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거의 7-8일에 달하는 히말라야 트레킹, 정확하게는 안나푸르나 푼힐전망대 코스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코스를

 

합한 일정의 대단원에 도달하는 즈음. 시욜리 바자르까지 가서 하룻밤 묵고 나면, 내일아침에 두어시간 더 걸어서

 

나야풀까지 가면 트레킹 코스의 끝에 닿는 거다. 한층 더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2,000미터 아래로 내려온지라 경사도 훨씬 완만해졌고 길도 편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나무 가지를 줄넘기삼아 깡총거리는 꼬맹이의 표정도 위에서 만났던 소년소녀들보다 훨씬 밝아보이는 것 같고.

 

 

한쪽으로 산비탈이 상당한 이런 좁고 오르내리막하는 길조차 이제는 굉장히 편하고 다정다감한 길로 느껴지는 수준에 이르렀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강물도 훨씬 유속이 느려졌고, 트레킹 코스와의 낙차도 그리 크지 않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이 걷기도 재미있고, 중간에 고삐풀린 염소떼들이 온통 길을 점령하고는 시끄럽게 훈계질하는 것도 듣고.

 

 

중간에서 만난 또다른 염소떼들은, 사람을 겁내면서도 잰 걸음으로 자기들 헛간으로 들어가느라 바쁘다.

 

 

안전한 집으로 일단 피신하고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이대는 낯선 사람이 궁금했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삐죽삐죽 고개들만 빼밀었다.

 

차가 다니길래, 시욜리바자르에 다 왔는가 했다. 그게 아니라, 사륜구동 지프차는 여기서부터 다닌다고 한다. 비정기적으로 다니는

 

지프인데, 시욜리바자르나 나야풀까지 간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걷는 길은 좀 비포장된 시골길이랄까, 차가 다닐만한 널찍한 길.

 

 

그래봐야 다랭이논을 이쁘게 정돈해서 빡빡한 생업에 힘쓰는 건 산 아래나 위나 똑같고, 자유롭게 풀린 닭들이 천지사방으로 기웃대며

 

닭털을 풀풀 날리고 다니는 것도 똑같고. 차가 다닌다고 해서 딱히 더 발전된 모습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 비포장된 시골길을 한참 걷고 있는데, 이제야 손님을 다 채운 지프차가 따라잡았다. 온통 물이 범람하고 바윗돌들이 들썩거리는

 

데다가 심지어 저만큼 한쪽으로 기울어진 길을 거침없이 달리는 지프에는 사람이 그득그득, 뒤에까지 저렇게 매달린 채 달린다.

 

지프를 먼저 보내고 걷고 있다가 만난 네팔의 젊은 아가씨. 등짐을 가득 지고는 맨발로 저런 길을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버스. 이제 저 굉음과 악취를 동반하는 쇳덩어리가 지배하는 영역으로 들어왔구나, 확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맑은 공기 마시며 히말라야 산길을 거침없이 내달리던 지난 며칠이 벌써부터 그리워지던 순간.

 

 

그렇게 찻길을 따라 좀 걷다가, 저 강 옆에 모여있는 집들, 시욜리 바자르로 내려가는 샛길로. 그러고 보면 '바자르'란 단어는

 

아랍쪽에서도 시장이라는 의미로 쓰는 단어인데, 뜻도 같고 발음도 같다. 그렇다고 저 동네가 무슨 시장통은 아니고 이전에

 

그런 물물교환의 거점 역할을 한 모양인데, 대체 네팔과 아랍, 멀리 떨어진 두 지역에서 어떻게 같은 단어를 쓰는 건지는 신기할 따름.

 

 

 

시욜리 바자르에 도착,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그동안 잘 인도해주고 챙겨줬던

 

가이드 커멀과 맥주를 한잔 나눴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이야기며, 덕분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는 치하,

 

그리고 나중에 히말라야 트레킹에 관심있어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추천해주겠다는 약속까지.

 

진짜로, 영어와 한국어와 네팔어와 인도어를 굉장히 잘 구사하는 가이드, 게다가 친절하고 자상한 가이드,

 

아무리 네팔 사람들이 순하고 밝고 착하다고는 해도, 이런 가이드는 흔치 않다.

 

우리가 함꼐 나눈 맥주. 독일 맥주던가, 투벅의 공장이 네팔에 있다고 한다. 제법 맛도 좋고 값도 무지 싸고.

 

그가 내 무릎에 압박붕대 대신 감아줬던 그의 손수건. 마치 깃발처럼 그의 방앞 빨랫줄에 얌전히 내걸렸다.

 

그렇게 깊어가는 안나푸르나의 마지막 밤. 이제 다음날 아침 두시간 정도만 걸으면 트레킹도 끝이다.

 

 

여태 들렀던 롯지 중에서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어있던 곳이어서 눈여겨 보았더니, 자매만 셋인 집이었나보다. 나름 한껏 치장하고

 

포즈를 잡은 사진들을 벽면에 잔뜩 붙여두었는데, 히말라야의 녹색 풍경 속에서 문득 현란한 색감을 마주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이제는 마차푸챠레 봉우리도 등지고 안나푸르나도 등지고, 정말 산에서 내려간다는 실감이 팡팡 나는 내리막길들.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일곱시 반부터 출발해서 조금 걷지 않아 무릎이 절룩거리길래, 중간에 어느 마을에서 잠시 쉬려던 참.

 

꼬맹이들 둘이서 끈을 잡고 앞뒤로 살살 흔들어대는 뭔가가 흥미를 잔뜩 돋궜다. 뭘까.

 

따뜻한 담요로 꽁꽁 싸매어진 그것은 바로 갓난아이가 담긴 포대기. 눈까지 푹 내리씌운 자줏빛 모자가 귀엽다.

 

저런 식의 한글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는 건, 요새 히말라야 트레킹을 오는 한국인이 많다는 반증이겠다.

 

이제 햇살도 다시 완연히 뜨거워졌고, 왠지 초록빛들도 훨씬 더 싱싱해진 느낌. 멀리 새하얀 봉우리가 꿈만 같다.

 

 

 

시누와 아랫마을부터는 물소도 보이고, 당나귀도 짐을 싣고 다니고. 시누와가 그 마지노선이라고 했었다.

