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이 무려 162분이던가, 두시간 사십여분짜리 영화란 걸 알고 대번에 툴툴거리고 말았다.

대체 요즘 영화들은 왜 이렇게 길게만 만드는 거야, 좀처럼 덜어낼 줄도 모르는 욕심쟁이들 같으니라구.

아무리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의 전작들, 에이리언이니 타이타닉(195분)이니 전작들이 모두 러닝타임이 대체로 

길었다고는 해도, 또 그의 검증된 '능력'을 신뢰한다 해도 부담스러운 길이의 영화임에는 틀림없었다.


엊그제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바로 리뷰를 쓰고 싶었다. 워낙 요새 개봉한 영화 가운데서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는데다가, 대체로 영화에 대한 상찬 일색이었던 판이어서 나도 뭔가 말을 보태 그 '아바타

신드롬(?)'이라 할 만한 것에 묻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달까.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무엇을 딱히 짚어서 이야기할 만한 건더기를 결국 못 찾고 말았다. (사실은 이 영화에 대해

새로운 영화적 가능성을 발견하니 어쩌니 말은 많지만, 결국은 '현질'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화다. 카메론 감독이 공들여 묘사해낸 외계 행성의 비쥬얼은 디테일한 부분까지 황홀할

정도로 환상적이었고 전투신 등은 박진감 넘쳤으며, 스토리 역시 길고 긴 러닝타임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탄탄했지만, 무엇보다 무척이나 재미있는 영화였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비쥬얼과 스토리 모두

빠짐없이 구비한 데다가 명감독의 능력까지 더해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된 셈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비쥬얼이나 이야기 모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비쥬얼만 따져보자면 공중에 떠있는 '할렐루야 산'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천공의 성 라퓨타'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몇 점을 그대로 영화화해 놓은 듯한 느낌이었고, 공중 전투신은 스타워즈에서 보았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다. 외계 행성에 있던 '생명수'의 이미지라거나 그들의 '자연친화'적인 삶의 이미지 역시

어디에선가 여러번 반복되어 나타났던 그런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친생태 유토피아'의 모습인 거다. 딱 잘라

말하자면 적잖이 진부한 비쥬얼이란 거다. 딱히 새롭게 상상력을 자극한다거나 전혀 참신하고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스토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바타'라는 존재를 통해 지구인과 외계인의 존재를 매개한다는, 그리고 결국 어떤

육체에 실려있을 때가 자신인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은 일견 참신해 보인다. 그렇지만 매트릭스 이후, (사실은

'13층'이란 영화 이후) 모든 SF가 다루고 있는 건 일종의 탈근대적인 자아 정체성 찾기의 문제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나로서 규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마주한 시공간이 현실/진실일까" 따위의 철학적

문제, 동양적으로는 일종의 '호접몽'을 제기하는 건 이미 답도 없고 진부하기만 한 관념적 유희가 되어버렸을

정도다. 거기서 더 나아가려는 영화적 시도들이 있고, 실제 그런 영화들이 개봉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제와

또다시 '이 몸이 정말 나인가 저 몸이 정말 나인가' 같은 류의 화두를 꺼내다니 조금 아쉽다. 물론, 영리하게도

감독은 이런 난해하고 오래묵은 문제를 파고들지도, 치열하게 대면하지도 않는다. 단지 영화를 맛깔나게 하는

하나의 씨즈닝처럼 살짝 얹어놓을 뿐.


결국 영화는 종을 넘어선 사랑이야기다. 생태에 대한 이야기, 인류의 탐욕에 대한 이야기, 인간적 신뢰와

휴머니즘의 이야기, 혹은 지구적 차원에 빗대어 선진국 대 제3세계 간의 갈등이야기 등은 하나의 양념이나

데코레이션처럼 영화를 풍성하게 하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카메론

감독이 정말 '나비'족의 생태철학과 생명존중문화를 중요한 주제로 여겼다고 생각한다면 몇 가지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적장의 가슴에 화살을 두 발씩이나 박아넣던 여자가, 처음 등장할 때엔 어쩔 수 없이 생명을 해치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그 여자라는 걸 기억하는지. 생명을 최대한 불필요한 괴로움없이

사그라뜨리려던 건 '나비'족의 어른이 되기 위한 요건이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증오'와 '분노'를 배운 셈이다.

