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반띠아이 쓰레이라 해도 역시 크메르 사원 양식을 벗어나진 않는다. 내부는 의외로 담백하고 밋밋한

그대로 인 거다.

조금씩 기울어져 있는 외벽들, 물론 중앙성소가 있는 중심부로 갈수록 화려함은 더해가고 보존상태도 훨씬

훌륭해지지만, 이 곳 역시 천년의 시간을 빗겨나가진 못한 거다.



이빨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벽면, 그리고 황토를 개서 만든 벽돌을 딱딱하게 말려서 반들반들하게 만들었을

벽돌은 조금조금씩 비바람에 갉아먹혀서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단단한 부분만 남았다.

링가의 늠름한 자태.

그러고 보니 이런 장식들도 우선 라테라이트 벽돌을 쌓아올린 후에 저렇게 입체감 넘치도록 조각을 해버린 거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복명'의 자세로 나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원숭이들. 얘들은 근데 최근에 복원한 건지

전부 색깔이 다르다. 주변의 때묻고 빈티지스러운 느낌과는 전혀 이질적이다.

도마뱀도 더러 지나가던 곳, 어찌나 빠르고 귀엽던지. 문득 초등학교 때 괌에 이민 사전조사차 갔다가 맥도널드

앞 유리창에 떼로 몰려있던 도마뱀들을 콜라 빨대 속으로 몰아놓고 장난치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중앙사원의 네 대문 중 세 개는 역시 가짜문이다. 동쪽으로 난 문만 진짜. 가짜문이라고는 해도 외관상으로는

진짜 문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같이 장식을 해 놓았다.

얼핏 보면 원숭이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한담을 나누는 거 같기도 하고. 멀찍이 등돌리고 앉아있는 녀석을

나머지 네 녀석이 뒤에서 뒷담화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신 뒤의 남신, 여신상에 비해 참 담백하다. 그냥 뭐, 아무 장식이 없이 지팡이 같은 거만 하나 들었다.

저런 식물들, 돌 틈새에 들어가서 뿌리라도 내리면 조각들 떨어져나가는 거 금방일 텐데. 다른 사원들에선

시간을 거슬러 아등바등 외관을 유지해보겠다고 애쓰는 게 안쓰럽고 조금은 치사(?)해 보였지만, 여긴 달랐다.

좀더 잘 지켜졌으면 좋겠고, 좀더 잘 보존되어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참 간사하고 기준도 없다, 그러고 보면.





링가와 한쌍을 이루는 '요니'의 바닥. 어디론가 연결되어 샘물이 솟아오를 거 같기도 하고.

또다른 요니, 여기는 연꽃무늬 벽돌이 네모반듯한 요니를 막고 있었다.




또다시 화장실 앞의 넓게 펼쳐진 연꽃밭에서. 아직 봉오리가 터지지 않은 탐스러운 연꽃송이는 정말 크메르

사원의 정형적인 형태와 닮아 있었다. 그 터지기 직전의 봉긋한 옆구리도 그렇고, 봉오리 위쪽의 삐쭉거리는

꽃잎매들도 그렇고. 연잎마저 탐스럽게 늘어졌던 반띠아이 쓰레이.

그 앞에는 상점들의 정비작업이 진행중이었다. 제대로 외관을 갖춘 높은 지붕의 건물들에 입주한 각종 상점들.

지붕을 덮은 갈색 짚이엉이 야무지다.

크메르 전통 공예가인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나무를 깍아만든 '크메르의 미소'에 색깔을 입히는 모습이

굉장히 몰입해 있었다. 가격을 슬쩍 물어보니 왠지 씨엠립 시내의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비싸다 싶어서 그냥

돌아나왔다.




반띠아이 쓰레이는 앙코르 유적지에서 약 38km, 한 시간정도 툭툭을 타고 가야 하는 길 위에서 소 달구지도

만나고, 자전거 레이스를 하겠다고 덤비는 꼬맹이들도 만나고.

밝은 감색 승복을 나부끼는 스님들과 허술한 기념품 가게 옆도 씽 지나쳐버렸다. 역시 여행은 속도가 느릴수록

재미있는데 말이다. 할애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으니 자꾸 압축적으로 보려는 마음이

동하게 되는 거겠지만. 그래서 사실 가끔 여행 많이 다니는 자칭 '고수'들이 그렇듯 패키지로 나가는 '관광객'을
 
낮추어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빠알간 꽃의 무게를 못 이기고 축 처진 것처럼 보이는 줄기들.