 

내리막이라고 마냥 내리막길만 있는 건 아니다. 꼬맹이들도 애기를 업고 이렇게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기도 하고.

 

 

그리고 트레킹 길을 관통하며 세워진 '굉장히 큰' 상점. 거의 히말라야 최대의 대형마트 수준인 거다 이정도면.

 

술도 팔고 담배도 팔고 과자와 물과 등산화와 스틱, 수건에 필름, 건전지, 약품류까지. 없는 거 빼놓고 없는 게 없는 상점.

 

 

 

그리고 촘롱에 도착해서 일단 맥주부터 한잔. 아침 6시반부터 열심히 오르내리막, 전반적으로는 내리막길을 걸었더니 몇시간

 

걷지 않아 땀이 흠뻑 나버렸다. 아무래도 아래로 내려올수록 기온이 확 올라가는 게 체감될 정도로, 가파르게 하강 중인 거다.

 

맑은 날에는 촘롱에서 안나푸르나 사우스 봉우리와 마차푸챠레 봉우리가 보인다더니, 정말 선명하게 두개 봉우리가 보인다.

 

새하얗게 반짝이는 만년설로 덮인 날카롭고 위태로와 보이는 두개의 봉우리.

 

다리가 아파 더이상 못걷겠다는 어떤 트레커는 이제부터 말을 타고 내려가기로 하고 백마를 호출했다.

 

 

잠시 쉬고는 다시 출발, 닭들을 쫓으며 노는 아이를 지나기도 하고.

 

노랗고 빨간 무늬의 수건이 높은 바람에 펄럭이는 제법 '대문'이란 것도 갖춰놓은 집을 지나기도 하고.

 

안나푸르나 사우스와

 

마차푸차레를 바싹 당겨 관찰해보기도 하고.

 

푼힐 전망대쪽으로 가는 갈림길까지 도착해서는 반대쪽 길로.

 

 

층층이 그 육중한 무게감과 부피감을 과시하는 산의 옆구리들. 그리고 그 모든 굵직한 주름들 너머로

 

짙고 두터운 하얀 구름을 피워올리며 홀로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히말라야 산봉우리들을 배경으로 한 일출을 보고, 조금더 안나푸르나 쪽으로 걸어보기도 하면서

 

훌쩍 지나버린 아침시간. 이 풍경들을 이곳에 놓고 와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쉬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길이다치면 빈틈없이 내 옆에서 길을 안내해주고 여기는 어디, 저기는 어디, 안내해주던 훌륭한 가이드 커멀.

 

그를 먼저 내려보내고는 거의 한걸음에 한 장씩, 이 멋진 광경을 꼭꼭 새겨두리라 다짐하며 셔터를 눌렀다.

 

 

 

 

 

 

같은 듯 다른 사진들. 뭐하나 차마 버릴 수가 없던 디테일들.

 

그렇게 겨우 숙소까지 도착해서는 지난 밤 덜덜 떨며 비몽사몽간에 홀로 지새운 휑뎅그레한 삼인실 방을 정리하고는 하산 시작.

 

그새 구름을 잔뜩 뿜어낸 안나푸르나. 구름이 어디선가 흘러와서 덮는 게 아니라 산 스스로가 만들어내어 덮는 느낌이다.

 

 

어제에 비해 훨씬 맑아진 하산길의 시계.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완만한 경사길 위로 강렬한 햇살이 빗겨들었다.

 

이제는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마차푸차레를 바라보며 가는 길이다. 물고기 꼬리처럼 생긴 마차푸차레 봉우리가 선연하다.

 

몰랐는데,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게이트의 뒷면에는 이런 따뜻한 인사말이 적혀있었다.

 

 

 

그새 풍성해진 구름 틈새로 안나푸르나 사우스 봉우리가 손을 흔들어주는 듯 하다. 마치 오랜 친구를 떠나듯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로 내려가는 길. 전날 오후에 짙은 안개 혹은 구름 속을 헤치며 왔을 때는 몰랐던 풍경이다.

 

 

회색빛 강을 따라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걸어가기를 두시간이 채 안되었을 즈음,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를 지나고 데우랄리를

 

지나고, 어느덧 4,120여미터의 고도에서 3,000미터 어간으로, 다시 2,600미터 어간의 도반까지 내려왔다.

 

달밧으로 점심을 먹고, 따뜻하게 몸을 덥히고 다리를 좀 주물러주다가 다시 출발.

 

사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내려오는 순간부터 다리에 문제가 있었다. 두개의 스틱을 잘 써서 거의 네발짐승처럼

 

빠르고 안전하게 산을 오르긴 했지만, 하루 열시간을 넘나드는 오르내리막의 산길을 6일째 쉼없이 걷다보니 아마도 무리했던 거다.

 

왼쪽 무릎과 오른쪽 무릎이 서로 통증을 호소하며 자기가 더 아프다고 경쟁하더니, 왼쪽 무릎으로 모든 통증이 옮겨가는 걸로

 

정리가 되어서는 발을 내리딛을 때 거의 도가니가 찢겨가는 듯한 아픔이 있었다. 절룩거리며 왼발을 제외한 세 다리로 하산 재개.

 

그래서, 해발 4,120미터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해발 2,360미터의 시누와까지 내려오기까지는 카메라도 가방 안에 넣고

 

무사히 내려오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특히 점심 먹고 이후의 코스가 꽤나 가파르고 험한 돌밭이어서 조심조심.

 

그래도 무릎에 맨소래담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네팔 현지 연고를 바르고 손수건을 압박붕대삼아 칭칭 감고 걸으니 좀 괜찮은 듯 하여

 

여지없이 열시간 가까이 걷는 하루를 이어갔다. 저녁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에 시누와 동네 사진 한장. 트레킹코스를 따라

 

길게 형성된 롯지들의 군집. 그게 시누와를 포함한 다른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마을들이 생겨나고 커지는 방식인 듯 싶다.

 

 

저녁은, 두둥. 어느 롯지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Noodle' 메뉴 중의 하나, 'Korean shin lamen noodle'. 심지어 한글로 '신라면'이라

 

적혀있기도 하길래, 대체 맛이 어떠려나 궁금해서 한번 먹어보았는데, 면발이 꼬들꼬들하고 한국보다 더 매콤하니 맛있었다.

