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의 안압지는 조선시대로 따지자면 경회루랄까, 국가적인 행사나 연회가 베풀어지던

공간인 셈이니까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사실 조선 시대 이전의 건물이나 사적들이

거개가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유물과 문화재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들이란 점에서 때로는 조선시대의 무엇무엇과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 식별하는 게

조선시대 이전 문화재들의 기능과 위상을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인 듯.

입장권 뒷면에서 발견한 (여전히 한자가 난무하는 딱딱한 말투의) 설명은 왜 그리도

안 읽히는지, 조금은 더 독자 입장에서 읽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여하간 이 '안압지'는 12봉우리를 가진 3개의 인공섬을 꾸며놓은 신라의 대표적 인공정원.

그 연못 주변에서 여러 연회용 건물이 지어졌던 것도 확인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연못 안에서

이러저러한 유물들이 발굴된 것이 더 흥미로웠다. 이 낯선 주사위는 신라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놀았던 놀이기구의 하나로, 총 14면이나 된다고 한다. 육각형이 8면, 정사각형이

6면이나 되는 형태도 신기하지만 그 각 면에 씌여진 내용들이 더 신기하다.


칼 같은 걸로 새겨진 글씨에 따르면,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오늘날의 어휘로

바꾸자면 혼자 노래부르고 자작해서 원샷하기 정도일까), '술 석잔 한번에 마시기' (삼배주...;; ),

'여러 사람이 코때리기' (이건..다구리?;;;; ), '소리없이 춤추기' 등등 재미있는 벌칙들이 있는 셈.


당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이 연회 중에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문득 주사위를 꺼내어서는

차례로 주사위를 굴리며 벌칙을 수행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비어져나왔다. 벌칙이란 것도

원샷에 삼배주에 다구리, 노래시키고 춤시키고, 오늘날의 음주 문화가 새삼 지탄받을 일은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한국인 DNA에 이때부터 각인된 건가 싶기도 하고.


근데 저 벌칙은 뭘까. '더러운 것을 버리지 않기'. 똥이나 오줌을 참으라는 걸까, 그니까 화장실을

가지 말라는 거거나, 혹은 잔뜩 사발주를 들이키곤 토하지 못하게 하는 건지도. 뭐가 됐건 간에

참 신라 왕족들 평소 술자리가 무료했나보다.

그래, 우리 조상들이 (개인적으로는 그저 '10세기즈음 한반도 주민들은'이라고 좀 멀찍이

표현하고 싶지만) 마냥 음주가무에만 몰입했던 건 아닌 거다. 이 그럴듯한 외양의 가위는

그 생김새도 훌륭하지만, 가위날에 붙어있는 동그란 받침이 독특해서 눈여겨봤다. 뭔고

하니 촛불의 심지를 자를 때, 뜨거운 촛농이 묻어있는 그 심지가 아무데나 떨어지지 않도록

받치기 위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감탄했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단군 중의 한 명이라는 '치우천황'의 이름을 알았던 사람으로,

붉은악마들이 치우천황의 얼굴이 묘사되었다는 귀면와의 도안이 그려진 깃발을

흔들고 옷에도 그려넣고 하는 걸 보면서 조금 기분이 묘했다. 저들이 치우천황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자칫 굉장히 배타적인 민족사관과 더불어 한민족과 한국을

떠받드는 국가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싶기도 하고, 80년대 제대로

학자 대접도 못받던 재야사학자들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반향을 받나 싶기도 하고.

민족사관의 시각에서 다소 아이러니할 수 있는 점은, '치우천황'의 이미지가 이어진 것은

다름아닌 신라의 기왓장들을 통해서였다는 사실. 민족사학이나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은

으레 고조선과 고구려의 기상과 패기를 강조하며 대륙을 정벌하고 지배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외국 당나라를 끌어들여 조국 통일의 대업을 망치고 겨우 한반도 남단에 그치고 만

만고의 역적 신라라는 공리를 갖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전쟁의 신'이라는 치우천황의

이미지가 신라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다.


