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김혜자가 싫었다. 그녀의 가늘고 여리여리한 목소리, 때로는 신경질적일 만큼 하이톤의 그 목소리도 싫었고,

그 목소리가 이와 혀를 걸러 발출될 때의 발음과 말투도, 그녀의 얇은 입술도 싫었다. 쉽게 근심그늘이 고이는

웅덩이같은 그녀의 양미간, 짙은 주름도 보기 싫었고 무언가 늘 고민과 걱정을 안고 있는 듯한 눈매와 그

축축한 눈동자도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연기는 언제나 '엄마'였다. '국민 엄마'라는 칭호로 소개되곤 하던 그녀에게선, 정말이지

여자가 아닌 엄마의 표시만이 가득했다. 잔소리와 더러는 짜증을 예비하기 위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숨길

수 없는 자식 걱정에 굵게 패인 주름, 자식놈이 커나갈수록 쉬이 축축해지는 눈동자까지. 그런 '엄마'만

있는 게 아니라지만, 그녀는 그런 특징들을 꽉 쥐고 '엄마' 역할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런 엄마, 전원일기 속 엄마, 드라마 속 엄마에 더해 봉준호의 '마더'는 그녀에게서 살짝 불온하고 불안한

엄마 모습을 캐내고자 한다. 섹스가 없는 상태에서의 엄마, 섹스를 원하지만 충족할 수 없는 엄마의 모습들.

간이 옷장 안에 숨어 젊은 남녀의 육덕진 섹스를 훔쳐보는 엄마, 고등학생의 부탁으로 생리대를 고르고

계산하며 눈치보는 엄마, 휴대폰 속 벌거벗은 남자-섹스 구매자로서-들 사진을 한장씩 넘겨보는 엄마,

심지어 자신을 막 대하는 아들 친구에 묘한 긴장감을 느끼는 엄마. (어쩌면 이미 그녀와 아들 친구놈은

한번쯤 잤던 사이라고 힌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그녀, 엄마는 조금은 지쳐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라곤 아들 밖에 없는 집에서 둘이 산 지 오래다.

다 큰 아들은 정신이 온전치 못해 팬티만 입은 채 한 이불을 덮고 엄마 가슴을 조물딱대며 잠들곤 하니,

'엄마와 잔다'는 표현이 계속해서 중의적으로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닌 거다. 아직은, 아마 앞으로도,

상상할 법한 '패륜'의 힌트가 예기되지는 않았으니 엄마는 만족되지 못한 채 지치거나 욕구불만이거나.

그렇지 않을까. 아마도 그래서 노상에 방뇨하는 아들의 그곳에 유심스레 눈길이 간 거다.


남자의 욕구야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그녀의 다 큰 아들도 마찬가지다. 정신은 빠졌어도 육체는 건전하니,
 
쌓이기만 하는 욕구는 그를 '발정난 개'로 만들어 버린다. 굳이 '오이디푸스 신드롬'이니 따위 엄마에

대한 근원적 욕구를 운운할 생각은 없지만, 그를 사랑해주고 보듬어주는 여자는 그녀 뿐이다. 비록

그녀가 다섯살즈음 농약을 먹였을지언정, 그녀는 마르지 않고 넘칠듯한 사랑으로 그를 무조건 믿고

보호하며 지지한다는 걸 안다. 그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대안은, 엄마다.


아들에게 '바보'라는 표현이 그 누적된 욕구불만을 파열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면, 엄마에겐 그

아들의 존재-하나뿐인 피붙이이자 '남자'로서-가 위기에 처할 때 방아쇠가 작동한다. 천지사방을

뛰어다니며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애쓴다. 그치만 누구를 위한 구명일까. 바보천치 아들은, 콩밥도

맛있다며 교도소 안이 편하다는 아들은 사실 창살 안과 밖의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혹, 엄마 자신을 위한 구명 활동 아닐까. 그녀가 살기 위한, 그녀의 욕구불만을 해소키 위한. 
 
그러고 보면 엄마에게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남자는, 아들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아들은 더욱 서로에 의지하고, 지쳐가며, 또 헌신한다. 다른 방법이나 대안이 없기도 하다.

특히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에 대한 보호 본능이라 이름붙이던 모성애라 이름붙이던, 그녀는 아들로

인해 욕구불만이 강화되고 아들로 인해 욕구불만을 해소한다. 달리 기댈 곳이 없었던 그들의 애정이 쏟아져

나갈 유일한 통로, 서로를 향한 무조건적 애정이 콸콸 쏟아지는 순간, 그녀는 말랐던 댐이 터지듯 온통

뿜어나오는 피분수 속에 두 손을 담궜다. 어느 순간 구르기 시작한 파국적인 결말을 향해 치달으면서도

그 둘의 징글징글하고도 섬뜩하기까지 한 애정, 특히 엄마 혜자의 아들 도준에 대한 사랑은 더욱 뚜렷이

선연해지기만 한다.