 

다리가 아프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등산길보다 하산길은 훨씬 빠르게 주파하는 중이다.

 

올라올 때는 근 이틀이 소요되었던 구간을 하루만에 내려와버린 셈이니. 다리가 안 아팠다면 훨씬 빨리 내려올 수 있었을 듯.

 

 

 

 

해발 4,120미터 고지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새벽부터 일어나 히말라야 산봉우리 사이로 솟는 해를 보고 난 뒤라

 

꽤나 흥분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던 거 같다. 금세 배가 고팠지만 전날 선주문해둔 아침식사라고는 고작 구릉족 전통빵과 벌꿀.

 

그에 더해서 고산병 예방에 특효이자 이 추운 동네에서 몸을 따뜻하게 지켜주는데 효험이 좋다는 마늘 스프까지.

 

아침을 먹고 다시 나왔더니 그새 새파란 하늘이 조금씩 구름을 몰아내는 중이다.

 

 

다시금 두근두근, 이 새하얗고 거대하고 위엄돋는 자연 앞에 언제 다시 서보랴 싶어서 카메라를 쥐고 안나푸르나 쪽으로 무작정 걷다.

 

이제 이 곳에도 새로운 롯지를 짓느라 꾸역꾸역 건축자재들을 등짐으로 이고 지고 나르며 작업이 한창이긴 하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나푸르나를 비롯한 마차푸챠레, 닐기리 등등 숱한 히말라야의 높은 봉우리들은 여전히 굽어볼 뿐이다.

 

 

롯지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다국적인들, 일행과 함께 혹은 나처럼 혼자서 산을 향해 걷는다. 뭔가 홀린 사람들같기도 하다.

 

 

 

정신줄 놓고 그저 셔터만 누를 뿐. 이런 풍경 앞에서 감히 무슨 단어와 표현을 동원할 수 있겠나 싶다.

 

 

 

 

 

빙하가 훑고 지나며 수백수천년 간 갈아엎었을 저 주름진 협곡.

 

 

 

새하얀 구름들은 새파란 하늘 속으로 점점 녹아내리고, 산봉우리들을 포근하게 감싼 하얀 만년설은 얼음처럼 반짝거린다.

 

 

더 이상 접근하긴 힘들겠다 싶을 즈음, 더 이상 롯지로부터 대책없이 떨어지긴 겁난다 싶을 즈음.

 

 

박영석 대장을 비롯한 안나푸르나 등반대 3인의 위령탑을 발견했다. 불과 2011년의 일. 탑 아래엔 가족사진이 빛바랜채 놓였다.

 

여전히 이 시대에 '탐험'과 '모험'이라는 걸 찾아다니느라 피가 끓었을 사람들, 이 곳에서 평안히 잠드셨기를.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사진을 추리고 걸러내려 애써봐도, 약간의 각도만 틀어져도 또다른 디테일들이 나타나는 거다.

 

그저 얼음 좀 얹혀있는 커다란 바윗덩이려니 생각했는데, 수만년의 시간동안 쪼아지고 다듬어졌을 그 표피의 질감과 무게감이라니.

 

게다가 환청인가 싶을 만큼 드문드문 갸날픈 신음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빙하. 금세라도 우르릉,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던 풍경이라 사진 역시 뭐 하나 버릴 수가 없더란 점.

 

 

안나푸르나 푼힐&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6일차 새벽, 단언컨대 지상 최대의 스펙타클한 장면 중 하나를 꼽으라면

 

절대 뒤쳐지지 않을 안나푸르나의 일출 장면을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전날 오후부터 온통 구름밭 속을 거닐던 듯한 베이스캠프 바깥 풍경이 나름 또렷하니 현실감을 얻은 새벽. 

 

밤새 추위에 뒤척거리다가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에 문득 창밖을 보니 희뿌연 불빛이 새어나오는 게 새벽인 거다.

 

침낭과 담요를 그대로 뒤집어 쓴 채로 카메라 쥐고 밖으로 뛰쳐나오자마자 맞이한 안나푸르나와의 첫 대면.

 

 

잠깐 사이에도 세상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고 수묵화로 그린 듯한 하얗고 검은 안나푸르나 산등성 아래로도 풍경이 살아나는 중이다.

 

 

 4,200여미터 고지의 베이스캠프에서 올려다보는 7-8천미터 높이의 히말라야 영봉들, 두텁던 구름이 사방으로 찢기고 난리판이다.

 

 산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던 만년설들, 빙하들, 그것들이 산비탈에 그어낸 깊고 굵은 주름살들. 사실 겨울에는

 

이곳 ABC에서 MBC까지 내려가는 길 한켠으로 온통 빙하가 꽁꽁 얼어붙어있을 정도라고 한다.

 

안나푸르나 쪽으로 좀더 올라가 내려다본 베이스 캠프. 그 너머로 보이는 건 물고기 꼬리모양으로 삐쭉한 마차푸챠레 봉우리.

 

 

 거대한 빙벽이나 댐처럼 버티고 선 히말라야 산맥, 얼룩덜룩한 만년설의 흔적이 흡사 호랑이의 얼룩무늬같기도 하다.

 

 

 이곳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안나푸르나 사우스, 안나푸르나 1 봉우리로 가는 길은 달리 없다고 한다.

 

그저 이 거칠고 황량해 보이는 곳 가운데를 조심스레 즈려밟으며 그나마 길 비슷한 것을 만들며 앞사람을 따르는 것 뿐.

 

그리고, 동쪽 하늘에서 드디어 샛노랗게 불빛이 일기 시작했다. 산봉우리들과 맞붙은 구름들이 조금씩 타오르는 하늘.

 

 안나푸르나 쪽도 마찬가지. 봉우리에 노랗게 불빛이 쟁여지더니 조금씩 형체를 갖추어 맺히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번져오르는 불길을 피해 사방으로 아우성치며 쏟아져나오는 짙고 하얀 구름. 빙하가 흐르던 길을 구름이 흐른다.

 

 그리고, 끝내 안나푸르나 봉우리 위에 맺힌 불길은 구름을 흩어냈다. 화이트 앤 블랙의 투톤에 더해진 황금빛 햇살.