어쨌거나 그 무시무시하면서도 정겨운 표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와가 이 안압지 연못

바닥에서 많이 출토되었다고 했다. 오늘날의 미적 감각으로 보아도 천년이나 지난 디자인이라

홀대하기엔 너무 귀중한 것 같다. 부리부리한 눈이나, 수염을 길게 빼문, 으르렁대는 듯한 입,

그리고 양미간 사이에 잡힌 굵은 주름까지. 무서운 와중에 유머러스함이 솟아나오는 부분이

바로 그 양미간 사이의 주름인 듯 싶다.







(이데올로기전이다. 이데올로기전에서도, 근래의 과학전에서처럼 정밀한 외과수술과 같은 surgical strike,

국부공격이 필요하다.)


다물으다. (잃은 것을) 되찾는다는 뜻을 지녔다는 우리의 고어로 알려진 이 단어는, 80년대 초 민족주의와

민족사관의 열풍을 선도한 베스트셀러 '다물'로 처음 소개된 바 있다. 식민시기 일제의 잔인한 악행과 천여번의

침탈만 당했던 애끓는 약자의 비애를 미래 언젠가 통일한국의 기개와 대비시키며 식민사관의 사슬을 끊어내자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언젠가 '그 때'가 되면, 남북한의 통일은 물론 토문강 이남의 연해주, 만주를 되찾고 (여전히

일각에서 주장되듯) 산둥반도 부근의 동중국까지 '다물'하여, 토끼같은 형상의 한반도에 짓눌려있던 한민족의

기개가 되살아나 평균신장까지 서구인보다 더 크게 된다는 거다. 그게, 우리가 다물해야 할 세계최강 최고민족

최종 버전의 역사이자, 원래의 우리모습이라는 주장. 흔히 민족사관이 빠져버리고 마는, 결과적인 자기 부정 내지

자기 혐오의 모순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소설이다. 형이상학적인 또다른 목적론과 병든 인간.



아직 주몽이 이끄는 일단의 무리들이 내건 '다물多勿'의 의미는, 수세적인 상황인지라 그 외연이 적절히 통제된

상황에서 그나마 다소간의 설득력과 적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역-내지 당시의 전세계-패자인 한나라와 이에

기댄 부여에 대항해서, 상실한 삶의 기반(다소 서정적), 혹은 고토(다소 국가주의적), 혹은 민족의 터전

(다소 선동적)..이랄까, 뭐가 되었던 간에 그 땅뙈기를 되찾겠다는 데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뭐..물론 그 땅에

'백성이 주인되는 땅'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왜 하필 주몽이 왕이 되어야 하는지, '이 땅 위에서 가장

강대하고 융성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고토만 회복하면 되는지 아님 어디까지 쳐부셔야 가능해지는지, 왜

전쟁에서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건 '주몽의 착한 백성'과 '적들의 무장한 병사'들 뿐인지 등등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들투성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고대 왕국의 성립을 위해 제창된 '되찾음'의 이데올로기는 적어도 상실한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제시되고 있을 때, 그리고 상대편이 그에 대항하여 무언가 더욱 설득력있고 피끓는

명분을 제시하지 못할 때 강력한 호소력을 갖게 된다. 아무래도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의 외연을 좁히고 명확히

할수록 유리해지는 거다. 지금의 미국이 제시한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데올로기가 그 외연을 이슬람 문화

일반으로 넓혀버리고 말아 더욱 곤란해지고 만 것은 반대의 사례일까.