반띠아이 쓰레이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눈에 번쩍 띄었던 꼿꼿한 나무 한 그루. 뭔가 왼쪽의 무성한 이파리의

가지와 앙상한 오른쪽의 가지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드디어 반띠아이 쓰레이다. 근 한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달려 여기까지 꼭 와야 했을까, 살짝 반신반의하는 맘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여긴 입장권 판매소부터 다르다. 깔끔히 정비된 간판에 사원 주변을 둘러싼 듯한 연꽃밭.

입구서부터, 뭔가 조각이 다르다. 선명하고 섬세하고, 빈틈없이 화려하다.

'링가'들이 두줄로 정렬한 채 순례자를 중앙사원으로 인도하는 통로. 바닥의 포석은 더러 유실되고 이리저리

비틀어져 버렸지만 링가의 불끈한 형태는 그대로다. 상상 그대로인 것이, 저 링가란 파괴의 신 시바를 추상화한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 시바신이 사람처럼 상상되기 이전 그의 존재를 나타낸 조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건

고대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남성의 성기 모양을 따서 상상되었다고 하는데 벌써 모양새가 딱 그렇다.

사원 중간중간 부서진 조각들에도 꼼꼼하게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건, 이 사원이 한번 철저하게 스캐닝되어

관리되고 복원되고 있다는 의미와 같지 않을까. 이 조각이 있어야 할 곳, 소용되는 곳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단

것일 테니 말이다.

얼마나 깊고 정교하게 조각을 했는데 살짝이라도 손을 대면 으스러져 떨어져나갈 것만 같다. 무슨 부드러운

붉은 색 목재를 조각한 것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건 모두 붉은 사암, 돌이다.

링가가 세워져 있던 장소, 성소가 흐르는 곳이라 하는 곳을 '요니'라 한다. 옆을 지나가던 한국인 가이드의

설명을 훔쳐들은 바, 이것 역시 여성의 성기를 본따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래서 링가와 요니가 만나는 이

곳을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었다고. 미루어 추측해 보자면 아마 성기 그 자체가 창조나 풍요, 생산력을 상징할

수 있었겠구나 싶다.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굉장하다. 멀리서 볼 때부터 충분히 그 돌출감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깊고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엇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이건 무슨 부드럽고 다루기 쉬운 코르크 재질로 만든 장식 같기도 하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던 당대의 장인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았을까,

캄보디아의 전통 사회에서도 '사농공상' 같은 유교적 위계가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사원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온통 조각으로 가득해서 밑에서부터 훑어올라가는 시선이 위에까지 가 닿으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을만큼 강렬한 매력을 가진 반띠아이 쓰레이.

그러고 보면 '반띠아이 쌈레', '반띠아이 쓰레이' 등등 '반띠아이'로 시작하는 사원들이 적지 않다. 반띠아이란

크메르어로 '방으로 둘러싸인 사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리고 '쓰레이'는 (발음을 잘 해야겠지만)

'여성'을 의미한다고 하니, 반띠아이 쓰레이는 사원의 여성적인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걸맞는 이름을 가진 셈.

앙드레 지드가 소싯적에 여기서 '동방의 모나리자'라 불렸다는 이 여신상을 도굴하려다가 잡혀서 6개월 실형을

살았다고 한다. 그가 여길 도굴하려던 게 1924년,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아름다운 사원이 발견된 게 고작 그

십년 전, 1914년이라는 사실이다. 얼마나 잊혀져 있었던 걸까.

하아...할 말을 잃게 만드는 저 조각들. 천년 전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엣지있게' 생생하다. 슬쩍

손을 뻗쳐 모서리를 만져보니 여전히 빳빳한 게, 막 조각해 내었을 때의 뚜렷한 각도가 그대로인 게다.

약간 사원 옆으로 튕겨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아기자기한 높이에 그다지 크지 않은 스케일의 사원임엔

틀림없지만, 붉은 빛을 가득 품은 정말 아름다운 사원이다. 해가 뜰 때나 질 때 보면 햇살에 붉은 빛이 반사되어

더욱 이쁘다고 하는데, 빈약한 상상으로나마 그 풍경이 대충 감이 간다. 아니, 그때의 감동이 어느만큼일지

대충 감이 간다는 게 맞겠다.