 

 

기를 쓰고 내달린 구름이 다시 밑에서부터 서서히 잠식하며 차오르기 시작했다. 빙하가 긁어낸 흔적이 잠기고, 베이스 캠프

 

아랫동네가 잠겼으며, 이제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턱밑까지 다시 차올랐다. 

 

 

 그리고, 어느 새 등뒤의 풍경을 온통 감춰버린 짙은 회색의 장막. 그러고보니 함께 흥분해서 셔터를 누르던 사람들도

 

추위를 못 견뎠는지 대부분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숙소로 돌아가 전날밤 주문해둔 아침부터 든든히 챙겨먹을 시간, 6일차의 아침이 밝았다.

 

해발 4,130미터. 이 표지를 보고 나자 생각보다 훨씬 감개무량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를 오려고 여태 걸었구나, 싶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높이까지 걸어올라와 보았구나, 싶기도 하고. 그냥, 질리도록 걷고 싶었는데 그야말로 5일간 징하게 걸어서 도착한 곳.

 

 

그리고 짙은 안개속에서 헤엄치듯 조금 더 걸어가니 비로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예기치 않게도 산악인 고 박영석의 기념패. 2011년에 안나푸르나 등정을 왔다가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크고 황량하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시즌이 아니라 더욱 사람이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앞서 걷던 미국 친구 하나는 벌써 다이닝룸에 누워서는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있길래, 슬쩍 도촬. 훌륭한 풍경이다.

 

그리고 한쪽에는 새로 롯지를 짓고 있는 공사판이 있고, 그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위한 텐트가 짙은 구름 속에 숨어있다.

 

새로 지어지는 롯지에 들어갈 침대들. 그러고 보니 트레킹 중에 내가 누웠던 침대는 모두 저렇게 생겼던 거 같다.

 

멀찍이 흐릿하게 보이는 탑 같은 형체가 삐죽 솟았길래 슬쩍 가봤다.

 

가는 길에는 온통 누군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진과 글귀가 가득했고.

 

 

탑 역시도 티벳 불교식의 깃발을 온통 휘감고서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보고 향했던 사람들을 품었다.

 

 

 

비교적 최근에 늘어뜨린 것처럼 보이는 선명한 빛깔의 깃발은 '부처의 눈' 그림을 새긴 채 산아래를 굽어보는 중.

 

4,130미터 고도의 이곳에서도 공사판은 별다를 거 없다. 물론 건축용 부자재들은 하나씩 전부 사람이 이고지고 날라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면 있겠지만, 그렇게 날라온 문짝과 유리와 나무판넬들을 가지고 건물을 세우는 건 기술자들의 몫.

 

이렇게 촘촘한 발받침을 갖고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도 할 테고. 저렇게 간격이 좁으면 오히려 불편하지 않을까, 괜한 걱정.

 

여기까지 무사히 트레커들을 인도해서 끌고 온 가이드와 포터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이야기에 열중이다.

 

모두들 추위를 막기위해 오리털 파카에 네팔 전통의 양털 모자를 썼다.

 

그리고 이미 이 곳 다이닝룸에 자리를 잡은 한 트레커는 침낭 안에 들어간 채 꽁꽁 옷을 싸매고 모자까지 쓴 채 독서삼매경.

 

아침마다 향을 새롭게 갈아 피울 텐데, 저렇게 나무벽에 찰싹 붙여서 태우면 위험하지 않으려나 걱정스럽기도 하고.

 

애초 제대로 씻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고양이세수라도 하려고 화장실을 찾았더니 주인 아저씨가 양동이를 내준다.

 

여기는 물도 귀하다면서 저 양동이에 달린 수도꼭지를 틀고 세수도 하고 발도 닦고 하라는 것. 대충 씻고 치웠다.

 

 

그리고, 짙은 안개를 뚫고 불현듯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두둥실, 구름 사이에서 삐쭉 고객만 내밀었다.

 

근데 이토록 가까이 다가섰을 줄이야. 거의 코앞이잖아 싶을 정도로 눈앞을 압도하는 위용과 그 디테일.

 

이내 짙은 구름 속으로 다시 숨어버렸고, 한참을 바라보아도 좀체 다시 나타날 기미가 없더니,

 

해가 거의 떨어지기 직전 다시 한번 슬쩍 안부인사를 건넸다. 굳 나잇. 내일 새벽에 봅시다.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에서 도착해서 점심을 주문하고 잠시 쉬어가는 참.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길에는 네팔의 공작새와 염소 비슷한 동물들이 곧잘 출몰한다고 한다. MBC에서 ABC로 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한 오르막길.

 

해발 3,700미터. welcome을 저렇게 중간에 하나 쉬고 적어놓으니 뜻이 미묘하다. well, come to 블라블라. 오시던가, 하는 시크함.

 

 

앞마당에 놓인 테이블과 빨랫줄에서 빨랫감을 넣고 있는 롯지의 주인 아저씨와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마시는 중인 가이드 꺼멀.

 

 

등산화는 앞코가 긁히고 옆엣 쿠션이 슬쩍 터지고.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많이 상했다. 잠시나마 신발을 벗고 따뜻한 햇살에 일광욕.

 

그리곤 맨발은 얼음같이 차가운 히말라야의 자연수에 담그고 땀을 씻어내고 열도 빼내고. 세째 발톱이 거의 시꺼매졌다.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에서 한숨돌린 일꾼들이 등짐을 메고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 그러고 보면 굉장히 스펙터클한 자연의 품안이다.

 

 

이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잠시 몸의 근육들을 풀어주기도 하고.

 

나와 함께 페이스를 맞추던 체코의 70대 노부부 두 분도 느지막히 올라와선 등산화부터 풀어젖히고 계신다.

 

롯지 안을 슬쩍 구경해보니 온갖 세계인들의 증명사진들이 한쪽 벽에 빽빽히 붙어있는 게, 여기 다녀왔다는 기념삼아 남겨둔 것인 듯.

 

다이닝룸 안에서 점심식사를 시작하신 두 부부. 불빛 하나 없이 유리창 너머로 스며오는 햇살에만 기대어 갈릭스프를 드시는 중.

 

 

나는 달밧. 따뜻한 콩스프인 '달'이 들어가니까 몸의 구석구석까지 콩단백과 뜨끈한 온기가 전달되는 느낌이다. 막판 스퍼트 준비.