고구려의 역사는 태왕사신기로 이어지면서, 아니 거기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당장 어느정도 고구려의 기틀이 잡힌

후에는, '다물'이란 단어가 폭주하기 시작한다. 외부의 제약으로 눌려있던 그 폭력성과 저속성이 드러나는 것

뿐이지만. 물론, 당시 고구려가 실제로 '다물'을 의식적인 이데올로기로 차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고구려

초기에 건원칭제하며 '다물'을 연호로 썼다는 설도 있다만-모든 국가, 조금 줄이면 고대국가는 동일한 행태를

보인다. '다물' 등 나름의 관제 이데올로기를 동원한 정복 전쟁. 더이상 우아한 '역사강역'의 문제나 합리적

(국제법적?)인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전쟁을 위한, 그리고 전쟁을 수행할 백성을 동원하기 위한, 혹은

(아직 이데올로기가 백성에게까지 유효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납득하기 위한

핑계거리일 뿐이다.



독도의 영유권이 한일 중 어디에 있던 큰 상관이 없는 것보다 더, 주몽이 옛 조선의 영토를 다물하던, 대조영이

발해를 꿈꾸던, 그건 사실 사는데 별 상관 없는 일이다. 하잘것 없는 민족적 일체감을 5분정도나마 느껴보거나,

우리민족도 이만큼 해낼 수 있다는 이중으로 왜곡된 자기 비하에 빠지고 싶다거나..이런 건 비추. 그저 하나의

퓨전사극으로만 볼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암만해도 붉은악마가 재등장시킨 '치우천황기'나 민족주의를 빙자한

온갖 극우주의적인 주장들과 종교들이 낭자한게..일본이 뭐만 하면 헤드라인으로 '극우주의 부활' 이러는데

사실 한국이 더 문제다. 멀쩡하게 잘 사는 인간들을 갑자기 한이 가득한 못난이로 비하한 채, 과거 '깃발을

꼬나들고 대륙을 호령하던 영웅'을 처방하는 민족주의(내지 민족사관)는 이미 정부의 FTA 옹호 광고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미국하고 경제 자유화하자는 거지, 누가 깃발쥐고 말달리며 쳐들어가자했냐 말이다. 그런

메타포가 정부에서조차 흘러나오는 상황이라니..볼 때마다 참..가슴이 덜컥덜컥한다. 조금만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하면, 이 병든 인간들은 영웅을 부를 게다. 전쟁을 부를 거 같다. 아니, 이미 전쟁과도 같은 사고방식은

시작된지 오래다. 우리는 이미 전쟁에 동원된지도 모른 채로, 나와는 상관없는 전쟁중인지도 모르겠다. 대개

은폐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기가 순순히 죽으러 나가는 게 아니라, 상대를 죽이러 나가는 게 전쟁이다.



(민족주의는 식민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도된 이미지 그 자체일 뿐이다.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단지

'일본인이 없는 일본의 지배'를 고도화했을 뿐인지도. sub-altern학파의 이야기.)

일본 정부가 중학교 사회과 지도요령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을 넣겠다고 한다.

MB의 '실용노선' 외교가 결국 거덜나고 있다는 또 하나의 표징이다. 북-미 관계가 호전되는 상황에서 냉전적

대북강경정책은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었으며, 이제 쌀을 주니 직접대화를 하니 부랴부랴 수습에 나서보지만

사실상 남-북간 대화채널은 모두 끊어진 상태다.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내세웠지만 이 역시도 성마르고

아마추어적인 접근으로 인해 쇠고기 문제, FTA 문제..뭐 하나 제대로 해결하고 있지 못하며 MB 정권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신뢰도마저 땅에 떨어졌다. 중국은 '친미정권'인 MB정권을 잔뜩 경계하며 북한포섭하기에

발벗고 나섰고, 일본은 준것없이 '과거는 씻어버리자'는 선언을 받아들고는 독도를 내놓으란다. 더하자면,

자원외교랍시고 중동지역의 나라들을 순방하고 각종 경로를 통해 경제협력을 강화한다고는 하지만, 실무적으로

얼마나 그 나라들과 가까워지고 전략적으로 서로의 가치를 제고시키는지는 잘 모르겠다.



막말로 그렇다. 독도가 '한국'이란 나라의 땅이던, '일본'이라는 나라의 땅이던, 나와는 상관없다.

