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놀러갈 때마다 슬쩍슬쩍 걷던 길이, 멀리 청사포항에서 달맞이고개, 달맞이고개에서 해운대를 지나 동백섬,

 

동백섬을 지나 광안리해수욕장까지 걷게 되다 보니 얼추 바닷가를 따라 내려오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된거

 

계속 이어서 가보자고 시작한 길이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이기대 공원을 지나 오륙도까지.

 

처음에 광안리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지날 때만 해도 그 코스가 의외로 길고 힘들 줄은

 

몰랐던지라 카메라며 노트북이 든 가방을 그대로 메고 걸었던 거다.

 

 

이렇게 바닷바람에 온통 시퍼렇게 녹이 슬고 만 송수구에도 굳이 무릎을 꿇어가며 사진을 찍을 만큼 여유롭던 출발.

 

그리고 이렇게 낚시대 네다섯개를 일정하게 벌여놓고 고기를 기다리는 아저씨 옆에서 잠시 구경할 만큼 느릿느릿.

 

 

길에 표지판도 있고 걸어온 거리, 앞으로 걸어가야 할 거리가 적혀 있긴 했다지만 꼭 끝까지 갈 생각도 아니었고,

 

그냥 되는 대로 설렁설렁 걸으며 사진이나 찍을 생각이었으니까.

 

 

 재미있는 조형미를 가진 등대를 구경하기도 하고.

 

 부산의 세찬 바닷바람에 떨어질세라 케이블타이로 꽁꽁 묶인 화분들의 열차놀이.

 

 어라, 그러다 보니까 이기대해안산책로의 입구쯤이다. 그리고 비로소 한눈에 잡히는 광안대교와 해운대 신시가지.

 

 제법 시가지와 떨어져 흙길을 밟는 느낌이 좋았다. 마치 울릉도나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느낌같기도 하고.

 

 

 이기대 해안산책로 초입의 웨딩홀이던가, 한적한 까페가 있는 곳에서 잠시 앉아 딴짓도 하고 책도 보고.

 

역시 이때만 해도 이기대 해안산책로가 한번 걷기 시작하면 중간에 빠져나오기가 힘든 통발같은 코스란 걸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계속 걸어갈수록 광안대교와 해운대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더 멋진 각도와 뷰포인트들이 나타났다.

 

 

 

예컨대 이런 장면. 우와...감탄감탄.

 

 

그리고 해안산책로를 따라 계속 이어지는 해안선의 거칠고 투박한 분위기도 맘에 들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지긴 했는지 야외촬영중인 예비부부들도 보이고, 곳곳에 커플들이 해바라기중이다.

 

 

나중에는 해가 지고 나서도 한번 와봐야겠다고 생각한 게, 영화 '해운대'에 나왔던 야경을 보던 장소가 여기라나.

 

아...이즈음부터 풍경이 살짝 등산과도 같다 싶었는데, 돌아나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왠지 한쪽에서 약숫물이 이렇게 흐르는 풍경도 그렇고.

 

 

 

다소 지루하다 싶도록 녹색의 짙은 숲길을 헤치고 나가는 해안산책로, 사실 제법 오르내리막도 있고 풍경도

 

심심하진 않았지만 전날의 숙취와 며칠전의 지리산 둘레길 트레킹 덕분인지 조금 녹색에 질려있던 참인 듯.

 

그래도 결국 이 구간의 종점이라는 오륙도까지 도착하니 좋다. 어쩌면 숲길을 뚫고 사람 사는 동네로 나왔다는 게

 

좋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늦게 출발하고 여유부리다보니 사실 바다아래로 넘어가려는 해가 조마조마했었다.

 

오륙도 전망대에 꽂힌 화살표들. 도쿄와 엘에이와 독도, 홍콩, 그리고 뜬금없는 질문이 하나. 당신과 나의 거리는?

 

언젠가 해운대의 바다를 보면서, 그리고 광안해수욕장의 바다를 보면서 여기는 동해인지 남해인지

 

궁금해했던 때가 있었다. 어차피 인간들이 붙인 자의적인 구분이긴 하지만, 비로소 여기에서 해답을 발견.

 

오륙도는 동해와 남해를 구분하는 분기점, 그러니까 오륙도 동쪽의 해운대니 광안리 앞은 동해바다 되시겠다.