 

안개가 점점 짙어진다 싶은 게, 점점 추워지기도 하고 시계거리도 엄청 짧아지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했다.

 

 

 

키작은 관목들, 그리고 내가 가려는 길을 거슬러 흘러내리는 제법 맹렬한 개천, 끊긴 듯 이어지는 오솔길 하나. 시야는 제로.

 

누군가 길 옆 풀떼기들을 가지고 이렇게 머리채처럼 땋아놨다. 무슨 의미가 담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정성들여 꼼꼼히 땋았다.

 

 

걷다 보니 굉장히 초현실적인 느낌이다. 몸이 둥둥 떠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개천과 산과 언덕과 오솔길. 이런 그림같은 풍경이라니.

 

 

 

 

이런 식의 완만하고 몽환적인 풍경 속을 한참 걷고 또 걷는데, 전혀 힘들지도 않고 그냥 가볍고 유쾌하게 산책하는 기분이다.

 

 

 

 

 

그렇게 한참. 도무지 안개인지 구름은 걷힐 생각이 없어보이고, 저 너머로는 분명 만년설을 이고 있는 안나푸르나 사우스와

 

안나푸르나 1 봉우리 등등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을 텐데 당장은 한발자국 앞의 보랏빛 꽃송이들이 눈길을 잡아챈다.

 

 

 

 

당장 눈앞의 길은 보인다지만 대체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계속 이어지기는 하는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휘적휘적 이어지는 길.

 

 

 

바위들도 다들 모서리가 날카롭고 거칠기 짝이 없어 한발한발 내딛을 때마다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자칫 넘어지거나 스텝이 꼬이면 망.

 

 

 

앞서거니 뒷서거니, 세상에 온통 나와 가이드 꺼멀 둘 뿐인 듯 하다. 그는 겨울엔 이 곳도 온통 허릿춤까지 쌓인 눈이 가득하다며

 

그때는 알아서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지금은 그래도 걷기 무척 편한 거라며 내게 듬직한 등을 보여줬다.

 

 

그리고, 아무런 징조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나마스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해발 4,130미터의 트레킹 코스 종점이자

 

본격적인 안나푸르나 등산가들을 위한 시작점. 내게는 5일동안 내처 걸었던 전반적인 오르막의 꼭지점이기도 하다.

 

 

 

5일차의 아침이 밝았다. 히말라야 캠프는 2,920미터, 점심은 3,700미터의 MBC, 그러니까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에서,

 

그리고 저녁은 4,130미터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먹기로 했다. 계속해서 올라가는 길, 정점을 찍는 날이다.

 

바깥이 시끌벅적하길래 눈을 떴다. 맹렬한 추위로 뼈마디가 온통 굳어버렸고 무릎도 발가락도 온통 아프지만, 일단 카메라를 쥐고

 

밖으로 뛰쳐나왔더니 맑은 하늘에 안나푸르나 봉우리가 보인다. 밤새 비가 오더니 그래도 아침만 되면 용케 비가 그치니 다행이다.

 

 

위풍당당하게 출발, 기온이 확실히 떨어져있어서 옷을 좀 두껍게 입을까 하다가 어차피 계속 걷다보면 열이 오르고 땀이 나니 패스.

 

MBC,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가는 길에 있는 거대한 동굴. 비가 오거나 하면 잠시 앉아 쉬어가며 구름바다를 구경하는 것도 좋을 듯.

 

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렇게 오르막 일색인 것도 아니고, 적당한 경사의 오르내리막이 이어지는, 그리고 중간중간

 

날 듯이 걸어갈 수 있는 평지 구간도 안배되어 있다.

 

 

걸어가면서 점점 눈에 잘 띄는 삼각뿔 모양의, 마치 피라미드 같은 안나푸르나 사우스 봉우리.

 

얼마 가지 않았다 싶은데 벌써 시야에는 다음 마을, 데우랄리가 보인다. 해발 3,200미터상의 마을이자 그 위로는 단지 ABC와

 

MBC만을 두고 있는 하늘아래 첫동네이기도 하다. 각기 안나푸르나(7,200여미터)와 마차푸차레 등정(7,000미터)을 등정하기 위한

 

베이스캠프인 ABC와 MBC 그 두개는 딱히 마을이라고 부르기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이니깐.

 

 

물살은 한결 더 급하고 격하고, 유량도 많다. 최근에도 이 곳에서 한국 트레커가 한 명 실족해서 사망했던 일이 있었을 만큼,

 

잠깐의 방심이나 실수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빚을 수 있는 곳이다.

 

 

데우랄리에 도착했을 즈음, 하늘은 더 없이 파랗고 햇살은 정말 눈부시다. 자외선지수도 엄청 높을 테니 잠시 앉아 쉴 때마다

 

선크림을 챱챱 발라주고, 안경 대신 렌즈에 선그라스를 끼고 다니기를 정말 잘했다고 실감하는 하늘이다.

 

 

잠시 앉아서 땀도 식히고 물도 좀 마시고 나서는 다시 출발. 이제 마차푸챠레와 안나푸르나가 코앞이라고 하니 없던 기운도 솟는다.

 

 

햇살이 눈부시지만, 그 햇살 속에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갈라진 마차푸챠레 봉우리가 신기루처럼 둥실 떠 있다.

 

 

그리고, 데우랄리 위쪽으로는 계속 걷기 무난한 코스가 이어지고. 사실 촘롱으로 들어선 이후로 그렇게 길이 험하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던 거 같다. 푼힐 전망대쪽에서 촘롱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제일 어려웠던 듯. 정확하게는 타다파니에서 촘롱 구간.

 

 

 

양쪽으로 봉우리가 우뚝 솟아난 틈새, 그 협곡을 따라 걸어올라가는 길이다.

 

 

한쪽으로는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녹아서 내리는 듯한 회색빛의 시냇물이 요란하게 흐르고, 한쪽으론 제법 평평한 공간에 꽃들이.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새하얀 암벽. 히말라야의 숨겨진 비경이다.

 

 

그리고,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가 드디어 시야에 잡히다.

 

 

고도가 높으니 나무같은 것들은 안 보인지 오래. 키작고 조그마한 식물들이 빽빽히 들어찬 초원이라고 해야 하나.