육체적 피로나 따꼼한 발바닥 따위는 잊고 아무리 감격한 채 사원을 헤집고 다녀보려 해도 한가지, 뜨거운 불볕

더위는 어쩔 수 없다. 잠시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도 사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반띠아이 쓰레이에도 외부를

빙 둘러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 자취가 거의 남지 않을 만큼 사라져버렸지만, 어쨌건 흔히 '유럽의 성'에서

연상하는 해자는 캄보디아에서 연원했다는 것.

3개의 탑을 앞세운 중앙성소는 원숭이 상들이 빙 둘러 수호하고 있고, 외벽에는 빼곡하게 여신상이나 코끼리상

혹은 나가(뱀)상, 덩굴무늬 등이 조각되어 있었다. 굉장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기까지한 느낌이었는데, 아쉽게도

사진상으로는 색감이 좀 날아가버렸다.

근데 대체 지드가 훔치려 했던 '동양의 모나리자'라는 여신상은 어떤 걸까. 하나씩 꼼꼼이 살피며 대체 뭘까,

했는데 약간씩 표정과 몸짓의 뉘앙스가 다르다. 뭐였을까. 지드가 반해 버려서 도굴까지 꾀했던 그 여신상은.

사실 여신상은 중앙성소의 벽면마다 하나씩 안배되어 있을 정도로 많은 수가 조각되어 있는 데다가, 사이즈도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아 맨눈으로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극히 드물게도 이곳은 사원 보호를 위해

일정 거리를 확보한 채 출입제한선을 설정해 두고 있는 거다.)

어느 문화재나 그렇지만, 그림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와 이야기를 알고 보면 더욱 재밌다. 그렇다고 여기에 직접

가이드북에서 읽은 배경 이야기들을 그대로 옮기는 건 의미없는 짓 같고, 그저 비주얼과 개인적인 이야기만

털어놓아도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동하지 않을까 기대해 볼 뿐. 사실은 여행 가기 전 열심히 관련 책도 읽고

힌두교 신화와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입에서 술술 나올 만큼 익숙하게 공부를 했었는데, 어느새 다

까먹어 버렸다.;

또다시 중앙성소 주변에서 발견한 '요니'. '반띠아이 쓰레이'는 시바신에게 바쳐진 힌두교 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바신을 형상화한 초기 형태랄 수 있는 남성 성기 모양의 '링가', 그리고 그것과 한짝인 '요니'가

곳곳에서 모셔지고 있는 거라고.

여기에 조금 남아있는 해자의 흔적. 원래는 해자 바깥 쪽으로 외벽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하는데 거의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해자너머로 보이는 반띠아이 쓰레이의 중앙사원과 그곳을 향한 통로들이 장난감같이 귀엽기도

하고, 테마파크처럼 아기자기하기도 하고.

너무 거리를 두었는지 사원의 디테일한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초록빛 정글과 대비되는 붉은 사암

재질의 벽돌들이 또다른 미감을 자극한다.

가루다(조류의 왕)도 보이고, 비슈누(코끼리)도 보이고, 말탄 시바도 보이고, 머리만 남고 자신의 몸을 모두

뜯어먹었다는 악마 칼라도 보이고. 아니 저토록 정교한 덩굴장식은 대체 어떻게 천년을 버티냐고.

연꽃밭 한 가운데 잘 꾸며진 화장실이 있다. 아마 캄보디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연꽃들. 여행객들의 영양분을 먹고 살아 더욱 아름다워졌으리라.

화장실에서 발견한 어이없는 그림 하나. 휴지걸이 옆에 붙은 그림이 뭔가 보고 실소(失笑)해 버렸다. 샤워하지

말랜다. 워낙 더운 나라, 더구나 반띠아이 쓰레이까지 왔을 여행객들이면 얼마나 꼬질꼬질 힘이 들었을까.

이런 어이없는 그림이지만, 오히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생기길래 오죽하면 그러겠어 싶기도 하다.

캄보디아에서 봤던 개 중에 가장 활기차 보이던 개. (다른 개들과는 달리) 그래도 불볕더위가 내리쪼이는

시간대에 그늘에 숨어 퍼지지 않고 네 발로 당당히 버티고 서서는 화장실 다녀오는 사람들 냄새를 맡던 녀석은

꽤나 똘똘해 보였다.



반띠아이 쌈레의 건물은 좀 묘한 느낌을 준다. 붉게 산화한 라테라이트석의 색깔이 기이한 느낌을 뿜어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여태 둘러보았던 앙코르 유적군의 다른 유적들과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 확연하다.

