 맞게 들어앉았다.


저 아이들은 나중에 사회의 동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바가지 머리' 마을로 들어온 '찰랑찰랑 갈색머리'

외부인을 배척하거나 질시하는 일변도가 아니라, 내면에 숨어있던 질투와 부러움을 성찰하고 솔직히

소리내어 고백할 줄 안다. 외부인을 맞아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기적인' 성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친구가 되고 덩어리로 뭉쳐든다. 그렇게 열린 채로, 나이많은 사람부터 무서운 엄마까지 모든 사람들이

'전통'이라며 예스라고 할 때 쉼없이 물음표를 매달고는 급기야 전통에 반대하며 가출도 감행하고 시위도

하는 거다. 커서 멋진 노를 외치는 멋진 데모꾼이 될 거다.


비록 살색그림 가득한 빨간 책에 열광하고, 슬슬 철봉에 거기도 문대는 맛도 알아버린 장난꾸러기 녀석들이긴

하지만, 만약 '어른이란 타인을 배려해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꼬맹이 아버지의 기를 쓰고 멋져보이려는 말이

맞다면 녀석들은 이미 어른인지도 모른다. 마을의 룰, 규칙, 전통보다 먼저 새로 들어온 사람을 생각하고,

그런 '전통'이 깨져나갈 때 어쩔 수 없이 아프게 될 사람을 또다시 먼저 생각하는 녀석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바가지머리를 유지하는 건 누군가에게 싫은 일이 되니까 반대지만 그렇다고 바가지머리를 없애는

건 또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니까...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며 우는 거다.


그 아이들과 미용실 아주머니의 화기애애하고 다정한 분위기는 수미상관, 그렇지만 아이들의 머리모양은

바뀌었다. 바리깡으로 밀리고 나서는 아직 형태를 잡지 못했다. 다시 바가지 머리로 길들여지지는 않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착하게도, 강한 척 하지 않고 괜찮은 척 하지 않고 울어버렸댔다. 무언가를

바꾸고 변화시킨다는 건 그런 아픔을 모두에게 남긴다는 걸 고백함에 다름아니었다. 아주머니 역시 어른이니까

그 어른스러운 아이들에게 우악스럽고 일방적인 아픔을 전가하진 않을 거다. 어른이니까 조금은 더 양보하고

참아주면 좋겠다.


바가지 머리, 그런 거 하나를 바꾸는데도 이렇게 다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 깔끔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갈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모든 건 변하며 사람은 늙으니까, 실은 모두가 피해자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인 척은

아니어도 최소한 나잇값은 해가면서, 상대가 짊어지고 있는 아픔, 짊어지게 될 아픔은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생떼 피워가며 빨갱이니 뭐니 난동피우는 늙은이들, '反기성세대'라며 갈아엎자느니

죽이자느니 증오의 언어를 뱉는 젊은이들, 둘다 촌티 풀풀 나는 바가지 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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