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 최진실, 노무현, 정몽헌, 최진영..활자화된 이름들의 죽음 이외에도 도처에서 학생이,

회사원이, 주부가, 아이가 죽음을 선택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선택에 대해

원망하고 훈계한다. 더러는 비웃음이 섞인 훈계일지도 모른다. 니가 힘들다는 그 삶, 난 잘 살고 있는데..하며.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 사람에 한번쯤 생각해본 사람까지 합한다 해도, 어쨌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그들은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의 이름으로 자살의 경박함과 무책임함을 비난하고, 사회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살을 단죄하는 판이라 그렇다. 이미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살려두기 위한 '반면교사'나 '예외'가 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같다.)

(참고 :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


"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생명 법칙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또 일견 그럴 듯 하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하고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채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역할과 기대가 그(녀)에게 감겨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변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아픔/손실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란다. 잠시의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나약함의 소산이라고도 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과 같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증좌라며 심리적/생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곁들여진다. 게다가 여전히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등의 종교적인 믿음이 단단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자살학의 진단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인생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당사자만이 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힘들다는 사람들을 끌어와 앉혀서는, 니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뭐가 되겠니, 하며 니가 맡아야 할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압박이다. 단적으로 최진영의 죽음이 그랬다.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조카는 어떡할 거냐, 엄마는 어떡할 거냐, 누나 볼 낯이 있겠냐, 따위 오지랖 넓은

한가한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본인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과정 끝에

죽음을 선택한 건지 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의 노력은 없었다. '우울증'이란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그(자살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메리가 굳이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쓸 만큼, 자살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래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으로 스러지고 만다는 깨달음을 거쳐야 가능한 거다.

자살하고 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고,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회성/기능성'에 기반한 사회의 협박 이외에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는 강렬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의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최고로 가치있는 자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고자 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자연본능과 사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다.

나는 자연적인 죽음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온갖 생산활동-애낳고 밥벌이하는-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부한다.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생명체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보전의 대원칙까지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하건대 더이상의 삶은 부질없는 생명의 연장일 뿐 죽음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지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그것은, 아메리가 말하듯, 삶을 던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지키겠다는 모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적인 판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개개인마다 다를 거다. 다르지만

또 같을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한다. 에셰크(Lechec), 치욕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죽음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더이상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더이상 없는 중증 환자, 삶의 전부라

여겼던 사랑의 실패자, 심지어는 대입시험에 실패한 사람, 남들 눈에 어이없고 하찮아 보일 문제라 해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다. 삶의 결정적 순간은 본인만이 안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그러나) 지성의 논리로 볼 때 자유죽음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자유죽음을 택한 결단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인간성'과 '존엄성'에 기댄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생과 '에셰크'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죽음으로 직접 끝낸 인생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자살할 권리'는

복권되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행하기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스스로의 자유를 체감하고 밀도높은

삶을 살았다고 본인이 느낀다면 본인 이외 다른 누가 그 삶에 대해 주제넘은 훈계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아메리는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욕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목하려고 한다. 꾸역꾸역 생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겠다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삶의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지켜낼 자유를 극한으로 수행하고자, 맹목적으로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하이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퀸,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융통성없고 고집스러운, 순진하다 못해 꽉 막힌 쑥맥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에셰크'에 공감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계와

비웃음, 그리고 권해지는 자연적인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인 거다. 우리 사회의 드높은 자살율엔 이유가 있다.







#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삐져나오면 '요새 삶이 힘드냐', '우울하냐'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그럴 때만 입에 올려야 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을지 살지의 문제가 김밥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의 문제만큼 유쾌하거나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꼭 우울하거나 피폐해졌을 때만 떠올려야

하는 건 아닌 거다. (그렇다고 요새 내가 삶이 힘들지 않다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건 아니..ㄹ 거다.)