 

오륙도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볼 수 있는 스카이워크도 있더라는. 오후6시인가가 마지막 시간대여서

 

들어가 밟아보진 못하고 이렇게 멀리서 어찌 생겼는지나 한장.

 

보는 각도, 그리고 밀물썰물에 따라 다섯개로도 보였다가 여섯개로도 보였다가 해서 이름이 오륙도.

 

이제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라는 노래가사에 떠올릴 수 있는 풍경이 생겼다.

 

알고보니 이곳 오륙도에서부터 해운대 끝의 미포까지가 동해를 따라 걷는 해파랑길 1코스란다.

 

지자체마다 해파랑길이니 갈맷길이니 강릉바우길이니 강화 나들길이니, 온갖 이름으로 트레킹 코스를 만들어놨지만

 

이런 식의 난립은 조금 곤란한 거 같기도.

 

그러니까 저 굽이굽이의 이기대 해안산책로를 지나 광안대교를 따라 광안해수욕장을 걷고 동백섬을 휘감아 한바퀴

 

돌아본 후에 해운대 해수욕장을 따라 달맞이고개까지, 대략 14키로정도의 해파랑 1코스.

 

삽시간에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가방은 사정없이 어깨를 조여와서 택시를 잡아탈까 하다가 눈앞에 버스정류장이

 

나타났다. 종점인지 버스 몇대가 출발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온통 바닷바람에 녹슨 양철표지판이 삐걱대던 곳.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오륙도의 모습. 제법 듬성듬성 초록빛 머리칼이 풍성한게 아직 미중년의 모습이다.

 

 

 

강릉에 있는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 원래는 요새 강릉 지자체에서 꾸며놨다는 바우길을 따라 걸으려

했었다지만, 어쩌다보니 바우길 코스에서 벗어나 발길 닿는대로 걷는 일정이 되어 버렸다. 그건 아마도

뭔가 이렇게 흥미로워보이는 게 눈에 띄면 쪼르르 달라붙어 고개를 묻고 있던 일행들 덕분이기도 할 거고,

빗발이 변덕스럽게 쏟아붓던 지랄같은 날씨 탓이기도. 여하간, 코스에 대한 강박관념 따위는 버리는 게 좋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문장가였던 허난설헌이 남매

사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헷갈렸던 건 그 중 누가 손위였냐 하는 문제. 허균이 오빠?

아니면 허난설헌이 누나? 왠지 허균이 늘 앞서 이야기되기도 했던 데다가 여기 이름도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인지라 허균이 손위 오빠일 거라는 추측에 무게가 실렸다. 진실은 기념공원 안에서 확인하기로.

공원 안에는 허난설헌 생가터가 있었다. 허난설헌이 태어났고 허균도 아마 태어난 곳 아닐까, 이미 한무리

방문객들에게 열심히 설명해주고 계시던 봉사자분의 말씀을 귀동냥해보니, 여기는 토담과 주변솔밭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것과 같은 '연화부수(蓮花浮水)'형의 명당터라고 한다. 지금도 이렇게

소나무숲 한가운데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과거엔 더욱 그럴듯한 풍광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을 듯.


처마 끝에 서려 있던 이슬로 빚어진 그물망 하나. 조선시대 이런 변방에서 태어났던 양반가 자제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저렇게 그물망 하나 풀어놓고 세월을 낚는, 권력의 중심으로 굳이 애써서

나서려 하지 않고 안분지족의 삶을 즐기는 '폐포파립'의 선비였으려나. 아니면 언제고 중앙정치의

무대로 되돌아갈 생각으로 이를 갈며 쓸개를 핥던 야심가들이었을까.



아무래도 신분제에 예리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던 허균이나, 사람 대접도 못 받던 여성이었던 허난설헌

모두 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나라를 뒤엎겠다는 거대한 혁명의 꿈까지 꾸진 않았다고 하면, 에라 그냥

산좋고 물좋은 강릉에서 시나 읊고 글이나 쓰고, 음풍농월로 한세월 보내자는 생각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그들 남매는 '양반-상놈', '남존여비'의 당대 관념에 얼마나 시니컬했을까. 뭐 그렇지만 그들의

문학가로서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뻗쳤다는 게 함정. 힘들게 피보며 나라를 엎느니 그게 남는 장사일지도.