"엄마는 원래 그런 존재야, 모성애란 그런 거지" 등등의 따뜻하지만 통속적인 이야기로 끝낼 영화는 아닌 거

같다. 그녀의 사랑은 알게모르게 현실적인 이해타산이 맞물려 있고, 다른 통로의 유무에 따라 그 강렬함이

결정되며, 그 기저엔 엄마이기 이전 사그라드는 여성으로서의 욕구불만이 마그마처럼 꿈틀대고 있다는. 

무조건 신성하고 순결한, 지고한 데다가 여성이 가진 본성과도 같은 덕목으로 찬양받는 '모성애'가 실은

그런 육체적인 욕망과 얼기설기 엮여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던 건 아닐까. 천상의 모성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얼마전 이야기한 것처럼 교통사고를 내고, 그 탓인지 이전부터 살짝 뻐근하던 허리가 무지근하게 아파왔다.

하루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어서 지난 게 좀체 나아질 기미는 커녕 점점 묵직한 통증이 밀려드는 듯 하여

저번주에 병원에 갔다. 허리가 아프니 정형외과가 있거나, 척추전문 병원 쪽을 찾아야겠지 싶었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을 검색해서 전화 예약을 하고 진단을 받으러 갔다.


그전부터 좋지는 않던 허리가 충격이 있은 후 조금씩 더 아파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아픈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아픈지 적절한 단어를 찾아 묘사하고 미리 찍은 엑스레이를 멍하니 쳐다 보며 의사의 판결을 기다렸다.

의사는 별 이야기가 없다. 그냥 내가 일상적인 언어로 묘사한 통증과 아픈 부위에 대해 '있어 보이는' 의학적인

단어를 알려주었다. 그건 '디스크' 같군요, 라고.


이제 병명은 알았으니 조금은 속이 시원하다. 아, 디스크구나. 근데 다시 답답해지는 건 의사선생님이 내려주는

처방이나 치료책이란 게 참 단순하달까, 무신경하달까. 일단 조금 지켜보고 정밀진단을 받던가 하자고 했다.

우선은 물리치료부터 일주일정도 받아보자고. 물리치료란 게 별거 아니다. 의사도 아닌 간호사가 묻는다, 어디

아프세요. '등'이 아프다고 이야기하면 그냥 등에 물리치료기 쑤셔넣어주고 한시간, 끝이다. 전기치료, 초음파

치료, 그리고 핫팩치료로 구분되긴 하지만...사실은 일상어로 보통 '찜질'이나 '안마' 정도로 번역될 것들이다.


그러고 보면 의사 참 쉽다. 어차피 아픈 사람이 알아서 자신이 아픈 게 어디쯤일 거야, 생각하고 종목을 정해

의사를 찾는다. 그러면 의사는 환자가 묘사하는 증상과 부위에 대해서 학술용어나 전문어로 통용되는 '병명'을

가르쳐준다. 예컨대,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통증이 있어서 왔어요, 이러면 '족저근막염(足底筋膜厭)'입니다.

풀자면 '발바닥아래근육에염증이있는병'입니다. 허리가 아파요, 이러면 '디스크'입니다. 요게 다다. 그렇지만

그 병명이란 것들이 굉장히 있어보이는 데다가, 실은 병명을 아는 것만으로 환자는 뭔가 커다란 진척이 있다고

느끼는 게 당연한 거기도 하다. 나만 이렇게 아픈 거 아닌가, 이건 치료법도 없고 병명도 모르는 건 아닌가 하는

모종의 불안감을 모든 환자들이란 가질 수 밖에 없을 테니. 그렇지만 사실 치료도 뭐, 적당한 처방과

필요하다면 일상의 '찜질'이나 '운동'이니를 좀더 전문화한 '물리치료', '운동요법' 등을 동원하면 참 쉽다.


좀 시니컬한 건가. 의사들의 진단과 처방이 나름 경험칙에 근거한 점쟁이들의 '연기'와 비슷하다고까지 말하는

건 조금이 아니라 너무 시니컬하게 나가는 거 같지만, 그래도 비슷한 구석이 상당히 있어 보인다. 의사들이

동원한다는 첨단 과학과 장비들, 그건 대부분의 소소한 환자들과는 먼 나라 이야기다. 그냥 말을 듣고 조금

진찰해보고, 엑스레이 정도 보편화된 장비를 동원하려나. 그 정도의 소스를 가지고 진단하고 처방하고, 그건

점쟁이들이 점보러 온 사람들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과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거다.