진지한 것과 우울한 건 다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병들고 패배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봄이라고, 볕이 따시다고,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 죽음을 터부시할 이유가 하필이면 손꼽을 수 없을만큼 쌓여있는 이 때라도, 살아갈 자유가

있다면 동시에 죽을 자유도 있는 거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죽음 - 10점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김남시 해제/산책자


* 알라딘 4월 마지막주 이주의 TTB에 선정되었습니다.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를 다 봤는데 우울하네..거대한 수용소에 배제된 채 포섭된 벌거벗은 직딩이야."

- 힘내라 쉽지않지 뭐..

"얘는 근대국가서 숨쉬는 생명 자체가 trapped된 거라고 말하는데 어째야 할지는 모르겠단 거 같네.."

- 그게 사실이래도 나가죽을순 없잖냐ㅎ

"짐 이런 책 읽어 모에 쓰나 싶기도 하고ㅋㅋ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고"

- ㅋ적당히 생각하고 살기도 쉽지 않은데 대단하네

"하도 멍청한데 요새 더 멍청해져서ㅋ 지극히 자족적이고 개인적인 이유랄까."


어제 퇴근하고 오는 길에 드디어 '호모 사케르'를 다 보았다. 저번달 말부터 읽기 시작하면서 주로 출퇴근 길에

짬짬이 읽다가, 휴가 기간 끼고 전철 안에서 자고 하다 보니 근 삼 주넘게 걸린 듯 하다.

뭐랄까,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다 보니 막막하기도 하고, 아직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치받아서 친한 선배와 문자를 주고 받았다. 고작 한 번, 그것도 띄엄띄엄 끊겨가며 읽었지만 이 책은 뭘

말하고 있는 걸까..그리고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뭘까 정리되길 바라며.


가장 눈에 띄는 건 배제는 곧 포섭이라는 일견 역설적인 아감벤의 지적이다. 구조로부터 배제됨으로써 곧

그 구조 자체에 포섭된다는 이야기는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매우 통찰력있는 지적이다.

고국의 정치 현실로부터 떠밀려난 망명자, 혹은 비적떼나 해적과 같은 경계지의 범죄자가 누구보다

그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다는 사실, 아감벤이 지적한 대로 나치 하의 독일에서 금별 유대인과 검은별

집시 등이 있어 시민권과 생명을 박탈당함으로써 곧 그 구조 자체에 '배제자'로서 포섭되는 걸 보면 그렇다.

아, '예외'라는 라틴어의 어원상의 의미 자체가 '외부에 포함되다'라는 지적도 의미심장하다.


근대국가와 그 주권자는 누군가를 배제시킴으로써 포섭하고, 포섭함으로써 배제한다. 그러한 끊임없는

경계-지음은 사회의 존속에, 국가가 의도하는 시스템의 존속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자유주의적 정체든

사회주의적 정체든 '인민(people)'이란 단어가 갖는 수많은 균열선의 흔적이 그 강력한 증거 중 하나라고 하며,
 
그 점에서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의 정치적 상상력이 갖는 한계를 시사한다.


정치라는 것 자체가 희소한 자원인 권력을 불균등하게 나누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러한 경계(그게 계층이던

계급이던 혹은 다른 무언가던간에..) 자체는 유사 이래 지속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나치와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보여주었던, 혹은 푸코가 이미 지적했던 '경찰국가, 혹은 근대 행정의

탄생' 이래 인간의 몸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심화되는 현상이다. 아감벤은 아렌트와 푸코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도 인간의 생명 자체가 정치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대 국가 혹은 주권 권력이 인간의

생명을 직접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지난 수천년동안 인간은 생명을 지닌 동물이면서 덤으로 정치적 삶을

누릴 능력까지 갖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근대의 인간은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로 바뀌었다.("~"는 푸코, "앎에의 의지" 중)


아감벤이 주목하는 건 나치 하의 수용소가 근거하고 있는 법적, 철학적 기반이다. 흔히 사람들은-그리고 아마

유대계 네트워크의 강력한 활동에 의해 추동된 사람들은-나치 하 유대인들이 겪었던 수용소 생활이라거나

비인간적으로 다뤄졌던 온갖 사례들에 분노하며, 그 '비정상성'과 '비인간성'에 탄식한다. 그렇지만 그에 따르면

나치 하에서 이루어진 수용소, 생체실험 등은 비단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막론하고 생명 자체가 정치의 담보물이 되는 근대국가, 주권권력에 있다는 거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책들은 꽤나 나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감벤은 그런

차원에서 한 걸음 더 근본적으로 들어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배제가 곧 포섭이라면, 이른바 푸코-그리고 아감벤-의 '생명정치'는 곧 '죽음의 정치'와 같다.