땅 한조각 갖지 못한 내게 독도같은 '바위투성이 섬', 혹은 '갈매기들이 똥싸고 가는 섬'이 어느 국가로 귀속되던

크게 괘념할 일은 아닌 것이다. 독도가 우리 땅이란 걸 걸고 넘어진 일본은 물론 조갑제가 말한대로

'미친놈'이긴 하다. 조갑제에 동의할 때도 있다니 놀랐지만...그는 냉정하고 당당한, 그치만 차분한 대응을

주문했고, 나 역시도 일정부분 동의한다. 다만 나는 독도문제에 대해 감정적으로 격발되는 사람들의

'민족주의적이고 혹은 국가주의적인 반응' 자체가 염려스러우며, 독도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다.



중요하다는 가치판단은 해당 시점에 이슈가 되는 다른 여러 문제들, 예컨대 서울시의회의 전례없는 수뢰사건,

광우병 관련 정부지정 우려식품이 680여개에 달한다는 보도, 언론에 대한 정부의 재갈물리기, 금강산 피격 사건,

쇠고기협상 국정조사, 그리고 일상적이지만 더욱 중요할 수 있는 비정규직 문제,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들

말이다. 당장 독도를 일본이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고, 당장 일반인들...국민들이 나서서 어쩐다고 될 문제도

아닌 그야말로 국가간의 문제인 거다. 김종필은 폭파할까, 했다가 누구는 못준다 했다가, 일본총리는 달라고

했다가 조용했다가..뭐 그런 식으로, 그저 양국 고위 정치권력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하며

탁구치듯 핑, 퐁 하고 왔다갔다 하는 문제였던 게 여태까지의 진행 사정이다. 그러한 그들만의 리그에 힘을

보태기 위해 장식되는 민족주의적 수사들과 요란하게 치뤄지는 각종 이벤트들로 인해, 가뜩이나 MB 때문에

피곤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새 '국민'으로 호명되고 '피끓는 독도지킴이'로 동원되는 것 뿐이다.



독도를 넘겨줘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고작해야 민족적 감수성만을 자극할 뿐인 땅덩이 문제에, 온나라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아우성칠 일인가 싶다는 거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독도의 경제적 효과까지 감안해서

분노하는 것 같지도 않다. 독도를 영유함으로 인해 얻게 되는 넓은 영해와 EEZ, 혹은 대륙붕에서 어로 활동이나

기타 광물자원을 채취하는 등 잠재적인 가치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과 그로 인한 내 주머니

속사정이 조금은 풍족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먼 일이다.



역사적으로 누구 땅이었다느니, 고지도에 기재되어 있다느니, 다 좋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근대국가로

틀지워지기 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했는지,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호명되는 것이 어떠한 효과를

낳는지를 되돌아보는 기회일 때 더욱 값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어느새 위험한 수준으로 넘실대는

한국의 민족주의, 혹은 우석훈이 말한바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경계하고 그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을 키워내는

첩경일 테다.



백두산에서, 독도에서 태극기 흔든다고 대체 해결되는 게 뭔가. 게다가 민족사관이랍시고 반만년 역사에 금칠을

해서 '한단고기'네 뭐네 인류의 시조이자 선택받은 민족이라 주장해서 해결되는 게 뭔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고수해서 우리가 얻는 건 뭔가. 그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동체를 다방면으로

풍요롭게 하고 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다. 꼬리에 달라붙은 일부 정치권력자가 온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분탕질치는 꼴이다.

민족주의란 게 그렇게 써먹혀 왔고, 독도가 그렇게 써먹혀 왔다.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대응을 지켜보면 될 일이다. 일본에 대고 삿대질할 일이 아니라, 정작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외교를 말아먹는 MB에 대한 규탄과 끈질긴 저항. 포커스는 '독도'가 아니라 '외교'로, '민족'을 찾을 게 아니라

'사람'으로 맞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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