뭘까, 뭐가 다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보통 사원 외벽을 장식하기 마련인 무수한 압사라와 여신들,

그리고 정형화된 형태의 조각들이 하나도 없이 맨벽인 거다. 아마 벽돌이 저렇게 풍화되기 전에는 맨들맨들한

벽이 조각가의 손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서 있었던 게다. 그리고 천 년이 지난 셈.

드문드문 부조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건 위로부터 흘러내린 다크서클같은

검은 얼룩, 그리고 때가 낀 건지 이끼가 낀 건지 알 수 없는 세월의 자취.

그래도 연씨 무늬를 차용해서 만들어진 창은 훼손되지 않고 그 모서리마다 잘 보존되어 있었다.

창살 사이로 환하게 스며들어오는 햇살. 사원 내부의 매끈한 벽면은 뭔가 외부와는 다른 마감재를 써서

그런 걸까, 천년 세월에도 여전히 시멘트를 바른 양 매끈하기만 한 표면.

그리고 그 안에는 여전히 '신'이 모셔져 있었다. '신'이 모셔져 있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은 쉼없이

향이 피워올려지고 싱싱한 꽃이 바쳐지는 기적을 만들어내었다.

사원 위에 삐쭉삐쭉 올라있는 공룡 등뼈같은 뿔들은 그냥, 적당히 다듬어낸 길쭉한 돌들을 세워놓은 거였다.

여기 상당한 폭우가 무시로 쏟아져내리는 열대기후의 땅일 텐데, 저렇게 작은 돌들을 일렬로 세워놓은 것들이

단단히 붙어있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다.

정감가는 형태, 연꽃이 활짝 만개한 형태의 중앙사원. 보통 정사각형 형태로 꾸며진 크메르사원은 사방에서

중앙성소로 접근할 수 있지만, 중앙성소에 있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 중 동쪽으로 난 문을 제외한 세 개의

문은 문의 형태만 조각된 가짜문이다. 역시, 해뜨는 동쪽이 대세.




사원 내부는 너무 어두컴컴하다. 바닥이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창문 역시 외부의 빛을 잘 들여보내주지 않는

구조여서, 자칫 발을 헛딛거나 미끄러지기 쉽다. 그나마 이렇게 창문이 조금 깨져 나가 빛이 들어오는 곳은

나은 편이고.

내부에서 장식을 발견하긴 쉽지 않지만 중앙성소쪽으로 가는 가짜문에는 나름의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가 문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겠지만, 어찌 생각하면 괜한 크메르 노동력의 낭비다.

캄보디아의, 크메르의 푸른 하늘. 그리고 정글의 침투와 시간의 부식을 막고 천년을 버틴 그들의 석조 문명.

반띠아이 쌈레는 꽤나 큰 사원이고, 앙코르왓의 3층 성소탑을 재현했다고 할 정도로 많이 닮아 있다고 한다.

일부러 반띠아이 쓰레이와 앙코르왓은 마지막 일정으로 빼놓은 게, 거길 보고 나면 어쩌면 다른 곳들이 굉장히

시시해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도 하고 사전 조사했을 때에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기 때문.

사원 내부에는 종종 이렇게 천장이 무너져 내린 채 방치된 방들이 있다.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내린 듯, 무너져

내린 모양 그대로 꽤나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사원의 방과 방을 잇고 있는 문턱은 어찌나 높은지 좀 돌아보다가 발이 무거워지면 툭툭 걸리기 일쑤다.

커다란 입을 귀밑까지 찢고는 무슨 벌레알같은 이빨을 우르르 과시하고 있는 괴수. 이거 호랑이인가?

창틀 밖을 내다본다는 것, 창틀과 함께 바깥 풍경을 기록한다는 건, 어쩌면 관음의 욕구를 반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안에서 밖을 보는 것, 창틀에 기대어 '액자'처럼 외부를 훔치는 것.
 
구석구석 새싹들을 품고 있는 돌덩이 사원. 길게만 자라 축축 처진 잎사귀들은 대체 뭘 먹고 자라는 건지.

사진 모델을 자처한 꼬맹이들. 카메라를 보곤 슬쩍 자세를 잡아주다간 좀 찍어볼라 하면 수줍게 도망가버리는

순진하고 귀여웠던 꼬맹이들이었다. 근데 밑의 꼬마는 다시 보니 킬빌의 그녀가 오버랩되는 듯.