기념공원 앞에 있던 홍길동 기념관. 조그마한 오두막이 2층으로 지어져 있었다. 올라가면 뭐가 있으려나

싶어서 걍 외관만 구경하고 말았는데, 기념관 안에는 온갖 버전의 홍길동전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

허균은 본인의 숨겨둔 욕망, 못 가본 길에 대한 갈증을 홍길동으로 하여금 대리충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초가지붕이 단정하게 얹혀있는 황토빛 화장실. 궁서체로 써진 '화장실'이란 글자가 나름 운치있다.

사용후기 : 사람이 그렇게 많이 방문하는 곳이 아니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깔끔하게 관리되더라는.

허난설헌 생가와 기념관 옆에 서있던 오문장비. 이 곳에 살던 허씨 5문장을 기념한 비석들로 아버지 허엽,

장남 허성, 허봉, 허난설헌, 그리고 허균 이렇게 다섯 명을 허씨 5문장이라고 한단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글재주가 돋보였다며 후대에도 칭송이 자자했던 사람은 바로 허난설헌, 알고 보니

허균이 막내아들이었고 그 손위 누이가 허난설헌. 무려 6살이나 많았던 난설헌의 본명은 초희라고 한다.

허균의 생몰년도는 1569-1618, 허난설헌의 생몰년도는 1563-1589.


그녀의 글재주는 8살때 신선세계의 궁궐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받았다고 상상하고 썼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에서부터 조선땅과 중국땅의 인증을 받고 일본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그녀의 시는

현재까지 약 210여수가 전한다고 하는데, 그나마 그녀의 유언으로 전부 태우고 남은 게 그만큼이란다.


허초희. 이름이 참 이쁘다. 이름을 알고 나면 얼굴이 궁금해지는 건 인지상정. 그녀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빚어낸 그녀의 황동빛 조상이 기념공원 한가운데 단아하게 앉아있었다. 27살에 죽었다니 정말 이른 나이에

돌아갔구나, 역시 천재들은 일찍 요절하는 법인가 싶어 살짝 씁쓸해지던 차에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을

사실들이 몇개 나열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풍류를 즐기던 남편, 빡빡한 시어머니, 무엇보다 자녀들의

죽음과 태중의 아이까지 상실한 아픔. 생각보다 참, 힘들고 신산스러운 삶이었겠다.


그녀가 두 자녀를 잃고서 썼다는 시를 보면 허초희 그녀의 심정이 얼마나 아팠을지가 절절하다.

제목은 '아들딸 여의고서'.

 

"지난 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도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바치네

소지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 놓으니

아무렴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끓는 피눈물에 목에 메인다."
 


기념관을 한 바퀴 돌아보며 허난설헌과 허균의 삶과 사상, 문학세계를 돌이켜보고 나니 왠지 기분이

스산해졌다. 물론 그들이 당대의 문명을 널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떨치고 죽어선 지금까지도 이렇게

기념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장 그들의 삶이 어땠을지 계속 맘에 걸린다. 엄마로서 아이들을 앞세우고

아내로서 남편과 시댁의 박대를 받고, 그렇다고 해서 조선 문단의 일원으로 제대로 평가되지도 못했을거고.

그게 허초희의 질곡이었다면 허균 역시, 본인이 꿈꾸던 세상과 사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세상에 대한

욕구불만과 갑갑증은 오죽했을까.

기념공원을 빠져나가 경포호로 이어지는 길을 찾았다. 삐쭉삐쭉 가늘고 길다란 소나무들이 이쑤시개처럼

땅바닥에 꽂혀있는 솔밭 사이 오솔길을 걸었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의 수묵화를 보면 소나무를 저렇게 앙상하게, 그저 쭉쭉 기둥만 그려놓고 위에

한웅큼 다복솔을 뿌려놓곤 해서 상상해서 그린 거 아닐까 했는데, 아니었다. 수묵화 속의 소나무들이

그대로 실사로 표현된 공간. 