 

 

왔던 길을 돌아보니 구불구불, 길이 참 이쁘기도 하다.

 

그리고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 해발 3,700미터 고지다. 아침에 먹은 갈릭수프 덕분인지 고산병의 징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전에 막 새로 단장한 듯 말끔한 페인트칠에, 어라, 벽면에는 이러저러한 기하학적 문양까지 새겨넣었다.

 

그리고 눈이 멀도록 새하얗고 강렬한 태양. 기온은 서늘할 정도로 낮은데 햇살은 찌르는 듯 따가운 그런 기묘한 느낌.

 

마치, 왼발은 찬물에 오른발은 뜨거운물에 담그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려나.

 

 

 

 

그러고 보면 매일 비슷한 일정이다. 아침 7시반쯤 출발, 오후 4시에서 4시반쯤 대충 도착. 가끔 오후 6시까지 걷기도 하고, 혹은 아침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움직인 적도 있긴 하지만 대충 그 정도씩만 걸어도..하루 열시간 가까이 걷는 거구나.

 

 

히말라야 캠프의 롯지는 고작 세 동이던가, 위로 올라갈수록 롯지 수도 줄어들고 마을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곳이 많다더니 정말이다.

 

그래도 납작평평한 돌들로 이렇게 테라스도 만들고 계단도 쌓아두고, 생각보다 훨씬 잘 정비되어 있어서 놀랐다.

 

그렇다고 따뜻한 온수가 나온다거나 난로가 지펴지는 건 아니어서 꽤나 추웠지만, 덕분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땀과 땟국물이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방금까지 열심히 걸으며 온몸 가득 흠뻑 젖었던 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뽀송뽀송해진 상태.

 

건물 외벽에 나와있는 요 단촐한 시설이 세면대. 여기에서 씻고 이닦고 발도 닦고.

 

어느 포터의 등짐. 대나무로 엮어 만든 등짐에 대충 질긴 천을 찢어 묶어서는 어깨끈을 만들었다.

 

히말라야 캠프 앞쪽의, 아마도 공용 설비라고 해야 하나. 뭐 딱히 롯지끼리 니꺼내꺼 갈라 쓰는 분위긴 아니라지만 여긴 위치상 공용.

 

속속들이 집결하는 트레커들. 촘롱 이후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오르는 길은 이길 하나밖에 없으니 사람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눈인사만 주고받던 사람들이던 '나마스떼~'하고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이던 결국 몇번씩 얼굴을 마주치게 된다.

 

 

아직 우기의 끄트머리라 그런가, 그러고보면 4일차에 이르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왔다. 그나마 하루 빼고는 오후 늦게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걷는데 지장이 없었지만, 중간에 하루 비맞으며 마침 굉장히 오래 걷고 났더니 굉장히 타격이 크다. 옷도 다 젖고.

 

3천미터 어간에서부터 주의해야 하는 고산병.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거나, 식욕이 없다거나, 몸이 무거워지는 등등 다양한 증세를

 

보인다고 하는데, 요새는 고산병 약으로 (혈관 확장효과 때문에) 비아그라를 많이 쓰기도 한다고 한다. 그치만 현지 가이드의 추천을

 

듣건대, 그리고 내 경험상으로도 단언컨대, 고산병에는 마늘수프가 최고다. 갈릭 수프.

 

저녁은 간단하게 갈릭수프와 감자전 비스무레한 것. 갈릭수프는 기대 이상으로 꽤나 맛있었고, 몸도 따뜻하게 덥혀주는 효과까지.

 

네팔같은 빈국의 경제 상황을 가늠케 해주는 것 중 하나는 이런 기본적인 생필품들의 퀄리티를 보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느쪽이 칼날인지 헷갈릴 정도로 얇디얇은 저 손잡이들. 칼뿐 아니라 숟갈이나 포크 역시 마찬가지다. 칼날만큼 얇은 손잡이.

 

그리고 가스 버너. 한국의 등산가들이 갖고 와서 쓰다가 놓고 갔다던가. 왠지 이 동네에 딱 어울리는 물건이지 싶다.

 

 

그리고 전기조차 귀해서 알전구가 빠져 있는 내 숙소방. 전기가 끊긴 건지 전구가 비싼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내게 지급된 초 한자루.

 

바깥 기온과 딱히 다를 바 없는 실내 기온 때문에 오리털 침낭을 덮고 그 위에 이불을 또 덮었지만 별무소용이라, 따뜻한 물을 다시

 

주문해서 계속 마셨다. 양초도 어찌나 조악하고 조그맣고 얇은지, 생일 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초라고 해도 믿겠다.

 

그래도 이토록 짙고 농염한 어둠 속에서도 양초 한 자루, 그리고 헤드랜턴 두개를 가지고 히말라야의 긴긴 밤동안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가져갔던 책이 네 권인데 전부 다 읽고 돌아왔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거침없는 오르막길, 그 문턱에 있는 시누와. 시누와까지만 당나귀나 물소가 다니고 그 위로는

 

사람만 등짐을 메고 다닐 뿐이라고 한다. 덕분에 거머리의 습격도 없고 당나귀 똥밭도 없긴 하지만, 또 그래서 시누와 위쪽으로는

 

미네랄 워터를 팔지도 않고 그저 끓여서 정제한 물만 판다는 단점도 있다. 위로 오를수록 물가가 올라간다는 점도 있고.

 

시누와를 지나 2,310미터 고지의 밤부Bamboo에 다다라 점심을 먹기로 했다. 대나무가 많이 나는 마을이라 밤부, 맞다고 한다.

 

 

 

지천으로 피어있는 게 꽃나무고 풀떼기들인데도, 이렇게 플라스틱 케이스를 재활용해서 롯지 곳곳을 식물로 꾸며놓았다.

 

롯지 앞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대나무숲, 사람들이 몇명 들어가서 대나무를 베고 죽순을 채취하고 있었다.

 

이미 슬쩍 소슬해질 만큼 낙차가 느껴지는 기후, 맨땅바닥에 그대로 앉으면 엉덩이가 차가워져서 꼭 저렇게 양털가죽을 깔고 앉으라

 

말해주는 세심한 가이드, 그 덕분에 푼힐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코스를 무사히 잘 다녀왔다.