또, 마지막 장면에 '나비'족이 포로들을 지구로 돌려보내던 장면에서 지구인들의 무기로 무장한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 그들은 지구인의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한 채, 지구인들의 또다른 침공을 대비하거나 혹은

자신들끼리 전쟁을 벌이게 될 거다. 그들이 지구인들에 비해 '야만'이었던 혹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인류'였던,

이제 그들도 오염되기 시작하는 건 아닐까.


뭐, 심각하게 따지고 보자면 그런 거고, 역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로 보아야 할 거 같다. 그다지

새롭거나 실험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지만, 이미 오락성이 검증된 몇 가지 이야기와 소재들을 잘 버무려서

만들어낸 전형적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랄까. 어쨌건 그 스펙터클함은 영화관에서 봐야 제 맛인.



"나는 나의 과거를 싫어하고 다른 누구의 과거도 싫어한다. 나는 체념, 인내, 직업적 영웅주의, 의무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을 혐오한다. 나는 또한 장식미술, 민속학, 광고, 발표하는 목소리, 공기 역학, 보이스카우트, 방충제 냄새, 순간의 사건, 술 취한 사람들도 싫어한다."

2월은 진중권의 마그리트 강연회, 그리고 시립미술관에 가서 마그리트를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확정.


이번달에 언어교육원에서 3월개강프로그램 홍보 포스터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두번이나 했었다. 엊그제에

친한 후배랑 같이 경영대서
301동까지 걸어다니며 200장 가까운 포스터를 붙였는데, 그만 내 실수로 포스터

종이에 그녀석 손을 베어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종이에 손을 많이 베어본지라, 베일 때의 화끈함과 살꺼풀이

쫘악 갈라진 그 선명한 비주얼함, 그리고 그 따꼼따꼼한 느낌같은 것들이 그대로 내게 재현되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문제는,
그리고 나서 학교 곳곳에 우리가 붙인 포스터를 보거나, 그러한 빳빳한 종이로 된

포스터 종류를 볼 때마다 내 손에서 그런 감각이 되살아난다는 것.

종이베임공포증..이랄까. paper-scar phobia.(이런 단어가 있으려나 몰겠다)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오늘은 어떤 종이를 보던 그 느낌이 생생히 살아난다.

순서도 :

종이를 본다 -> 종이가 칼날처럼 내 손을 가르는 걸 상상한다 -> 화끈한 느낌이 손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

살이 열린다 -> 빨간피가 스물스물 배어나온다 -> 찌릿찌릿하게 아픈 느낌이 이제야 전해진다 -> 호기심에

상처를 잡고 양쪽으로 벌려본다 -> (휴지로 피를 닦고 나면) 안쪽의 하얀 부위가 보이는데 뼈가 보이는 거라고

내맘대로 생각해버린다 -> 겁먹는다 ->약처바르고 일주일동안 밴드감고 다닌다, 너넨 뼈본적 있냐고 자랑한다

-> 이 상처로 인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가까운 이들이 안타까워하며 울부짖는 모습을 그리며 눈시울이

붉어진다..이상의 사고과정 도합 2초 어간.


흠..빨리 치유해야겠다. 이놈의 종이베임공포증. 일부러 종이 모서리에 슬슬슬 손가락을 비비대고 있다.

공포의 대상과 친숙해지는 것이 효과적일 거라는 나름의 처방.ㅋ

#1. 엊그제는 성대에서 진중권의 르네마그리트 강연을 들었다. 진중권이 애초 미학자였단 사실은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왕의남자'나 '타짜'에 나왔던 유해진과 똑같단 생각은 들을 때마다 하게 된다.