어딘가 사원 구석에서 발견한 조각상의 잔해. 무슨 슬리퍼 두 짝이 남아있는 거 같아 재미있다. 무슨 조각이

이 슬리퍼를 신고선 자세잡고 서있었을까. 조각이 서있었을 자리에는 이제 무슨 연장통같은 나무상자가.

사원에서 빠져나가는 길, 이제 반띠아이 쓰레이로 간다.

뚝뚝이 기다리고 있는 사원 입구 쪽에 도착하니, 내가 그랬듯 수많은 아이들에 포위된 채 어쩔 바를 몰라

당황한 미소만 짓고 있는 여행객들이 있었다. 저 아이들의 애교 공세를 넘어서 반띠아이 쌈레 구경 잘 하시길.




반띠아이 끄데이, '방으로 둘러싸인 사원'이라는 의미라고 하지만 방이라기 보다는 '벽'으로 둘러쌓였다는

느낌이다. 벽도 사방이 온전히 둘러쳐진 그런 벽이 아니라, 네 면중 한 면쯤은 꼭 허물어져 있는 듯할 정도로

허술해져 버린, 그런 사원이다.

그런 사원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띄었던 건 마치 방금 조각해낸 것처럼 선명한 윤곽과 신선한 색감이 살아있는

여신상들. 이 여신상 말고도 다섯여섯 걸음마다 사원 외벽에 여신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약간씩 다른 표정

다른 몸짓을 한 채 세워져 있었다.

피사의 사탑이 유명해진 이유는 건물이 살짝 기울어서. 이 정도 어긋난 채 기울어진 출입문은 어떤지.

그런 출입구를 지나면서, 또 다른 통로를 지나면서도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위험' 표지판들.

표지판이 아니어도 이미 눈으로 보기에도 충분히 스릴있어 보이는 데다가, 굳이 '노 터치' 같은 사인을

붙이지 않아도 손을 대면 금세라도 폭삭 무너지지 않을까 싶어 아주아주 조심스런 행동을 유발하는 사원.

멋진 부조가 조각되어 있는 기둥. 압사라댄스를 추고 있는 여신들이 좀더 활짝 웃었다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님 그냥 지금처럼 살짝 웃음을 물고 있는 표정이 더할나위없이 좋아보이기도 하고.

조금씩 기둥이 녹아내리는 걸까, 아마도 철분 성분이나 비슷한 게 기둥 위에서부터 녹아내리는지 까만 얼룩이

기둥을 타고 다크서클처럼 내려왔다. 저만큼 얼룩이 내려오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지. 백년에 일센치?

안쓰럽도록 꽁꽁 동여매어진 사원의 연꽃모양 탑.

문틀을 액자삼아 넘겨다본 저 너머의 풍경들.

그러고 보면 사원의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건 기와가 아니라 기와무늬 돌들이다. 커다란 돌을 올리고는 그렇게

기와무늬를 조각해 넣었나보다. 그 기와무늬 하나하나에 공들여 내려앉은 초록빛 이끼가 화려하다.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기우뚱 무너져내리기 직전의 벽면까지.

여기저기서 펼쳐져 있는 거미줄들. 저렇게 사람만한 크기의 거미줄이 펼쳐지고 유지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사람의 손을 여전히 많이 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앙코르왓'으로 대변되는 앙코르

유적지가 세계적인 명소라고는 해도, 그 세세한 디테일까지 고루 살펴보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테니.

빛과 어둠의 대비가 강렬한 사원 내부의 공간들, 예전에 이 건물들을 막 지어올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거

같다. 아마도 그래서 건물 외부에 정성을 쏟아 조각을 하고 장식을 한 것과는 달리 내부는 거의 아무런

장식이나 무늬를 더하지 않았을 거다.

교정이 필요할 만큼 심하게 들쑥날쑥한 치열처럼 이리저리 어긋나 있는 기둥들. 술취한 녀석들이 우르르

어깨동무하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그림 같기도 하다.

사원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왠지 사원과 스펑나무가 이렇게 사이좋게 함께 있는 모습은 처음 본 거 같았다.

대체로 사원을 스펑나무가 잡아먹고 있는 듯한 무시무시하고 치열한 광경이었는데, 아마 이들도 수백년내에

그렇게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꽤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중인 듯한 사원과 나무.

사원에서 돌아나오는 길, 한쪽에 좀 본격적으로 마련된 기념품 샵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캄보디아 전통

의상을 입은 허수아비 인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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