 

그리고 점심. 달밧을 시켰는데 반찬이 색다르다. 역시, 대나무가 많이 나는 지역이라더니 밑반찬도 대나무 속대로 만든 요리. 맛있었다.

 

 

다시 배를 채우고 출발, 해발 2,920미터 고지의 히말라야 캠프까지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그러면 대충 500미터 어간을 올라야 하는 셈.

 

체코에서 오신 70대 노부부의 페이스에 맞춰서 살살 '천천히 천천히' 올라가기로 했다. 한국어와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가이드가

 

제일 먼저 배운 한국말은 역시나, '천천히 천천히'라고 했던가. 무작정 서두르고 다그치며 오르는 한국인들이 많은가보다.

 

한참 걸어가는데 옆에서 대나무 속대를 채취해서는 다듬고 있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등짐을 메고 이마로 끈을 버팅기며 저 무거운 가스통을 이고 지고 나르는 사람.

 

 

앞의 체코 노부부를 챙기는 가이드도 굉장히 살뜰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다리를 건너거나 경사가 가파른 곳을 지날 때는

 

원, 투, 쓰리, 발 딛을 곳까지 하나하나 지정해줘가며 인도해주고, 어떨 때는 이렇게 힘껏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도 되어주고.

 

아무리 봐도 네팔어는 참, 저 글자를 어떻게 쓰는 건지 신기하기만 하다. 쓴다기보다 그린다는 표현이 맞을 거 같다.

 

 

점점 안개인지 구름이 휘감고 있는 지역이 늘어나고, 경사도는 완만해질 줄 모르고 끝없이 오르막인데다가 짐은 무겁다.

 

 

그래도 주변의 풍경들, 급류를 이루고 흘러가는 개울과 온통 초록초록한 가운데 점점이 뿌려진 꽃송이들.

 

그런 풍경을 천천히 음미하며 오르다보니 금세 히말라야 캠프. 2,920미터의 이곳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는 이제

 

세개 포스트 남았다. 데우랄리,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 그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푼힐전망대, 안나푸르나 서쪽에 위치한 이곳은 해발 3,210미터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코스에서 만나게 될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 직전의 데우랄리쯤과 비슷한 고도를 점하고 있는 곳이다. 새벽 4시반부터 롯지를 나와 산행을 시작한 건,

 

이 전망대에서 해뜨는 걸 보며 동시에 안나푸르나 사우스, 안나푸르나 1, 마차푸챠레, 닐길리, 힌출리 등의 이름 높은 산들을

 

바라보고자 함이지만, 사실 밤새 구름이 많이 끼고 심지어 비도 조금 내렸어서 큰 기대는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을 헤드랜턴으로 헤치며 근 1시간가까이 헉헉대며 산행을 했을까, 해발 2,874미터에 위치한 고레파니에서 수직으로

 

약 400미터 가까이 올라가야 하는 셈이니 생각보다 거친 산행이었던 셈이다. 슬몃 하늘이 밝아진다 싶을 때 전망대에 도착했다.

 

저멀리 닐기리 산의 눈덮인 정상부가 짙은 구름 사이에서 신비스러운 빛을 내뿜는 게 보였지만, 전반적으로는 구름에 숨은 상태.

 

 

우선 전망대에 위치한 찻집에서 밀크티, 찌야를 마시며 몸을 좀 녹였다. 보통 롯지에서는 50루피 내외(KRW 500원 정도)이던 찌야가

 

무려 240루피. 역시나 여기서도 네팔 본국 사람에 대한 우대는 여전해서, 같은 찌야가 고작 120루피. 대개 그렇듯 차 역시 반값이다.

 

 

맹렬한 속도로 움직이는 구름, 날카로운 삼각뿔 형태의 안나푸르나 사우스에 갈갈이 찢기면서도 하릴없이 몰려왔다. 볼 수 있을까.

 

그 와중에도 한쪽의 벤치에는 쌍쌍이 앉아 있는 커플들, 마치 알프스의 다정다감하고 온유한 산정에 오른 듯한 분위기를 연출 중이다.

 

구름이 없이 맑은 날이면 전망대 아랫춤에 붙어있는 그림처럼 쭈욱 이어지는 산봉우리들을 볼 수 있을 텐데.

 

 

끈덕지게 시야를 가로막던 구름들이 조금씩 산개하며 밀려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푼힐 전망대의 전망탑. 하늘은 파래졌지만 사실 아직 태양이 지면 위로 떠오르지는 않은, 그야말로 일출 직전의 긴장감.

 

 

밤새 이슬이 내려앉은 어느 벤치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봉우리들.

 

 

삐쭉, 봉우리가 구름 위로 솟았지만 여전히 계속 감질나는 시츄에이션.

 

그 와중에 봉우리들 틈새로 햇살이 빗겨 번지기 시작했다.

 

무슨 수묵담채화도 아니고, 옅은 금빛의 햇살이 시꺼먼 산 아랫도리를 부드럽게 헤집으며 서서히 채비를 갖췄다.

 

 

 

끝내 맑은 하늘을 못 보려는가 싶으면서도 뭐 딱히 서두를 거 있나, 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이제나 저제나 목을 빼고 기다리는 중.

 

사실 딱히 안나푸르나 사우스니 마차푸챠레니 하는 봉우리들이 하나씩 툭툭 불거지지 않아도 좋았다. 어차피 난 푼힐 트레킹 코스

 

말고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코스로 넘어갈 거고, 그러면 계속해서 그 봉우리들을 바라보고 걷게 될 테니 급할 건 없다.

 

 

 

오호라, 그렇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안나푸르나 1과 안나푸르나 사우스 봉우리를 대면할 수 있었다. 금빛 아침햇살을 머금고

 

반짝거리는 새하얗고 매끄러워 보이는 만년설의 질감이란. 게다가 저토록 섬세한 디테일들이 맨눈에도 쉽게 드러나다니 감탄 또 감탄.

 

 

실컷 감상을 하고서 슬슬 내려오면서도 계속 안나푸르나의 봉우리들은 뒤를 지켜 주었다. 이제 모두 저멀리로 날아가버린 구름들,

 

가끔 깃털인양 한두조각씩 걸쳐지는 구름들을 불어내면서 그 거대하고 웅장한, 위엄돋는 봉우리들이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쉬웠다. 우선 날이 밝아 발밑이 안전했고, 줄곧 내리막이었으며, 배가 고팠으니깐. 금세 푼힐전망대의

 

티켓 오피스를 지났고 이내 고레파니의 숙소까지 내달릴 수 있었다.