개인적으론, 내가 많이 겹친다고 생각하는 인물. 정치적인 입장이나 그걸 표현하는 방식, 그리고 말투도 조금.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체험'이라는 단어로, 일상성에 함몰된 사물을 복권시키는 마그리트의 예술을 해명하려

했다. 일상적으로 친숙한 이미지를 고립시키거나, 중첩시키는 잡종화의 기법은 우리가 사물에 부여한 도구적,

실용적 의미를 벗겨내고자 하는 시도라는 해석.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메타적 해석과 비판적 재구성, 그건

내가 마그리트를 예술적 의미의 좌파라 부르고 싶은 이유다.



#2. 그의 그림인 줄 모르고 좋아했던 몇개의 작품들이 있었다. 진중권의 강연회 다음날에는 세시간동안 그의

전시회에서 놀았다. 일단 한번 쭉 돌고, 빽빽한 인파를 피해 다시 한번 거닐면서 맘에 들었던 그림들만 다시 보기.
 
이런저런 작품들이 내 걸음을 잡고서 놔주지 않았지만 그다지 리뷰는 내키지 않으므로 생략. 그저..단지 나뭇잎과

비둘기를 합쳐놓은 그림들보다..'눈물의 맛'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훨씬 맘에 들었다. 이런 그림에다가, 송충이

하나가 커다란 나뭇잎-새(?)를 갉아먹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요새 주위에 하도 사랑 문제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는지..와닿았다. 눈물의 맛은 누가 보고 있는 걸까. 새의 가슴을 갉아먹는 송충이? 가슴이 휑하니

갈아먹힌 새? 둘다? 누가 누구를 울게 했고, 누가 누구의 눈물을 맛보고 있는 걸까..라는. the flavour of tears.

오케이, 그림 찾았다.ㅋ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이레네, 혹은 아이린(Irene)이라는 인물의 발굴.
 
첫째, '이레네 혹은 금지된 책'이란 작품. irene의 철자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계단이 그려져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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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대화의 기술'이란 작품. 다소 해석하기 쉬운 듯한 이 그림에는, 그려진 글자가 숨어있다. 내가 보기엔

IRENE정도로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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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마그리트가 찍은 무성영화를 보면 Irene이란 인물이 종종 등장한다. 뭉실대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도슨트에게 질문했더니, 그녀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와이프였다나. 음..그래서 저 그림의 밑에는 남자 둘이

서 있는 건가. Irene이 저만큼 커보였을 수도, 그녀를 저 불분명한 글씨만큼밖에 이해하지 못한 걸 수도, 혹은,

위태롭지만 아름답게 쌓아올려진 저 돌들처럼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걸 수도. 어쨌거나, 어쩐지 공식적인

사생활이 깔끔하다했다. 머..말년까지도 마그리트 부부는 무지 행복해 보이긴 했지만. 아, IRENE을 마그리트와

묶어보는 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



#4. 부모되긴 무지 힘들 거 같다. 평일이었고, 오전이었음에도, 인간들이-특히 학부형과 아이들이-파도처럼

철썩댔다. 애들한테 쉼없이 질문하거나 설명하거나..이건 뭘까, 저건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열린 질문은 그래도

무언가 귀를 기울일 만한 아이의 대답을 유도하지만, 표현기법이 어떠니 저 사물은 무엇을 의미한다느니 등의

진부하고 꽉 막힌 설명은 참..힘들어 보였다. 열을 올리며 설명하는 어머니나, 지루하고 다리아파하는 아이나

서로 못할 짓 같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이번 전시회 관련해 뭔가 찾아봐도 마찬가지다. '검증받은' 작품들만

그림파일로 쉼없이 전파되고, 그에 대한 '검증받은' 감상 역시..들불처럼 번져나간다. 작년 피카소전때도, "난

뭔지 잘 모르겠고 뭐라 의견을 낼 만한 자신도 없지만, 내가 긁어온 글에 의하면 대단하다더라, 이그림이

대단하다더라"..거개가 이런 '안전한' 태도다. 흠...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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