굳이 점집을 찾은 사람들이 고민이 있으니까 가겠지. 수많은 병원 중 굳이 이 종목의 병원을 찾은 사람들은 그

관련된 질병이 있으니까 가겠지. 점집을 찾은 사람이 보여주는 외적 행색이나 외모, 분위기가 그 사람의 직장,

고민, 생활환경, 배경 등을 추리케하는 단서가 되겠지. 병원을 찾은 사람이 묘사하는 증상과 부위가 그냥

그 사람의 병명을 확정케 하는 단서가 되겠지. 처방은, 경험칙에 근거한 몇가지 일반론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의사들 역시 경험칙에 주로 근거한 몇가지 진단과 처방전.


뭐, 의사도 환자가 아픈 데가 어딘지 알아야 진료를 할 수 있다는 걸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대단한 질병이

아니라 소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환자의 말에만 의존하는 건 아닌지, 장님 코끼리 더듬듯 그저 몇몇

간단한 것들로만 처방해버리는 건 아닌지 싶어서다. 좀더 적극적으로 아픈 부위를 탐색하고 증상을 발견해내는

자세가 필요한 건 아닐까. 넘 방만해 보여서다.



덧댐. 그래서, 그나저나, 내일 당장 큰 행사가 또(!) 있음에도 요새 날마다 한시간씩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이제 "그녀를 보는 순간 등줄기에 전기가 흐르는 듯 했다" 따위 묘사를 보면 생생히 그 감각을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전기치료도 받고 있고, 초음파며 핫팩치료도 받고 있는데 왜 오히려 조금씩 더 나빠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드는 건지 원. 행사 마치고 나면 정밀진단을 받아볼 생각이다. 요새 바쁜 이유, 그 와중에 지난 10월에

다녀온 두바이 사진들만 올리는 이유. 아프지 맙시다.





모처럼 집까지 걸어서 퇴근했다.

찬 바람이 떠밀어 더욱 재게 놀리던 발걸음이었지만 좀 지나니 몸이 훈훈해져 똑딱똑딱 걸었다. 똑,딱,똑,딱.

문득 내 안의 '불안과 불만'이 되살아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술에 잔뜩 쩔었던 내장이 다시 작동할 때처럼

기이하지만 왠지 안심이 되는 느낌이랄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그런 건 모르는 듯 마냥 든든하고 안정적이며 긍정적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지만, 이미 그것도 옛날 얘기. 사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있지만 없는 척, 그렇게 애써 눈돌리는데

능숙해지는 것 뿐이었다. 지금의 나, 내 주위의 것들, 나로부터 뻗어나가거나 나를 얽어두고 있는 관계들에

대한 불안과 불만을 문득문득 잊어가곤 하지만, '잊은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차라리 눈 앞에 딱, 불만의 대상, 불안의 대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것 때문에. 라고 말할 수

있는 타겟이 있다면 좋겠다고. 이미 지난 것들은 간편하게 추려져서 명료한 이유를 붙일 수 있지만, 지금

지나는 것들, 앞으로 지날 것들에 대해서는 마냥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이미지 뿐, 뭔가 딱 떨어지는 '답'이

없어 보인다.


몇 개의 통발을 지났다. 한번 지나고 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인 순간들, 취직, 진학, 입학, 그리고

탄생까지 거스를 수 있을 그것들. 어쩌면 그것들은 간편한 핑계가 되어 주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핑계거리,

혹은 시험관문이 사라지고 나면, 뭔가 그 과정을 거쳐 성숙하기는 커녕 마냥 나태하고 진부해져버려 '불안과

불만' 자체를 그냥 없는 문제인 양 하면서 외면하고, 그렇게 지친 어른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수학을 왜 공부하냐고. 수학에서 배운 것들을 바로 써먹을 리야 없겠지만, 그걸 통해 사고의 논리력과 응용력을

배울 수 있으리라 믿는 거라고, 와타나베보다 먼저 생각했었다. 어쩌면 '불안과 불만'은 항상 그 시점까지

살아오며 배운 것들을 총동원해 해결하고 해소해야 하는 커다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응용력을 키우기 위한

연습문제들이 동나버린지도 오래, 응용력 따위 키우기도 전인데 하루하루 문제의 압박은 커져간다.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불만과 불안의 골이 깊으면 만족과 안온함의 산도 깊을 거라고. 정면으로 이 녀석들과

마주하지 않으면 하루하루 마비된 채 살아가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좀처럼 

듬직하고 안정감 있는 어른 따위 못해먹겠다. 혹여 그런 모습이 보일 때라 해도 그것은 연기, 내면에선 여전히

질풍노도가 치고 있는 데다가 나 역시 집중해서 그걸 바라보는 중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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