 

고레파니 마을로 들어서기 직전의 회전문. 대체 왜 저런 문을 설치했나 했더니, 닭이니 염소니 물소니 그런 것들이 함부로

 

마을 경계를 넘어 도망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나야풀에서 티케둥가까지.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을 포함해서 대충 다섯시간을 걸어 올라와서 쉬엄쉬엄 맞이하는 저녁시간.

 

여력이 충분히 남은 상태인지라 마을을 둘러보고, 산장 겸 식당으로 기능하는 롯지도 요모조모 살펴보고.

 

심심치 않게 지나는 염소떼라거나 당나귀들도 구경하고.

 

웨스턴 스타일의 토일렛이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네팔은 물을 사용하는 수식 화장실. 그러니까 휴지 따위 준비되어 있지 않고

 

수도꼭지와 바께쓰 하나만 놓여있을 뿐. 손과 물을 써서 닦아낸 후에 물로 흘려보내란 이야기인데, 자연에 조금 부담을 줄지언정

 

표백물질과 화학물질이 혼합되어 있을 새하얀 크리넥스 티슈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직 우기가 끝나기 직전이라 비수기에 해당하는 9월 초중순, 1인실, 2인실에 따라 방값도 다르지만 넉넉하게 혼자 차지한 독채.

 

게다가 양쪽으로 창이 훤히 뚫려 있어 햇살도 잘 들어오고 모기랑 나방도 잘 들어오고..

 

 

 

숙소 2층에서 내려다본 당나귀들의 행렬. 양쪽으로 균형잡고 실린 짐들은 대개 생필품이라거나 곡물류, 심지어는 가스통까지.

 

 

 

이 곳에는 편마암이랄까, 결을 가지고 일정한 두께로 쪼개지는 돌들이 많이 있나보다. 계단도, 포석도 모두 그런 돌들로 마감되어있다.

 

 

롯지 안의 다이닝룸, 사방에 트레킹족들과 산악회들의 깃발과 명함이 나부끼는 가운데 한글로 된 깃발들도 많이 보인다.

 

그 와중에 머리끄댕이를 못박힌 채 노랗게 잘 말라가고 있는 옥수수 몇 자루.

 

높은 산들로 가로막힌 고산지대의 밤은 꽤나 이르게 내려앉았고, 몇개 되지 않는 알전구들의 밝기란 밤하늘의 별빛보다 못했으니.

 

어디서든 거의 마찬가지였는데, 식사를 주문하고 나면 나오는데 거의 한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 같다. 아무리 간단한 단품이던 달밧이던,

 

조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조차 예외없이 삼십분 이상의 대기 시간이 필요했다는. 역시나 저녁은 달밧, 이었지만

 

이것도 롯지마다 레시피가 다르고 곁들여 나오는 반찬이 달라서 매번 새로운 느낌이다.

 

그렇게,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에서의 1일차가 지나고 있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위해서는 우선 카투만두에서 비행기로 30여분 걸리는 포카라로 이동해야 한다. 아침 8시반 비행기로 출발,

 

포카라에 도착후 다시 택시로 한시간여 비포장도로를 달려 트레킹의 최초 출발점인 나야풀Nayapul에 도착하다.

 

 

이로써 해발 850미터의 포카라에서 1,070미터의 나야풀까지는 수월하게 도착. 이제 3,200여미터의 푼힐 전망대를 찍고 다시

 

3,700미터의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 4,130미터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오르고 돌아오는 대장정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얄포름하고 앙상한 철판과 철망으로 만들어진 구름다리. 지나는데 20여킬로그램에 달하는 가방무게에 체중이 더해져 출렁출렁.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끼고 사는 마을이라 역시 애들 낙서조차 범상치 않다. 삐죽삐죽한 산들 아래 마을, 그 앞엔 왈칵 휘여돌아가는 강.

 

골목길을 연해 활짝 뚫려 있는 이발소 아저씨는 내 카메라를 보더니 슬며시 포즈를 잡으며 미소를 짓는다. 머리는 집에 가서

 

감아야 한다는 게 네팔 이발소의 법도.

 

개와 닭들이 이렇게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정경. 확실히 평화로운 시골 동네 분위기가 물씬 배어난다.

 

 

골목이 끝나갈 무렵의 조그마한 '마트'. 바닥에 앉아 동생과 놀던 아이가 내 쪽을 손짓하며 뭐라뭐라 신나서 떠드는 중.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유용한 수송수단이 된다는 당나귀들. 길가에 똥을 어지간히도 싸질러놓는지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만드는.

 

 

다리를 지나고 체크포인트에서 트레커 카드와 TIMS 카드를 확인받고 나서는 점심식사부터 하기로 결정.

 

꼬질꼬질하게 때가 묻어있는 저 스위치들, 숫자는 많지만 정작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자주 끊긴다고 한다.

 

샤워설비가 굉장히 열악해 보이는구나, 벌써 땀은 이렇게 흐르는데. 싶었지만..나중에 3000미터 위에서부턴 샤워도 못했다.

 

기온이 뚝 떨어진 시점에서 샤워를 하면 자칫 감기에 걸려 고산병으로 고생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아예 제대로 씻기조차 포기.

 

티벳 불교도의 상징, 울긋불긋한 깃대를 올린 집. 사실 히말라야 산에 깃든 사람들은 대개 티벳 불교도라서

 

거의 모든 롯지(산장)에서 이런 깃대와 장식들을 볼 수 있었다.

 

첫 점심. 네팔의 전통음식이라 해야 하나, 달밧. '달'은 콩으로 만든 스프를 의미하고 '밧'은 흰쌀밥을 의미한다.

 

거기에 두어가지 찬을 더해서 제공되는 음식이 달밧. 첫 음식이니만치 든든하게 치킨 커리를 추가로 주문.

 

산장 겸 식당을 운영하는 롯지의 주인 아주머니가 쓰는 낡은 계산기와 장부.

 

그리고 다시, 1일차 오후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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