경포호로 가는 길은 홍길동의 분신들이 촘촘히도 지키고 섰다. 다리 양쪽에 선 울타리에도, 교각 위에도,

뭔가 솔방울 수류탄을 던지는 포즈의 홍길동이 거북이 등 위에 단단하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다시 바우길 위. 올레길이 파란색 조랑말표식이나 화살표로 코스를 안내해 주었다면

강릉 바우길은 저렇게 파랑색 솟대 그림으로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경포호 옆길로 바싹 다가서자 저너머 경포대가 보인다. 경포호가 이렇게 컸구나, 싶은 실감을 하고 있던

차라서 정반대에 있는 경포대까지 가보는 건 일단 가볍게 포기.

경포호를 따라 걷다보니 홍길동전의 스토리를 따라 조성된 조각들이 보인다. 홍길동의 어린 시절이라는

이 세 아이들의 조각 중에 누가 홍길동일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가운데의 제일 개구진 녀석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때 유별나게 개구장이였던 녀석이라야 나중에 크게 된다는 말...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나저나 저런 아크로바틱한 자세라니 보통 인간은 가능하지도 않을 자세인데, 역시 홍길동의 타고난

신이함을 드러내는 조각이라고 마음대로 정리.

그리고 돌을 네 조각으로 두부처럼 썰어버리는 어마어마한 칼솜씨, 홍길동이 수련중인 장면이다.

그리고 탐관오리들의 행패..였던가. 아니면 탐관오리들을 징벌하는 활빈단..이었던가. 형틀에 묶인 채

맞고 있는 게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에 따라 홍길동전의 전개상 기승전결 중 '승'에 해당할지 '전'에

해당할지 바뀌겠지만, 여하간 맞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 무척이나 괴로워보인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게다가 저 펑퍼짐하게 까뒤집어진 채 맷자국이 도랑처럼 남은 엉덩이, 참 아파 보인다.

홍길동이 율도국을 세우기 전, 그 섬에 있던 요괴들을 처치해야 하는 퀘스트가 남았다. 아마 이 요괴들을

없애고 나서야 아리따운 여인을 얻어 혼인, 해피엔딩에 이르렀던 거 같은데. 요괴들이 짜리몽땅하고 왠지

익살맞게 생긴 게 그렘린같기도 하고, 골룸같기도 하고.

언제나 영웅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나름의 갈고 닦은 영웅포즈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홍길동이 갈고 닦은

포즈는 바로 이것, 주춤 서서는 한 손으로 칼을 쥐고 다른 손으로 거리를 잡는. 이 조각상은 특히 인상에

남았던 이유가, 홍길동의 눈이 새겨져 있지 않아서였다. 눈을 새겨넣으면 밤에 홍길동 조각이 살아나서

당장 이 나라의 탐관오리와 부패한 '조정'을 뒤집을 것이 겁났던 걸까.

이렇게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을 둘러보고 경포호를 따라 걷다간, 경포대해수욕장까지 가서 주변 횟집에서

회 한접시 먹는 것도 꽤나 그럴 듯한 코스였다. 허균은 익히 알고 있었다지만 그저 여류 문인의 한명으로만

알고 있었던 허난설헌, 허초희 그녀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거칠게나마 알게 된 것도 적잖은 소득이었고.





경포호 근처 '바우길'을 걷다가 발견한 보도블록 위의 잔혹한 그림, 무려 몸통이 잘려나갔다. 싹둑.


아마 어른 한사람과 뒤를 따르는 아이 한사람이 열심히 걷고 있는 그림이었던 거 같은데, 애초

인도의 보도블록 위에 저런 그림을 굳이 왜 그려놓았어야 했는지가 한가지 의문.


그리고 대체 우리나라는 보도블록을 왜 그리도 시도때도 없이 바꿔대는지가 두번째 의문, 멀쩡한

블록을 세금 소진하려고 바꾼다는 비난이 이어지니깐 요샌 아예 블록 자체를 불량으로 사는 거 같달까.


그리고 여하간 블록을 일부만 교체해서 저렇게 험한 결과물이 남았다면 왜 마저 그려넣지

않은 걸까, 세번째 질문. 담당자가 달랐으려나, 나머지도 마저 철거하려나, 뭘까.








모처럼 비가 그친 하루. 여전히 하늘은 마냥 찌푸린 채 여름같잖은 선선한 바람을 불어제끼고 있다지만.

길가에 고인 물웅덩이에 비친 풍경이 참 말갛다. 좌측으로 꺾어들어간 비보호 표지판이 선명해보이는.



@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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