뇌사, 안락사의 문제에서 보이듯 일부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기인한 생과 사의 경계 획정문제자체가 정치화되어

주권국가와 그의 법에 좌지우지되는 생명의 개념, 복지국가의 아이디어에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국민)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고 그 생명의 생산성과 건전성을 확보하겠다는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그치만 한국에선 여전히

낯설기만 한-오랜 추세, 국적을 벗어던지는 순간 인간으로서 아무런 존재증명이 불가능해지고 마는 불가사의한

난민의 지위, 나치뿐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 영국 등에서도 쉼없이 행해졌던 재소자 및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인간 모르모트). 그리고 아마 근대 이전과 달리 은밀하고 구조적으로 행해지는

사형제도 역시 그러한 생명정치, 곧 죽음의 정치가 만연한 하나의 징후가 아닐까 싶다.


그런 그림이다. 나면서부터 특정국가에 소속되어 생명을 담보잡히고, 그에 따른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는

대신 언제든 내 생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주권 권력. 만약 그걸 거부한다면 '벌거벗은 생명'이 되어 사회적

생명뿐 아니라 신체적 생명까지 보호 내지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그런 상황에서, 나치 혹은 그와

유사한 국가권력이 언제든 '생명(국민)'의 정치적 헌신과 복종을 요구하는 경우 배제된 채 포섭된 유대인, 집시

혹은 타자화된 다른 누구라도 멸절시킬 수 있다는 거다. 그 모든 건 이미 거대한 수용소처럼 짜여진 국가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 생명을 보다 공고히 지배하고 장악하려고 혈안인 주권 권력.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뭐 여러가지로 빗대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선명하게 나타났던 건 역시 최근의

쇠고기 사태에서 드러나는 것 아닐까 싶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라는 문구가 관용구화되었단

사실 자체가 국민 생명의 소유권이 어디로 넘어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 무색치 않을 정도로 심각해진 '비정규'라는 예외의 문제라거나, 황우석 사태로 불거졌던 인간배아의

존엄 문제..등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의 주권 권력은 생명을 쥐고 흔들려고 한다.


...그밖에, 내가 느끼는 감정은...그런 거였다. 예컨대 유모차 부대로 촛불시위에 나섰던 사람들이 경찰에 소환되고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 이를 찬성하는 사람,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런 논쟁의 틀을 마치 체스판

위에서 양편의 말을 내려보듯 분석하며 보다 큰, 근본적인 이야기를 던지는 게 아감벤이다. 경찰조사가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법치를 내세우고, 반대하는 사람이 법의 횡포를 말한다 쳤을 때 아감벤의 이야기는 아마도 국민의

저항권 내지는 근본적으로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성찰쯤 될 수 있단 얘기. 너무 멀다.


대학교 다닐 때와 달라진 거라면 좀더 사고가 현실적이고 땅바닥에 붙어버렸다는 사실이지 싶다. 그때라고 뭐 이런

이야기들이 딱히 구체적인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와닿았겠냐만은, 최소한 그때는 지금만큼 몸이 무겁지는 않았고

마음도 무겁지는 않았다. 책을 보면서는 어떤 부담이나 이질감없이 그 사유체계를 내맘대로 유영할 만한 여유가

있고, 가능성이란 게 있었던 거 같은데..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이

그저 한번 읽었을 뿐인 책에다가 화풀이하듯 손에 잡히는 이야기를 해라, 대안을 내놓아라, 이렇게 딴지를

걸고 있다.

호모 사케르 - 8점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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